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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 고든 맥도날드
*작가인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는 자신의 내면세계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가 인용한 와일드의 고백은 다음과 같다.
신들은 내게 거의 모든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을 오랫동안 무분별하고 육체적인 향락에 빠져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향락이 극에 달하면 곧 싫증을 느끼고 새로운 흥분거리를 찾아 밑바닥까지 일부러 내려가 보았다. 내 사고는 역설로 가득 차고 정열은 뒤틀려 갔다. 나는 점차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해 개의치 않게 되었다. 나를 즐겁게 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계속 쾌락을 추구했다. 나는 일상의 작은 행위 하나하나가 우리의 성품을 형성하거나 파괴하기도 하며, 우리가 밀실에서 행한 일로 인해 언젠가 지붕 위에서 통곡하게 되리라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의 주인 되기를 멈추었다. 나는 더이상 내 영혼의 선장이 아니었고, 나는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쾌락이 나를 지배하도록 허용했던 것이다. 끔찍한 수치감 속에서 내 인생은 끝나 버렸다.
"나는 더 이상 내 영혼의 선장이 아니었다"는 와일드의 표현은 내면세계가 흔들림으로써 삶이 무너져 버린 사람의 모습을 나타낸다. 그의 말은 한개인 삶의 극적인 단면을 표현하지만, 와일드처럼 내면을 무시한 많은 이들도 이와 비슷한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시대 가장 격렬한 전쟁터 중 하나는 개인의 내면세계라고 믿는다. 특히 자신을 실천적이거나 순종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라고 믿는 자들은 마땅히 이 싸움을 치러야 한다. 그들 중에는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서 무거운 책임을 지고 수고하는 이가 많다.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지만 너무나 지쳐 있다! 그래서 싱크홀 같은 붕괴 위험에 처하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런가? 그들의 가치 있는 활동은 와일드의 경우와는 거리가 멀지만, 그들 역시 와일드처럼 내면세계를 너무 오랫동안 무시한 채 공적 세계에만 치중한 삶을 살기 때문이다.
웨인 뮬러(Wayne Muller)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바쁘면 바쁠수록 스스로를 그만큼 더 중요한 인물인 양 여기고 남들에게도 그렇게 비칠 것이라고 상상한다. 친구와 가족을 위한 시간이 없는 삶, 황혼을 음미할 시간이 없는(혹은 해가 이미 진 것조차 알지 못하는) 삶, 심호흡 한번 할 시간조차 없이 정신없이 일에 쫓기는 삶, 이런 모습이 성공한 인생의 모델이 되어 버렸다.?
서구 문화의 가치관은 우리가 이런 성향에 눈멀도록 이바지했다. 우리는 공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는 사람이 내적으로도 아주 영적인 사람이라고 순진하게 믿는 경향이 있다. 또한 교회가 크면 클수록 하늘로부터 오는 복이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 지식이 많을수록 그만큼 하나님과 더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 때문에 내면세계를 희생해서라도 공적 세계에 관심을 기울이는, 균형이 깨진 삶의 유혹을 받는 것이다. 더 많은 프로그램, 더 많은 모임, 더 높은 학력, 더 넓은 대인관계, 더 바쁜 일정 등, 삶의 표면을 이루는 이 모든 것이 너무 무거워져 도무지 감당할 수 없게 되면 결국 삶 전체가 무너져 내린다. 피로, 환멸, 실패, 패배가 무섭게 엄습할 수 있다. 지금까지 무시되어 온 내면세계는 더 이상 그 무게를 지탱할 수 없게 된다.
*괜찮다면 바다에서 일어난 사건을 또 하나 이야기하려고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이야기 중 하나는 어느 날 오후 갈릴리 바다에서 큰 폭풍을 만난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제자들은 순식간에 공포에 질려 마음의 평정을 잃었다. 그들은 오랜 세월 그 바다에서 고기를 잡았던 숙련된 어부로서, 모든 장비를 갖추었고, 그런 폭풍을 한두 번 겪어 본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번에는 그런 상황을 감당할 수 없었다. 한편 예수님은 배 뒤편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은 씩씩거리며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위기에도 개의치 않고 주무시는 그분에게 달려갔다. 그런 상황에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제자들에게 점수를 조금 주는 게 옳지 않을까?
그리스도께서는 폭풍에게 잠잠하라고 명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셨는데, 그것은 그들이 영적 지도자로서 개인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하는 데 필요한 핵심 질문이었다. “너희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눅 8:25) 내 방식대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이 물으신 셈이다. "왜 너희 내면세계의 조종실은 질서정연하지 못한 것이냐?" 삶에 개인적으로 긴장과 압박이 가중될 때, 왜 우리는 삶의 조종실로 가는 대신 더 빨리 뛰고, 더 강력하게 저항하고, 더 많이 쌓고, 더 많은 정보를 모으고, 더 나은 전문가가 되려 하는 것일까? 우리 시대는 내면세계보다는 외적 영역의 온갖 소소한 데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내면세계만이 우리가 그 어떤 외부의 광풍이라도 헤치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데도 말이다.
성경 기자들은 조종실의 원칙을 믿었다. 그들은 내면세계를 잘 가꾸고 유지하는 일이 최우선임을 알았고 또 그렇게 가르쳤다. 따라서 그들이 이룩한 업적이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전수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기록한 것은 창조주로부터 받은 것으로, 그분은 우리를 내면세계로부터 외부 세계를 지향할 때 가장 잘 살 수 있도록 만드셨다. 스티븐 코비(Stephen Covey)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 (The 7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 김영사)에서 이것을 '내면으로부터 외부로 향하는 접근'(inside-out approach)이라 부른다.
잠언 기자는 내면세계의 원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그 무엇보다도 너는 네 마음을 지켜라.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잠 4:23).
*부름 받은 사람은 자신이 청지기임을 알고 있다
먼저, 요한의 반응은 청지기직 원리를 시발점으로 삼고 있다. 이 대화를 촉발한 자들은, 요한이 군중을 사로잡는 시대는 이제 끝났다는 소문을 듣고 그가 크게 동요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실상 요한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척 기뻐하는 것 같았다. 요한이 자신을 떠나 예수님에게로 가는 무리를 바라보며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저들은 절대 내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빌려주신 이들이었을 뿐입니다." 부름 받은 사람들은 절대 그들의 일이나 그 일로 함께한 사람들을 자신의 소유라 여기지 않는다.
이는 쫓기듯 살아가던 사울의 모습과 얼마나 다른가! 사울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권을 소유했으며 그 왕권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는 일단 무엇인가를 소유하면 그것을 꼭 쥐고 지켜야만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요한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무리를 사로잡았을 때, 요한은 그들을 그분께 돌려 드리는 것이 몹시 기쁠 뿐이었다.
요한의 청지기 의식은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원리를 제공해 준다. 그에게 군중에 해당한 바가 우리에게는 직업이나 재산, 타고난 재능, 영적은사, 건강 등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들은 우리 소유물인가 아니면 그것들을 우리에게 주신 분의 이름으로 관리할 대상인가? 바로 대답하지 말고 먼저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라. 쫓겨다니는 사람은 그러한 것들을 자신이 소유했다고 여기고, 부름 받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쫓겨다니는 사람은 그것들을 잃으면 곧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부름 받은 사람은 그렇게 되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다. 그의 내면세계는 여전히 그대로이거나 오히려 더욱 강해진다.
나는 브뤼셀의 다닐스 추기경(Cardinal Danneels)이 한 말을 좋아한다. 나는 기나긴 하루를 보내고 돌아오면 예배당에 가서 기도한다.
"오늘 할 일을 이제 마쳤습니다. 주님, 심각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이 교구가 저의 것입니까, 당신의 것입니까?" 하고 주님께 묻는다. 그러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고 주님이 말씀하신다. "당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나는 답한다. "그래 맞다. 내 것이다" 하고 주님이 말씀하신다. 그러면 나는 “주님, 이제 이 교구를 책임지고 지도하는 일은 당신 차례입니다. 저는 잠자리에 들렵니다" 하고 말한다.
*부름 받은 사람은 변함없는 헌신을 몸소 실천한다. 마지막으로, 요한은 부름 받은 사람으로서 자기 수중에 있는 무언가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들은 자녀들이 좀더 독립적인 삶을 살도록 결국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멘토는 적절한 시기에 수하생을 떠나보내야 함을 알고 있다.
요한은 그의 마음가짐이 어떤지 캐묻는 사람들에게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요 3:30)고 응답했다. 요한의 말은 계획된 떠나보냄의 원리를 보여 준다. 부름 받은 자는 자신이 청지기이며 자기가 누구인지 알 뿐만 아니라 목적의식이 투철하기 때문에,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 손을 놓아야 할 때를 미리 내다보면서 산다. 이 경우에는 그것이 군중, 일시적 명망, 예수의 영향권으로 떠나보내야 할 제자들 등이었다.
쫓겨다니는 사람은 요한처럼 말할 수 없다. 그는 계속해서 더 많은 주목을 받고, 더 많은 권력과 물질을 모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저 꼭 붙들고 있어야 한다. 놓을 수 없다. 그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스스로를 너무 많이 묶어 놓고 있다.
우리는 종종 어떤 조직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던 지도자에 대한 안타까운 소식을 듣는다. 은퇴할 때가 되었는데도 리더십을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지 않고 계속 붙들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면 리더십을 자기 아들이나 딸에게 물려주어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려 한다는 것이다.
*왜 광야에서였을까? 그것은 아마 너무 분주하고 시끄럽고 자기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도시에서는 쉽게 포착할 수 없는 것들을 광야에서는 듣고 깊이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때로 도시에서는 공적 생활의 날카로운 굉음에 밀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없다. 그리고 도시에서는 때때로 사람들이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 빌딩과 화려한 극장가, 웅장하기 그지없는 교회 건물에 둘러싸여 교만해진 나머지 하나님께 귀기울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요한을 광야로 이끌어 내시고 거기에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그를 광야로 데려오신 후 요한의 내면세계에 그의 시대에 대한 전혀 새로운 관점을 각인시켜 주셨다. 광야에서 요한은 종교와 선악,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기 세대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일, 즉 아주 특별한 과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특별한 민감성과 용기를 계발하게 되었다. 광야는 그의 내면세계가 만들어지는 현장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광야에서 요한에게 임했다. 하필이면 그렇게 이상한 곳에서 말씀하시다니. 광야에서 도대체 무엇을 배울 수 있겠는가? 나는 멀리 돌아서 가더라도 가급적이면 광야를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광야는 내게 고통과 고독, 고난을 의미한다. 누구라도 이러한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광야는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살기 힘든 곳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피할 수 없다. 우리가 고통 가운데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이기만 하면 위대한 교훈을 배울 수 있는 곳이 바로 광야라는 사실 말이다.
광야에서 우리는 메마름에 대해 배운다. 광야는 메마른 곳이기 때문이다. 요한은 광야의 메마름에 대처하는 법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그가 요단강에서 외칠 때 찾아왔던 사람들의 영적 고갈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음이 틀림없다.
광야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의지하는 법을 배운다. 히브리인들이 수세기 전에 깨달았던 것처럼, 광야에서는 자비로운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생명을 부지할 수 없다. 광야와 같은 고초를 겪어 본 사람만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맡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광야에는 달리 의지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한편 좀더 밝은 측면도 있다. 광야는 개개인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계획하고 준비할 수 있는 장소다. 그리고 때가 되면 요한처럼 그는 그 메마른 땅에서 새롭게 충전되어 메시지를 들고 나타난다. 그것은 사람들의 얄팍함과 위선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메시지다. 그는 인간 영혼의 깊은 밑바닥까지 뚫고 들어가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하여 그 시대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그리스도께 이끌어 준다.
*“내게 있는 것은 지식 없는 정보, 원칙 없는 의견, 신념 없는 본능이다.” 이는 「뉴요커」 (New Yorker)의 영화 평론가 데이비드 덴비(David Denby)가 젊은 시절의 자신을 성찰하면서 쓴 말이다. 이는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놀랄 만한 발견으로서 사물을 보는 방식을 재평가하라고 도전하는 소리다. 이는 바울이 다음 말씀을 기록할 때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이기도 하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롬 12:2).
바울은 우리가 갈 수 있는 두 가지 길을 분명히 알았다. 사고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주변의 지배 문화에 영향을 받아 그 모양으로 빚어질 것이다. 그러나 변화받은 사람(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롭게 된)은 사고하고 반추하고 삶과 실재의 의미에 대해 독자적 결론을 내리는 일에 부지런할 것이다.
바로 이런 모습을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낯선 상황에서 페르시아 왕후 자리에 오른 에스더는 유대 민족을 말살하려는 음모를 알게 된 그녀의 멘토 모르드개에게 책망을 받았다. 처음에 에스더가 이 문제를 들고 왕에게 직접 나아가라는 그의 권고에 반대했을 때 그는 이렇게 전갈을 보냈다. "왕후께서 궁궐에 계시다고 하여, 모든 유다 사람이 겪는 재난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때에, 왕후께서 입을 다물고 계시면, 유다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라도 도움을 얻어서, 마침내는 구원을 받고 살아날 것이지만, 왕후와 왕후의 집안은 멸망할 것입니다. 왕후께서는 이처럼 왕후의 자리에 오르신 것이 바로 이런일 때문인지를 누가 압니까?"(에 4:13-14).
'생각해 보시오, 에스더. 생각해 보란 말입니다!' 이것이 모르드개의 메시지였다. 그런데 한 번도 생각하는 법을 훈련받지 못했다면? 엘튼 트루블러드는 이렇게 썼다. “다음 세 가지 요소를 잘 계발하지 않는 한 생명력 있는 기독교란 불가능하다. 바로 내적으로는 헌신하는 삶, 외적으로는 섬기는 삶, 지적으로는 합리적인 삶이다.” 셋째 요소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가장 쉽게 무시해 버리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너무 세상적이며 복음에 거슬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딘 지성은 결국 내면세계를 무질서하게 만든다.…
올리버 웬델 홈즈(Oliver Wendell Holmes)는 이렇게 말했다. “행동하는 사람은 현재를 소유한다. 그러나 사고하는 사람은 미래를 장악한다. "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놀라운 능력으로서, 피조물을 발견하고 관찰하며 그 각 부분을 비교하고 대조해 보고, 창조주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그것들을 적절히 사용하게끔 해준다. 생각하는 사람은 묵은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가설을 분석해서 거짓으로부터 참을 가려낼 줄 안다. 생각하는 사람은 때로 오래된 진리를 새로운 언어와 형식으로 기술하고, 다른 사람들이 진리를 삶에 적용하도록 도와준다. 그들은 또한 대담한 결정을 내리고,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비전을 보도록 하며,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방법으로 장애를 극복해 낸다.
이것은 위대하고 명석한 사람들만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건전한 정신을 지닌 모든 사람의 과제다. 신체적인 면에서처럼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강할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몸이나 정신을 사용해야 할 책임을 면제해 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자신을 스펀지처럼 여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나님은 이 광대한 창조 세계 안에 인간이 발견하고 즐기며 창조주 그분의 성품을 깨달을 수 있는 것들을 숨겨 두셨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스펀지처럼 흡수할 수 있어야 한다. 잠언 25:2은 이렇게 말한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요, 일을 밝히 드러내는 것은 왕의 영광이다."
최초의 남자와 여자가 한 일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것들을 발견하고 밝히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써 그처럼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일부 상실하고 말았다. 그들은 이제 창조 세계 안에 있는 것을 계속 발견해 나가는 일보다는 적대적인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지를 더욱 걱정하게 되었다. 일의 성격이 갑자기 바뀐 것이다. 천국에서의 삶은 어떤 방식으로든 노동의 원형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그러한 발견의 원리와 특권은 부분적으로는 여전히 유효하다. 어떤 발견은 높은 산에서 금을 캐내는 것처럼 힘겨운 육체노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또 어떤 발견들은 식물계와 동물계와 인간세계 등에서 생명체의 활동을 관찰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리고 창조 세계에 대한 탐구의 많은 부분은 순전히 마음속에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묻혀있는 개념과 진리를 캐내어 그것들을 예술적이고 아름답고도 창의적으로 표현하게 된다.
생각한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마치 잘 단련되고 다듬어진 신체가 경주에서 잘 달릴 수 있듯이, 잘 훈련되고 온전히 형성된 지성이 가장 잘 생각할 수 있다. 최선의 사고는 모든 피조물을 통치하시는 왕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창조주를 아는 지식을 얻는데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위대한 사상과 예술 작품을 만든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들은 순전히 자기 권력의 확대를 위해서 혹은 하나님 없이도 세상은 잘 굴러간다는 전제하에 인간 중심적인 제도를 개발하기 위해서 사고하며 혁신적으로 일한다.
*러틀리지(베트남전에서 포로생활)가 평생 동안 무시해 왔던 내면세계에 중심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에게 보여 준 것은 바로 하트브레이크 수용소에서 겪은 고통이었다. 나는 그 중심을 가리켜 사람의 영(spirit)이라 부르고 싶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혼(soul)이라고도 부른다. 생리학적으로는 사람의 내면세계의 영적 중심부가 어디 있는지 가리킬 수 없지만 그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영원한 것으로서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가장 친밀하게 교통하는 지점이다. 영은 그 속성인 영원성을 결코 잃을 수 없지만, 하나님과의 사귐이 거의 단절된 무질서 상태에서 존재할 수는 있다. 그 무질서는 보통 내면세계의 다른 부분까지도 혼돈 상태에 빠뜨린다.
월리스 해밀턴(Wallace Hamilton)은 인간의 내면생활의 자연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는데 이는 내가 좋아하는 표현이다. “우리 각자 속에는 고삐를 풀고 달리고 싶은 야생마 한 떼가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중심부에 있는 삶의 질에 대해서 씨름하고 있다. 적어도 이것은 내면의 영적 활동의 의미에 대해서 기꺼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들과 아주 오랜 시간 대화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갖는 교제의 수준에 대해서 매우 불만족스러워하고 있다. “하나님께 가닿는다는 느낌이 통 안 들어요" 하고 말하는 것을 종종 듣게 된다.
영적 무질서는 종종 내적 평온함의 결여를 뜻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평온하다는 것이 사실상 그저 무감각이나 공허함에 불과할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기대에 결코 미치지 못한다고 느껴 불안함으로 괴로워한다. 공통된 문제는 영적 추진력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 적절히 일관성 있는 태도와 열망을 지니지 못하는 것이다.
*내면의 정원은 섬세한 장소라 잘 가꾸지 않으면 어느새 방치된 덤불로 뒤덮일 것이다. 하나님은 때로 난잡하게 어지러워진 정원은 거닐지 않으신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방치된 내면의 정원을 텅 비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워드 러틀리지가 하트브레이크 수용소에서 압박이 극도에 달했을 때 겪었던 고통이 바로 그것이었다. 철저한 고립, 잦은 구타, 악화된 건강상태 등이 그의 세계를 적대적 장소로 만들었다. 그에게는 자기를 지탱해 줄 힘을 얻을 만한 원천이 있었는가? 그가 시인한 바와 같이 그는 내면의 정원에 힘과 결의를 저장할 만한 기회들을 젊은 시절에 모두 날려 버렸다. “나는 너무 바쁘고 다른 일에 몰두한 나머지 일주일에 한두 시간이라도 정말로 중요한 것에 관해 생각하는 데 시간을 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그의 고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나마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얻은 미미한 자원을 붙잡고 그것을 계발했다. 그러자 갑자기 하나님이 실제로 다가오셔서 그의 존재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내면세계의 영적 차원에 질서를 바로잡는 것은 영적인 정원을 가꾸는 작업이다. 그것은 조심스럽게 영적인 터를 일구는 것이다. 정원사는 땅을 갈고, 잡초를 뽑아내고, 정원을 꾸밀 계획을 세우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비료를 주어, 그 열매로 추수를 맛본다. 이 모든 것은 많은 이들이 영적 훈련이라고 불러 온 것이다.
나는 수세기 전에 살았던 그리스도인 명상가 로렌스 수사(Brother Lawrence)의 말을 좋아하는데, 그는 예배 처소를 은유로 사용했다.
하나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 항상 교회에 머물 필요는 없다. 우리는 마음을 예배 처소로 삼고, 때로 거기로 물러가 하나님과 부드럽고 겸손하고 사랑스런 사귐을 나눌 수 있다. 누구나 하나님과 이런 친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어떤 이는 좀 더 많이, 어떤 이는 좀 더 적게… 그분은 우리의 능력을 아신다. 지금 시작해 보자. 그분은 오직 우리가 전심을 다해서 결단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용기를 내자! 우리 생은 짧으니.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오래전 사막 교부들이 영성 훈련을 하기 위해서는 조용한 환경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침묵, 고독 그리고 내적 평안(Fuge, terche, et quisset)을 서로 중요시했다고 말한다.
내면의 정원을 가꾸려면 침묵과 고독의 시간이 꼭 필요한데, 그런 시간을 방해하는 소음의 무서운 음모를 잘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은 우리 삶의 매순간을 문명의 소음으로 뒤덮으려고 음모를 꾸며 왔다. 그런 소음을 방치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압도하기 십상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통 큰소리로 말씀하지 않으신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엘리야가 깨달은 바와 같이 하나님은 정원에서 나직이 속삭이신다.
나는 라틴아메리카의 한 선교 본부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마침 라디오 방송국의 음향 스튜디오를 만드는 공사 중이었다. 인부들은 방음장치를 설치하여 거리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방송국에서 송출되는 방송과 녹음을 망치지 못하도록 온갖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외부 세계가 방해하는 소리를 차단하는 마음의 방음장치를 설치할 필요가 있다. 나는 캘커타의 마더 테레사가 쓴 다음 글을 좋아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소란하고 쉼이 없는 곳에서는 그분을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은 침묵의 친구이시다. 자연, 즉 나무와 꽃과 풀들이 침묵 가운데 어떻게 자라는지 보라. 해와 달과 별이 침묵 속에서 어떻게 운행하는지 보라....우리가 침묵 기도 속에서 더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외부의 삶에서 더 많이 베풀 수 있다. 사람들의 영혼을 만지기 위해서 우리는 침묵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말하는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말이 우리 내면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모두 쓸모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지 못하는 말은 어두움을 배가시킬 뿐이다.
*C. S. 루이스는 미국인 친구에게 편지를 쓰면서 성찰 훈련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모두 기도 시간에 무미건조한 순간들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반드시 나쁜 징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최선의 기도라고 느끼는 것이 실은 최악이 아닐지 가끔 의심해 본다. 즉, 우리가 느낀 즐거움이 실은 춤을 추거나 시를 낭송한 다음 느끼는 일종의 성취감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나님은 우리와 더불어 대화하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그분에게 일방적으로 말하기를 고집한다. 이 때문에 우리 기도가 때로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 조이(Joy)가 수년 전에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어느 날 아침 그녀는 하나님이 그녀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신다는 느낌에 사로잡힌 적이 있는데, 그것은 마치 어떤 의무를 소홀히 했을 때 계속 추궁당하는 것과도 같은 압박감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아침 늦게까지 그것이 무엇일까 하고 골똘히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가 걱정하기를 멈춘 바로 그 순간, 마치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또렷하게 응답이 들려왔다. 그것은 "나는 네가 어떤 것을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너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다"라는 메시지였다. 즉시 그녀의 마음은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 찼다. 하나님은 빈손을 보면 주시는 분이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두 손에 짐을 가득 들고 있는 사람은 선물을 받을 수 없다. 그 짐이 반드시 죄나 땅에 속한 염려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요란하게 그분을 예배하려는 노력일 수도 있다. 우리의 기도를 가장 자주 방해하는 것은 어떤 엄청난 혼란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일 경우가 많다. 즉, 기도가 끝난 후 해야 할 일이나 피하고 싶은 일과 같은 것 말이다.
*90년 전에 출간된 관상적 믿음에 관한 통찰을 담고 있는 한 소책자에서 브리지트 허먼(Bridget Herman)이라는 유럽의 한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이 썼다.
위대한 성인들의 생애를 읽다 보면 그들이 상당히 효율적으로 일한 동시에 여가를 충분히 누렸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게 된다. 그들은 서두른 적이 없었고, 일을 그다지 많이 하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아주 놀랄만하거나 대단히 중요한 일을 한 것도 아니었다. 또한 자신의 영향력에 대해서도 그다지 연연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늘 정곡을 찔렀는데, 그들 삶의 모든 면면이 그것을 말해 준다. 가장 단순한 행동조차도 뚜렷한 차별성이 있었고 예술가다운 정교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 이유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그들의 성인다움은 가장 사소한 행동조차 하나님께 의뢰하는 습관에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 안에 살았고,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의 동기에서 행동했다. 그들은 타인의 평판에 얽매이지 않는 만큼 자존심으로부터도 자유로웠다. 모든 것을 살피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상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 밖에 무엇이 더 필요했겠는가? 그들은 하나님을 소유했고 하나님 안에 있는 자신을 소유했다. 그래서 그 온유하고 조용한 사람들이 지닌 빼앗을 수 없는 위엄은 그토록 겸허한 인품으로 그토록 위대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이다.‘
*왜 기도하는 것이 어려운가
그렇게 수많은 이들이 기도 문제로 씨름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가능한 세 가지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자.
예배와 중보 기도가 부자연스러운 행위로 보이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는 본래 하나님과의 사귐을 갈망하도록 창조되었다. 그러나 죄의 결과 그러한 본래의 갈망이 둔감해져 버렸다. 죄로 인하여 자연스러운 행위가 부자연스러운 행위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죄가 인간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을 때 본래의 신체적 욕구들은 거의 감퇴되지 않은 반면 영적 차원이 가장 심하게 손상되었다. 우리의 식욕과 성욕 그리고 안전에 대한 본능적 집착은 본래 수준과 거의 비슷할 것이다. 죄로 물들기 전 인간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면, 하나님과의 사귐을 향한 열망이 오늘날 우리가 지닌 자연적이고도 생생한 욕망과 본능을 충족코자 하는 욕구만큼 강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강했던 영적 허기가 죄의 권세로 인해 형편없이 무디어져 버렸다. 그리하여 예배와 중보 기도가 몹시 어려운 일이 된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좋은 방식으로건 제대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의 자연적 본성에 거슬리는 일이며 우리 문화가 가르치는 삶의 방식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우리가 이런 문화에 얼마나 세뇌되어 있는지 깨닫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의 내면세계는 날마다 이 시대의 메시지로 온통 폭격을 당하고 있다. 그 메시지들은 영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오직 행동으로만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다고 은연중에 배워 왔다. 그런데 기도는 일종의 행동 부재로 보인다. 내면이 무질서한 사람에게는 그것으로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기도야말로 매우 중요한 실제적 활동이며 시공을 초월하여 실존하시는 하나님께 이르는 통로임을 믿기 전에는, 예배와 중보 기도의 습관을 결코 익힐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습관을 얻기 위해서는 기도가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의식적으로 극복해야 한다.
*헨리 나우웬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탁월하게 묘사해 준다.
기도는 우리의 모든 정신 활동에서 하나의 급진적 전환이라 할 수 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자기 자신과 근심거리, 집착과 자기만족으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이 새로워질 것이라는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여겼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행위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붙잡히기 직전에 하신 그 기도는, 그분의 뜻이 아버지의 뜻과 일치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성숙한 기도다. 많은 경우에 나는 기도의 결과를 염두에 두고 기도하곤 했다. 어떤 사람과 사건에 대해서 기도할 때 내가 그들(혹은 그 사건들)을 통제할 수 있으려면 결국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내 생각을 하나님 아버지께 강요하곤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하늘의 시각이 아니라 땅의 시각으로 그 사람과 사건을 보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무엇이 최선의 결과인지를 하나님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는 듯 기도하는 것이다.
토머스 켈리는 "주님, 당신이 저의 뜻이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기도야말로 온전한 기도라고 말한다. 아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기도는 그저 "아버지, 하늘의 눈으로 이 땅을 보게 해주십시오"라는 것이리라.
켈리는 또한 이렇게 썼다.
전적인 순종, 전적인 복종, 전적인 경청을 추구하는 삶은 놀랄 만큼 완전한 것이다. 그러한 삶은 빛나는 기쁨, 심오한 평화, 뿌리 깊은 겸손, 세상을 뒤흔드는 권능, 모든 것을 감싸는 사랑, 어린아이 같은 단순함을 그 특징으로 한다.
바로 이러한 생각이 나로 하여금 예배와 중보 기도의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렇다. 자연인에게는 기도가 무척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내 삶에 들어오셨으므로 이전에는 어색했던 것이 이제는 자연스러울 수 있으며, 우리는 그런 능력을 달라고 간구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 기도란 우리의 약함과 의존성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하지만 그것이 내 진실된 모습이며 그 사실을 포용할 때 나는 더욱 건강한 자아를 갖게 된다. 그리고 기도에 대한 응답이 항상 나의 기대와 일치하는 것이 아님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잘못된 기대에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능력이나 세심함의 부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죄성이 바로 그와 같다. 그것은 표면에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는 돌멩이와 자갈과 바위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영적 훈련에서 날마다 죄를 고백하는 일을 무시하는 사람은 누구나 곧 그 돌들에 압도당하고 말 것이다. 나는 왜 바울이 노년에 이르러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불렀는지 충분히 이해한다. 감옥에서 인생의 종말을 눈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그는 여전히 자갈과 돌멩이를 치우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 그리스도인을 만나 보면 그들의 삶에서 발견하는 여러 가지 죄 때문에 무척 낙심하게 된다는 말을 듣곤 하는데, 그때 나는 미소를 머금는다. 그들이 적어도 그 죄를 볼 수 있고 그에 대해 거부감을 느낀다는 사실은 그들이 실제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자칭 그리스도의 추종자라는 사람 중에는 이미 오래전에 자신의 죄성을 직시하는 눈을 잃어버린 자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주일 예배에 참석할 때에도 진정한 예배의 표지인, 하나님 앞에서 깨어지고 통회하는 경험 없이 교회를 떠나곤 한다. 그 결과 저급한 영성이 양산되는 것이다.
스탠리 존스는 영적 훈련에서 고백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건강에 해로운 특정한 정신적 • 감정적·도덕적·영적 태도가 있음을 알고 있다. 그것은 분노, 원망, 두려움, 걱정, 지배욕, 자기 집착, 죄책감, 성적 부도덕, 시기, 창조적 활동의 결여, 열등감, 사랑의 결핍 등이다. 이것들은 건강을 해치는 열두 사도다. 그래서 나는 기도 중에 그것들이 모습을 드러낼 때 그리스도 앞에 내어놓는 법을 배웠다. 언젠가 나는 가가와(Kagawa) 박사에게 "기도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는데, 그는 "기도는 자기를 내어놓는 일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도 그 대답에 동의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날마다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는 것과 모르는 것 모두를 주님께 내어놓는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모든 것'이란 아직 알 수 없는 장래와 장차 일어날 문제를 모두 포함한다. 그래서 나는 기도 중에 이 열두 가지 중 어떤 것이라도 떠오르면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배웠다. 사실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곧, 그것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께 내어놓고 “주님, 이것을 가져가 주소서" 하고 말씀드리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