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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17 - 남북조 시대 북조의 북위와 북주 그리고 남조의 송,제,양,진!
남북조 시대는 크게는 위진남북조 시대에 속하는데..... 동진이 끝난 뒤의 시대로 북조는
북위(北魏)가 건국된 386년이나 또는 화북을 통일한 439년 부터 시작되며 남조는 유유
의 송나라가 동진의 마지막 황제 공제 사마덕문에게 선양을 받은 420년 부터 시작됩니다.
탁발씨는 시베리아땅에서 사냥과 목축으로 살다가 북흉노가 유럽으로 이주하니 이후
남하해 대막남북 옛 흉노땅으로 내려왔는데..... 진(西晉)나라 회제때 병주자사
유곤이 흉노족 철불씨를 칠 때 병력지원을 한 공로로 추장 의로는 대공(代公)이
되고 314년에는 대왕(代王)에 올라 작은 왕국을 세우는데 철불씨와는 원수가 됩니다.
376 탁발십익건왕때 철불씨는 저족이 세운 전진(前秦)에 병력을 지원해 탁발씨를 공격해
대나라를 멸말시켰으니 손자 탁발규는 어머니의 친정인 흉노 하란부(어머니는
공주였음)로 도망쳐 목숨을 부지하는데 그후 비수대전에서 전진(前秦) 의 백만대군
이 동진(東晋) 군에 패해 북방이 혼란에 빠지자 옛 부하들을 불러 모아 대국을 재건합니다.
그러고는 398년에 남쪽 중구 땅인 평성(대동)으로 천도하고는 국력을 길러 철불씨
유위진을 공격해 멸망시킨후 삼합피(산서성 양고)에서 모용수가 병으로
출진하지 못한 점을 노려 당시 북방의 최강자였던 후연(後燕)을 대파한후
모용수가 죽자 중산을 차지했으며 서쪽으로 대하(大夏)를 치고 유연을 격파합니다.
탁발씨의 북위(北魏)는 그후 목숨만 남아있던 풍씨의 북연과 북량까지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하고는 내친김에 남조를 정벌하려고 했으나.... 양(梁) 나라의
명장 위예(韋叡)에게 종리(鐘離)에서 대패했고, 그 뒤에 육진의 난
(六鎭之亂), 진경지(陳慶之)의 북벌 등이 벌어지며 통일의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이후 탁발씨의 북위는 동위와 서위로 분열하면서 왕조가 바뀌었고 동위는 북제, 서위는 북주
로 바뀌는데 고씨의 북제는 처음에는 강성했으나 곡률광, 고장공이라는 뛰어난 명장
들이 황제에게 죽으면서 쇠퇴했으며 반면 우문씨의 북주는 점점 강성해졌으니 두
나라의 강을 사이에 둔 대치 지역에서 처음에는 겨울에 북주가 북제를 막으려고 얼음
을 깨서 도강을 막으려고 했는데..... 나중에는 북제가 북주를 막으려고 얼음을 깼다고 합니다.
끝내 북제를 멸망시킨 북주의 우문씨 무제는 중원 통일을 꿈꾸었으나.... 급서하자
황제의 장인이자 북주의 대장군이었던 양견은 권력을 장악한 뒤, 섭정을 시작
했는데 우문씨 선제(宣帝)가 매우 어리석어 난폭한 짓만 하다가 죽게 되자
북주 정제에게 선양(?)을 받은 뒤에 수나라를 건국하니 바로 수(隋) 문제 입니다.
수 문제는 즉위한지 8년째인 588년 10월에 한금호(韓擒虎), 하약필(賀若弼) 등
의 명장들에게 52만 대군을 맡겨 여덟 갈래로 군사를 나누어 남조의
진(陳)을 공격하였으니 진의 수도 건강(建康)은 순식간에 함락되고, 우물에
숨어있던 황제 진숙보(陳叔寶)가 사로잡히면서 진(陳)나라는 완전히 멸망합니다.
남북조 시대의 특징으로는 신의가 땅에 떨어지고 왕은 짐승의 마음이라 한(漢)
족인 남조의 유송과 제나라는 권력을 두고 유혈극이 낭자했는데......
의외로 오랑캐라는 선비족 탁발씨에서 출발한 북위는 산대적으로 보면
조금 덜했다고 여겨지는데 그래도 삼무일종법난 가운데 두 가지가 벌어집니다.
또한 동진 시대 정치가 불안정해짐에 따라 권신의 선양(宣揚 ?) 풍조를 방지할
목적으로 한(漢)으로 부터 선양을 받은 위(魏) 정통론 대신에 촉한정통론
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물론 본격적으로 촉한이 정통으로 대두되는
시기는 이후 한참이나 지난 후대에 성리학이 정립되는 남송대 이후라고 봅니다.
남북조 내내 남조는 북조에 대해 열세에 있었는데, 한나라 시절에는 강남에서 개간이 된
지역이 장강 유역이었으니 그 남쪽은 인구도 적었으며 땅이 습하고 더워서 열대성
전염병이 창궐하는 등 좋지않은 땅이었고 또 한나라 시절에는 개발이 적어서 벼의
품종이나 농법 등의 벼농사 기술도 덜 발달했으니.... 강남의 농업 생산력도 낮았습니다.
그래서 남조가 강남 지역을 본격적으로 개발할 동안에 화북 지역은 전연이 245만호,
북제가 303만 호, 북위가 500만호를 이룬데 비해 강남 지역은 남북조시대
최강국인 송이 91만호, 진은 50만호를 겨우 넘길 정도로 인구 차이가 현격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강북의 경제력은 후한말 군웅할거, 팔왕의 난, 영가의 난, 오호십육국
시대와 같은 전란으로 황폐화되거나 기후 변화와 섬서, 산서 일대 장기간에 걸친 건조화
로 인해 환경파괴가 일어나 정체되어간데 비해 강남에선 남조가 개발을 본격적으로
해서 땅에 물기를 빼니 벼농사를 짓기 최적화된 땅에 더워서 2모작, 3모작을 하기 시작합니다.
2모작이 보편화됨에 따라 강남의 경제력을 크게 발전시킨 원동력이 되었고 벼농사의 발달로
생산력이 역전되기 시작했으니 이때부터 강남의 경제력이 커져서 당과 북송 대에는 강남
지역의 발전으로 강북의 경제력과 비슷하게 되었고 정강의 변이 터지면서 화북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뛰어난 상업 기술을 전파하면서 남송(南宋)시대 때 강남이 강북을 압도하게 됩니다.
초기에 강남 열세의 또 다른 원인은 중앙정부가 지방을 통제하지 못했으니 인구에서도
열세인데 행정에서도 열세라 수도에서 멀수록 중앙의 지배력이 닿지 않았는데
토착 호족의 영향, 그리고 화북 출신 귀족들과 토착 세력간에 반목으로 조정이
안정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수 있으며 전대미문의 대혼란과 군벌의 난립으로
현실정치에서 유교는 크게 쇠퇴하고 상대적으로 도교, 불교가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 영향으로 문화 예술의 발전이 눈부셔서 북조 국가들을 오랑캐라고 무시했지만
그럼에도 남조에서는 암군이 쏟아져 나왔으니 하루도 왕조가 편할 날이
없을 정도로 자기들끼리 죽자살자 싸웠는데... 가끔 명군이 나타나 평안한 때가
있기도 했고 육조시대 마지막 국가인 진(陳)나라는 정상적인 국가라 여겨집니다.
남조는 북방 이민족에게 망하지 않고 사직을 지켜냈으며 일방적인 열위에만 있지
는 않고 몇차례 큰 공세를 퍼부은 적도 있었으며 초기에는 북방 오호들이
16개 국가로 명멸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는데 자치통감
에서는 위나라 위주로 기재하다가 뒤에는 동진-유송-제-양-진으로 기록을 합니다.
서양에서도 육조시대 라는 명칭이 성행했던 것이야 말로 남조 정권이야말로 중국의 정통 왕조라는
인식이 이전부터 있었음을 보여주는데 조르주 뒤비에의 세계지도에서 나타나는 이 시기의
중국사 지도에서는 남조를 중국(China) 이라고 보는데, 북위에서 호한체제(胡漢體制)가 성립
된후 남조의 폐단을 억제하기 위해 과거제 도입이나 귀족층 관롱집단의 억제를 시행하기도 합니다.
남조는 대체적으로는 열세로 수비위주 였는데, 송·위 전쟁기에 북조의 북위가 자만
하고 치밀한 준비 없이 무턱대고 강남으로 대군을 남진시켰다가 패배하기도
했으니 이런 점에서는 남조가 늘 북조에게 열위에 있지만은 않았으며..... 또
북방과 중원의 백성들도 살육과 약탈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황족 다툼이나 파벌 다툼으로 남조를 한심하게 볼 수는 있겠지만 조금난 기분이
나쁘면 관료의 목을 치거나 배신을 밥먹듯 하며 이합집산이 잦았던 화북 왕조
들의 형편이 남조보다 늘 나았던 건 아니며 제도나 문물은 북조도 남조의 영향
을 받았으니.... 통일은 북위를 이어받은 북주 그리고 수나라가 이루게 되지만,
수나라가 정작 많이 참고한 관료제는 북위나 북주 보다는 남조의 제도로 봅니다?
전진이 놀라운 융성을 자랑했지만 잠깐이었고 화북 일대는 다시 후진과 후연이 들어
서는데 남조의 전신이라고 할수있는 서진(西晉) 정권이 매우 실망스러운 형태로
붕괴했고 이후 중국은 마땅한 정통 통일왕조 없이 혼란의 상태에 접어들었지만
그래도 동진이 과거 통일 왕조의 저력을 이어받았던 것이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갈씨 석륵과 석호의 후조는 가장 강성할 때도 회수 일대를 지키는 옛 서진 군단의 후예
라고 볼수 있는 유민 군사 집단에게 막혀서 회수 이남으론 손을 뻗지 못했으며,
적어도 석륵 이상은 될 저족 부견의 전진(前秦)에게 남조의 동진이 밀릴 때도 영토
를 호락호락 내줬던 건 아니었으니 남북조의 대치는 꽤 오랜 기간을 두고 이뤄졌습니다.
북방을 통일한 북위는 결국 북제와 북주로 갈라져 한동안 북방 유목민들에게도
일시 수세였던 기간에도 남조의 양나라는 번영을 자랑했으니 남북조의
대치 상황이 완전히 확고하게 북강 남약으로 굳어지는 건 북주가
북제를 멸한 시기 이후이지만 이때는 이미 남북조가 거의 끝나갈 시점입니다.
중국에서는 "중화 문명의 전성기" 를 꼽으라고 하면 남북조시대 이전의 한나라 보다도
오히려 남북조시대 직후의 당나라를 선택하는 여론이 조금 더 우세하니, 중국이
한나라 시기까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가 오호의 침입 이후에는 정체되었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이민족들이 혼합된 당나라를 오히려 더 발전한 시기로 봅니다.
한사군에다가 위나라와 연나라에 의해 고구려 수도 환도성(국내성)이 2번이나 함락되어 고구려왕
이 도주하고 고구려인들이 대거 중국땅으로 잡혀가는등 중국 세력에 시달리던 한반도에서는
장수왕이 즉위한 뒤 413년에 동진이 망하고, 북위가 화북을 통일했으니 장수왕과 문자명왕,
안장왕, 안원왕은 남북조 국가 모두에 조공하며 고구려왕 책봉을 받는등 양팔 외교를 이어갑니다.
고구려는 이런 북방의 안정을 토대로 나제 동맹을 효과적으로 견제하였지만 안장왕, 안원왕 대에
가면서 왕위 분쟁이 본격화해 점차 국력이 쇠퇴하며 말기로 가면 백제의 성왕과 신라의 진흥왕
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니 온달이 땅을 되찾으려고 했지만 실패했으며 또 554년 성왕을 전사시킨
관산성전투후 신라는 전성기를 누리니 한국의 삼국시대는 위진남북조시대가 배경으로 등장합니다.
[1] 북조 : 북위 - 서위와 동위 - 북주와 북제
1. 북위 :
오호십육국시대에 선비족 탁발씨가 세운 왕조로 선비족은 모용씨 단석괴 이후 후한
과 서진을 공격하였고 혼란을 틈타 남진해 한(조) 나라를 세웠는데 북위는
후기에 등장하여 화북을 통일해 남북조시대를 형성하고 수, 당 제국의 바탕
을 이루었으며...... 수도는 다퉁(대동)이었다가 효문제 때 낙양으로 바뀌게 됩니다.
훗날 거란의 요, 여진의 금과 만주의 청, 몽골의 원와 같은 '정복 왕조' 국가들이 자기민족
고유의 복장을 유지하며 고유 문자의 제정이나 이원적인 통치 조직의 형성등을
통해 지배 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반면에 북위는 효문제 시절
성족상정을 실시해 선비족의 성씨를 중국식으로 개칭하고 중국 문화를 받아 들입니다.
북제와 북주 시절에는 이 조치를 다시 되돌리고 한인 귀족들에게 선비의 성씨
를 하사하기도 했으나 선비족의 한화(漢化)는 중단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니 수, 당의 지배 계급인 관롱 집단을 한화된 선비족으로
보기도 하는데 그러나, 호(胡) · 한(漢)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고 봅니다.
당대의 국호는 '위(魏)' 혹은 '대위(大魏)' 였고 주변 나라에서는 “타브가치” 라고 불렀으며
북위라는 표현은 이전 시기 전국시대의 위나 삼국시대의 위와 같은 여타 '위나라'
들과 구분하기 위해 역사가들이 붙인 표기 방식이니 당대를 바탕으로 한 소설,
사극에서 '북위' 로 자칭하는 표현이 등장한다면 그것은 “고조선” 처럼 잘못된 것 입니다.
선비족의 한 갈래인 탁발선비(拓跋鮮卑) 는 315년에 서진 정권에게 하사받았던 기존의 국호인 '대(代)'
를 386년에 탁발규가 '위(魏)' 로 바꾸고 칭제건원했으며 선비족 며용시 후연(後燕)의 황제
모용수가 탁발선비의 성장에 위협을 느끼고 쳐들어왔지만 도리어 395년 참합피 전투에서 격파
했으며 이를 계기로 힘의 균형이 역전되기 시작해 모용수 사후 397년 후연의 수도 중산을 점령합니다.
3대 황제 태무제 시기에 북하, 북연과 북량을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했는데 이때 한족
(漢族) 관료로서 북위 조정에 몸담고 있던 최호의 '국사 필화(筆禍) 사건' 이 터져
최씨 일가 및 그와 관련된 귀족 세력들이 대거 처형 및 숙청되었으며 그후 북위는
남조와는 달리 황제권이 귀족과 대등하거나 좀 더 우위에 있는 경향이 자리잡게 됩니다.
북위는 고구려와 우호관게였으니 동방 지역 패자의 위치를 인정해 고구려 태왕
에게 정동장군(征東將軍)이란 고위 관직을 하사했으며 또한 고구려 사신을
남조 사신 다음으로 대하였는데 489년(장수왕 77년, 북위 효문제 19년) 에는
남조 사신과 고구려 사신을 동급으로 대해 남조 사신이 크게 항의한 바 있습니다.
북위에서는 황태자로 책봉된 왕자의 생모를 처형시키는 자귀모사(子貴母死) 제도가 있었다고
하니 이는 훗날 외척의 세도를 막기 위한 처사였다고 하며 북위 효문제의 유언 때문인지
다음 황제인 8대 선무제때 자귀모사 제도는 시대에 뒤쳐지는 제도라면서 철폐되었다고 합니다.
초대 황제였던 도무제 탁발규는 자귀모사(子貴母死) 라는 명분하에 태자였던 탁발사의
어머니를 처형하니 어미를 잃은 탁발사가 밤새 대성통곡을 하자 도무제는 태자가
나약하다며 오히려 죽이려 드니 탁발사가 밤에 몰래 황궁을 빠져나가 잠적해버리자
도무제는 아들 중에 하란부 출신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탁발소를 왕위에 앉히려 합니다.
자기 어머니도 죽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한 탁발소는 급히 외갓집인 하란부로 달려가 이를 알려 하란부의
군사를 모았고 새벽에 몰래 황궁으로 쳐들어가 도무제를 죽였으니 북위 창업 군주가 자귀모사 제도로
인해 외척도 아닌 자기 자식에게 죽은 것이니 탁발소는 어머니도 살리고 자신도 제위에 오르려 했습니다.
그때 잠적했던 폐태자 탁발사가 외척의 군대를 이끌고 대역죄인 소탕을 명분으로 나타나 하란부 와
탁발소 일당을 쓸어버리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니 2대 황제 명원제인데 명원제는 하란부의 쿠데타
사건을 통해 외척의 위험성을 깨달아 자기 어머니를 죽인 자귀모사 제도를 오히려 더 강화시키고
공고히 다져갔으니 8대 황제 선무제가 없앨 때까지 자귀모사 제도는 중단없이 실행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북위는 남조의 역사서인 남제서 백제전에 백제를 484년, 488년 및 490년에 세차례나 침공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왜 침공했는지, 육로로 침공했다면 왜 고구려가 길을 열어줬는지 의문이고, 기마 부대로
편성된 유목민 군대가 해상으로도 가기는 어려우니 중국 해안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보지만 당사자인
위서(魏書) 에는 단 한줄도 기록이 없으니 허위인지 의문인데.... 양이 많은지라 따로 글을 쓰기로 합니다?
5세기 말 효문제 시기에 적극적인 한자(漢字) 사용 정책을 추진했는데 수도를 대동에서
낙양(洛陽) 으로 천도하고 호성(胡姓)을 중국식인 한성(漢姓)으로 고치고
호속(胡俗) 과 호어(胡語)를 금지했으며 귀족들이 같은 계급과만 결혼하게 하는
성족분정(姓族分定) 민족 고유의 제천의식을 금지하고 관제를 중국식으로 고칩니다.
효문제가 한화(漢化) 정책으로 인해 권력에서 소외된 비(非) 한화 선비족의 불만이 누적되어 523년
북위 멸망의 원인인 육진의 난이 발생하는데 6진(六鎭)이란 북방의 유목민족인 유연(柔然)을 방어
하기 위해 낙양 천도 이전의 원래 수도인 평성(平成, 대동시) 부근에 설치된 군사 도시를 말합니다.
본디 낙양 천도 이전의 6진은 수도 방어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만큼 귀족 중에서도 최상급의 엘리트들이
복무했으며 주둔군도 후한 보수를 받았지만 수도가 낙양으로 천도 된후 소수의 선비족이 한족(漢族)
에게 동화된 반면, 군(軍)에서는 고유의 선비족이 강하게 남아 있어 양대 민족이 서로 이질감을 느낍니다.
새로운 수도 낙양으로 이주한 귀족에게는 중앙 권력과 문벌귀족으로의 진입등 온갖 혜택이 돌아간 반면
군, 특히 이전까지 후한 대접을 받던 6진의 주둔군은 날이 갈수록 처우가 열악해지는 것을 느끼며
불만이 커졌으니 이와같은 군인계층의 분노가 조선의 임오군란 처럼 마침내 대형반란으로 번지게 됩니다.
“육진의 난”은 선비족 출신의 무장 이주영(爾朱榮)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그는 권력을 잡은
이후 궁중 암투로 인해 암살당했고, 그의 휘하 장수들이 이합집산을 벌이며 북위의
운명을 놓고 싸우게 되니 휘하에 고환(高歡), 우문태(宇文泰), 후경(侯景) 등이 있었습니다.
2. 서위와 동위
북위에서 일어난 반란인 “육진의 난”을 진압해 실세가 된 이주영은 530년 궁중 암투로 북위
효장제에게 암살당하니 이에 조카 이주조(爾朱兆)가 복수하기 위해 군을 일으켜 효장제를
살해한 뒤 장광왕 탁발씨 원엽(元曄)을 옹립했지만 그러나 방계로 정통성이 낮았던 원엽
은 531년 이주세륭(爾朱世隆)에 의해 폐위되었고, 절민제(節閔帝) 원공(元恭)이 옹립됩니다.
이에 반발한 하북 선비족 명족들이 이주씨에 대한 반항운동을 시작했고, 과거 휘하 장수였던 고환과 연계
하여 탁발씨 원랑(元朗)을 추대하며 연합정권을 수립해 532년 업(鄴)을 점령하니 이주조는 토벌군을
보냈으나 한릉산 전투에서 대패한후 낙양마저 함락당하였고 이주씨는 소멸되니 낙양에 입성한 고환은
이주씨가 세웠던 절민제(전폐제)와 과거 옹립하였던 원랑을 함께 폐위시키고, 새로 효무제를 옹립합니다.
고환이 진양에서 마음대로 북위 조정을 주물자 효무제는 모욕을 참지 못하고 낙양에서 탈출해 장안으로
도망가서 우문태(宇文泰)에게 몸을 의탁하니, 고환은 탁발씨 황족 원선견(元善見)을 추대하면서 화북
지역에는 효무제를 받아들인 우문태 세력과 효정제 원선견을 옹립한 고환세력이 동서로 대치하게 됩니다.
북위는 고환의 동위(東魏) 와 우문태의 서위(西魏)로 분열했으니 고환은 수도를 낙양에서 동쪽 업(鄴)으로
옮겼고, 옛 북위의 수도였던 낙양은 동서 양국의 최전선 지대로 바뀌며 잿더미가 되었으며 동위와 서위
는 여전히 탁발씨인 원(元)씨들이 황제였으나 둘 다 고환과 우문태의 꼭두각시 허수아비 황제들이었습니다.
결국 고환의 아들 고양이 효정제를 폐위하여 황제에 오르면서 동위는 북제가 되고 낙양에 입성한 고환은
이주씨가 세웠던 절민제와 과거 옹립하였던 원랑을 함께 폐위시키고는 새로 효무제를 옹립시킵니다.
549년 고징(高澄)은 제왕(齊王)에 봉해지며 사실상 북제(北齊)를 열게되지만 그러나 고징은 노비였던
난경(蘭京)에게 살해되고, 고환의 차남인 고양(高洋)이 제왕을 물려받게 되었으며 550년 고양은
원씨 효정제로 부터 선양을 받으며 북제를 건국하였으니.... 동위는 16년 만에 멸망하게 된 것 입니다.
서위에서는 우문태가 화주에서 모든 정사를 휘둘렀으니 535년, 도망온 효무제와 사이가 틀어지자
효무제를 독살하고 새로 문제(文帝)를 옹립하니 서위가 건국되었는데 556년 우문태가
죽자 아들 우문각(宇文覺)이 후계자가 되었지만 나이가 어리니 실권은 사촌인 우문호
(宇文護)가 가지고 있었으며 556년 우문호에 의해 공제(恭帝)가 폐위되고 우문각에게 선양합니다.
우문각은 효민제로 즉위해 북주(北周)가 건국되니 서위 정권은 31년만에 멸망하는데
이후 동쪽 동위에서 바뀐 북제와 싸워서 북주가 승리해 화북을 통일했으니 북주
(北周) 는 이제 남조의 진나라(陳)와 대립하다가.... 북주의 정제를 폐위한 양견이
수나라를 세우고 진나라를 병합하면서 서진 멸망 이래로 분열된 남북을 통일합니다.
3. 북제
동위의 고환은 원씨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며 정사를 휘두르다가 효무제가 장안으로 도망치자
새로 세운 효정제 원선견에게는 조심해서 공경했으니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아뢰고, 권력을
독점하지 않았으며 연회에서 부복하고 축수하며 황제 원선견이 법회를 열고 수레를 타고 향불
을 피우면서 가면 고환은 향로를 받쳐들고 도보로 뒤를 따르니 고환의 부하들 역시 공손했습니다.
하지만 547년에 고환이 죽고 뒤를 이은 장남 고징은 오만하여 연회에서 황제에게 술을 따르는
것도 군신간의 예의가 없었으니 화가 난 원선견은 '예로부터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었는데
짐이 어찌 이렇게 삶을 도모한단 말인가!' 라고 말하니 짐? 짐은 무슨 놈의 개대가리 같은
짐이야! 개나 줘버릴 짐 같으니! 라는 치욕적인 말을 들었으며 고징이 황문랑 최수서
에게 주먹으로 세차례나 구타를 하도록 명해 당했으나 금과 비단을 내려 사과해야 했습니다.
물론 원선견이 바보는 아니라서 한편으로는 몰래 고징을 죽이려 했지만 세력이 부족하여 결국 발각
되었으니 이에 고징이 군대를 이끌고 입궁하면서 폐하께서 어찌하여 반역을 생각하십니까? 라고
따지자 원선견은 정색을 하며 '예로부터 신하가 군주를 배반한다는 말은 있으나, 군주가 신하를
배반한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자신이 반역을 꾀하면서 어찌 짐을 책망하는가?' 라 꾸짖었습니다.
이에 고징은 탁자에서 내려와 머리를 조아리며 대성통곡하면서 사죄하였는데.... 그러나 사흘후,
원선견은 고징에 의해 함장당에 연금되었으며 원선견은 갇혀 있다보니 바람 좀 쐬려고
가끔씩 말을 탔는데 고징은 원선견이 효무제 처럼 달아날까봐 겁이 나서 감시를 당했습니다.
때마침 고징이 음식 나르는 노비 난경(蘭京)에게 암살당하자 원선견은 기회가 왔다고 보았지만
고징의 동생 고양이 진압군을 지휘해 뒷수습을 말끔히 하고, 권력을 재빨리 장악하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으니 원선견은 결국 고양에게 선양을 해서 목숨이라도 건지려고
했고 중산왕으로 강등되지만 끝내 고양에게 짐독으로 살해당했고 업성 북쪽에 매장
되었으나 얼마후 고양이 원선견의 무덤을 파헤쳐 관을 업성을 흐르는 장수에 던져 버립니다.
이런 혼란속에 고징 시절 하남태수였던 후경이 548년에 배신하여 하남의 영지를 가지고, 남조 양나라
소연에게 귀순한 사건이 발생하자 고징은 모용소종을 파견하여 후경군 및 양나라군과 싸워 격파
하고 하남을 되찾자 패배한 후경은 양나라에 투항했으나 이후 양나라가 동위와 수교를 맺자 위기에
몰린 후경은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으니 양무제 말년도 피로 얼룩지며 후경이 살해된 뒤에도
북제가 개입하니 이에 반발한 진패선이 친북제파들을 죽이고 양나라를 이어 진(陳)나라를 세웁니다.
북제의 초대 황제 문선제 고양은 과단성과 능력이 있어 유능한 신하들에게 나라를 맡겨
안정시켰는데 고양은 정신이 멀쩡할 때는 이성적이고 유능한 왕이었지만 문제는
술이 취하면 그야말로 미치광이가 된다는 것이니 술 취하면 죄수들을 살인용으로
무더기로 데리고 다닐 정도였으며 나중에는 재판 받던 사람들 까지 무차별로 죽입니다.
고양은 무덤에서 파낸 원선견의 관을 강에 쳐넣고, 북위 원씨(탁발씨) 일족 700명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도살했으니 이때 갓난아이도 위에서 떨어뜨려 창으로 찔려 죽이거나 불태워 죽이고 시신
들은 모두 장수에 버렸으니...... 그후 장수에서 잡힌 물고기 뱃속에서 사람의 손가락이나 손톱이
나오는 경우가 자주 생겨서 오랫동안 업성 사람들은 장수에서 잡은 물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태평광기에 따르면 고양은 광무제가 중흥할수 있었던 것은 왕망이 유씨를 모두 주살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여겼기에 원씨를 대대적으로 주살했는데, 이때 죽은 자가
1,000여명이나 되었으며 시신은 장수(漳水)에 버렸다는데 원씨 가운데 오직
원만(元巒), 원장춘(元長春), 원경안(元景安)의 세 집안만이 주살을 면했다고 합니다.
원만은 그의 딸을 상산왕 고연(高演)의 비로 삼았고, 원장춘과 원경안 등은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기 때문이었다는데 원경안의 형 원경호는 차라리 부서진 옥이 될지언정
온전한 기와는 되지 않겠다 라고 말하니 원경안이 그 말을 아뢰었더니 고양은 다시
죽였으며 이로부터 원씨(탁말씨)의 자손들은 나이와 귀천에 상관없이 살아남지 못합니다.
또 고양은 술을 마시고 친어머니 누씨를 모독한 패륜아이기도 했으며 아버지 고환의 첩이었던 이주씨
를 범하려다가 실패하자 칼로 죽였고 또 자신의 첩 설씨가 예전에 다른 남자와 사통했다는 이유로
찢어 죽인뒤 그 인피로 악기를 만들고, 사람을 이유없이 살육하는등 공포 정치를 한 폭군이었으며
나체에 밀가루로 분칠을 하고 발가벗고 다녔으며 높은 대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즐기는등 미친놈으로
9년만에 죽었는데 ‘위에서 군주는 어두웠지만 아래 능신들에 의해 맑았다.' 라고 평가받는다고 합니다.
고양의 장남 폐제 고은이 그의 뒤를 이었지만 다음해 고환의 6남 효소제 고연이 찬탈
해서 그의 목숨을 빼앗았는데 고은은 고양의 장남으로 아버지와 다르게 학문을
좋아하고 바른 사람이었지만, 심약하여 고양이 매우 싫어했으니 한번은 금봉대
에서 죄수들의 목을 자르라고 했는데 결국 자르지 못해 채찍으로 맞았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말더듬이가 되고, 발작을 일으키며 정신병자가 되었다고 하는데 고양도 이를 우려했는지
고연에게 미리 '네가 황위를 찬탈하려 한다면 마음대로 하되 부디 내 아들을 죽이지는 말아라!'
라고 말할 정도였다는데 고연은 고양의 유언(?)대로 찬탈했고 결국 조카 고은을 살해하고 맙니다.
그래도 고연은 능력이 있어 고양의 폐정을 개혁하고, 크고 작은 정무들을 모두 자신이 보았지만 다음해
사망했는데, '태자는 죄가 없으니 네가 봐서 좋을 대로 처리하되 앞 사람을 본받지 말라' 라고 고환의
9남 무성제 고담에게 유언을 남겼으니 그래서 고담이 뒤를 이었는데 고담도 형 고양과 판박이였습니다.
고담은 형 고연을 본받아 자신이 황제가 되었지만 결국에는 조카 고백년을 죽여버렸는
데, 무엇보다 고양은 잔인하고 음란했지만 능력은 있는 군주였으며 고연은 능력도
있고 부지런한 군주였으나, 고담은 무능한 군주였으며 동시에 음란하고 잔인
하기만 했으니 고담이 고양의 황후였던 자신의 형수 이씨를 범해 딸을 낳게 합니다.
이씨가 부끄러워 딸을 방치해 죽게하자 화가 난 고담은 네 년이 내 딸을 죽였으니 네 아들도 죽이겠다
라며 고양의 아들 고소덕을 활로 쏴서 죽이고, 능력있는 고연의 아들 고백년도 결국 제거했으며
그런 다음 이씨를 녹초가 되도록 구타하다가 초주검이 되자 수레에 실어 비구니로 만들어버립니다.
고담은 부역을 가중시키고 사치를 누렸는데 고양은 그나마 능력이라도 있었지만 고담은 아무
능력도 없었으니 565년 4월, 아들인 고위에게 양위하여 태상황제로서 정무를 보면서 음란
사치에 빠졌고, 568년 12월 업궁의 건수당에서 사망했는데 결국 고담의 아들 후주 고위
대에 이르러 북제는 서쪽 북주에게 멸망하고 일족은 북주 우문씨에게 모조리 멸족당하고 맙니다.
동쪽의 북제는 부강했으니 중원이라 불리는 지역 대부분을 점거하면서 함곡관을 경계로 평야 지대가
북제의 영토였으니 특히 바다에 면하는 황하 하류를 끼고 있었기에 농산물이 풍부했으며 돌궐과
손을 잡고 거란을 견제하기도 했는데 고위만 해도 폐제 고은 - 효소제 고연 - 무성제 고담의 짧은 재위
기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긴 11년을 황위에 있었으니 일반적으로 망할 나라가 아니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북제는 한족세력이 강한 나라였으니 이주영에게서 분립할 때, 고환은 발해와 산동 귀족
들의 지지를 받아 자립할 수 있었고 또한 북위의 한화정책 영향을 강하게 받아
문화가 발전하였으며 체제도 잘 정비되어 있었으니 남조와 가까워 선진문화의 수입
도 적극적이었지만 이는 반대로 말하면 선비족의 숭무 성향은 뒤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북제는 상대적으로 약한 선비족 무인 세력과 한족 귀족세력의 대립에 고질적으로
고통받아야 했으니 양측은 서로 숙청할 것을 황제에게 계속 충동질했는데,
북제의 공포정치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며 반대로 북주는 뒤떨어진 문화와
강력한 선비족 세력을 바탕으로 부병을 이루어냈으니 북제와 대비되는 부분입니다.
북제는 유리했으나 선비족과 한족세력의 균형을 맞추지 못하면 선비족은 북주로, 한족은 남조로 도망칠
위험을 감수하고 살아야 했으니 문선제는 능력있는 황제였지만 이 둘의 균형을 맞추는 것에 실패
하였고 정치에 관심을 잃고 음주에 빠져버렸는데 하지만 북제의 문화와 체제는 수나라에게
넘어가 율령체제에 큰 영향을 주었으니 북주의 고답적인 주례체제는 시대에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고위의 후반기 치세가 문제였으니 고위가 화사개(和士開) 등의 간신들을 신임하면서 국력이
크게 쇠약해졌으며 특히 곡률광과 고숙이라는 뛰어난 명장들이 이들의 참언에 의해 살해
되었으며 선비족을 우대하고 한족의 율령 체계를 거부하는 공포 정치를 유지하면서 북제는 계속
쇠퇴하여, 결국 국력과 군사력으로 압도하였던 북주와 진나라에게 영토를 빼앗기는 처지가 됩니다.
북제가 쇠약해지자 북주의 무제 우문옹(宇文邕)은 출병을 결심했으니 575년 북주군의 침공이 시작되면서
순식간에 영토를 잃고 말았으며 577년 후주는 장남 고항에게 양위하였고, 북주군의 추격을 피해서
도피를 하지만 결국에는 부하들이 배신하면서 3월 청주(青州)에서 유주 고항과 함께 북주군에게 생포
되었으며 그후 북제는 멸망하는데 북주는 고위를 온공(温公)으로 봉했지만 577년 일족과 함께 살해합니다.
결국 북제는 고위가 곡률광을 죽인지 5년 고장공을 죽인지 3년 만에 멸망했는데, 후주 고위의 어머니
이자 무성제 고담의 황후였던 호태후와 고위의 황후 목씨는 살아남았으니 이들은 북주의 수도
장안에서 기녀가 되었는데.... 남편 고담 못지않게 음란하던 호태후는 간신 화사개와 사실상
부부 였으며 며느리까지 부추겨 장안에서 기녀가 된 후에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태후로 사는 것은 기녀로 사는 것보다 재미가 없다!" 비록 망국이지만 북제의 전직 태후와
전직 황후가 서비스 한다는 소문에 장안의 저 기녀집은 불야성을 이루었고, 그 후로도
호태후는 열심히 인생을 즐기다가 수나라 초기에 사망했다고 합니다. 인생이 뭐 별것 이냐?
여담으로 북제가 존재했던 시기는 신라 진흥왕(540년 ~ 576년)의 재위 기간과 정확히 겹치니
신라는 564년과 572년에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고, 무성제 고담은 진흥왕
을 사지절(使持節) 동이교위(東夷校尉)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 에 봉했습니다.
577년 북제가 멸망한후 북제의 영주자사 고보녕은 북주 우문옹의 회유를 거부하고 돌궐로 망명했던
북제 황족 고소의를 황제로 추대하면서 부흥운동을 벌이게 되는데 그러나 북제 영토 대부분은
북주에게 넘어갔고, 북제 부흥운동 세력의 활동범위는 요서지역과 유주 일부에 그친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황제 고소의는 580년 돌궐군의 배신으로 잡혀서 북주로 넘겨졌고, 고보녕은 583년까지
영주를 점거한 상태로 북주와 그 뒤를 이은 수나라에 대항했지만 583년 수나라의 토벌로
세력이 와해된 뒤 도주하다가 부하의 손에 목숨을 잃으면서 북제의 부흥운동은 끝나게 됩니다.
4. 북주
나이는 어렸지만 강한 성격이었던 북주의 황제 우문각은 실권을 가진 사촌형 우문호에게
불만을 품고 제거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우문호는 557년에 효민제 우문각을 폐하고
죽였으며 우문각의 동생 우문육(宇文毓)을 세웠는데 우문육은 겉으로는 너그럽고 만만
해 보였지만 능력이 있어서 원로 대신들이 점점 몰려들고 백성들에게 위망을 사게 됩니다.
이에 우문호는 우문육 황제를 시험하고자 병권을 제외한 모든 권한을 넘기니 권력을 접수하고 황제
의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자 덜컥 겁이 난 우문호는 560년 우문육을 독살하고 그 동생 우문옹
(宇文邕)을 세웠으니 우문호는 황제가 될 힘은 있었으나, 민심을 고려해서 황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문옹은 무능해 우문호가 충신을 죽이고 간신을 등용하고 황제 보다 군대와 재산이 많아도 우문호
의 아들들이 온갖 막장 패악짓을 해도 모르는 척 했으며 그후에는 우문호의 덕이 높다면서
그를 이름을 부르지 않고 직책으로 불렀으니 이에 우문호는 우문옹에게 마음을 점점 놓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문옹황제의 계략으로, 그는 실제로는 매우 유능한 사람으로 앞서 두 형이
유능함을 보이다가 제거된 것을 보고 무능한 척하면서 힘을 길렀으니 마침내 13년 후인
572년 실권자 우문호를 죽이고 황권을 회복하였으니 바로 그가 북주의 명군인 무제입니다.
앞서 우문호는 유계재에게서 곧 변고가 있을 것이니 실권을 반납하고 병을 이유로
사퇴해 집에 있으면 주공단과 소공석이 될 수 있으며 자손들도 번성할 것이라고
제안을 받았지만 우문호는 거절했는데, 우문호에게 벼슬을 뺴앗긴 우문직을
포섭한 무제는 왕궤, 우문신거, 우문효백도 추가적으로 포섭해서 준비를 마칩니다.
우문호가 입궐하자 무제는 태후가 술을 좋아하니 알현하여 술 좀 그만 드시라고 주청할
것을 제안하니 이에 우문호는 태후를 알현하여 글을 읽는데 무제가 뒤에서 옥으로
된 홀로 우문호의 뒤통수를 때렸고 직후 쓰러진 우문호의 머리를 우문직이 베어
버렸으니 그후 무제의 명령으로 우문호의 아들과 부하들을 제거하고 실권을 찾게됩니다.
북주 무제는 전쟁노비를 해방하여 농업에 종사하도록 하고, 균전제를 확대 실시하여 농민에게 토지
를 분배하였으며 또한, 황무지 개간 및 수리 시설의 확대로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켰고 부병제를
균전제와 결합시켜 병농 일치화 하고, 부병을 황제에 직속시켜 황제의 군사 통제권을 강화시킵니다.
또한 폐불을 단행하여 승려를 환속시키고, 사원전을 몰수하여 균전농에게 분배해 부역과
세금을 납부케 하여 세수를 확대하였으니 이렇게 커진 국력으로 577년 북제를
멸하고 화북 지역을 통일했고 고구려와 충돌하기도 했는데 그러나 남쪽의 남진을 토벌
하기 위해 준비하던 무제가 36세의 이른 나이에 병사하면서 나라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578년 무제의 장남인 선제(宣帝) 우문윤(宇文贇)이 즉위하였는데 그는 황태자 시절 술을 좋아하고
놀기를 좋아해서 무제에게 엄격한 교육과 체벌을 받았으니 무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선제를
폐태자 할려고 했지만 동생들이 나이가 어리고 그나마 선제가 그중에서 유능한 편이라 중지합니다.
선제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이 엄청나 아버지가 죽은 뒤에도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회초리 자국을
어루만지며 왜 늦게 죽었냐고 원망했다는데, 음란사치하여 황후를 5명이나 두었으며 1년후 7살인
정제(靜帝) 우문천(宇文闡)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천원황제(天元皇帝)로 주색잡기에 열중하였습니다.
580년 선제가 22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북주의 멸망이 가시화되니, 선제의 비인 양황후의
부친 양견(楊堅)이 섭정이 되어 실권을 장악하였으니 580년 양견은 수왕(隋王)에
책봉되었고 581년 그에게 대항하는 난을 진압하면서 확실하게 반대 세력을 제거
했으며 9세인 정제에게 선양을 받아 수(隋)를 건국하면서 북주는 24년만에 멸망합니다.
북주는 서위 이래 무천진 출신의 선비족 관롱귀족으로 이뤄진 통치층이 왕조의 중추세력이 되었
으니 이들 선비족 관롱귀족은 북주뿐만 아니라 수나라, 당나라의 지배층으로서 중추세력
으로 이어지는데 북주의 무제 우문옹은 북위의 효문제가 한 한화 정책과는 반대로 호화
정책을 추진했으니 효문제가 선비족들에게 수나라 양씨 당나라 이씨 등 한자 성씨를
하사했지만 다시 선비족 성씨로 바꾸고 선비족 출신들을 우대하고 한족들을 차별했습니다.
북주는 군제를 정비했는데 이는 북주의 강성한 군사력의 원동력인 부병제(府兵制)의 바탕이 되었으니
서위 시절 우문태(宇文泰)가 처음 조직했는데, 부병제 조직은 총 24군으로 구성되었고, 개부(開府)
가 각각 1군을 통솔하며 그 위에 대장군(大將軍)이 2군을 통솔하고, 주국(柱國)이 4군을 통솔해
서위에는 총 6군이 있었으니 6주국, 12대장군, 24개부로 계열화되었으며 총사령관 우문태와
서위 황족 광릉왕 원흔(元欣)이 조직한 2주국을 포함시켜 8주국(八柱國) 12대장군제를 조직했습니다.
부병제는 국민 개병의 원칙하에 호한의 차별 없이 모든 민에게 군역을 부과하고, 일반 민호들을 부병
으로 선발하여 절충부에서 훈련하게 하는 제도나 병농 일치로 농민은 교대로 번상하여 군사
훈련을 받고 고향에 돌아가면 향병이 되어 예비군을 조직하니 국가가 많은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국민 모두 병력화를 가능케 하였으며 부병이 되면 장비와 식료를 스스로 부담하고 군마의 사육을
할당받는 대신 군사 훈련을 받을 동안에는 일반 민호와 구별이 되어 조용조와 역역을 면제받았습니다.
[2] 남조 : 송 - 제 - 양 - 진
1. 송 (劉宋):
송(宋, 420년 ~ 479년)은 중국 남북조 시대(439년 ~ 589년) 강남 지방에서 유유(劉裕)에 의해 건국된
남조 첫번째 왕조로 유송(劉宋)이라 부르기도 하니 동진말기 강남에서 손은(孫恩)이 난을 일으키자,
형주의 유력자 환현(桓玄)이 반란의 진정을 핑계로 건강에 들어가 제위를 빼앗자 팽성(彭城)의 하급
군인이었던 유유(劉裕)는 병사를 일으켜 손은과 환현을 무찌르고 동진 황제 안제(安帝)를 복위시킵니다.
유유는 후연의 침공을 격퇴하고 반란군의 잔당을 소탕한 뒤 북벌을 감행해 후진의 요홍(姚泓)을
멸망시켜, 그 명성과 북부군(北府軍)의 병권을 배경으로 동진(東晋) 공제(恭帝)로부터 선양을
받아 즉위했으며 건국후 귀족의 기득권을 보장해주면서 정권을 안정화 시켰으니 이때 부터
하급군인 출신 황제의 무력과 귀족의 정치력이 결합되어 남조의 독특한 사회체제가 시작됩니다.
유유는 토단법(土斷法) 경제정책을 시행하면서 화북 유랑자들을 강남 호적에 편입시켜 동진시대 황적
(黃籍), 백적(白籍)의 구별 철폐를 추진했으니 토착민과 유랑자간의 과세의 균등화를 목표로 하였고
동시에 군현의 통합을 추진하는등 경제재건을 추진햇으나 재위 3년만에 죽으면서 후사를 한문(寒門)
출신 서희지(徐羲之)등에게 맡겼으니 그들은 2대 소제(少帝)를 퇴위시키고, 문제(文帝)을 즉위시킵니다.
문제는 왕홍(王弘)등 귀족을 존중하고 문치를 내세운 30년간의 치세는 "원가의 치" 라 불릴정도로
태평성대를 구가하였으니 지방을 안정화 시키고, 430년 전서법(錢署法)을 두어 4주전(鑄錢)을 주조
하여 화폐 경제를 부흥시켰으며 438년 유학, 현학, 문학, 사학의 4학을 연구하는 시설을 만들어
동진의 유민 도잠과 사령운, 안연지 등이 시문세계에서 활약했고 토번 및 하서왕과 교류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430년, 450년 2번에 걸쳐 북위(北魏) 태무제(太武帝)에게 패배하여 회북(淮北)을
빼앗기니 군사비가 증가하고 태자에게 암살당하면서 송나라는 쇠퇴하는데 아버지를 암살한
형을 죽이고 제위에 오른 효무제(孝武帝)는 아버지 정책을 이어가면서, 형주, 양주, 강주의
군부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대사를 파견하여 조세의 독촉을 진행하고, 중앙집권화를 추진합니다.
전폐제(前廢帝)는 남조의 대표적인 포악한 황제로 숙부 유욱(劉彧)에게 암살당했고 유욱은
명제(明帝)가 되었으나 전폐제의 동생 유자훈(劉子勳)이 반항을 하자, 심유지(沈攸之)
를 보내 그를 죽였으니 명제는 채흥종(蔡興宗) 등 귀족의 말을 듣고 학관을 설치
했으나 난의 평정후 독단정치를 펼치며, 사치와 미신을 좋아해 재정을 궁핍하게 만듭니다.
명제 이후 폐제가 제위하였으나 숙부 유휴범(劉休範)이 한문출신 권력자들의 전횡에 분노해
병사를 일으켜 건강을 위협하자, 무장 소도성(蕭道成)이 난을 평정하고 포악한 군주 폐제
를 살해하고 순제를 옹립하자 심유지등이 의병을 모아 공격했으나 패퇴하니 소도성은
병마의 모든 권한을 쥐었고, 479년 순제(順帝)로 부터 선양을 받으면서 제나라를 건국합니다.
2. 제
제(齊, 479년 ~ 502년)는 중국 남북조 시대 강남에서 건국된 남조의 2번째 왕조로 남제(南齊)
라 부르는데 송나라 말기 소도성은 난릉(蘭陵) 출신의 하급 병사로 유휴범의 반란을 진압하여
권력자가 된뒤 황제를 폐위하기로 결정하고 479년 순제로 부터 선양 받아 제나라를 건국합니다.
482년 고제는 즉위 3년 만에 죽고, 아들 무제가 즉위했으니 제2대 황제 무제는 아들 경릉왕
(竟陵王) 소자량(蕭子良)을 상류로 보내 송나라 효무제 이래 실시했던 태사(台使)
파견을 중지했으니 태사는 조세대납 지역에 대해 중앙에서 그 감시를 위해 내려
보내는 관리였으나 부정부패가 심했고 명문출신의 지방관과 대립하여 악평이 많았습니다.
무제는 또한 교적관(校籍官)을 시켜 호적을 조사하고 정리했으니 수년에 걸친 토지 및 호적조사
로 부정부패 때문에 토지를 빼앗기고 국경 근처에서 떠돌던 많은 백성들이 호적에 복귀하였
으니 무제는 중서사인 채법량, 여문도를 시작으로 한문 출신의 인재를 등용하여 귀족을
제압하니 귀족의 지지는 잃어버렸으나 백성들의 삶은 윤택해지고, 도시가 번영하였습니다.
무제의 치세는 영명의 치(永明의 治)라 불리며 11년간 계속된 뒤 어린 군주 두 명의 짧은 재위를
거쳐 명제가 즉위했으니 남조 특유의 전제군주로 아들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고제와 무제의
아들 20여명을 살해했고 또한 종실제왕이 파견나간 곳에 주사(主師)를 파견햇으니 '여러 주의
일은 주사에게 듣고 자사에게는 듣지 않는다' 라는 평을 받으며 귀족, 관인의 지지는 없어집니다.
제6대 황제인 폐제 소보권은 황족에 그치지 않고 관료와 민중을 마구 죽이고, 궁전
에서 과다한 사치를 하여 정치를 어지렵혔는데 종족 중에 한 사람인 소연은 형이
동혼후에게 살해당한 일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우고 병력을 일으켜 동혼후를
살해하고, 화제를 옹립했으나 다음해 화제로 부터 선양을 받아 양나라를 건국합니다.
당시 제나라 문화의 중심은 무제의 둘째 아들 경릉왕 소자량의 저택이었으니 그의
저택에 있던 서쪽 처소는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 모였기에 이들 대표적인 8명을
가리켜 경릉팔우(竟陵八友) 라고 불렀으니 소연도 그중에 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3. 양
양(梁, 502년 ~ 557년)은 중국 남북조 시대 한족이 강남에 건국한 남조의 3번째 왕조로
남제 말기에 황제였던 동혼후는 폭정을 해서 많은 대신들을 살해했고 먼 친척인
소의를 살해하니 옹주자사로 양양에 있던 소의의 동생인 소연은 폭군을 처단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건강을 함락한뒤 동혼후를 살해하고 화제를 옹립했는데
502년에 소연은 화제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양나라를 건국하니 그가 바로 무제입니다.
무제의 치세는 48년이란 긴 기간이었고, 그동안 내정을 정비하여 구품관인법을 개선
했고 불교를 장려하여 국내를 안정시키려 하였으나 북조의 서위와 동위의 공격에
항상 시달렸으니 서위와 동위에 조공을 보내며 50년간 평화를 보냈으며 또한
무제의 맏아들 소명태자가 편찬한 “문선” 은 후세에까지 전해지는 훌륭한 문헌입니다.
이후 서위의 공격이 자주 있었고 무제의 50년에 걸친 치세 후반에는 불교에 너무 심취하여 스스로
동태사(同太寺)에 여러번 사신(捨身)을 행하는 무모한 짓을 여러번 일으켰으니 그때마다
신하들은 막대한 돈을 들여 무제를 되찾아 왔기에 국고가 크게 궁핍해졌는데 퇴위 후 법황의
신분이라면 모르나 재임 도중에 황제를 잃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548년 동위의 무장이었던 갈족 후경이 투항해 왔다가 반란을 일으켜 양나라 수도인 건강으로 진격
하니 다음해 건강(남경)이 함락됐고 한족(漢族) 들은 무참히 유린되었으며 무제는 사로잡힌뒤
쇠약해져 죽었으며 무제의 일가친척은 갈족들의 노비가 되었으니 갈족 후경은 간문제를 옹립했다
가 551년에 간문제를 살해하고 예장왕 소동을 제위에 올린뒤 선양을 받아 황제에 올라 즉위합니다.
그러자 각지에 주둔한 여러 왕들 중에 가장 세력이 강했던 형주자사 소역은 왕승변에게
대군을 주어 건강을 공격해 후경을 죽이고는 소역은 즉위한뒤 황폐화된 건강을 버리고
강릉으로 수도를 옮기니 그가 바로 원제인데 이런 혼란을 틈타 남정에 나선 서위는
촉(蜀)에 있던 무릉왕 소기와 원제의 대립을 틈타 선비족 군사를 보내 촉을 점령합니다.
또한 양양을 가지고 투항해온 소찰이 있었으니 북조의 서위는 선비족 군사를 보내 554년 강릉을
정복하고는 양나라 원제를 죽였고 양나라 한족들을 무참히 학살했으니 당시 양나라의
인구 3분에 1이 학살되었고 양나라 한족 권세가들은 노비로 전락하였는데 양나라
건강(남경)의 파괴와 강릉의 함락은 남조의 한족 귀족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습니다.
양나라는 북조에 조공과 공녀를 약속하였고 북주의 선비족 군사들은 돌아갔는데 건강에 주둔하던 왕승변
은 555년 북제의 압력에 정양후 소연명을 맞이하여 옹립하였으나 진패선이 이에 반대하여 군사를
일으켜 왕승변을 죽이고 정양후를 퇴위하게 한뒤 원제의 아들 진안왕 소방지를 옹립하니 그가 경제인
데, 557년에 경제는 진패선에게 제위를 선양하니 양나라는 멸망하였고 진패선의 진(陳)나라가 건국됩니다.
4. 진(陳)
진(陳, 557년 ~ 589년)은 남조 최후의 왕조로 남진(南陳)이라고도 하는데 진나라를 건국한 진패선
(陳覇先)은 미천한 가문의 군인 출신으로 후경(後景)의 난에 유능한 지휘관으로 난을 진압하고,
원제의 휘하에서 무공을 세웠으며 북제(北齊)에 동조한 소연명(蕭淵明)을 제위에 올린 동료
왕승변(王僧弁)을 타도하고 경제를 추대하였으나, 이후 경제의 선양을 받아 스스로 제위에 올랐습니다.
한수(漢水) 유역과 사천성은 서위를 이은 북주에게 정복당했고 거기에 양자강 중하류를 사이에 두고 공방전
을 벌였으니 양나라 때에 비해 영토가 크게 축소하여 남조 왕조 중 가장 국력이 약소했는데 진패선
은 왕승변의 부장과 강남 토호의 반란을 평정하다가 죽고, 형 시흥왕 진도담의 아들 문제(文帝)가 제위
를 물려받아 영주를 확보하고, 북주를 비롯한 북제, 후량과 대치하며 내정에 전념하여 국내를 안정시킵니다.
문제의 아들 임해왕때 북주, 후량과 내통한 화교의 난을 평정했으나, 실권을 장악한 4대 선제(宣帝)가 폐위
하고 즉위하여 국력의 차이를 생각하지 않고 575년 명장 군사를 시켜 북제를 공격해, 숙적 왕림(王琳)을
죽이고 수양을 빼앗아 강북으로 까지 영토를 넓혔지만 그후 선비족 반격을 받아 다시 영토를 잃게 됩니다.
북주의 공격에 시달리던 진(陳)나라에서 진숙보陳叔寶가 즉위해 사치와 향략을 일삼아 국력
이 피폐했는데 북주를 선양으로 이어받은 수나라 문제 양견은 588년 10월 진숙보의
부패와 무능을 보고 51만 8천명이라는 대군을 진왕 양광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이끌게
하여 589년에 대대적으로 침공하니...... 하악필과 한금호는 장강을 건너 남경을 점령합니다.
진숙보는 겁에 질려 한번 싸울 생각조차 못하고 우물속에 숨어있다가 잡혀 장안으로 끌려갔으니
이로써 400년에 걸쳐 분열되었던 위진남북조시대가 종결되고 중국은 통일되었으며
수나라 양견은 진(陳)씨 일가를 숙청하고 남은 진(陳)씨들은 서쪽으로 이주시켰는데 몇년
이 지난후 수나라 양견은 서쪽으로 이주시킨 진(陳)씨 일족들을 모두 노비로 전락시킵니다.
진(陳)나라는 남조 귀족제가 후경의 난을 거치며 해체되어 무제때 중서통사사인 채경력같은 한문 출신들
이 군주의 뜻을 받들어 국정을 담당했으니 후주도 시문경등 한문 출신을 측근으로 기용했기에, 국가의
석이었던 무장 노광달, 소마가, 임충 등을 멀리했기에 문무 해체가 된 나라는 멸망하게 된 것인데 다만
후주의 시대는 문화가 융성하여 문학에 강총, 서릉 등이 있었고, 불교도 문무 관료에게 신앙 받았습니다.
565년 진(陳)나라는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을 신라로 보내 예방하고, 불교
경론(經論) 1천 7백여 권을 보내주었는데 유사와 명관은 신라의 사신들과 함께
귀국하였으니 진(陳)나라는 신라 사신들에게 관직을 주었고 566년, 567년, 568년,
570년, 571년에 신라는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