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을 생각한다. 3/3
서울의 테헤란로, 테헤란의 서울스트리트
테헤란로의 역사는 50년 가까이 된다. 조선시대에는 길 이름도 없던 곳이었는데 1972년에야 서울시가 삼릉로(三陵路)라고 명명했다. 인근 선릉(성종과 정현왕후 묘)과 정릉(중종의 묘)의 봉분이 셋이어서 생긴 삼릉공원에서 이름을 따왔다. 테헤란로라는 명칭이 탄생한 것은 1977년 6월이다. 당시 이란 테헤란 시장이었던 골람레자 닉페이(Gholamreza Nikpay)가 서울을 방문하면서 구자춘 서울시장과 양 도시 간의 자매결연이 체결되었다. 이란과 한국은 외교수교를 기념하며 서로의 수도 이름을 수도의 도로에 붙이기로 하였다. 한국은 서울에 ‘테헤란로(Teheran-ro)’를, 이란은 테헤란에 ‘서울 거리(Seoul Street)’를 지정하기로 하였다. 참고로 닉페이 시장은 1969년부터 1977년까지 8년간 테헤란 시장을 지냈고 임기 만료 이후에는 팔라비 왕조 내각에서 건설부 장관으로 재임했다. 1979년 이란 혁명으로 루홀라 호메이니가 직접 인민재판을 열고 총살형을 선고하여 광장에서 팔라비 왕조 요인들과 함께 공개처형되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란의 테헤란로라고 명명하였을까? 당시 이란은 이슬람권 국가이고, 한국과 큰 교류가 없어 보일 수 있지만, 1970년대 당시 이란은 친미적 팔라비 왕조의 세속 국가였고, 한국과도 경제, 외교적으로 활발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특히 원유와 건설 분야에서 협력이 많아서 양국은 미래를 함께 하자는 의미로 상징적인 길 이름을 교환하게 되었다. 1970년대 중반, 한국은 중동 건설 붐을 통해 경제 도약을 꿈꾸고 있었고, 당시 산유국이었던 이란은 한국의 중요한 경제 파트너였다. 당시 이란은 석유 자원으로 급성장하며 중동의 부강한 나라로 부상 중이었다. 한국은 아직 개발도상국에 가까운 단계였지만, 양국은 전략적 협력 관계를 다지기 위해 이러한 상호 도시 명명이란 ‘상징적인 교류’를 선택하였다. 우리나라의 중동 진출이 활발하던 때에 이란과의 우호를 증진한다는 의미에서 이란의 수도 테헤란의 명칭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테헤란로(Teheran-ro)는 서울 강남구의 주요 도로로,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비즈니스 거리 중 하나이다. 길이 3.7㎞, 너비 40m. 강남구를 동서로 연결하는 주요 간선도로인데 지금의 테헤란로는 한국 경제의 심장부로 불리고 있다. 카카오, 삼성 SDS, NHN, 쿠팡, 네이버 클라우드 같은 IT. 스타트업, 금융 기업 본사들이 이 도로를 따라 늘어져 있다.
도로명 교환은 한-이란 관계가 가장 좋았던 팔라비 왕조 시대의 유산이지만 이란 혁명 이후 이란에서는 왕조 시절의 모든 것을 부정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울 거리'의 이름을 유지하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테헤란로'에 대해 '팔라비 왕조 시기 맺은 협약이니 무효'라는 식의 지적을 한 적은 없다.
서울에서 테헤란로 지정한것과 마찬가지로 이란에서도 테헤란 북부에 '서울로(Seoul Street)'를 조성하였다. 초고층 업무 지구는 아니지만, 도로 주변에는 이란의 굵직한 국가 시설들이 자리 잡고 있다. 수교 40주년을 기념으로 2003년에 두 도시의 우호를 기념하며 서울공원(Seoul Park)도 조성하였다. 서울로는 테헤란 북부의 에빈(Evin) 지구와 셰이크 바하이(Sheikh Bahaei) 광장 인근을 지나는 도로로, 길이는 약 3.8km, 왕복 4~6차선 규모로 현지에서도 꽤 널찍한 간선도로에 속한다고 한다.[2026.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