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옷을 입고 죽고 싶다
그녀가 죽으로 들어갔다
문학 교수로 잘 살아낸 87 나이에
젊어서나 늙어서나 아름다웠고
긴장미를 잃지 않던 기품 있는 여자
80년대였지
노동의 새벽을 내고 수배자로 쫓기던 나는
강남에 있는 그녀의 집필실로 찾아 들었지
그때, 늘씬한 드레스의 하이힐을 신고서
담배를 피워 물고 나를 보던 그녀가 말했지
박시인, 민주화도 혁명도 좋은데요
난 재수 없게 곱게 자라서 말이에요
안기부 끌려가고 감옥살이 같은 건 못 해요
그러니까 당신 잡히지 마요 그리고…
나보다 먼저 죽지 마요!
흐르는 상념 사이로
서울 근교에 호텔 같은 요양원으로
꽃을 들고 그녀를 문병한다
자식들과 친지한테 민폐 끼치지 않고
고이 마무리하고 싶어서
여기 들어온지 1년이 되어 가네요
공기도 맑고 풍경도 좋고
문화시설과 식사도 좋고
의료진과 서비스도 좋은데
아무래도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아요
뭐가 제일 싫은지 아세요
다 똑같이 요양복을 입는 거요
똑같은 방과 가구와 식사들이요
나란 인간의 취향도 없고 개성도 없는 것들요
더 끔찍한게 뭔지 아세요?
늘 똑같은 얼굴들과 똑같은 일과를 보내는 거요
나른하고 호화롭게 죽어가는 노인들 속에서
하루하루 연명하다 떠나긴 싫단 말이에요
난요, 내 옷을 입고 죽고 싶어요
내 책상과 의자에 앉아 내 분위기 속에서
나 다운 모습으로 떠나고 싶다고요
내가 살고 일하고 사랑한 기억이 생생한 장소에서
친구들과 후배들과 제자들과 아이들에 둘러싸여
웃으며 안녕, 죽어가고 싶어요
내 인생 전체가 담긴 죽음을,
나 자신에 의한 죽음을 원해요
단 몇 달을 살다 주고 갈지라도
내 인생을 이렇게 살긴 싫다고요
박 시인은 절대로 나처럼 죽지 마요
그녀가 내 손을 잡고 흐느낀다
나는 그녀를 안아주고 그녀가 쓴 원고지와
좋은 일에 써 달라며 건넨 봉투를 받아들고
검은 정장에 경호원들이 지키는 요양원을 나선다
모두가 여기 들어와 죽기를 소망하나
그녀는 여기 나와서 죽기를 갈망하는 이곳에
카페 게시글
애송 시詩
내 옷을 입고 죽고 싶다(박노해)
엠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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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8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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