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청도 관찰사 정공 묘갈명 병서(公淸道觀察使鄭公墓碣銘 幷序)
이민구(李敏求) 찬(撰)
호서 관찰사(湖西觀察使) 정공(鄭公) 휘(諱) 효성(孝成)은 나의 선친과 가장 막역(莫逆)한 친구였다. 선친께서는 과묵하고 차분하여 교유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정공이 친상(親喪)을 치르며 3년 동안 곡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는데, 선친께서 한 달에 두세 차례씩 들르셨다. 돌아오셔서는 반드시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기를 “효성스럽다. 효성스러워. 사람이 누군들 부모가 없으랴.”라고 하셨다.
대개 공의 선조(先祖) 공대공(恭戴公) 휘 척(陟)은 진양(晉陽) 출신으로, 벼슬이 수문전 태학사(修文殿太學士)에 이르렀다. 그 뒤로 아들 승지(承旨) 휘 성근(誠謹), 손자(孫子) 박사(博士) 휘 주신(舟臣), 증손(曾孫) 증(贈) 참판(參判) 휘 원린(元麟) 형제, 그리고 공에 이르기까지 4대가 모두 효성이 있어서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공이 별세한 뒤에 아들과 며느리도 의열(義烈)이 있어서 계속 정려를 받아 세워진 정려문이 즐비하였으니, 비록 지극한 성품은 하늘에서 부여받았지만, 또한 가법(家法)을 갈고 닦은 것은 옛 책 속에서도 사례를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공의 자는 술초(述初), 호는 휴휴자(休休子)이다. 선비(先妣) 남원 윤씨(南原尹氏)는 장사랑(將仕郞) 정원(正元)의 딸이다. 공을 임신한 지 9개월이 되었을 때, 참판공[參判公, 정원린(鄭元麟)]이 세상을 떠났다. 공이 태어나자 어머니 윤 부인이 공을 안고 가서 영연(靈筵)에 고하였는데, 그날 밤 꿈에 선친께서 나타나 이름을 지어 주셨다고 한다.
공은 어려서부터 침착하고 원대한 기상을 지녔으며, 성장해서는 선비들에게 존중받았다. 기축년(1589, 선조 22)에 성균관에 들어가고 침랑(寢郞)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조정에서 공의 재지(才智)를 들어 회덕 현감(懷德縣監), 함흥 판관(咸興判官), 호조 정랑(戶曹正郞)에 발탁하였다.
정미년(1607년 선조 40)에 이르러 삭녕 군수(朔寧郡守)가 되었다. 그해 겨울에 윤 부인께서 별세하였다. 공이 지극한 효성으로 상을 치러 세상에 알려졌으니, 그 일이 《삼강행실(三綱行實)》에 갖추어져 있다. 상을 마친 뒤에 형조 정랑(刑曹正郞),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을 거쳐 은진 현감(恩津縣監)이 되었는데, 임기가 찬 뒤에도 1년을 더 맡았다. 현의 창고를 가득 채우니, 도신(道臣)이 장계를 올리자 사농(司農 호조(戶曹))이 가져다가 나라의 경비에 보태고, 공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특진(特進)시켰다.
무오년(1618, 광해군 10)에 조정의 신하들이 광해군(光海君)의 지시를 따라 모후(母后)를 폐하자고 요청하였으나, 공은 목숨을 버릴 각오로 조정의 의론에 참여하지 않았다. 당시 공의 장남 참판군(參判君)이 내한(內翰)으로 있으면서 기휘(忌諱)에 저촉되어 전야(田野)로 쫓겨났다.
공이 6년 동안 명을 기다리며 대단히 위태롭고 치욕스러웠으나, 어떠한 기미도 말과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다. 광해군이 손위(遜位)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음식을 물리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옛 임금이 간사하고 흉악한 자들의 손에 잘못되었으므로, 성상(聖上) 인조(仁祖)께서 혼란을 바로잡고 옛 임금으로 하여금 천수를 다할 수 있도록 하시니, 진실로 성덕(盛德)의 일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계해반정(癸亥反正=인조반정) 이후 처음에 외직으로 나아가 충주 목사(忠州牧使)가 되었고, 내직으로 들어와 호조 참의(戶曹參議)가 되었다. 병인년(1626, 인조 4)에 강화 부윤(江華府尹)이 되었다. 이듬해 임금께서 강화도로 전란을 피하셨는데, 공이 상하(上下)의 요구에 대응하는 것이 주도면밀하고 여유가 있었다. 사태가 안정되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유수(留守)로 승진하였다.
무진년(1628년,인조 6)에 판결사(判決事)를 거쳐 청주 목사(淸州牧使)가 되었다가, 3년 뒤에 공청도 관찰사(公淸道觀察使)가 되고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다시 3년 뒤에 나주 목사(羅州牧使)가 되었다. 을해년(1635, 인조 13) 가을에 장남 참판군이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있다가 갑자기 병에 걸려 운명하니, 공이 매우 슬퍼하여 병이 심해져도 달라지지 않았다.
병자년(1636,인조 14) 겨울에 청나라 군사가 침입하자 공이 조정의 뜻을 따라 강화도에 들어갔다. 이듬해 정월에 강화도가 함락되고 공도 운명하였으니 향년 78세였다. 당시 뜨거운 불길이 집들을 모두 태웠는데, 공의 거처만 다행히 온전하였으니, 암암리에 도와주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손자 선흥(善興)이 상여를 받들어 광주(廣州)의 선영으로 와서 해좌(亥坐)의 등성이에 장사 지냈다. 두 아들의 공훈으로 추은(推恩)하여, 두 번 추증되어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이르렀다. 공은 지극한 행실이 순수하고 독실하여 세상에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선조(先祖)를 받드는 데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비바람이 불어도 사당에 들어가 절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각별히 마음을 다잡아 노력해야 하는 것들이 공에게 있어서는 애써 힘쓰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일이었다. 여러 고을과 변방을 맡아 다스리면서 아랫사람들을 엄격하게 대하였으니, 비록 때때로 우스갯소리를 해도 아전들이 모두 다리를 벌벌 떨며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속이거나 감추려는 마음을 감히 갖지 못하였다.
간사한 도적들을 다스리는 데 방책이 있었으므로 경내가 고요하였다. 그러나 손을 깨끗이 하고 법도를 지켜서 하나라도 부정한 일에 물드는 일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존모하였다. 처음 군에 부임하면 아전과 백성들이 혹 공의 정사에 불안감을 느끼기도 하였으나, 치도(治道)가 이루어지고 명령이 행해지는 데 이르러서는 안정되어 믿고 복종하였으며, 반드시 비를 세워 덕을 기록하였다.
더욱이 자신을 절제하고 쓸데없는 낭비를 줄였으니, 거두는 세금을 늘리지 않아도 관의 저장이 넘쳐나, 공의 뒤를 이어 임무를 맡은 사람이 넉넉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젊었을 때 과거 공부에 힘써서 일찍이 향시에 장원하였으나, 또한 그만두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경전(經傳)과《소학》과 주자(朱子)의 글을 즐겨 읽었고, 모든 행동은 예법을 준수하였다. 주량도 커서 몇 말의 술을 마셔도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때때로 친지들과 즐겁게 마셨는데, 겉과 속이 다름이 없이 활짝 트여 있었으니, 아,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공은 두 번 장가들었다. 첫 번째 부인 백씨(白氏)는 좌윤(左尹) 유검(惟儉)의 딸로,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했다. 두 번째 부인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군수 의필(義弼)의 딸로, 유순하여 부덕에 어긋나는 점이 없었다. 공이 편모(偏母)를 섬기면서 깊이 사랑하고 도리를 다하였는데 부인이 또 공을 도와 봉양하니, 세상 사람들이 “윤 부인은 아들이 하나뿐인데, 두 효자의 봉양을 받는다.”라고 하였다.
2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 백창(百昌)은 병조 참판(兵曹參判)이고, 차남 백형(百亨)은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이다. 딸은 통례(通禮) 김이경(金以鏡)에게 출가하였다. 참판 백창은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 공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선흥(善興)은 상의원 정(尙衣院正)이고, 차남은 선홍(善弘)이다. 딸은 부사(府使) 김진표(金震標)에게 출가하였다. 필선 백형은 판서(判書) 이시발(李時發) 공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을 두었는데, 봉사(奉事) 권천(權偳)에게 출가하였다. 통례 김이경은 세 아들을 두었으니, 희(禧)와 상(祥)과 기(祺)이다. 선흥의 두 아들은 어리고, 그 나머지 자손들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공에게는 서출(庶出)도 있었으니, 아들은 백숭(百崇)과 백륭(百隆)이고, 딸은 김두점(金斗漸)에게 출가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정씨는 대대로 효성 지극하였는데 / 鄭氏世孝
그 자손 번성하지 못했도다 / 其姓不繁
공이 안쓰럽게도 뱃속에 있었지만 / 公閔在腹
대를 이어 준 것은 하늘의 뜻이라네 / 迓續者天
공이 어머니를 모실 때 / 公侍其慈
그 용모 유순하였고 / 婉婉其容
공이 사당에 제사 드릴 때 / 公享于廟
풍성한 제수를 올렸네 / 列鼎以供
충성스러운 마음을 옮겨 나라 섬기니 / 移忠事國
확고하게 지키는 바 있어 / 有確其守
변방 지키고 고을 다스림에 / 藩鉞州符
선대를 드날리고 후대를 인도하였네 / 揚先導後
내가 그 문을 바라보매 / 我瞻其門
붉은 현판 진실로 아름다우니 / 朱扁載媺
지나가는 사람이 공경을 표하지 않는다면 / 過者不式
네 이마에 식은땀 흐르리라 / 爾顙有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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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정효성鄭孝成 墓碣銘 - 李敏求 撰
湖西觀察使鄭公諱孝成, 於吾先君契最厚莫逆。 先君簡穆, 罕交遊。 方鄭公居親喪, 三年哭不絶聲, 先君月再三過, 歸則必泫然曰: “孝哉孝哉! 人誰無父母” 蓋公之先恭戴公諱陟, 起晉陽, 位修文殿太學士。 傳子承旨諱誠謹, 孫博士諱舟臣, 曾孫贈參判諱元麟兄弟, 逮公四世, 竝以孝表閭, 而公歿後, 子若婦用義烈受旌相繼, 棹楔櫛比。 雖至性實根天品, 亦家法脩飭, 載籍所無云。 公字述初, 號休休子。 妣南原尹氏, 將仕郞正元女, 妊身九朔, 而參判公亡。 公旣生, 尹夫人奉以告靈筵, 其夜夢先公來命名。 公幼而凝遠, 長取重士類。 陞己丑上庠, 除寢郞, 不就。 朝廷擧才諝, 擢懷德縣監、咸興判官、戶曹正郞。 至丁未, 守朔寧郡。 其冬, 尹夫人下世。 公以鉅孝發聞, 事具《三綱行實》。 服闋, 歷刑曹正郞、司僕僉正, 監恩津縣, 及瓜, 又借一年。 公藏充牣, 道臣言狀, 司農取以佐經用, 特進秩通政。 戊午, 廷臣徇光海指請廢母后, 公守死不預庭論。 時公長督參判君, 以內翰觸忌諱, 放逐田野。 公胥命六歲, 危辱極矣, 而無幾微發於言貌。 及聞光海遜位, 却食涕泣曰: “舊君爲奸兇所誤, 聖上撥亂, 使舊君得終天年, 實盛德事也。” 公初出爲忠州, 入參議地部。 丙寅, 尹江華府。 其明年, 上避兵江都, 公所以上下責應, 周贍有裕。 事定, 加嘉善階, 晉號留守。 戊辰, 由判決事牧淸州。 越三年, 拜公淸道觀察使, 陞嘉義。 又三年, 牧羅州。 乙亥秋, 參判君按圻輔, 暴疾不起, 公哀傷之, 病谻不損。 丙子冬, 兵鋒內逼, 公遵朝旨入江都。 翌年正月, 闔島敗而公亦卒, 壽七十有八。 時烈焰燔廬舍俱盡, 獨公所處室幸全, 殆默護者存焉。 其孫善興, 奉喪就廣州先塋, 葬坐亥原。 推兩子從勳, 再贈至議政府左贊成。公至行純篤, 世無異言。 奉先磬其誠敬, 展廟不廢風雨, 人人所刻意自勵者, 在公不待勉而至焉。 歷典州藩, 臨下以嚴, 雖時嬉笑之言, 吏咸股慄, 毫欺髮隱, 無敢萌意。 緝治奸盜有方略, 境落謐如, 然潔手守法, 一介絶濡染, 人皆敬而慕之。 始居郡, 吏、民或不安其政, 及治成令行, 乃帖然信服, 必立碑紀德。 尤能制節省浮費, 卽豆區不增, 而官貯流溢, 承代者用之不竭。 少治擧子業, 嘗魁發解, 亦捨去不進取。 然喜讀經傳、《小學》、《朱子書》, 行身動遵禮法。 酒戶甚洪, 至數斗不亂。 時從親懿樂飮, 表裏軒豁, 嗟乎! 何可得也公凡再娶, 元媲白氏, 左尹惟儉之女, 無后。 繼妣南陽洪氏, 郡守義弼之女, 婉嫕無違德。 公旣事偏慈, 深愛盡倫, 而夫人又佐公爲養, 世以“尹夫人唯一子, 而有二孝子之奉”云。 擧二子一女: 長百昌, 兵曹參判: 次百亨, 侍講院弼善。 女適通禮金以鏡。 參判娶西平府院君韓公浚謙女, 生二子一女: 長善興, 尙衣院正: 次善弘。 女適府使金震標。 弼善娶判書李公時發女, 生女, 適奉事權偳。 通禮生三子: 禧, 祥, 祺。 善興二子, 幼。 其餘子姓不盡載。 公有庶出子百崇、百隆。 女適金斗漸。 銘曰:
鄭氏世孝, 其姓不繁。 公閔在腹, 迓續者天。 公侍其慈, 婉婉其容。 公享于廟, 列鼎以供。 移忠事國, 有確其守。 藩鉞州符, 揚先導後。
我瞻其門, 朱扁載媺。 過者不式, 爾顙有泚。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