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혀의 교리가 아니라 생활의 교리이다.
이 말을 한 분은 종교개혁자 칼빈입니다.
요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이 흔히 하는 말 중 하나가
'믿음은 교리가 아니라 삶이다' '사람은 말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삶을 통하여 변화된다'고 말함으로 아주 그럴 듯한 이론을 펼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찌보면 위에서 칼빈이 했던 말과 같은 주장을 한다고도 보여집니다.
우리 속담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칼빈의 말과 오늘날 유행하는 말의 유사성에서도 불구하고 그 주장의 내면적인 뜻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오늘의 시대정신이 탄생시킨 그 말의 교묘함을 면밀히 파악해야만 합니다.
먼저 전자(칼빈)의 경우는 실제적/실천적 무신론자를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복음은 혀를 통해서 나온다(복음선포)는 것을 전제로하고 있습니다. 혀의 교리가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혀의 교리만 말하고 그 교리를 실제적 삶의 교리로까지 나아가지 않는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교훈한 것과 같이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다만 내 아버지 뜻대로 하는 자라야 들어간다'는 주님의 말씀과 상통하는 가르침입니다.
반면 후자(오늘날 인본주의적 시대정신)의 경우는 그것과 정반대의 경우입니다.
오늘날 실천적 무신론자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사람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변화된다'는 논리구조에 서있는 이들에게는 복음으로 인한 교리를 말하는 것에 거부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리를 말하는 것을 혐오합니다. 대신에 이웃에게 친절하고 상냥하며 상대방의 심정을 배려하는 봉사와 희생의 정신과 삶으로 이웃을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주객을 전도시키고 있습니다. 칼빈의 논리와 흡사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를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치명적인 약점은 삶을 교리보다 우선으로 놓는다는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삶이지 말이 아니라고 합니다. '교리가 아니라 삶이다' 참 그럴듯해 보이지만 깊이 들어가면 성경말씀에 대한 계시적 권위를 절대적으로 여기지 않는 그들의 근본적인 마음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칼빈의 말은 교리를 무시하고 삶을 우선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좋은나무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전제되어야만 합니다.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냐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개혁교회의 가르침은 언제나 진리 안에서의 사랑입니다. 진리없는 사랑을 외친다는 것은 인본주의이며 기독교의 순수성을 파괴하는 것이며 교회를 병들게 하는 누룩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