이용득의 부산항 이야기 <16> 외국인과 맺은 부산 로맨스
해관장 외동딸과 유부남 정원사의 연애에 '들썩'
부산지역 영화인이 만든 개화기 헌트 부산해관장 딸의 사랑 이야기 '리즈 헌트'의 한 장면.
- 임신사실 들키자 함께 도주
- 곧 잡혀온 뒤 조선떠나 이별
- 선교사와 신여성 불륜 파문도
- 이혼 후 재혼, 또 별거로 끝나
개항 이후 부산항에 불었던 개화 바람 가운데 국경을 초월한 사랑도 한몫을 했다. 영국인 해관장의 딸과 의료선교사로 왔던 미국인 어을빈(魚乙彬)이 각각 조선 사람과 나눈 사랑은 예전에 없었던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사랑이라 더욱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도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사랑이었기에 더욱 흥미를 끌면서 한동안 부산항의 뜨거운 이야깃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한 세기가 지난 오늘에 와서도 세인의 입방아에 올라 구미를 당기는지 모른다. 헌트 해관장의 딸은 꽃다운 나이 18세에 양산 대석리 출신의 유부남 권순도와 사랑을 나누었고, 유부남인 어을빈은 20대 초반의 미혼여성 양유식과 역시 깊은 관계를 맺었다. 공교롭게도 사내 둘은 유부남이었고, 이들의 상대 여성은 아가씨였다.
권순도가 들어오고부터 모처럼 집안에는 활기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더욱이 갓 사춘기에 접어든 해관장의 딸에게는 권순도야말로 둘도 없는 이성의 말벗이었다. 특히 정원에서 권순도가 잔디와 나무를 가꿀 때면 항상 곁에는 파란 눈의 아가씨가 자리를 지킬 정도였다. 이렇게 수년간 함께 생활하다 보니 어느새 둘은 정이 깊어졌고, 드디어 아가씨에게는 권순도가 이성의 친구로 보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가씨의 눈빛은 달라졌고 그럴수록 권순도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유교 집안 출신으로서 이제는 두 명의 자녀를 둔 그로서는 반드시 아가씨의 뜨거운 유혹을 물리쳐야만 했다. 그러나 육탄으로 달려드는 아가씨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어느 날 아내로부터 외동딸이 정원사에 의해 임신했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접한 헌트 해관장은 권순도에게 권총을 휘두르며 쏘아 죽이려 했다. 위기를 느낀 이들은 어둠을 틈타 양산 대석리로 도피했다. 다음 날 화가 잔뜩 난 해관장은 외교관의 특권을 내세워 동래감시서에 수색원을 내고 이들의 행방을 물었다. 결국, 연인은 감리서 포졸에 의해 잡혀 부산으로 끌려오는 신세가 되고 권순도는 동래감리서 구치소에 갇히게 된다. 그러나 아가씨는 식음을 전폐하며 권순도를 그리며 몸부림을 쳤다. 곁에서 이걸 본 헌트 해관장은 애달픈 나머지 1898년 2월에 자식을 데리고 홍콩으로 가기 위해 부산항을 떠났다. 이걸 소재로 만든 영화가 '리즈 헌트'다. 2009년 부산 영화인들이 만들었는데 일반 상영은 되지 않았다.
해관장 딸의 로맨스가 서서히 기억에서 사라져 갈 무렵인 1911년께 또 하나의 러브 스토리가 부산항을 강타했다. 어을빈과 양유식의 사랑이었다. 북미 장로회 소속의 어을빈(Dr. Charles.H.Irvin)은 1893년에 부산에 의료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건너왔다. 그는 자기보다 5년 전에 왔었던 헌트 해관장의 도움으로 해관관사를 사 자기 병원을 열었다. 이후로 병원 구내에서 만든 만병수 통치약을 개발하여 떼돈을 벌였다. 그러는 사이 자기 병원에 영어를 배우기 위해 간호부 수습생으로 들어온 좌천동 출신 미모의 신여성 양유식과 사랑에 빠졌다가 탄로가 났다. 이 바람에 선교사 자격을 박탈당함과 동시에 부산에서 여성교육가로 명망을 얻던 그의 부인으로부터도 이혼당한다.
이혼 후 그는 양유식과 재혼하지만 26살이라는 나이차와 문화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탓인지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양유식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결혼 이후에 폐결핵을 앓아오다 홀로 요양하는 신세가 된다. 외로움과 고통 속에 지쳐 있을 때 일본인 요시하시와 만나 동거까지 해보지만 결국 사망한다. 그녀는 어릴 적 고향 뒷동산 증산 언덕배기에 묻히게 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어을빈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녀의 무덤에 와서 꽃을 바치며 식지 않은 사랑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양유식을 애통해하던 어을빈도 1935년에 세상을 떠나 40여 년 동안 생활하던 병원 뒷동산 복병산 산자락에 묻혔다. 그들의 사랑 이야기가 춤극으로 만들어진 것이 2005년 '부산 아리랑'이다. 부산 APEC 정상회의 때 공연됐다.
부산세관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