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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 ☆ 2022년 퇴계 선생 마지막 귀향길 700리 종주이야기 (13)
퇴계 선생의 발자취, 경(敬)으로 따르다
2022.04.04~04.17.(14일간)
* [제13일] 4월 16일(토) 영주 두월리→ 삽골재(도산서원 주차장) (20km)
— 퇴계선생 귀향길 시비제막 ; 용수사 입구 · 노송정 종택 · 지산와사 입구
* [1569년 기사년 음력 3월 16일, 퇴계선생]
◎ 이날 퇴계선생은 영주에서 머물렀다. 이산서원(伊山書院)에서 유생들과 강학을 하였을 것이다.
◎ 1566년 가을 어느 날, 66세의 퇴계선생은 〈새벽에 온혜[溫溪]를 출발하여 소릿재[聲峴]를 넘어 도산에 도착하였다〉는 시(詩)를 남겼다. 온혜는 선생이 태어나고 자랐던 노송정 종가가 있는 마을이고, ‘소릿재’는 지금 ‘삽골재’라고 부르는 곳으로, 도산행정복센터 맞은편 산 안부에 있는 고갯길이다. 이곳을 통과하면 온혜에서 상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도산서당으로 질러갈 수 있다. 시 전문은 이렇다.
曉霧浸衣濕 효무침의습 새벽이슬에 옷 젖어 촉촉한데
羸鞭越峴艱 리편월현간 야윈 나귀 채찍해도 고개 넘기 어렵네
短長松並立 단장송병립 크고 작은 소나무는 나란히 서 있고
黃白菊相班 황백국상반 희고 누른 국화는 서로 아롱지도다
閭寂柴門逈 여적시문형 고요한 사립문 저 멀리 바라보이고
蕭疎竹院寒 소소죽원한 대나무 성긴 정원 쓸쓸하기만 하네
晩來風日好 만래풍일호 저녁나절 바람과 햇빛 좋기도 하여
凝坐望秋山 응좌망추산 가만히 앉아 가을 산 바라보네
—《퇴계집(退溪集)》〈晨自溫溪踰聲峴至陶山(새벽에 온계를 출발하여 소릿재[聲峴]를 넘어 도산에 도착하였다)〉
* [2022년 4월 16일 토요일, 귀향길 재현단]
▶ 오늘 귀향길 재현단은 두월리 1교차로(삼거리)에서 출발하여 안동의 도산(陶山)으로 향한다. 오늘의 종점인 도산면 삽골재까지는 20km인데 노정의 대부분은 시골의 농로이거나 산을 넘는 고갯길이다. 도중에 크게 4개의 산과 언덕을 넘는데, 용수사를 품은 용두산을 넘는 산길[용수재]을 제외하면 대체로 통행이 수월한 편이다.
▶ 오전 8시 두월리 교차로 주차장에 재현단과 오늘의 구간에 참여하는 많은 인사들이 나왔다. 4월의 아침, 하늘은 푸르고 햇살은 맑았다. 신선한 공기가 쾌적하게 느껴지는 날이다. 오늘은 도산서원 입구에까지 가는 여정으로, 실제로 마지막 구간이다.
▶ 주차장에 모인 인사들은 크게 원을 그리고 서서 이동신 별유사의 진행으로 상읍례를 하고 〈도산십이곡〉 제12곡을 불렀다.
우부(愚夫)도 알며 하니 그 아니 쉬운가
성인(聖人)도 못다 하시니 그 아니 어려운가
쉽거나 어렵거나 중에 늙는 줄을 몰라라.
— 부족한 사람도 알면서 하니 그 아니 쉬운가. 성인도 다 못하시니 그 아니 어려운가. 학문의 세계란, 시작은 쉬우나, 그로부터 궁극적인 진리(眞理)를 알아내고 터득하기는 어렵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학문에 대한 참다운 맛을 알게 되면 공부하는 맛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맛을 알고 몰입하는 가운데 세월 가는 줄도 모른다고 한 것이다. 학문에 정진(精進)하여 앎을 극진히 하고 마음을 수양(修養)해 나가는 즐거움을 노래한 것이다.
이 곡은〈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대미를 장식하는 노래다. 지난 4월 5일 두뭇개나루공원에서 제1곡을 부르고, 이후 하루의 여정을 시작하는 아침마다 한 곡씩을 불러왔다. 12일 동안 전 곡을 완창한 것이다. 하루 하루 퇴계선생의 노래가 재현단의 발길에 힘을 실어주었다. 내일은 삽골재 아래 길목에 세워져 있는 〈陶山十二曲〉 시비(詩碑)를 만난다. 그리고 도산서원에 들어가 선생을 뵈올 것이다.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도산십이곡〉은 퇴계 이황이 명종 때 친히 지은 연시조(聯詩調)로, 모두 12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 6곡(前六曲) 후 6곡(後六曲)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전자는 ‘언지(言志)’, 후자는 ‘언학(言學)’으로 부른다. 즉, 전 6곡은 퇴계 이황이 자연에 은거한 상황에서 각종 심정의 감흥(感興)을 읊은 것이고, 후 6곡은 학문과 수양을 통한 성정(性情)의 순정(醇正)을 읊은 것이다. 친필본이 도산서원에 소장되어 있고, 청구영언에도 그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율곡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와 함께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시조 중 하나이며, 조선조 시조문학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백파의 효과적인 건강 보법(步法) 그리고 마음의 수양
▶ 모든 재현단이 출발에 앞서 준비운동을 했다. 그리고 필자가 편안하고 피로감이 적은 ‘건강보법(步法)’에 대해 말하였다. 서울의 한강 봉은사나루, 양평의 국수역에 이어 세 번째 하는 말씀이었다. 몇 차례 강조한 것은 구간마다 참가하는 분들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필자의 건강보법은 퇴계선생의 〈십훈(十訓)〉 중 두 번째 항목에 나오는 ‘구용(九容)’에 바탕을 둔 걷기인데, 그 중 ‘족용중(足容重)’은 걸을 때 발을 가지런히 하여 진중하게 옮기되 뒤꿈치부터 착지하여 발바닥을 굴리듯이 걷는 것이다. 준족(俊足)으로 정평이 나 있는 바로 그 ‘마사이보법’이다. 아울러, 걸을 때 머리를 반듯하게 하고[頭容直], 눈빛은 단아하게 한다[目容端]. 그리고 가슴을 약간 앞으로 내밀듯이 하여 걸으면 허리가 곧추서게 된다. 이러한 바탕에 근거하여 몇 가지 걷기의 바른 자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시선을 전방 5m 정도를 주시하고 턱을 살짝 당긴다
• 가슴은 당당하게 활짝 펴고 허리를 세워서 걷는다
• 주먹을 가볍게 쥔다
• 팔은 90~110°로 굽혀 가볍게 흔든다
• 배와 엉덩이에 약간의 긴장을 두고 힘을 준다
• 발뒤꿈치부터 착지하여 앞 꿈치로 무게 중심을 움직여 굴리듯이 걷는다
• 호흡을 깊게 들이 마시고 서서히 내쉬며 걸음에 맞춰 반복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척추와 고관절이 균형을 이루어 오장육부가 제자리를 잡아, 완급을 조절하여 걸으면 온몸이 원만한 기능을 하게 된다. 건강한 보법을 몸에 익히면 일상생활에서도 아주 건강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 필자는 족용중(足容重)의 마사이보법으로 2020년 강원도 태백에서 부산 다대포 몰운대까지 혼자서 낙동강 1300리를 종주한 바 있다. 퇴계 선생이 평생 몸소 지니신 공경(恭敬)하는 마음에 의탁하여 멀고도 먼 길을 걸었다. 일이관지(一以貫之)를 주제로 한 걷기 명상이었다. 특히 낙동강은 청량산―도산서원 구간에서 비롯되는 선생의 도맥(道脈)이 흐르는 강이었다.
오늘의 출행
▶ 오전 8시 38분, 두월 1교차로를 출발하여 935번 지방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향하는 길이다. 동쪽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얼굴을 찌른다. 도로의 왼쪽 가장자리를 따라 걷는다. 오늘은 마지막 귀향길 700리 중 마지막 구간이어서 그런지 많은 분들이 참석하였다.
▶ 의관(衣冠)을 갖춘 선비단이 앞장을 서고 그 뒤를 평상복을 입은 재현단이 대열을 이룬다. 오늘도 선두에는 이한방 교수가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가 적힌 깃발을 들고, 오늘의 여정을 열어 나간다. 의관을 갖춘 전 안동문화원 이동수 원장, 진주에서 올라온 전 경상대 허권수 박사, 문영동 교수, 강구율 교수, 도산서원 별유사 이원봉 님 등 유림들이 도포를 차려 입었다. 그 중에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경상대 학생처장 안미정 교수도 함께 걷는다. 평상복을 입은 전 고려대 김언종 교수·김승종 시인·김순종 님 삼형제분, 권덕현 교수, 전 전북대 정학섭 교수, 퇴계 선생의 차종손 이치억 박사, 후손 이중환 님, 그리고 홍효정 님, 종주단의 이상천, 오상봉, 진현천 님 그리고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많은 지도위원 인사들이 참석했다. 필자는 향도를 맡아서 안내하고 사진을 찍었다.
▶ 재현단 모든 분들이 935번 지방도로의 가장자리를 따라 걷는다. 지방도로여서 차가 많이 다니지는 않았다. 재현단은 자연스럽게 2열로 열을 이루고 걷게 된다. 전방에서 자동차가 다가오면 이동신 별유사가 경봉을 들고 안전을 도모한다. 출발하자마자 바로 내성천의 다리[두월교]를 건넜다.
내성천 두월교(935번 도로) — 구천리 창팔
내성천(乃城川)
‘내성(乃城)’은 봉화(奉化)의 옛 이름이다. 내성천은 백두대간 봉화구간의 옥석산(1,244m)—문수산(1,207m) 지맥과 선달산(1,236m)—갈곶산 사이의 산곡(봉화군 물야면 오전리)에서 발원하여 봉화(읍)를 경유하여 흘러내리다가, 봉화읍 문단리에서 부석사에서 발원하여 내려온 ‘낙화암천’을 받아들이고 난 후,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내림리—석포리를 경유하여 이곳 두월리에 이른 것이다. 여기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내성천은 저 영주시 평은면 금광리에 2016년 10월 영주댐에 건설됨에 따라 담수호가 이루어졌다. 그 영향으로 두월교 근처에도 내성천은 물이 흐르지 않아 호수처럼 고여 있다.
▶ 박봉산(창동재)과 두월산 사이에 흐르는 내성천에는 935번 지방도로 두월교가 가로질러 간다. 우리 재현단이 도산으로 가기 위해 지나가야 하는 다리이다.
▶ 이곳 이산면 내성천의 서쪽 신암리 사금마을에 정경부인 김해 허씨 묘소가 있고, 내성천의 동쪽 석포리에는 작년에 이건 복설한 이산서원이 있다. 그러므로 이곳 내성천은 퇴계 선생 생전에 아주 각별한 곳이다. 선생이 온혜에서 일부러 찾아오기도 하고, 한양을 오르내리면서 반드시 머물다가 간 곳이다. 어제 우리 귀향길 재현단은 정경부인 묘소에 고유제를 올리고 이산서원에서는 선생의 영전에 고유제를 올렸다.
내성천 상류의 유서 깊은 명문세가
유곡리 닭실☆해저리 바래미☆ 물야면 오록마을
백두대간 옥석산 서쪽에 있는 선달산(물야면)에서 발원하는 내성천(乃城川)은 봉화읍을 경유하여 영주, 예천 지역의 평야지대를 형성하면서, 예천의 삼강(三江)에서 낙동강에 흘러든다. 내성천 상류의 영주 봉화는 안동, 경주를 중심으로 보면 산간오지일지 몰라도 문화적으로 변방은 아니다. 신라 사람들이 신성시한 태백산 아래에 있고 고구려, 고려의 문물이 죽령을 넘어 처음 닿는 고을이 영주, 봉화다.
특히 봉화는 조선 중기에 이르러 안동의 사족(士族)들이 들어와 집성마을을 이뤘다.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봉화에는 양반문화와 선비정신이 변질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 여럿 있다. 봉화읍 유곡리에는 충재 권벌의 안동 권씨의 ‘닭실(마을)’, 개암(김우굉) 문중의 의성 김씨 후손들이 세거한 봉화읍 해저리 ‘바래미(마을)’, 광산 김씨의 거촌1리, 원주 변씨의 거촌3리에 ‘외거촌’이 있다. 물야면 오록리에는 풍산 김씨 시조의 18대손 노봉 김정이 입향한 이래 그 후손들이 세거한 ‘오록마을(창마)’이 있다. 모두 명문(名門)으로 손꼽히는 집성마을이다.
특히 봉화읍 유곡리(酉谷里) ‘닭실’은 충재(冲齋) 권벌(權橃)이 자리 잡은 후 안동 권씨 집성마을로 봉화와 인근에서 알아주는 명문이다. 내성천 상류의 삼계서원(三溪書院)을 시작으로 석천계곡의 ‘석천정사(石泉精舍)’, 닭실의 ‘청암정(靑巖亭)’은 물론, 인근 춘양면 ‘한수정’까지 모두 안동 권씨 집안과 관련 있는 옛집들이 있다.
충재 권벌(權橃, 1478~1548)은 퇴계가 존경하는 인물이다. 1534년 가을, 33세의 퇴계(1501~1570)는 성균관에 수학하다가 향시에 응시하기 위해 고향 가는 길에 여주 이호촌에 은거하고 있는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을 만났는데, 그때 퇴계와 동행한 사람이 충재 권벌이었다. 당시 충재는 기묘사화의 화를 입어 14년간 야인 생활을 하다가 재기용되어 외직인 밀양부사로 나가게 되었는데, 그 부임하러 가는 길에, 퇴계와 함께 이호에 우거하고 있는 모재를 만난 것이다.
퇴계 이황의 ‘청암정제영시(靑巖亭題詠詩)’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충재(冲齋)가 유배지에서 운명한지 20여년이 흐른 뒤, 1565년 65세의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이 봉화의 ‘닭실’을 찾아와 ‘청암정에 붙이는시’〈寄題酉谷靑巖亭(기제유곡청암정)〉을 남겼다.
我公平昔抱心衷 아공평석포심충 충재공께서는 예전부터 깊은 뜻을 품었는데
依杖茫茫一電空 의장망망일전공 끊임없는 화와 복은 순간의 번개같이 공허하구나.
至今亭在奇巖上 지금정재기암상 지금껏 정자는 기이한 바위 위에 있고
依舊荷生古沼中 의구하생고소중 의구한 연꽃은 오래된 연못 속에 있구나.
滿目煙雲懷表樂 만목연운회표락 눈에 가득한 구름에서 본래의 즐거움을 찾고
一庭蘭玉見遺風 일정난옥견유풍 뜰 한쪽에서 자라는 난에서 남겨진 풍취를 보네.
取生幾誤蒙知獎 취생기오몽지장 못난 나는 거두어줌에 힘입었는데
白首吟詩意無窮 백수음시의무궁 늙은 몸으로 읊은 시는 그 뜻을 다하지 못하는구나.
酉谷先公卜宅寬 유곡선공복택관 충재공이 닭실에 집터를 점지하여
雲山回復水灣環 운산회복수만환 구름산 둘러서 있고 다시 물굽이 고리처럼 둘러있네.
亭開絶嶼橫橋入 정개절서횡교입 외딴섬에 정자 세워 다리 가로질러 건너도록 하였고
荷映淸池活畵看 하영청지활화간 연꽃이 맑은 연못에 비치니 살아있는 그림보는 듯하네.
稼圃自能非假學 가포자능비가학 채마밭 가꾸는 일 배우지 않아도 능했고
軒裳無慕不相關 헌상무모불상관 벼슬길 연모하지 않아 마음에 걸림이 없네.
更憐巖穴矮松在 경련암혈왜송재 바위 구멍에 웅크린 작은 소나무가 애틋하지만
激勵風霜老勢盤 격려풍상노세반 풍상의 세월 겪고 암반 위에 늙어가는 모습 더욱 사랑스럽네.
퇴계(退溪)는 충재(冲齋)의 행장(行狀)도 지었는데, 충재와 내외종 간으로 ‘오랫동안 이끌어주고 깨우쳐준 은덕을 입었고 조정에 계실 때 크게 빛나는 절개를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어 공의 충의와 풍절을 후세에 전할 군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고 칭송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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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천리 창팔마을
▶ 재현단 일행은 내성천 두월교를 건넜다. 935번 도로를 따라서 걷다가 두월삼거리에서 도로를 벗어나, ‘구천리 창팔’이라는 표지석이 서 있는 시멘트 포장의 작은 마을길을 따라 언덕을 넘었다. 길목에는 장대한 소나무도 있고 산굽이를 돌아가면 군락을 이루고 있는 연분홍 진달래가 곱게 피어 있다. 고개를 돌아가다가 푸른 소나무 그늘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쉬었다.
▶ 날씨가 화창하고 공기가 청랑하다. 모든 분들의 얼굴이 화색이 돌고 정겨운 표정들이었다. 잠시 쉬는 사이에도 이한방 교수가 길 위의 인문학을 펼쳐 놓는다. 고개를 넘었다. ‘창팔옛돌다리’라고 새긴 커다란 입석이 있는 ‘창팔경로당’ 앞에서 밝은 햇살을 받으며 잠시 쉬고 난후, 봉골-우뭇골의 산길을 넘어가니 봉화군 상운면 귀내마을[龜川里]이다. 길목에 고색창연하지만 품위 있는 고옥이 있다. ㅡ ‘야옹정(野翁亭)’이다.
야옹정(野翁亭)과 퇴계(退溪)
야옹정(野翁亭)은 퇴계선생과 각별한 우의(友誼)가 있는 야옹(野翁) 전응방(全應房, 1491~1554)의 정자이다. 야옹은 퇴계보다 10년 연상으로 1525년 사마시에 진사 급제를 했지만, 조부 휴계(休溪) 전희철(全希哲, 1425~1521)의 유훈을 받들어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이곳 귀내[龜川]에서 은거한 인물이다. 야옹(野翁)은 이름 그대로 ‘산야에 은거하는 늙은이’이다. 조부인 휴계(休溪)는 단종 때 상장군으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목도하며 사육신과 읍별하고 휴계(休溪, 지금의 영주시 상망동)로 물러나와 은거하면서, 자손들에게 벼슬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어제 우리 재현단이 지나온, 동창재 오르는 길목에서 보았던 고옥촌에 칠성루, 휴계재사와 휴계공 전희철의 묘소가 있었다.
야옹정(野翁亭)은 전응방이 1541년에 이곳 귀내마을[龜川里]에 건립한 것으로, 그 동안 수차례 중수하였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로 지었으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八(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우측에는 온돌방을 마련하고 좌측의 4칸을 우물마루를 두었다. 가구(架構)는 오량가(五樑架)의 굴도리집이다. 주상부(柱上部)는 초익공(初翼工)으로 장식하였다. ‘貯月塘’(저월당) 현판은 퇴계 이황 선생이 쓴 것이다.
퇴계 선생은 43세 때 이곳 야옹정에 머물면서 시〈題野翁堂(제야옹당)〉을 지었다. 대청마루에 올라가 살펴보니 퇴계 선생의 시판이 걸려 있었다.
靑山繞玉水環除 청산요옥수환제 청산은 집을 감싸고 물은 섬돌을 감도는데
此地從今時卜居 차지종금시복거 여기가 이제부터 새로운 보금자리일세.
隔霧林蹊應自闢 격무임혜응자벽 안개 서린 숲 사이 길 스르르 열리고
如雲田家欲親鋤 여운전가욕친서 한가로운 밭갈이에 호미질도 하고 싶네.
細君敬客開香甕 세군경객개향옹 부인은 손님 위해 향기로운 술독 열고
童子知時綴玉蔬 동자지시철옥소 아희는 때 맞추어 맛있는 채소를 뜯네.
我識野翁眞樂事 아식야옹진낙사 알겠구나 야옹선비의 참된 즐거움을
登臨何日玩溪魚 등임하일완계어 나는 언제 물가에 나와 앉아 노는 고기 희롱할꼬.
— 嘉靖 癸卯(가정 계묘 1543년, 중종 38년) 퇴계(退溪) 이황(李滉)
퇴계 선생의 시판(詩板) 옆에, 후대의 학사(學沙) 김응조(金應朝)가 기축년(1649, 인조 27)에 퇴계 선생의 시를 차운(次韻)하여 쓴 시 〈謹次野翁亭韻(삼가 퇴계 선생의 야옹정 시를 차운하여 쓰다)〉가 걸려 있다.
鳥下庭苔草不除 조하정태초불제 이끼 낀 뜰, 새 울고 풀은 자욱해
山間依舊碩人居 산간의구석인거 산골은 여전히 선비의 거처로다.
靈尨晝臥常關戶 영방주와상관호 반쯤 닫긴 대문 앞에 삽살개는 낮잠을 즐기는데
倦僕初歸獨荷鋤 권복초귀독하서 들에 나갔던 지친 종은 혼자 돌아오누나.
遣悶只宜釃野釀 견민지의시야양 시름을 달래려고 빚은 술 거르고
供賓聊復煮園蔬 공빈료복자원소 손님대접하려고 텃밭 채소 뜯어 전을 부치네.
一笻他日尋芳躅 일공타일심방촉 언제 한번 지팡이 짚고 방축 찾아서
擬向春溪斫鱖魚 의향춘계작궐어 싹 트는 봄 시냇물에서 쏘가리 잡고 싶네
야옹(野翁) 전응방은 조부 휴계 전희철의 유훈(遺訓)을 받들어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산수가 좋은 이곳에 ‘야옹정’을 세워 도덕과 학문을 수련하였으며 퇴계 이황과 자주 만나 도학(道學)을 강론하였다. 충직한 야옹은 단종을 기리며 매년 영월의 ‘노산군묘’를 찾아가 도포자락에 흙을 담아 할아버지 무덤 위에 올리고 배읍(拜泣)했다고 한다.
옥천전씨(沃川全氏) 오백년세거비
선조의 충절(忠節)을 이어 문부(文富)를 겸비한 집안
▶ 퇴계 선생의 묵향이 서려 있는 야옹정을 둘러본 뒤, 장대한 소나무들이 즐비한 마을의 입구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沃川全氏 龜川派五百年世居之地’(옥천전씨 구천파오백년세거지지)를 새긴 자연석 비석이 서 있었다. 비석의 하단에 그 내력을 자상하게 새겨 놓았다.
‘… 구천파(龜川派) 시조 야옹공(野翁公) 응방(應房)은 옥천전씨 득관조(得貫祖)인 고려 판도판서 관성군 유(侑)의 7세손으로서 1525년(중종 25년)에 진사 급제하였으나, 단종 재위 시 상장군으로써 계유정난을 겪고 사육신과 읍별(泣別)하고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관직을 버리고 휴천(休川), 지금의 영주시 상망동으로 은거하신 단종절신(端宗節臣)인 조부 휴계공(休溪公)의 유지에 따라 벼슬을 마다하시고 이곳 두메산골을 개척지로 하여 산중복지인 지금의 종택 자리에 싸리나무 기둥으로 초가를 지어 동명을 ‘귀내’[龜川]라 하고 시거(始居)하시면서 오로지 학문 강구에 몰두하시다가 평소 교분이 두터운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권유로 1541년 중종 36년에 ‘야옹정(野翁亭)’을 건립하고 도학자와 담론하시면서, 1544년 강학소로 ‘석문정사(石門精舍)’를 세워서 후학양성에 전념하셨다.
현손인 격양공(擊壤公) 시천(是天)은 당시의 큰 선비였으나 선조(先祖)의 뜻을 받들어 관직에 뜻을 버리고 1695년 숙종 21년 ‘격양당(擊壤堂)’을 세워 후학양성에 힘쓰고 특히 10세손에 이르러 종손인 귀암공(龜庵公) 수동(秀東)은 정묵재공(靜黙齋公) 수형(秀衡)과 문중의 힘을 모아 ‘구산서당(龜山書堂)’을 세워 우직공(愚直公) 병렬(炳烈)을 비롯한 많은 선비를 배출하는 한편 농경(農經)에 전력케 하여 부촌을 이루니 명실공히 문부(文富)를 겸한 문중으로서 사림의 각광을 받았다. 현재 19세손에 이어진 오백년 동안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6·25동란 등 격변을 겪으면서도 선조의 음덕과 후손의 숭조애종으로 사당을 보존하고 문중을 지켜왔다. 이제 선조의 얼을 되새기고 후손의 번영을 기리기 위하여 회원의 정성으로 노송향기 그윽한 문중 입구에 세거비를 세운다. / 2013년 11월 / 沃川全氏龜川派花樹會(옥천전씨구천파화수회)’
토일리 산길—산벚꽃 화사한
▶ 구천리 앞 다리를 건넜다. 935번 지방도로가 915번 지방도로와 만나는 구천삼거리 앞에서, 도로를 건너 봉화군 상운면 토일리 아스팔트 도로로 접어들었다. 하토일리 길이다. 오르막 길 왼쪽에 ‘石門洞天’(석문동천)이라 새긴 바위가 있다. 석문동은 야옹(野翁)이 ‘석문정사(石門精舍)’를 짓고 강학하던 곳이다. 글씨는 그가 직접 새겼다고 한다. 잘 정비된 포장도로는 낮은 언덕길을 올라간다. 길의 양쪽에 산벚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날씨가 청명하고 기분이 아주 쾌적한 산길이다. 길목의 수목들이 이제 막 새 순을 피워내고 있다. 4월의 봄바람이 산들거린다. 삼거리 갈림길에 좌측의 길로 접어들었다.
토일마을
▶ 오전 11시 10분 토일마을에 도착했다. 봉화군 상운면 토일리이다. 잠시 휴식을 취한 뒤, 토일천 신촌교를 건너, 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의 조용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완만하게 올라가는 농촌의 길목, 따가운 봄 햇살이 온몸에 내린다.
도미티재
‘퇴계선생 귀향길’을 알리는 첫 이정표
▶ 그렇게 한참을 걷다보니 오전 11시 40분, 도미티재를 지나면서 ‘퇴계선생 귀향길’을 알리는 첫 이정표 만났다. ‘→ 삽골재 12km(도산서원 13km)’를 표지하고 기둥에 ‘안동시 녹전면 매정리 951’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 이정표는 퇴계선생 마지막 귀향길‘ 재현 행사에 맞추어 도산서원의 요청을 받아들여 안동시가 세운 것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영주시 이산면 두월리를 출발하여, 봉화군 상운면 구천리-토일리 지역을 지나왔는데 이제 선생의 고향인 안동시 영역으로 접어든 것이다. ‘아, 드디어 안동이구나!’ 내심 탄성이 솟아올랐다. 한양을 출발하여 보름 가까이 내려와서 무거워진 몸으로 들어선 안동땅이다.
매정 용두길—용호정 저수지
▶ 453년 전 한양에서 먼 길을 내려와 고향인 안동 땅에 들어선 선생의 마음이 떠오른다.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산길을 내려온 지점에 안동시 녹전면 매정리가 있다. 이제 길은 ‘매정용두길’이다. 매정리에서 용두산 용수사로 가는 산길인 것이다. ‘→ 삽골재 11km’를 표지한 두 번째 이정표가 서 있는 곳에 저수지가 나왔다. 제방으로 쌓아 만든 저수지 옆에 거대한 느티나무 고목 몇 그루 있고 사이에 ‘용호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재현단 일행은 용호정과 느티나무 그늘 아래에서 김밥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잔디밭에 눕혀놓은 장방형의 빗돌이 있는데, 거기에는 ‘이 토지는 眞城李氏 東國님의 유지를 받들어 그 자손들이 안동시에 기증함 / 2019.6.26.’이라고 적혀 있었다.
용두산 용수재를 넘다
▶ 이제 용두산의 허리를 돌아서 올라가는 산길이 이어진다. 용수사로 가는 고갯길이다. 고개마루인 ‘용수재’에 이르렀다. 용수재는 갈현리 굴티고개로 가는 갈림길이고 문수지맥 용두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산행 들머리이기도 하다. 기존의 이정표 '국학진흥원 5.2km'도 서 있고, 이번에 새로 세운 ‘→ 삽골재 8.1km’ 이정표도 있다. 일행은 용수재 고갯마루에서 선 채로 휴식을 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퇴계 선생의 방손인 이한방 교수가 퇴계의 진성 이씨 가계에 대해 자상한 설명을 하기도 했다.
전 대구대 이한방 박사는 퇴계의 둘째 형님인 이하(李河) 공의 15대손이다. 서울 경복궁에서부터 지금까지 줄곧 의관을 정제하고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라는 깃발을 들고 필자와 함께 재현단의 선두에서 걸어온 분이다. 이번 귀향길 재현행사에서 '걸어다니는 도서관'이라는 별명이 붙은 박학다식한 고전 인문학자이다.
▶ 이제 오늘의 중간 기착지인 용수사가 멀지 않았다. 산의 허리를 돌아가는 산길이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목에 노송 한 그루가 장엄하게 서 있고 산길 주위에는 여기저기 물고운 진달래 피어 있었다. 하얀 산벚꽃이 눈부시고 조팝나무 줄기에 조밀하게 피어 있는 하얀 꽃무리가 화사하다. 밝은 햇살을 받은 노란 개나리도 곱고 연분홍 산도화의 선연한 자태가 매혹적이다. 봄이 무르익는 길이다.
용수사 일주문 광장의 행사
▶ 오후 2시 30분, 용수사 일주문 앞에 도착했다. 일주문 옆 광장에는 행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이크를 갖춘 연설대가 갖추어져 있고 그 앞에 간이의자를 즐비하게 배치해 놓았다.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라는 주제로 진행되는 오늘의 행사는 2022-퇴계 선생 마지막 귀향길 재현단이 서울을 출발한지 13일만에 안동에 입성한 것에 맞추어 기획된 것이다. 재현단 김병일 단장(도산서원 원장 /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을 비롯한 이한방 교수 등 영주 두월리에서 이곳까지 함께한 30여 명의 재현단을 맞아 이철우 경상북도 도지사, 권영세 안동시장, 용수사 주지스님, 김광림 퇴계학연구원장, 이희범 퇴계학진흥회장, 전 고려대 김언종 박사, 전 경상대 허권수 박사, 학봉종손 김종길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원장, 문영동 박사, 강구율 교수, 권덕현 교수, 전 전북대 정학섭 박사, 경상대 안미정 교수 등 명사와 유림 그리고 전 안동문화원장 이동수 박사, 퇴계 선생의 차종손 이치억 박사, 이중환 님 등 후손방손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하였다.
용수사와 퇴계 선생
1181년에 창건된 용두산 용수사는 1895년 안동의 을미의병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던 중 소실되었고, 현재는 1994년에 중수된 사찰이다. 용수사는 퇴계와 깊은 인연이 있는 사찰이다. 퇴계의 생가에서 가까워, 어린 시절 퇴계는 온계 형과 함께 자주 용수사에 올라와서 공부를 했고 후손들도 이곳에 기숙하며 공부했다.
용수사(龍壽寺)는 온혜종택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을 뿐만 아니라 퇴계선생이 한양을 왕래하는 길목에 있다. 1567년 6월 13일 임금의 부름을 받고 마지못해 상경하던 선생은 용수사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때 남긴 시가 있다. ‘명 황제의 등극을 알리는 사신이 곧 이르게 되므로 거듭 임금의 명을 받았다. 6월에 한양으로 가는데, 용수사에서 묵고 새벽에 나섰다가 비를 만나다’는 사연이 깃든 곳이다. 선생은 6월 14일 용수사를 떠나 25일 한양에 당도했는데, 명종의 병세는 위중한 상태였고 28일 퇴계선생과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선생은 조복(弔服)을 갖추어 입고 곡을 했다. 행장수찬청 당상관이 되어 명종의 행장(行狀)을 짓고 예조판서로서 국장을 총괄하는 직책을 맡았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그해 8월 다시 귀향했다. 고향에서 명종의 발인을 앞두고 아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 용수사를 찾았다. 용수사는 젊은 시절 학문을 정진하던 곳이었고, 노년에는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준 곳이었다.
〈敬-귀향길 안내판〉설치와 시비(詩碑) 제막
◎ 금반 선생의 귀향길 재현단(단장 김병일도 도산서원 원장)은 안동의 유림 및 시민들과 함께 이날의 경로를 따라가면서 세 곳에 퇴계의 시비(詩碑)를 제막한다. 그 첫 시비(詩碑)는 ‘귀향길 안내판’과 함께 도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용수사 입구, 두 번째 시비는 온혜마을의 노송정 종택, 세 번째 시비는 영지산 지산와사 입구이다. 그리고 퇴계 선생 귀향길 전 구간을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한 사업으로 중요 지점에 敬-귀향길 안내판과 요소 요소에 이정표를 설치하고, 생전 그곳에서 남긴 시비를 건립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추진되었다. 2021년 귀향길 재현행사를 마치면서 바로 추진되었으며, 2022년 오늘 귀향길 재현행사에 맞추어, 이정표아 안내판 설치는 우선 경상북도 안동시 관내부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시비(詩碑) 제막식 행사
이철우 경북지사 • 권영세 안동시장 • 용수사 주지스님
▶ 이날 4월 16일 먼저 용수사 일주문 입구의 광장에서 시비 제막식 행사에서 이철우 경상북도 도지사는 "퇴계선생이 마지막 귀향의 여정과 그 이후의 삶을 통해 몸소 보여준 선비정신의 실천과 공경, 배려, 존중의 미덕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값진 교훈이 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권영세 안동시장은 "코로나19로 인해 행사가 다소 위축됐지만 현대사회에서 퇴계 선생의 선비정신에 대한 관심과 중요성은 더 커져가고 있다"며 "선조 임금에게 성학십도를 올리며 마지막 당부를 남기고 아름답게 물러난 퇴계 선생의 학문과 삶은 오늘날에 더욱 큰 통찰과 울림으로 다가오고 있다"라고 전했다.
도산서원 김병일 원장
김광림 퇴계학연구원장 • 이희범 퇴계진흥회장 등
▶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은 "퇴계선생의 최대 염원은 '학문의 완성'이었다. 여기서 학문은 단순히 이론 공부가 아니라 사람답게 살아가는 올바른 삶의 실천"이라며 "요즘 사람들은 과학과 물질의 시대에서 예전보다 풍요로운 삶을 살지만, 개인은 힘들고 사회는 반목과 갈등으로 혼란스럽다. 이번 행사를 통해 당시의 퇴계선생이 추구하던 인간다운 삶을 각인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 외에도 용수사 주지스님의 축사와 김광림 퇴계학연구원 이사장, 이희범 퇴계학진흥회 회장 등이 ‘퇴계학 연구와 진흥을 위한 사업’에 대하여 고무적인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 오늘 2022년 4월 16일 먼저 용수사 입구에서 퇴계선생 마지막 귀향길 안내판(〈敬-귀향길 안내판〉)과 시비(詩碑) 제막식이 이어졌다. 퇴계선생의 마지막 귀향길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높이는 한편, 선생의 삶과 정신을 돌아 볼 수 있는 '선비정신 수양의 길' 활성화를 위한 초석으로 삼기 위함이다.
▶ 강연의 행사를 마치고〈敬-귀향길 안내판〉을 제막했다. 〈귀향길 안내판〉은 퇴계선생이 서울 경복궁에서 안동 도산까지 귀향한 여정의 요소와 거리를 표시한 것이다. 앞으로 귀향길 재현행사의 안내 역할을 할 것이다. 우선 안동시 도산면 운곡리 용수사 입구에 설치하고, 앞으로 귀향길 요소 요소에 세울 예정이라고 한다.
용수사 시비 제막
▶ 이어서, 귀향길 길목 용수사 앞에 송재(松齋)와 퇴계(退溪)의 시비를 제막했다. 용수사 입구의 시비에 담은 내용은 두 분의 〈권학시(勸學詩)〉와 그 ‘해설’이다. 먼저 송재 이우 선생의 〈권학시〉이다.
碧嶺圍屛雪打樓 벽령위병설타루 푸른 산이 병풍처럼 푸르고 눈발은 누각을 때리는데
佛幢深處可焚油 불당심처가분유 절간 깊숙한 곳에서는 등불을 켜고 공부할 만하네
佛幢深處可焚油 불당심처가분유 겨울 한 철 글 많이 읽으면 생각과 문장이 넉넉해지고
一理當從一貫求 일리당종일관구 한 가지 이치를 좇아 일관되게 궁구해야 하리
經術莫言靑紫具 경술막언청자구 경서 공부가 출세하는 도구라고 누가 말했나
藏修須作立揚謀 장수수작입양모 쉬지 않고 몸을 닦은 것이 입신양명하는 길인데
古來業白俱要早 고래업백구요조 예로부터 학문은 일찍부터 모두 갖추라 했지
槐市前頭歲月遒 괴시전두세월주 과거 볼 날 앞에 다가오니 세월이 빨리도 지나가네
퇴계(退溪)의 선생의 〈권학시〉도 시비 안에 나란히 새겨져 있다.
少年龍社擬書樓 소년용사의서루 소년 시절 용수사를 서재로 여기고서
幾把松明代爇油 기파송명대설유 얼마나 관솔 가지를 등잔처럼 태웠던가
家訓未忘當日戒 가훈미망당일계 가훈이 된 그날의 경계 말씀 잊지 말고
理遠仍昧至今求 리원잉매지금구 이치 근원 아득해 지금껏 궁구하네
老情蘄汝承遺澤 노정기여승유택 늙은 나의 이 마음 너희가 이어받아
忠告資朋尙遠謀 충고자붕상원모 충고하는 친구 힘 입어 원대한 꾀 숭상하라
門擁雪山人寂寂 문옹설산인적적 온 산에 눈이 내려 인적 끊겨 적막한데
好將同惜寸陰遒 호장동석촌음주 한 치의 시간도 아껴 정진하지 바라노라
* [해설] 용수사는 일찍부터 노송정 이계양(李繼陽, 1424~1488)의 자제들이 대를 이어 공부하던 장소로서 이 시는 1514년 퇴계가 소년시절 여러 형님들과 함께 이곳에서 공부하였는데, 숙부 송재 이우(李堣, 1469~1517)께서 자질(子姪)들을 격려하던 〈권학시(勸學詩)〉이다. 그 후 1566년 퇴계의 맏손자[安道]가 이 절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퇴계는 조부[이계양]의 고사를 추억하면서 숙부 송재공이 자신에게 준 시를 차운하여 율시 한 수를 손자에게 주면서 가문 대대로 지켜온 가학 전통을 이어 학문에 힘쓰라고 당부하였다. 이 두 시를 통하여 퇴계선생 가문이 지켜온 가학 전통의 학풍을 확인할 수 있다.
노송정종택(老松亭宗宅)
▶ 귀향길 길목인 용수사 앞 광장에서 행사를 마치고, 재현단 일행은 지금까지 걸어온 것처럼 퇴계선생의 태어나서 자란 노송정종택으로 향했다. 제막 행사에 참석한 명사와 유림들은 차편으로 이동했다. 용수사에서 온혜마을 도산온천(웅부중학교)까지는 약 3km인데, 온혜천을 따라 내려오는 2차선 포장도로이다.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한 날씨, 서쪽으로 설풋 기울어진 해가 밝은 햇살을 내린다. 앞서서 가는 선비단의 도포자락이 바람결에 펄럭인다. 많은 사람들이 뒤를 따른다.
▶ 오후 4시 45분, ‘퇴계퇴실’로 널리 알려진 온혜종택[노송정종택]에 도착했다. — 온혜초등학교 옆 담장을 끼고 들어가면 여러 채의 고택 가운데 노송정종택이 자리하고 있다. 종택은 퇴계 선생 뿐만 아니라 윗대의 아버지와 숙부 송재 선생, 온계 선생을 비롯한 여러 숙질(叔姪) 여러 형제(兄弟)들이 태어나 분가할 때까지 살아오며 가학을 이루던 생가이다.
노송정종택은 1454년(단종2년)에 지어진 550년이 넘는 고택으로 퇴계 선생과 관련된 여러 가지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후에 퇴계가 1501년 11월에 이 집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退溪胎室’(퇴계태실)이라 부르게 되었다. 특이한 구조인 태실을 포함한 정침(안채)은 지방문화재(60호, 1985년)로 지정되어 있다. 대문인 ‘聖臨門’(성림문)을 들어서게 되면 정면에 보이는 ‘老松亭’(노송정) 정자(대청), 그 좌측에는 퇴계태실이 있는 생가 본채, 우측에는 사당(祠堂)이 있으며 전체적으로 조선시대 사대부집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노송정 정자에는 노송정[이계양]이 아들 식(埴. 퇴계 아버지)과 우(偶) 형제에게 준 한시가 주련시로 걸려 있다.
노송정(老松亭)은 퇴계 선생의 조부인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이계양(李繼陽) 공의 호이기도 하다. 노송정은 단종을 폐위시키려던 계유정난 때 초야에 은거하기로 작정하고 이곳 온혜에 터를 잡았다. 집 주위에 오래된 소나무가 많아 ‘老松亭’을 당호와 아호로 삼았다. 당시 이곳에 터를 잡는데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공이 봉화현 훈도(訓導)로 있을 때 두루실[경류정종택]에서 온혜를 지나다가 시냇가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고, 신라현 고개를 넘어가던 중 잠시 쉬고 있을 때 허기진 승려 한 분을 구명하신 일이 있었다. 스님이 온혜의 아름다움을 말하자 공도 여기에 동의하고, 그 스님을 데리고 다시 온혜로 내려왔다. 스님은 여기저기를 살피더니 ‘여기에 터를 정해 살면 귀한 자손을 둘 것’이라고 하여, 공(公)이 이곳에 개창할 것을 결심하였다.
공이 이곳에 종택을 지을 때에 온혜에는 한 집만 살고 있었고, 주위에 묵은 땅이 많아 농사지을 농토가 넉넉했다. 또한 물을 끌어다 논을 만들 수 있었으며 나무숲이 울창하고 골짜기가 깊어 항상 맑은 냇물이 흐르고 물고기도 많았다고 한다.
공은 이곳에 세거지를 마련하고 이를 개척하여 터전을 열었다. 아들 형제를 낳았는데 이름을 각각 식(埴)과 우(堣)라 했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이 형제가 지방 향리에 불과한 진성 이씨를 굴지의 명문으로 발돋움하게 할 줄을. 식(埴)은 아들을 잘 낳았고, 우(堣)는 그 자신이 입신양명하여 가문을 일으켰다. 이런 결과는 과거를 단념하고 오로지 교육으로써 집을 일으키고자 한 노송정의 결실이기도 했다.
퇴계가 쓴 노송정의 사적(事跡)을 보면 “敎子孫爲業 有終焉之志(자손 교육을 업으로 하며 세상을 마치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고 했다. 노송정은 두 아들의 공부를 격려하기 위해 “차가운 절간에서 고생스러이 공부하는 너희를 생각하니 보고 싶은 마음이 때로 눈앞에 어린다, 70세를 바라보는 부모는 날마다 너희들의 입신양명을 고대한다.”는 시를 쓰기도 했다. 자손들은 결국 그런 부모의 염원에 부응했다.
◎ ‘진성 이씨’의 시조 이석(李碩) 공은 진보(현 경상북도 청송)에 살았고, 아들 송안군 이자수(李自修) 공이 조선 초기 안동의 풍산 마애로 입향하여 지내다가, 와룡면 주촌(두루)으로 옮겨갔다. 시조의 3세 이운후(李云候) 공의 아들인 4세 선산부사 이정(李楨) 공은 이우양(李遇陽), 이흥양(李興陽), 이계양(李繼陽) 등 세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맏아들 이우양 공은 주촌에 눌러 살고, 둘째 이흥양 공은 다시 마애로 환거하였으며 셋째 이계양 공은 예안현 온혜(현 도산면 온계리)로 이거하였다. 온혜리 입향조는 진성군 이계양 공으로, 퇴계의 조부이다. 이로부터 진성 이씨 온혜파가 그 뿌리를 내렸다.
노송정 사당의 고유제
▶ 오늘 아침, 영주 이산면 두월리에서부터 걸어온 귀향길 재현단에, ‘용수사 행사’에 참여한 안동의 명사들과 유림 그리고 후손방손 등 수많은 인사들이 노송정종택에 들어서자 종손 이창건(李昌建) 선생이 나와서 정중하게 인사들을 맞이했다. 노송정 대청과 일부는 마당에 서서 상읍례를 나누었다. 이 자리에는 퇴계 선생의 16대 종손 청하(靑霞) 이근필 선생(91세)도 참석하였다. 잠시 서로 담소를 하며 휴식을 취하고 난 후, 사당에서 고유제(告由祭)를 올렸다.
노송정 고유제(告由祭)
고유문(告由文)
維檀紀四千三百五十五년 歲次壬寅三月甲申朔十六日己亥 孝十八代孫 昌建 敢昭告于
顯先朝考 贈資憲大夫 吏曹判書兼 知義禁府事 成均館進士府君
顯先祖妣 貞夫人英陽金氏 今以 —
오직 단기 4355년 해의 차례는 임인년 3월 갑신 초하루, 16일 기해에 18대 종손 창건은
현선조고 증자헌대부 이조판서겸 지의금부사 성균관진사부군
현선조비 정부인 영양김씨께 감히 밝게 고하나이다. 이제 아뢰오니 —
陶山書院 士儒文化 修鍊院也 先師追慕 行事主催 退陶先生 最終致仕 歸鄕行事 再現于今 歸鄕途中 入此生家 聖臨門屹 胎室蕭灑 憶昔趨庭 感慨無量 參拜祖廟 如承謦欬 府君所作 寄子讀書 龍壽寺詩 先生次韻 其詩並刻 世居吾家 倍昔增光 家訓由來 更加闡明 是爲大榮 謹告厥由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에서 선사(先師)를 추모하는 행사를 주최하여서 퇴도(退陶) 선생이 마지막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오시던 행사를 지금에 재현하여 여기 생가에 들어오니 성림문(聖臨門)은 높다랗고 태실(胎室)은 말쑥하고 깨끗합니다. 옛날 집안에 거닐던 것을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할아버님 사당에 참배하니 ‘가르치는 말씀’[謦欬경해]을 받드는 것 같습니다. 부군(府君)께서 지으신 아드님이 용수사에서 독서하실 때 부치신 시와 선생이 차운한 것을 그 시를 함께 새겨서 정원에 비를 세웠으니 대대로 살던 우리집이 예전보다 배나 빛을 더합니다. 가정교육의 유래를 다시 더 드러내어 밝혔습니다. 이것이 큰 영광이 되옵기에 감히 그 사유를 고하나이다.
노송정 정원의 시비 제막
▶ 고유제를 마치고, 노송정 마당 동쪽에 자리 잡은 시비(詩碑)를 제막했다. 시비에는 노송정 계양 공이 두 아들 식(埴. 퇴계 아버지)과 우(偶) 형제에게 준 〈권학시(勸學詩)〉와 퇴계가 손자 안도(安道)에게 보낸 〈권학시(勸學詩)〉를 새기고, 해설을 곁들였다. 먼저 노송정의 시는 이렇다.
節序駸駸歲暮天 절서침침세모천 세월이 빨리 흘러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 가는데
雪山深擁寺門前 설산심옹사문전 눈 덮인 산들이 절 문 앞을 들러 싸고 있겠지
念渠苦業寒窓下 염거고업한창하 차가운 절간 창 아래 너희들 힘든 학업을 생각하니
淸夢時時到榻邊 청몽시시도탑변 맑은 꿈이 때때로 너희들 곁으로 달려가네
퇴계가 손자 안도(安道)에게 보내는 〈권학시(勸學詩)〉는 이렇다.
念爾山房臘雪天 염이산방납설천 섣달 눈 내린 산방에 있는 너를 생각하니
業成勸苦庶追前 업성권고서추전 부지런히 학업을 이루라는 선조 말씀 미루어 바라노라
二詩三復無窮意 이시삼복무궁의 두 시에 담긴 무궁한 뜻을 세 번 반복해 읽노니
一枕更闌夢覺邊 일침갱란몽각변 밤 깊은 배갯머리에도 꿈은 절로 깨이네
* [해설] ― 앞의 시는 노송정 이계양(李繼陽, 1424~1488) 공이 당시 용수사에 공부하고 있던 두 아들의 학업 성취를 격려하기 위해 지은 권학시 절구 두 수 중 하나이다. 뒷날 1566년 11월 퇴계 또한 조부 노송정의 시를 차운하여 당시 용수사에서 공부하던 맏손자[安道]에게 주었는데, 노송정이 두 아들의 학업성취를 바라는 뜻을 이어받아 열심히 공부하라는 간곡한 당부를 담고 있다. 퇴계의 조부께서는 성품이 온화하고 고요하여 세상에 나아갈 일에는 힘쓰지 아니하고 농사를 지으며 자손교육을 업으로 삼으셨다. 노송정께서 시로써 학문을 권고하였던 아름다운 가학전통이 후손들에게 미쳐서 후대에도 현달한 인물과 학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 노송정종택의 종손 이창건 님과 퇴계종택의 종손 이근필 님을 비롯한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 등 유림과 후손들이 노송정 마당의 가장자리에 자리한 시비를 제막하고 유림 한 분이 시비(詩碑)의 시를 창수했다. 그리고 노송정 대청에 올라 다과를 나누며 담소했다. 노송정종택 종부 최종숙 여사가 차려낸 다담상은 아주 정갈하고 품위가 있었다. —
▶ 노송정 대청에는 ‘山南洛閩’(산남낙민), ‘海東鄒魯’(해동추로) 현판이 걸려 있는데, 모두 퇴계의 학문과 덕을 기려서 올린 현판이다. ‘해동추로(海東鄒魯)'는 ‘노(鄒)나라 사람인 공자와 추(鄒)나라 사람인 맹자처럼 해동에서 태어난 성인'이라는 뜻이고 ‘산남낙민(山南洛民)'은 ‘낙양사람인 정자(程子)와 민중사람인 주자(朱子)처럼 영남(산남)에서 태어난 성인'이라는 뜻으로 두 현판이 서로 대구(對句)를 이루고 있다.
〈지산와사(芝山蝸舍)〉입구의 시비 제막
▶ 노송정에서 고유제와 시비 제막 행사를 마친 귀향길 재현단과 유림들은 ‘성림문’을 출발하여 동네 길을 나와 923번 지방도로(온혜천)의 가장자리, ‘지산와사(芝山蝸舍)’ 입구에서 세 번째 시비(詩碑)를 제막했다. 시비에 새긴 퇴계선생의 시는 〈지산와사(芝山蝸舍)〉이다. 지산(芝山)은 영지산이요 와사(蝸舍)는 달팽이집이니 영지산 기슭에 지은 아주 작은 집을 뜻한다. 퇴계가 자연과 벗하며 학문을 닦기 위해 영지산 산록에 처음 지은 집이다.
卜築芝山斷麓傍 복축지산단록방 영지산 끊어진 산기슭 곁에 집터 보아 세우니
形如蝸角祇身藏 형여와각기신장 모습은 달팽이 뿔만 하여 몸 겨우 감출 만하네
北臨墟落心非適 북임허락심비적 북쪽으로 낭떠러지라 마음에 들지 않지만
南挹煙霞趣自長 남읍연하취자장 남쪽으로 안개와 노을 끌어안아 운치가 넘치네
但得朝昏宜遠近 단득조혼의원근 다만 아침저녁 어머님께 문안드리기 좋은 곳
那因向背辨炎凉 나인향배변염량 어찌 방향에 따라 춥고 더움을 가리겠는가
已成看月看山計 이성간월간산계 이미 달과 산 바라보는 꿈이 이루어졌으니
此外何須更較量 차외하수갱교량 이밖에 무엇을 다시 견주어 바랄 수 있겠는가
* [해설] ― 시비를 제막하고 나서 강구율 교수가 시를 창수(唱酬)하고 김병일 원장이 이 시를 지을 당시 퇴계 선생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였다. 이 시는 1531년(31세) 퇴계가 영지산 자락에 지은 조그만 집 ‘지산와사(芝山蝸舍)’를 짓고 읊은 시이다. 퇴계는 ‘와각지쟁(蝸角之爭)’의 고사에서 무한한 우주공간에서 내려다보면 나라의 전쟁도 달팽이 뿔 위의 하찮은 다툼일 뿐이라고 여겼다. 숲속의 조그만 초가집이나 천자의 궁궐이라도 우주의 작은 하나의 존재일 뿐이며 세속의 뜬구름 같은 욕망을 버리고 자연의 도(道)를 따라 우주 자연을 관조하며 살겠다는 뜻으로 달팽이집[蝸舍]이라고 하였다. 산과 달을 바라보며 안개와 노을을 벗하고 가까이 온계 형님댁에 계시는 어머니와 가족을 보살필 수 있으니 여기에 무슨 다른 욕심이 있겠는가. 자신의 몸을 닦고 학문을 완성하여 가깝게는 가정을 다스리고 멀게는 나라의 백성을 위한 삶을 살고자 다짐한다. —
삽골재
도산서원으로 넘어가는 마지막 고개
▶ 〈지산와사〉 시비를 제막하고 나서, 재현단 일행은 온혜천 다리를 건너 온혜천-토계천 제방 길을 따라 걸었다. 토계천 건너편에 도산면행정복지센터 건물이 보였다. 제방 길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도산파출소 앞을 지나 35번 국도를 경유하여, 이정표가 있는 산길로 접어들어 삽골재를 넘었다.
삽골재 고갯마루에는 퇴계 선생의 시판이 세워져 있다. 앞서 소개한 〈신자온계유성현지도산(晨自溫溪踰聲峴至陶山)〉(새벽에 온계를 출발하여 성현을 넘어 도산에 이르다)이다.
曉霧浸衣濕 효무침의습 새벽이슬에 옷 젖어 촉촉한데
羸鞭越峴艱 리편월현간 야윈 나귀 채찍해도 고개 넘기 어렵네
短長松並立 단장송병립 크고 작은 소나무는 나란히 서 있고
黃白菊相班 황백국상반 희고 누른 국화는 서로 아롱지도다
閭寂柴門逈 여적시문형 고요한 사립문 저 멀리 바라보이고
蕭疎竹院寒 소소죽원한 대나무 성긴 정원 쓸쓸하기만 하네
晩來風日好 만래풍일호 저녁나절 바람과 햇빛 좋기도 하여
凝坐望秋山 응좌망추산 가만히 앉아 가을 산 바라보네
—《퇴계집(退溪集)》 〈晨自溫溪踰聲峴至陶山(새벽에 온계를 출발하여 소릿재[聲峴]를 넘어 도산에 도착하다)〉
▶ 오늘 아침 영주 두월리에서 귀향길 재현단과 함께 걸어온 전 경상국립대 허권수 박사가 구성진 가락으로 이 시를 창수했다.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는 저녁 나절, 호젓한 고갯마루에서 퇴계선생의 시심(詩心)이 구성진 가락을 타고 후생의 가슴을 울렸다. 감동적이었다. 동행하던 모든 분들이 재창을 요청하여 허권수 박사는 다시 시를 창수하고 자상한 설명까지 하였다. 시에서 말하는 ‘성현(聲峴)’이 지금 우리가 넘고 있는 이 ‘삽골재’이다.
▶ 고갯마루에서 내려가는 길은 사람이 다니지 않아 잡초가 우거지고 또 경사가 매우 가팔랐다. 극심한 내리막길에 안전자일을 설치해 놓았으나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귀향길 마지막 경로인 삽골재 험한 산길은 좀 더 안전하게 정비할 필요가 있다.
도산서원 길 주차장
귀향길 제13일의 일정을 마무리하다
▶ 삽골재를 넘어, 오후 7시 오늘의 최종 도착점인 ‘도산서원길’ 주차장에 도착했다.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지만, 퇴계선생 귀향길의 마지막 포인트인 이곳에 〈敬―귀향길 안내판〉 제막을 했다. 용수사 일주문 앞에 세운 것과 같은 안내판이다. 귀향길의 이정표인 안내판은 우선 이렇게 안동시 지역 두 군데 설치되었다. 김병일 원장은 ‘앞으로 서울에서 도산까지 귀향길 노정의 곳곳에 설치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말하였다.
▶ 모든 재현단 일행과 선비 유림들이 둥글게 둘러서서 상읍례를 하고 오늘의 모든 일정을 마쳤다. 도산에 고요한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오늘 종주 재현단 일행은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유숙을 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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