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룡산성과 최제우 동학(東學)
이언 김동수 (시인. 백제예술대 명예교수)
1. 교룡산성(蛟龍山城)과 은적암(隱寂庵)
천년 고도 남원시 서북방에 유서 깊은 교룡산성(蛟龍山城)이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 성(城) 안에, 경주 출신 수운(水雲) 최제우(1824-1864) 선사가 고향을 떠나 이곳에 은거하면서 동학(東學)의 경전인 『동경대전』을 집필하면서 ‘동학(東學)’이란 이름을 세상에 처음으로 선포한 선국사(善國寺) 은적암(隱寂庵)이 있다. 가장 수탈 받고 고통받던 호남, 남접의 지역적 기반인 이곳 남원 농민들의 정서 속에 흘러 들어가 동학 혁명의 혁명의 불씨를 지폈던 것이다.
또한 선국사 은적암은 3.1독립운동 당시 불교계를 대표하여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백용성 스님의 첫 출가한 사찰이기도 하다. 동학혁명 때에는 접주 김개남이 “교룡산성 안쪽에 있던 선국사(善國寺)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전라좌도를 통솔”(<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전라도남접이 시작된 선국사’)하면서 그가 이끄는 동학도들과 남원의 모든 농민군들을 모아 남원성을 점령하고, 교룡산성에 들어가 군세를 크게 떨친 역사적인 유적지이기도 하다.
교룡산성은 해발 518m인 교룡산의 험준함에 의지하여 축조된 산성이다. 성의 입지나 형식으로 볼 때 백제 때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성안에는 우물 99개와 계곡이 있어서 유사시에 대피나 전투의 목적으로 사용하기 좋은 산성이다. 조선 전기에는 군량을 저장하는 군창(軍倉)과 무기고가 있었다.
교룡산성은 경상, 전라, 충청으로 통하는 삼남의 심장부이니 호남제일의 요새지라 하였다. 조선초 황희 정승의 아들로 영의정을 지낸 황수신이 지은 「광한루기」 에서도
“교룡산은 북으로 밀덕봉이 솟아 있고, 남으로 복덕봉이 솟아 있어 험(險)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하늘을 찌를 듯이 송곳처럼 뾰쪽하게 솟아 추켜 오른 그대로 천연의 험요지(險要地)를 이루어 실로 금탕(金湯)의 철벽이라 아니할 수 없노라” 하였다.
임지왜란 이듬해인 1593년 도원수 권율의 명에 의해 처영은 경상도 의령에 주둔한 승병을 동원하여 다섯 달에 걸쳐 공사를 했고, 정유재란(1597년) 때에는 호남지역의 6개 군현에서 거둔 군량미를 모두 거두어 바로 이 교룡산성에 보관했다. 1960년 보제루에서 발견된 구리 도장(圖章)은 산성을 지키는 승군(僧軍)에게 조정에서 내려보낸 것으로, 교룡산성과 선국사(善國寺)를 나라에서도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현장에서 평상시에는 불법 수행도량으로, 전시에는 방어진지 역할을 하며 역사의 흥망을 함께 해온 성터라 하겠다. 이처럼 교룡산성 선국사(善國寺)와 은적암(隱寂庵)은 호남지역 호국의 상징이요, 동학의 창시자 수운이 창교(創敎)하고 용성 선사가 출가한 성지(聖地)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대웅전과 칠성각 그리고 요사채와 그 옆에 허물어져 가는 보제루(普濟樓)만 남아 있을 뿐, 선사들이 머물렀던 덕밀암 은적암도 흔적없이 허물어져 선사들이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 숲속에 팻말만 하나 세워져 있다.
* 교룡산성 시 2편
교룡산성이 백운 간에 솟았으니
한 줄기 길이 겨우 꾸불꾸불 통하였네.
마치 이 한 고을의 절험(絶險)을 자랑하는 듯
위급하면 여기 의지하여 오랑캐를 막을지니
龍城陟入白雲間 一線綴通路屈盤
好是一鄕誇絶險 時急憑伏制兇蠻
- 강희맹(姜希孟), 『용성지(龍城誌)- 1752년 남원향교본』, 남원문화원, 1995,
* 조선의 문신으로 뛰어난 문장가인 강희맹(1483-1483)이 교룡산성(蛟龍山城)이 남원의 자랑이자 호남제일의 요새임을 노래하고 있다..
희뿌연 안개 서기처럼 깔리는 굴헝. 새롬새롬 객사 기둥만한 몸뚱어리를 언뜻언뜻 틀고 눈을 감은 겐지 뜬 겐지 바깥소문을 바람결에 들은 겐지 못 들은 겐지 어쩌면 단군 하나씨 때부터 숨어 살아온 능구렁이.
보지 않고도 섬겨왔던 조상의 미덕 속에 옥중 춘향이는 되살아나고 죽었다던 동학군들도 늠름히 남원골을 지나가고 잠들지 못한 능구렁이도 몇 점의 절규로 해 넘어간 주막에 제 이름을 부려 놓고 있다.
어느 파장 무렵, 거나한 촌로에게 바람결에 들었다는 남원 객사 앞 순대국집 할매. 동네 아해들은 휘둥그레 껌벅이고 젊은이들 그저 헤헤 지나치건만 넌지시 어깨 너머로 엿듣던 백발 하나 실로 오랜만에 그의 하얗게 센 수염보다도 근엄한 기침을 날린다.
山城 후미진 구렁 속. 천년도 더 살아 있는 능구렁이, 소문은 슬금슬금 섬진강의 물줄기를 타고나가 오늘도 피멍진 남녘의 역사 위에 또아리치고 있다.
- 김동수. 「교룡산성」, 『시문학』, 1982. 10월호
2. 최제우 동학(東學)과 「칼노래」
1) 최제우의 동학(東學)과 시천주(侍天主)
수운 최제우(崔濟愚:1824-1864)는 재가녀의 자손이라는 굴레 때문에 과거길이 막히고, 재산도 없는 몰락양반이라 평생 불우했던 삶이 동학을 창시한 계기로 작용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득도를 확신한 최제우는 자신의 깨달음을 주변에 알리기 시작(1861년)했고, 짧은 시간에 동학이 세력을 불려나가자 유림층에서는 서학(천주교)을 신봉한다고 의심하여 탄압을 가해오자 최제우는 전라도 남원 교룡산성으로 으로 피신(1861년 11월), 그곳 은적암(隱寂庵) 피신생활 중 최제우는 <논학문(論學文)> <안심가(安心歌)> <교훈가> <도수사(道修詞)> 등을 저술하며 동학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했다
최제우의 동학(東學)'은 어지럽게 몰려든 서학(西學)에 맞서 동쪽 나라인 우리 민족 고유의 경천(敬天)사상을 바탕으로 유(儒), 불(佛), 선(仙)과 민속 신앙을 융합한 한민족 전통의 시천주(侍天主) 사상이다. ‘시천주(侍天主)’란 한울님을 모시는 신앙, 곧 ‘시천주 신앙(侍天主 信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최제우의 동학(동학)은 『용담유사』 「권학가」 2절에 나온 ‘저희 부모 죽은 후에, 신(神)도 없다 이름하고 제사조차 안 지내며 오륜에서 벗어나’ 있는 서교(천주교)와는 다른 한민족 고유의 ‘시천주(侍天主)’
사상이라 하겠다. 연
최제우에 따르면 사람은 누구나 한 울님을 모시고 있으며, 한울님은 인간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니, 결국 최제우가 만났다고 하는 상제(上帝)는 밖에서 온 것이 아니라 참된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러기에 '시천주(侍天主)'란 자기 안에 모시고 있는 한울님과 일체가 되기 위해 자기의 인격수련과 바른 삶의 태도를 기르는 것이다. 여기에서 일컫는 한울님의 관념은 고대농경사회의 '한울사상'에서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인간은 하늘을 모신 존재로서,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이 한울이 있기에 사람이 한울을 믿고 따르게 되면 다 같이 존귀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먼저, 한울님의 존재를 ‘믿고(信), 정성(誠)을 다해 공경(敬)하연서 내 안에서 있는 한울님의 말씀을 좇아 행하게 되면 만사가 저절로 깨달아 지고 무한한 힘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수은 최제우는 이 세 가지 덕목, 곧 신(信), 성(誠), 경(敬)을 시천주 사상의 기본 덕목으로 삼아 한울님을 모시라 강조한다. 그저 마음(心的)으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몸(身的)으로도 생생하게 느끼고 체험하라고 한다. 이러한 몸과 마음으로 인간이 주체적 자유와 공동체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인간은 참더운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동조한 교도들이 점차 늘어나자 동학을 위험한 세력으로 간주, 유림들과 조정에서 최제우에게 혹세무민의 죄목을 씌워 탄압을 가해왔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마음이 곧 네 마음(吾心卽汝心)이다’는 한울님의 말씀을 듣고, 이 도(道)를 체계적으로 이론화하여 널리 전파하고자 안전하고 집필하기 좋은 곳을 물색하다 1861년 12월 15일 경 유서 깊은 전북 남원의 교룡산성 내에 있는 선국사(善國寺)를 찾아 들게 되었다.
그곳에 있는 덕밀암의 방 한 칸을 빌려 은적암(隱寂庵)이라 이름 짓고 이곳에 피신하면서 동학(東學) 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여 1962년 1월 최제우는 논학문(論學)을 지어 널리 선포하였다. 그 논학문(論學) 서두에 하늘과 땅에는 차면(盈) 이지러지고(虛), 이지러지면 다시 차는 8쾌의 원리가 있어 그것들이 일정한 차례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음과 양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陰陽相均에)
비록 온갖 만물이 그 속에서 화생하지마는 (雖百千萬物이 化出於其中이나)
오직 사람이 그 중 가장 신령한 것이다 (獨惟人最靈者也라)
그러므로 하늘, 땅, 사람의 이치가 정해져 있다. (故로 定三才之理)
하늘은 오행의 근본이 되고 (天爲五行之綱이요)
땅은 오행의 바탕이 되고 (地爲五行之質이요)
사람은 오행의 기운이 되었으니 (人爲五行之氣하니)
하늘,땅,사람이 삼재가 되는 이치를 (天地人三才之數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 (於斯可見矣로다)
-「논학문(論學文), 『동경대전(東經大全)』, 1862.1
음과 양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만물이 그 속에서 화생하는데 그 중에서도 사람만이 가장 신령한 존재라. 그러기에 하늘(天), 땅(地), 사람(人)을 세 가지 근본 존재로 삼는
이른바, ‘천지인삼재(天地人三才) 원리가 세워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좀더 부연해 보면, ’천(天‘은 우주 생성의 근본 원리로서의 법칙(網) 이고, ’지(地)‘는 그것의 바탕인 자연이며, ’인(人)은 하늘의 정기(精氣) 받아들여 작동하는 수행자에 해당 된다 하겠다. 이러한 유기체적 메카니즘을 한양대 윤석산 교수는 하나의 집을 짓는 시스템에 비유하고 있다.
한 채의 집을 짓기 위해서는 삼재(三才), 곧 설계도와, 집터와 목수가 있어야 하는데, 한울님(天)은 그 집의 설계자이고, 땅(地)은 그 집을 지을 수 있는 집터에 해당되며, 사람(人)은 그 설계도에 의해 직접 집을 짓는 목수에 해당된다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하늘로부터 내리는 천명(설계도)을 받아 한울의 뜻에 따라 어긋나지 않고 충실하게 임무를 다해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로 융합되어 합일된 된 한 채의 집, 이것이 수운의 동학이요 시천주 사상이다
그러기에 동학(東學)에서의 주체는 멀리 있는 하늘(天)의 신(神)이 아니라, 항시 내 가까이 내 안에서 나와 함께 숨 쉬고 주문하여 한울(天)과 일심동체(一心同體)가 되어 있는 신인여일(神人如一)의 인격신으로서 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수운은 그 도(道)가 ‘그럼 서학(西學)과 같느냐? 는 질문에 분명히 그와 다름을 밝히면서, 서학이 아니고 ‘동학(東學)’이라며, 여기에서 ‘‘동학(東學)’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세상에 밝히고 있다.
묻기를 “도(道)가 같다고 말하면 서학(西學)이라고 이름합니까?” 대답하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또한 동(東)에서 나서 동 (東)에서 받았으니 도는 비록 천도(天道)이나 학(學)인 즉 동학(東學)이라. 하물며 땅이 동(東)과 서(西)로 나뉘었으니 서(西)를 어찌 동(東)이라 이르며 동(東)을 어찌 서(西)라고 이르겠는가? (曰同道言之則 名其西學也 曰不然 吾亦生於東 受於東 道雖天道 學則東學 況地分東西 西何謂東 東何謂西) - 「논학문(論學文)」, 『동경대전(東經大全)』, 1862. 1
이로써 ‘동학(東學)’이라는 이름이 1862년 1월 남원 교룡산 은적암에서 집필한 최제우의 「논학문(論學文)」에서 세상에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수운은 “은적암에 들어가 새해를 맞이하면서 「권학가(勸學歌)」 와 논학문(論學文)을 지었다. 6월 중순에는 「통유(通諭)」를, 하순부터는 「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와 「수덕문(修德文)」 을 이어 저술하였다.”(임형진, 남원 은적암과 주변 정세) 이후 이를 근거로 제자들이 오늘날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을 정리하여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최제우의 동학(東學)사상은 본질적으로 예언자의 사상, 곧 개벽사상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개벽사상은 앞으로 개벽의 세상이 올 것이라고 하는 예언의 사상으로 당시의 예언서였던 『정감록』의 사상을 이어받은 것이며, 최제우를 신봉하여 그의 종교에 입교한 많은 사람들은 새 시대의 '정감록'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동학사상을 믿고 따랐다고 보았다.
2) 동학(東學)의 변천 과정
이러한 수운 최제우의 동학의 교리는 이후 3단계의 발전과정을 겪었다. 교조인 최제우 단계에서는 시천주'(侍天主) 사상, 2대 교주인 최시형 단계에서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 그리고 3대 교주인 손병희에 의해 개창된 천도교 단계에서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변해가면서도 그 안에는 동학의 시천주(侍天主)사상이 기본이념으로 깔려있다. ‘시천주(侍天主)’라는 말은 <동경대전>의 21자 주문(呪文)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그 말의 뜻은 인간과 우주를 주재하는 초월적 신과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해 있는 내재적 신(神), 곧 한울님(天主)를 정성껏 내 마음에 모신다는 의미이다.
그 말의 뜻을 좀더 살펴보면 『용담유사-교훈』의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捨近取遠)하단 말가?"에 나타나 있듯, 멀리 있는 추상적 개념의 한울님을 무조건 믿지 말고 내 마음 안에 있는 초월적 한울님을 가까이 모셔 한울(天)과 내(人)가 합일(合一)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인격신을 잘 모시하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최제우의 한울님은 초월적 신(神)의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崔時亨)1827-1898)의 시대에 와서는, ‘시천주(侍天主) 대신, ’양천주(養天主)‘, ’사인여천(事人如天)‘의 개념이 등장하면서,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모시고 있는 한울을 잘 길러내야 한다는 양천주(養天主)’를 내세웠다. 그러기에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이미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보아 ‘사람 섬기를 한울님 섬기듯 하라’(事人如天) 하면서, 최제우의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보다 인간 중심의 수행 덕목으로 구체화시켜 나갔다.
뿐만 아니라 해월은 수운이 가르친 ‘한울님을 모신다’는 말의 뜻을 확대하여 사람 이외의 온갖 천지만물에도 한울이 내재한다는 범천론적(凡天論的) 사상을 주장하면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도 한울님의 소리이고, 베 짜는 소리까지도 한울님의 소리라 했다. 때문에 마음속에 천주를 기르고, 나아가 ‘사람과 만물을 하늘처럼 섬기라’하였다.
그러다가 제3대 교주 손병희(1861-1922) 단계에 와서는 전통적인 한울의 개념이 거의 사라지고 인간을 한울(天)과 완전히 동일시하는 ‘인내천(人卽天)’ 사상을 종지(宗旨)로 선포하여 동학사상과 동학운동이 서민층의 반왕조적인 사회개혁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1905년 천도교(天道敎)가 손병희에 의해 창교되었다.
이리하여 동학은 최제우의 ‘시천주(侍天主)’에서 ‘사인여천(事人如天)’을 거쳐 ‘사인여천’이 다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으로 재해석 되면서, 근대 시민 평등사상에 기반을 둔 인간중심주의의 추세에 따라 “개인의 내면적 영혼의 구원보다 동학농민 운동과 3.1 독립운동에서 그 주동적 역할을 한 것처럼, 사회개벽의 정치, 사회운동에 경도한 나머지 시천주(侍天主)의 종교적 요소가 점차 퇴색하게 되었다.”(신일철, <동학사상의 이해>)
그러나 손병희의 ‘사람이 곧 하늘이다.’는 ‘인내천(人乃天)’ 사상 역시 ‘사람은 누구나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수운 최제우의 가르침이 그 기저에 흐르고 있다 하겠다.
3) 「칼 노래」(劍訣)
최제우가 교룡산 은적암에 은거하여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을 집필하면서도 틈틈이 산에 올라 장검을 들고 춤를 추면서 손수 지어 부르던 <칼노래>가 있다. 이로써 당시 민중들이 얼마나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기를 염원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시대여 시대여 나의 시대여 다시는 오지 못할 나의 시대여
만세에 한번 태어난 대장부가 오만 년만에 때를 만났도다.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쓰고 무엇하리.
무수장삼(춤 출 때 입은 소매 긴 장삼) 떨쳐 입고
이 칼 저 칼 넌지시 들어
아득하여 보이지 않는 넓은 천지에 단신으로 비껴 서서
칼노래 한 곡조를 때(時)여! 때(時)여! 하며 불러내니
용천검 날랜 칼은 해와 달을 희롱하고
게으른 무수장삼은 우주에 덮여 있네
만고의 명장이 어디 있는가 장부 앞에는 장사가 없는 것이니라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 나의 신명 좋을시고
(원문)
時乎時乎 이내 時乎 不再來之 時乎로다
萬世一之 丈夫로서 五萬年之 時乎로다
龍泉劍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舞袖長衫 떨쳐입고 이 칼 저 칼 넌즛 들어
浩浩茫茫 넓은 天地 一身으로 비껴서서
칼노래 한 곡조를 時乎時乎 불러내니
용천검 날랜 칼은 日月을 희롱하고
게으른 무수장삼 우주를 덮여있네
萬古名將 어디있나 丈夫當前 無壯士라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身命 좋을시고
-최제우, 「칼노래(劍訣)」, 『용담유사』 1864
수운은 여기에서 ‘용천검으로 일월(日月)을 베겠다’고 하였는데, 이는 새로운 세상을 한 번 열어보겠다는 개벽사상을 염원한 노래라 하겠다. 반복적으로 쓰이고 있는 ‘시호(時乎)’란 ‘때가 이르렀다’는 말이다. 만년 만에 하나나 날까말까 한 장수가 오만 년 만에 만났으니,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어찌할 것이냐? 기세 좋게 칼을 들어 일월을 희롱하며, 우주를 덮을 용맹을 떨치니 만고명장인들 당할 수 없으리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수운 최제우는 안타깝게도 그 뜻을 펼치지 못한 채 이 해(1864년) 3월 체포되어 사도난정(邪道亂正) 혹세무민 죄목으로 대구 달성공원에서 효수되었다.
이처럼 남원의 교룡산성은 ‘동학’과 ‘3.1 독립만세운동’의 발원지로서의 자취가 서려있는 역사적 현장이다. 때문에 한국 사상사에 있어서 남원 교룡산성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교룡산 은적암에는 수많은 호남 사람들이 찾아 왔다. 수운은 이 교룡산 은적암을 중심으로 ‘동학(東學)’이란 종교를 세상에 처음으로 전파하였다. 이것이 호남 최초의 동학 포교지이고 그 결실이 바로 1894년 호남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진 ‘갑오 동학혁명’이었다.
“이런 역사 깊은 유적지를 남원은 아직까지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교룡산성 은적당 복원은 오래전부터 그 필요성과 타당성을 역설해 왔지만 공염불에 그치고 말았다. 앞으로 덕밀암 은적당이 복원되면 동학의 성지, 불교의 성지, 국민정신교육의 성지가 될 것이다.”(노상준: 남원학 연구소)
뿐만 아니다. 김개남 접주가 전봉준과 함께 농민군을 이끌고 남원 관아를 점거할 때도 이 성(城)를 주둔지로 삼았던 호국 선열들의 숭고한 얼이 서린 곳으로 하루 속히 교룡산성 덕밀암(은적암)을 복원하는 성역화 사업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마음 간절하다.
<참고문헌>
최동희 역, 「동경대전」, 『한국민속(종교) 사상』, 삼성출판사, 1983
윤석산, 『동경대전』, 모시는 사람들, 2006,9
윤석산, 『용담유사 연구』, 모시는 사람들, 2020,9
성주현, '남원 은적암과 수운 최제우’, 『제2회 남원동학문화제 학습발표회』, 남원동학 문화 제전위원회, 2020.11.28.
임형진, '남원 은적암과 주변 정세, 위의 책
원불교 대사전, 원불교 100년 기념 사업회
僧達의 블로그, 구글
|
첫댓글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역사의 현장에서 평상시에는 불법 수행도량으로,
전시에는 방어진지 역할을 하며 역사의 흥망을 함께 해온 성터라 하겠다.
이처럼 교룡산성 선국사(善國寺)와 은적암(隱寂庵)은 호남지역 호국의 상징이요,
동학의 창시자 수운이 창교(創敎)하고 용성 선사가 출가한 성지(聖地)이기도 하다.>
이언 교수님!
제가 남원 일대에 우리 원불교 남원 교당을 비롯해
많은 훙련원 등이 있어 자주 다녔지요?
그런데 그만 교룡 산성의 중요성을 몰랐습니다.
이제야 캄캄했던 저의 눈이 확 하고 뜨였습니다.
그리고 경주의 수운 최제우 성지는 밝히지 않으셨군요,
하여간 동학을 소상하게 알려 주시어 감읍할 따름입니다.
고맙습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경주와 최제우 선사는 잘 알려져 있지만, 남원 교룡산성과 동학이 상대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아 이를 조명해 보고자 하였습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렇군요.
그래도 언제 경주 성지도 한번
조명해 주시면 어떨까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