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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 부처님께서 깨달은 世界는 곧 우리의 마음이며, 여기에는 나와 남, 主觀과 客觀, 物質과 精神, 안과 밖, 時間과 空間, 有와 無, 生과 滅 등의 矛盾(모순)과 對立이 없습니다. 이러한 矛盾과 對立은 衆生들이 眞理에 無知하여 欲貪을 일으킴으로써 나타난 虛妄한 妄念일 뿐입니다.
032. “緣起說의 觀點에서 ‘世界’는 獨立的으로 存在하는 實體가 아니라, 認識 過程에서 드러나는 現象이며, 그와 함께 ‘나’ 또한 연기적(緣起的)으로 성립한다.”
033. 우리는 “무엇이 있느냐, 없느냐?”를 問題 삼습니다. “靈魂은 있느냐, 없느냐?” “永遠한 世界는 있느냐, 없느냐?” “世界를 만든 存在는 있느냐, 없느냐?” 이런 것을 問題 삼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무엇이 있느냐?”라고 묻는 건 存在에 對하여 그 實相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問題 삼는 것은 무엇인가가 우리의 外部에 우리와는 相關없이 存在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問題 삼고 있는 ‘무엇’은 우리에게 認識된 것일 뿐입니다. 認識되지 않는 것에 對해서는 그것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034. 元曉大師(원효대사)가 깨달은 것은, 單純히 더럽고 깨끗하다는 感情的인 判斷이 우리의 마음에 의해 좌우된다는 事實이 아닙니다. 元曉大師는 모든 存在는 우리의 마음에 ‘認識된 것’일 뿐이라는 存在의 實相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035. 부처님께서는 存在의 問題를 “무엇이 存在하는가?”의 問題에서 “어떻게 存在로 認識되는가?”의 問題로 轉換했습니다.
036. ‘知覺하는 놈’과 ‘知覺되는 것’을 色이라 합니다. ‘느끼는 놈’과 ‘느껴지는 것’을 受라 합니다. ‘생각하는 놈’과 ‘생각되는 것’을 想이라 합니다. ‘하고 싶어 하는 놈’과 ‘하고 싶은 것’을 行이라 합니다. ‘인식하는 놈’과 ‘인식되는 것’을 識이라 합니다.
037. 우리의 삶은 어떤 存在로 構成된 것이 아니라,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行動하고, 認識하는 業으로 構成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業을 通해서 存在를 認識합니다. 이런 다섯 가지 삶의 構造를 通해서 우리가 存在로 認識하는 다섯 가지를 부처님께서는 色・受・想・行・識, 즉 五蘊(오온)이라 했으며, 이런 五蘊을 一切法(일체법)이라고 했습니다.
038. 모든 存在는 우리에게 ‘認識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認識된 것’을 부처님께서는 ‘法’이라 부릅니다. 우리가 ‘存在’라 부르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法’이라 부르신 것입니다.
039. 五根만 있다면, 우리는 색깔, 소리, 향기, 맛, 촉감 등은 認識할 수 있지만, 사과, 책상, 나무 같은 것은 認識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눈은 빛만을 知覺하고, 귀는 소리만을 知覺하는데, 사과나 나무는 빛깔만 있는 게 아니라, 향기와 맛과 觸感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습과 맛과 香氣를 지닌 사과는 눈, 귀, 코와 같은 五根이 認識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分明히 사과를 認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五根 以外에 事物을 認識하는 다른 認識 活動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意根이라고 부릅니다.
040. 사과에 대하여, 눈이 認識한 색깔과 模樣, 코가 認識한 香氣, 혀가 認識한 맛을 意根이 綜合하여, 둥글고, 붉고, 향기롭고, 새콤달콤한 사과를 認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사과를 보지 않아도 사과를 생각할 수 있고, 사과를 생각하면 그것이 향기롭고 새콤달콤한 맛있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意根이 있기 때문입니다.
041. 우리가 認識하는 對象은 우리 마음(意根)에 依支하여 존재한다. 우리의 의근(意根), 즉 마음은 五根이 없으면 외부의 事物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五根은 각각 自身의 境界만을 知覺할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맛이나 향기를 個別的으로 知覺할 뿐, 맛과 향기를 지닌 사과는 認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意根은 스스로 外部의 事物을 알지 못하지만, 五根이 認識하지 못하는 사과는 認識합니다. 意根은 생각하는 器官이고, 마음의 感覺器官입니다.
042. 우리가 認識하고 있는 모든 事物은 外部에 存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認識되는 모든 事物을 ‘存在’라 부르지 않고 ‘法’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法’을, 意根이 認識하는 對象이라고 하였습니다.
043. 우리의 認識 活動은 우리의 몸에 依支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認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편, 認識하기 때문에 살아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유하면 등불이 탈 때 불빛이 나옵니다. 그리고 등불은 불빛이 나오기 때문에 등불입니다. 살아 있음이 등불이라면, 認識은 불빛입니다. 이처럼 五根이나 意根은 몸에 붙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살아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認識 活動입니다.
044. 事物을 指示할 때의 ‘法’을 불교에서는 任持自性(임지자성), 軌生物解(궤생물해)라고 설명합니다. 즉 法이란 자기 성질을 유지하면서(任持自性), 그 성질을 바탕으로 認識을 일으키는 것(軌生物解)입니다.
045. 意根이 만든 것은 사과나 양초가 아니라, 사과나 양초의 궤범(軌範-사람들이 따르거나 認識의 基準이 되는 본보기와 法度) 입니다. 意根은 五根을 통해 認識한 內容으로 ‘사물의 궤범’을 만들어 놓고 눈이나 귀와 같은 五根을 통해 어떤 게 知覺되면 그것을 이미 만들어 놓은 軌範에 맞추어봅니다. 軌範은 우리의 意根이 만들어서 마음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法’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046.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을 이렇게 法의 뜻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存在의 뜻으로 듣기 때문에 佛敎를 바르게 理解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047. 六根은 우리 生命 現象으로 認識 活動입니다. 일반적으로 六根을 單純히 우리 몸에 붙어 있는 感覺器官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전에 살펴본 「대구치라경」에서 六根은 ‘壽命’에 依支하고 있다고 함으로써, 그것이 살아 있는 것들의 知覺 活動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048. 知覺이란 五根을 통해 이루어지는 認識을 말하고, 思惟란 意根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認識을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認識은 이처럼 六根에 의한 知覺과 意根에 의한 思惟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049. 우리는 認識能力이 우리 몸에 붙어 있는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과 몸속에 있는 마음(心)이 활동할 때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은 몸에 붙어 있는 눈이나 귀, 코 등은 認識能力이 없습니다. 따라서 몸에 붙어 있는 눈이나 귀 등이 活動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우리 認識能力이라고 말씀하신 六根은 이렇게 몸에 붙어 있는 눈이나 귀, 또는 몸속에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050. 눈은 ‘보는 존재’가 아닙니다. 보기 때문에 ‘눈’이라고 불릴 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보지 못하는 것은 눈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무엇이 있어야 어떤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051. 六根은 몸에 붙어 있는 認識器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認識 活動에 대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六根은 이런 뜻입니다.
052. 六根을 다스려 調伏(조복)하지 못하고, 막지 못하고, 지키지 못하고, 붙잡지 못하고, 닦아 길들이지 못하면, 未來世에 반드시 괴로운 業報를 받는다. 六根은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는 우리의 삶이며, 행동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우리가 바르게 行動하지 않으면, 우리의 未來에 不幸이 온다는 걸 말씀하신 것입니다. 六根은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衆生들은 보고 들어서, 보이고 들리는 게 있으면, 보고 듣는 건 몸 안에 있는 ‘自我’이고, 보이고 들리는 건 몸 밖에 있는 ‘世界’라고 생각합니다.
053. 우리가 몸 안에 있는 ‘自我’라고 생각하는 虛妄한 생각이 내육입처(內六入處)이고, 몸 밖에 있는 ‘世界’라고 생각하는 虛妄한 생각이 외육입처(外六入處)입니다. 따라서 “業報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라는 無我의 道理를 깨달은 사람에게는 이러한 생각이 사라집니다.
054. 六根은 우리 몸에 붙어 있는 感覺器官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는 認識 活動을 뜻합니다. 이러한 認識 活動은 곧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055. 우리 삶을 잘 觀察하면, 거기에는 보는 놈과 보이는 것과의 分別이 있을 수 없습니다. 본다는 現象은 보는 놈과 보이는 것이 따로 存在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눈이 있어도 보이는 것이 없다면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보이는 것이 있어도 보는 눈이 없으면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본다는 現象은 보는 놈과 보이는 것이 分離되지 않은 狀態에서 나타납니다.
056. 認識 現象은 보는 놈과 보이는 게 서로 個別的으로 存在하는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게 아니라, 삶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삶의 現象입니다. 이러한 삶의 現象에는 ‘自我와 世界’가 分別될 수 없습니다. 박쥐에게는 박쥐의 삶을 통해 박쥐의 世界가 나타나고, 사람에게는 사람의 삶을 통해 사람의 世界가 나타납니다.
057. 우리의 自我와 世界는 이렇게 삶을 통해 나타난 것이지, ‘自我’가 ‘世界’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이 ‘存在’에 先行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이 먼저이고, 存在는 그 삶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佛敎의 無我와 空은 이것을 말합니다. “業報는 있으나 作者는 없다”라는 말씀은 “삶은 있으나, 삶에 앞서 독립적으로 存在하는 存在는 없다”라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業을 짓고 그 果報를 받는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業을 지으면 그 果報로서 ‘自我’와 ‘世界’가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058.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삶을 통해 나타나는 ‘自我와 世界’를 ‘없다’라고 否定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否定하신 것은 삶과 無關하게 存在하는 ‘自我’와 ‘世界’입니다. 삶을 떠나서는 ‘自我’도 ‘世界’도 없으므로, ‘自我’와 ‘世界’를 問題 삼고 있는 外道의 論爭을 부처님께서 無意味한 邪見이라고 批判하신 것입니다. ‘自我와 世界’는 삶을 통해 나타나는 삶의 果報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그가 짓는 業에 따라 반드시 果報를 받는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059. 佛敎의 無我說은 業報를 否定하는 思想이 아니라, 業報만을 認定하는 思想입니다. 우리가 사는 世界는 自我와 世界가 分別되지 않는 業報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欲貪이 있으면, “보는 놈은 나의 눈이고, 보이는 것은 外部의 色이며, 듣는 것은 나의 귀이고, 들리는 것은, 外部의 소리”라고 自我와 世界를 分別하는 十二入處가 나타납니다.
060. 十二入處가 나타난 마음에서는, 볼 때 보이는 것을 分別하는 마음이 생기고, 들을 때 들리는 것을 分別하는 마음이 생기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는 삶을 통해서 모든 것을 分別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렇게 十二入處를 因緣으로 생기는 分別心이 六識, 즉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입니다.
출처 : 이중표 교수 지음.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
첫댓글
오늘도
웃음으로 시작해서
행복으로 가득 채우는
즐거운 하루 되시기를 기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