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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라는 이름의 천국
김 영 하
관우, 장비, 마초로 하여금 각기 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선봉에 서게 하고 제갈량을 중진에 포진시키고 후미를 조자룡으로 하여금 방비케 한 후, 하후돈이 지키는 형주성을 공격케 하였다. 관우와 장비가 우회하여 형주성에 접근하는 동안 서남풍이 불었고 이를 틈타 제갈량이 화공(火功)*으로 형주성을 공격하니 하후돈의 병사 중 반이 전사하였다. 마초는 동쪽에서 관우와 장비는 서쪽에서 그리고 제갈량은 북동쪽에서 공격하는 동안 사마의가 이끄는 구원병이 형주성으로 진격해 왔다. 후미에 있던 조자룡이 제갈량을 호위하고자 나섰으나 상대는 여포, 조자룡으로서는 버거운 상대였다. 형주성 함락이 시간문제였지만 조자룡을 잃을 수는 없는 일, 장비로 하여금 조자룡을 돕게 하고 제갈량은 사마의의 진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도록 하였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으므로 언제 사마의가 화공으로 본진을 공격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제갈량이 진영을 옮기는 동안 아니나 다를까 사마의가 화공을 전개해왔다. 겨울철이어서 불길은 삽시 간에 온 들판으로 퍼졌다. 장비의 부대가 화염에 휩싸였다. 장비는 골짜기를 따라 패퇴했고 그때를 놓치지 않고 사마의가 장비를 뒤쫓으며 계속 불을 놓았다. 골짜기에 갇힌 장비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병력만 잃고 있었다. 조자룡은 멀리 있었고 관우가 구원하기엔 너무 늦다. 할 수 없이 제갈량이 직접 부대를 이끌고 사마의를 후면에서 공격했다. 장비의 부대는 어차피 화공으로 전멸할 바에야 제갈량과 함께 사마의를 공격하는 것이 나으리라 판단하고 불길을 뚫고 사마의의 부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기적처럼 비가 내려 불길이 잡혔다. 삽시간에 전세는 사마의가 장비와 제갈량의 부대에 포위된 형국으로 변모되 었다.
대마다. 이젠 형주성이 문제가 아니다. 마초의 군대로 하여금 위나라의 다른 장수가 사마의를 돕지 못하도록 골짜기 어귀를 지키게 하고 제갈량과 장비는 사마의 공격에 총력을 기울이게 하였다. 그때 조자룡은 홀로 여포를 상대하느라 병력의 거의 대부분을 잃고 있었다. 할 수 없다. 회군이다. 조자룡은 즉각 촉으로 돌려보냈다. 후퇴하는 조자룡을 여포가 뒤쫓고 있었지만 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골짜기의 사마의는 총력을 다해 장비와 제갈량을 상대하고 있었지만 힘으로는 장비를, 지략으로는 제갈량을 상대할 수 없는지라 하릴 없이 병사들만 잃고 있었다. 장비의 일만 명 군사도 지금은 천 명으로 줄어들었고 제갈량의 군사도 삼천 명밖에 남지 않았다. 사마의의 남은 병사는 고작 오백, 승리가 목전에 있었다. 그때까지 조자룡을 쫓고 있던 여포가 중군 사마의의 위급함을 알고 말머리를 돌려서 들이 닥쳤고 길목을 지키던 마초가 여포를 상대했다.
이 싸움이야말로 촉나라와 위나라의 운명을 가르는 싸움이 될 것이다. 형주를 차지하면 위나라는 거의 남북으로 갈리게 되고 힘은 반으로 줄어든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조조는 사마의, 여포, 하후돈 등과 같은 위나라의 명장들을 이 싸움에 모두 출전시킨 것이다. 제갈량은 장비로 하여금 마지막 총공세를 전개하도록 명령했다. 총공세 명령이 떨어지면 적과 아, 둘 중 하나가 전멸할 때까지 공격은 계속된다. 장비의 공격 이 개시되자마자 제갈량토 사마의를 향한 총공세에 들어갔다. 사마의의 저항은 거셌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사마의는 생포되었다.
즉각 목을 베도록 지시했다. 일세를 풍미하던 지략가 사마의가 그렇게 사라졌다. 사마의가 생포되자 여포는 마초와의 싸움을 중지하고 형주성에서 농성 중인 하후돈을 도우러 움직였다. 제갈량은 병사를 거의 잃은 장비를 접경지역으로 후퇴시킨 연후에 남은 이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형주성 공략에·나섰다. 병력을 거의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마초도 제갈량에 앞서서 형주성으로 향했다.
형주성의 하후돈은 의외로 잘 버티고 있었다. 워낙 난공불락*의 성이기도 하여서 관우 혼자 공략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제갈량과 마초, 관우는 3면에서 여포와 하후돈이 지키는 형주성을 포위하였다. 서로 화공을 주고받으며 공성전*을 벌이길 석 달. 형주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제갈량은 지원병을 요청 했다. 조자룡이 다시 군대를 보강하여 쳐들어왔고 장비는 아예 본국으로 철수시킨 후, 장요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형주로 향하게 하였다. 장요는 군량미도 함께 들여왔다.
장요가 형주에 도착할 무렵, 남쪽에서 주유가 이끄는 오나라의 군대가 조조를 돕기 위해 오만의 군사를 이끌고 형주성 전투에 가담했다. 뿐만 아니라 조조도 친히 아들 조비와 문추를 이끌고 형주로 진격해왔다. 상황이 급박하다. 오나라의 군대가 형주에 도착하는 데는 열흘, 조조의 군대가 도착하기까지는 약 보름이면 족했다. 철수냐, 공격이냐. 만약 이번에 형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한다면 앞으로 일 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 장수를 잃는 한이 있어도 이번에는 반드시 형주를 함락시켜야 한다. 그렇다면 총공세다. 형주를 포위한 촉군은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남쪽에서 다가오는 오나라의 군대를 향해서는 화공을 전개했고 새로이 도착한 장요는 조조의 군대를 맞아 지연작전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삐리리릭.
하후돈의 군대가 전멸하고 하후돈은 생포되었다. 그러나 하후돈과 결전을 벌이던 관우는 여포의 창에 맞아 부상을 입고 생포되었다. 주유의 군대는 화공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근접해왔고 멀지 않은 곳에서 장요의 군대가 조조의 본진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 제갈량은 장비, 마초로 하여금 여포를 향한 총공세를 전개토록 하였다. 전투를 벌이는 동안 조비의 군대가 제갈량의 부대를 공격했고 오나라의 군대도 목전에 다다랐을 즈음, 여포가 생포되면서 가까스로 형주성이 함락되었다. 제갈량의 군사들은 신속하게 형주성으로 진입했고 조조와 주유의 군대는 말머리를 돌려 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담배를 꺼내려고 담뱃갑을 만져보았으나 비어 있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5시, 꼬박 일 년에 걸친 형주 함락작전을 전개하는 동안 8시간이 지나 있었다. 이 전투에서 그는 관우를 잃은 대신 하후돈과 여포를 얻었고 사마의를 죽여 없앴다. 그리고 무엇보다 형주성을 얻었다.
아, 관우.
충성심이 낮은 여포는 언제 그를 배신할지 모르고 하후돈의 전투력과 지력은 관우를 당하지 못한다. 그는 재떨이에서 꽁초를 찾아 피워 물었다. 어떻게 한다. 일 년에 걸친 전쟁·덕분에 백성들의 충성심은 10포인트나 하락했고 인구도 50만이나 줄어 식량 생산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전쟁을 겪지 않은 오나라의 군대는 강성하고 형주를 잃은 조조는 반드시 다시 공격해올 것이다. 그는 AD 220년 가을에서 게임을 멈추고 결과를 저장한 후에 컴퓨터를 껐다.
어느새 사위*가 휜해지고 있었다. 방 안 곳곳은 세탁물, 담뱃갑, 맥주병으로 어지러워져 있었다. 그것들을 이리저리 치워 잘 자리를 마련한 후에 눈을 붙였다. 해가 더 밝아오기 전에 잠이 들어야 한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고 오호장군* 마초가 맹장 여포와 결전을 벌여 형주성을 함락시키는 장면과 사마의를 골짜기에 몰아넣고 협공으로 전멸시킨 장면이 눈에 어른거렸다. 5년 전 사마의는 그의 아들 유평을 사로잡아 베어 죽였다. 오늘에야 드디어 그 원수를 갚을 수 있었다. 그는 사마의의 아들들을 모조리 잡아 잡는 대로 목을 베어버리리라 결심했다.
여포의 충성심을 제고시키기 위해서는 여자를 보내주어야겠다. 갓 잡아온 여포의 충성심은 65. 너무 낮다. 적어도 95는 되어야 안심하고 전쟁에 데리고 나갈 수 있다. 전투에 나가서 배신하면 적과의 병력 차는 순식간에 이만 명으로 벌어질 뿐 아니라 여포를 적장으로 삼는 전투를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여자는 세 명 정도면 족할 것이다. 게임 매뉴얼에는 여포의 충성심이 여자 한 명 당 10포인트 씩 상승한다고 나와 있다. 『삼국지』를 보아도 여포는 초선이라는 여자 때문에 인생이 결딴나는 것으로 나와 있지 않은가.
눈을 감았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오늘이 며칠인가? 동남아 어딘가의 해변 사진이 붙어 있는 달력을 본다. 7월이었다. 삼국지 게임을 사 온 때가 6월 말이었으니 벌써 2주가 지난 셈이다. 처음에는 전쟁에만 몰두하다가 국민들의 충성심이 떨어지는 바람에 모반*이 일어나기도 했고 장수들이 다른 제후에게 투항하는 일이 잦았다. 매달 적정한 돈을 치수*와 농경에 투자하지 않으면 쌀 생산이 줄어들고 그렇게 되면 백성과 병졸 들의 충성심이 떨어질 뿐 아니라 축성(築城)도 할 수 없게 된다. 처음에는 그런 이치를 몰랐던 탓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늘 나라를 잃곤 했다. 그러나 이번 게임만은 질 수 없다. 이제 형주를 얻었으니 방비를 튼튼히 한 후에 남쪽으로 진공하여 오나라를 쳐야 할 듯싶다. 최근 오나라가 태사자와 주유를 앞세워 37번 주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다는 정보가 있었다. 먼저 36번 주로 만 명을 보내 치고 빠지는 작전으로 군대를 묶어둔 후에 조자룡과 마초를 보내 태사자와 주유를 공격하도록 해야겠다.
따르르르릉.
요란한 자명종 소리. 시계를 때려 누른 후에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무래도 자기는 글렀다. 어느새 시간은 7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주섬주섬 옷가지를 걸쳐 입으면서 거울을 본다. 점점 낯설어지는 남자가 거기 서 있다. 거뭇한 턱수염과 헝클어진 머리. 아마 머리는 나흘째 감지 않은 것 같다. 눈 아래쪽으로는 기미 비슷한 검은 그림자가 서려 있다. 빨간 실핏줄이 흰자위를 가로지르고 있다. 눈을 질끈 감고 방을 나선다.
마을버스를 타고 언덕배기를 내려와서 다시 시내버스로 갈아탄다. 장마철답게 후끈한 공기가 차 안에 가득하다. 그는 여전히 다음 작전을 구상하고 있다. 오나라를 치기보다는 강화조약*을 맺는 게 좋겠다. 지력이 높은 서서를 보내면 아마도 능히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연후에 오나라와 함께 위나라를 치는 것이다. 그동안 사로잡은 장수들의 충성심을 높이고 병서들을 훈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게임에서 그는 한 달에 한 번의 명령밖에는 내릴 수가 없다. 병졸을 훈련시키든지 장수들에게 상을 내리든지 그도 아니면 전쟁을 벌이든지 뭐든 한 달에 하나의 명령밖에는 내릴 수가 없는 것이다.
영업소에 들어서니 분위기가 싸늘하다. 지점장은 이미 출근한 지 오래인 듯, 벌써 넥타이가 느슨해져 있다. 다른 직원들은 사무실로 들어서는 그를 힐끔거리며 쳐다본다.
―야. 너 이리 와봐.
지점장은 일선 영업직원들에게 반말을 한다. 화가 날 때만 반말을 한다지만 그는 항상 화가 나 있는 편이다.
―너 지금이 몇 시야?
―9시 15분인 데요.
―이 자식이 지금 누구 약 올리나?
지점장이 서류철을 들어서 책상을 내리쳤다. 반쯤 벗겨진 대머리에 눈매가 날카로운 인상의 40대 남자. 실적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 가리는 전형적인 영업 매니저의 모습이다. 자세히 보니 지점장의 뒤통수가 툭 튀어나와 있다. 그냥 튀어나온 것도 아니고 양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반골이다. 그래. 위연이다. 제갈량은 죽으면서 “위연을 조심하라. 그는 반역자의 골상을 가졌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게임 속의 위연도 배신을 밥 먹듯이 했다. 애초에 위연을 데리고 있던 건 그였다. 그러나 적벽전투에서 오나라에 투항했고 그 뒤에 여러 차례 그의 영토를 공격해왔을 뿐 아니라 그의 장수 마속과의 일대일 대결에서 마속을 죽이기까지 했다. 언젠가는 내 너의 목을 반드시 베고 말리라.
―너 내 말 안 들려?
―네?
―지난달에 차 몇 대 팔았냐니까?
―하, 한 대요.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씨부리고 있냐, 이 인간 말종아. 김상근이 좀 봐라. 지난달에 아홉 대나 팔았잖아. 넌 그동안 뭐 했어? 지점장은 80년대 초에 회사에 입사했다고 한다. 80년대 회사가 망하느냐 마느냐 하는 시점에 강남지역에 부임해서 판매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주로 실적이 부진한 영업소로 내려가서 실적을 끌어올리는 데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가 이 지점장으로 임명된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다. 그가 부임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영업사원들을 닦달하지는 않았었다.
지점장에게 한바탕 당한 후에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신이 멍하다.
―커피나 한잔 하지.
지점장이 칭찬하던 김상근이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고등학교 1년 선배였다. 함께 학교 교지를 만든 적도 있었던 사람이어서 아무래도 친하게 지내왔던 터였다. 타고난 영업사원이어서 가만히 앉아 있어도 계약이 들어오는 사람이었다. 복도로 나가자 김상근은 그의 몫까지 커피를 뽑아왔다.
―힘내. 하루 이틀 겪는 일도 아니잖아. 그 개새끼 어디 가서 안 뒈지나 몰라.
―글쎄 말이에요.
커피가 눅눅했다.
―참 어제 택시 하나 계약했는데 기사가 너 안다고 하더라.
―그래요? 누군데요?
―박상수라고 공항동 사는 사람. 까다롭던데. 서비스 해달라는 게 무지하게 많더라. 깔판에 선바이저*에 시트에 핸들커버까지 다 해줬어. 아 그 덕에 어제 하루 종일 골치 아팠어.
―아, 네.
―그럼 수고해.
김상근이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다리에 힘이 쭉 빠진다. 그 택시기사는 그가 2주 동안이나 공을 들여온 사람이었다. 심지어 기사 집 앞 대폿집에서 소주까지 마셨다.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공중전화를 걸었다.
―박 기사님. 어제 계약하셨다면서요?
―했지. 어제 마침 지나가는 길이 있어서 들어갔더니 자네 없더라구. 그래서 그냥 했지.
―저 하고 인연을 봐서라도 저한테 해주시지 그랬어요?
―아 나도 그런 줄 알고 물어봤더니 계약은 아무하고나 해도 된다던데. 내가 자네 명함까지 보여줬는데 그냥 해도 된다고 그러던데. 그럼 안 되는 거야?
―할 수 없죠, 뭐. 나중에 차 바꾸시는 분 또 계시면 소개나 해주세요.
어쩐지 김상근이 커피를 뽑아줄 때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는 이번 달에도 본부 판매 1위를 할 것이다. 그래 잘 먹고 잘살아라. 아무리 못 벌어도 너처럼 후배 실적까지 빼앗으면서 살고 싶지는 않다, 이 개새끼야.
하기야 그는 선배로서 훌륭한 교훈 하나를 일러준 셈이다. 고맙군. 사무실로 돌아오자 김상근이 그를 힐끗거리는 게 느껴진다. 불편하겠지. 처음에는 조금 불편하다가 나중에는 만만한 놈이려니 여길 테지. 그러곤 계속 내 고객을 가로채겠지. 될 대로 되라지. 어차피 너나 나나 막장 인생이다.
지점장이 노려보고 있다. 몇 통의 거짓 전화를 건다. 그러고는 전화상담 기록부에 기록한다. 아무래도 내일은 대학동창회 사무실에 한번 들러서 동창들의 직장과 전화번호를 빼 와야겠다. 어차피 그들에게 전화를 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는 사람 파먹는 장사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그저 전화상담 기록부에 적어야 할 사람이 필요할 뿐이다.
―어디 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대번에 지점장의 눈길이 그에게 꽂힌다.
―고객 만나러 갑니다.
―노상 만나기만 하면 뭐 하나. 실적이 올라야지.
그는 대꾸하지 않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하늘이 흐렸다. 장마가 시작됐다는데 비는 오지 않고 있다. 그는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온다. 넥타이를 늘여 고리처럼 만들어 목을 빼낸다. 다시 매기가 귀찮기 때문이다. 같은 넥타이를 맨 지가 언제부터인지 그는 기억하지 못한다.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이게 그의 일과이다. 아침에 출근해서 얼굴도장 찍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가 저녁 때 다시 회사로 돌아간다. 한 달에 한 대만 팔면 잘리지는 않는다. 한 대 파는 건 쉽다. 남들보다 깎아주면 되기 때문이다. 한 달에 10만 원만 자신의 기본급에서 손해 보면 된다.
컴퓨터를 켠다. 모니터의 빈칸에 SAM이라고 친다. 일본 고에이 사의 로고가 뜨고 잠시 후, 화려한 삼국지 초기화면이 뜬다. 그가 저장해둔 파일을 불러오자 AD 220년 가을이라는 메시지가 나타난다. 그는 서서를 손권에게 보내 강화를 체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서서가 고개를 조아리고 그의 명령에 복종한다. 담뱃재가 그의 손에서 툭 떨어진다.
손권은 강화에 동의했다. 그는 다시 밀사를 보내 함께 위나라를 치자고 제안한다. 위연이 지키고 있는 10번 주가 표적이다. 산동이다. 산동을 차지하게 되면 위나라의 허리는 반으로 동강나게 된다. 다시 마초와 장비, 그리고 조자룡과 제갈량을 출진시키고 미축으로 하여금 군량을 지키게 하였다. 군량을 빼앗기게 되면 그 즉시 패하게 되므로 강한 장수를 붙여야 하는데도 미축에게 그 일을 맡긴 까닭은 강화를 체결한 오나라의 군대가 합세하기 때문이었다.
전세는 촉오 연합군에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제갈량이 이끄는 최정예 군사 오만, 그리고 주유가 이끄는 삼만의 오나라 군대가 산동으로 진격했다. 위나라는 위연과 안량, 문추가 이끄는 사만 명이 산동성을 수비하고 있었다. 두 줄기의 강이 흐르고 그 사이에 산동성이 있었다. 물에 강한 오나라 군대가 있으므로 그들은 강을 타고 공격할 터이니 제갈량의 군사들은 육지 쪽에서 성을 치도록 하는 것이 합당한 작전이었다.
미축을 최후방에 두고 제갈량은 중진에 서고 장비와 마초, 조자룡으로 하여금 공격에 나서게 하였다. 2면이 물로 막혀 있어 화공을 전개하기도 쉽지 않았다. 안량과 문추가 성 밖으로 나와 미축 쪽으로 다가가다가 장비의 군대와 맞닥뜨렸다. 장비는 안량과 문추를 번갈아가며 공격했다. 안량의 전투력 94, 문추 93, 장비는 99였으니 비록 장비가 혼자라 해도 능히 당해내고도 남음이 있었다. 오나라의 태사자도 장비 쪽에 합세, 문추를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나머지 조자룡과 마초, 그리고 오나라의 주유는 산동성에서 농성 중인 위연을 공격했다.
삐리리릭.
경고음과 함께 북쪽에서 위나라의 지원병이 전투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그는 신속하게 지원병을 이끄는 장수의 이름을 확인했다. 그중 한 장수는 장합. 조조 휘하의 명장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의 장수를 확인하다가 그만 그는 숨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게임을 잠시 중지시키고 한참 동안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Kwan WU. 바로 관우였다.
처음 게임을 시작할 때, 컴퓨터는 묻는다. 어느 제후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유비, 조조, 손권, 동탁, 유장 등 여러 제후 중에서 그는 언제나 유비를 선택하곤 했다. 게임 매뉴얼에는 조조나 손권을 선택해야 쉽게 천하를 통일할 수 있다고 나와 있었다. 왜냐하면 조조나 손권 휘하에는 뛰어난 장수가 처음부터 많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비 휘하에는 단 둘밖에는 없다. 관우와 장비가 그들이다. 나머지 장수들은 게임을 하는 동안 생포하거나 회유하는 등의 방법으로 데려와야만 한다. 그러므로 유비를 선택하게 되면 어려움이 많다. 유비는 전투력도 손권이나 조조보다 약할 뿐더러 지력도 떨어진다. 숱한 어려움을 겪는 동안 관우와 장비는 언제나 함께 있어주었다. 지난 형주성 전투에서 관우를 잃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관우가 이제는 조조의 편이 되어 그를 공격하러 온 것이다. 그는 다시 관우의 신상명세를 불러본다. 현재 관우의 지력은 98, 전투력 99, 카리스바는 99이다. 게임의 모든 장수의 능력은 이 세 가지 척도로 표현된다. 도원결의 따위는 입력되지 않는다. 그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관우에게 귀순의사를 타진해본다. 결과는 거절이다. 이제는 싸우는 수밖에는 없다. 그러면서두 마음 한구석에 이는 분노와 서운함은 어쩔 수 없다.
관우는 남쪽으로 곧장 진군해와 장비를 공격했다. 장합은 산동성으로 들어가서 위연과 합류, 농성에 들어갔다. 이제 남은 길은 관우를 생포하는 길밖에는 없다. 관우 쪽을 보니 현재 아군은 장비와 태사자 둘이고, 적군은 관우, 안량, 문추, 셋이다. 관우와 장비가 일전을 벌이고 있는 한편에서 태사자와 안량, 문추가 일전을 벌이고 있다. 산동성에서는 마초와 조자룡, 주유가 3면에 걸쳐 위연과 장합을 대적하고 있다.
그는 산동성 공략에 참가하고 있는 조자룡과 마초로 하여금 말머리를 돌려 관우를 포위 공격하도록 했다. 게임의 정석대로라면 산동성으로 병력을 집중시켜야만 한다. 성만 점령하면 전쟁에서 승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관우에 대한 배신감이 너무 강했다. 그를 사로잡아야 한다. 잡아서 다시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일념이 합리적 판단을 흐리고 있었다.
촉의 군대가 모두 관우 공격에 집중되자 오나라의 군사들은 산동성 공략에 나섰다. 당연한 일이었다. 오나라, 위나라 모두 컴퓨터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므로 그들은 프로그래밍된 대로, 정석대로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관우는 역시 관우였다. 가을이 되어 날씨가 건조해지자 화공을 전개하여 장비를 공격 하고 불길이 번지자 북동쪽으로 빠지면서 조자룡을 쳤다. 관우가 장비에게 불을 놓다니. 우울했다. 이건 게임일 뿐이라는 생각은 그의 머릿속에 들어서지 않는다. 마침내 그는 중군에 있던 제갈량마저 관우 공략에 투입한다. 안량과 문추는 전투력이 약한 제갈량을 협공한다. 상황은 점차 불리해진다.
삐리리릭.
경보음과 함께 태사자와 주유의 깃발 색깔이 바뀌었다. 깃발 색깔이 바뀐다는 것은 편이 달라진다는 의미였다. 오나라가 그새 위나라와 강화를 맺었다는 뜻이었다. 성을 공략하던 태사자와 주유는 발 빠르게 군량미가 있는 미축 쪽으로 접근한다. 성 안에 있던 장합도 그 뒤를 따른다. 이제 그들은 한편인 것이다. 군량을 잃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 비상사태다. 가장 근접거리에 있는 마초를 미축 쪽으로 보냈다. 한발 한발 태사자와 주유의 군대가 미축 쪽으로 다가선다. 북쪽의 마초도 황급히 달려간다. 그러나 태사자가 한발 빨랐다. 태사자는 단박에 총공세로 미축을 공격한다. 본시 문관이었던 미축의 공격력은 고작 60, 오나라의 명장 태사자는 98이다. 마초가 달려왔지만 그새 미축의 군사는 태사자에게 전멸하고 군량미는 불태워졌다. 삐리리릭. 전쟁은 끝났다.
삐리리릭.
후퇴하는 과정에서 마초마저 사로잡혔다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오호장군 중에서 두 명을 잃은 셈이다. 싸움에 패해 후퇴할 때, 적과 근접해 있거나 전투력 이 약한 장수는 쉽게 생포되고 만다.
후, 그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왜 오나라가 배신했을까. 그는 제후 유비의 신상을 검색해본다. 신뢰도가 75에 머물러 있다. 그때 모사(謨士) 제갈량이 화면에 등장해 아뢰던 말이 생각난다. 지난해, 형주성 싸움에서 사마의의 목을 벨 때, 제갈량은 사마의를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장수의 목을 자주 베면 백성들의 신망이 떨어지고 다른 나라 제후들로부터 신뢰를 잃어 신뢰도 수치가 떨어진다고 말했다. 오랜 게임의 경험으로 그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신뢰도가 떨어지는 제후는 부하들로부터 자주 배신당하고 조약도
쉽게 맺지 못한다. 그렇지만 사마의를 벨 때의 쾌감을 거역할 도리가 없었다.
삐리리릭.
갑자기 또 무슨 메시지일까? 그는 화면을 주시했지만 아무런 메시지도 뜨지 않는다. 다시 삐리리릭 하는 소리가 들려서야 그는 그것이 전화벨 소리인지 알 수 있었다. 문득 돌아본 방 안은 낯설었다. 광활한 중원은 온데간데없고 초라한 자신의 방안 풍경만이 생뚱맞게 나타나자 그는 전화벨 소리에 짜증부터 났다.
일주일 동안 사람들은 과연 몇 통의 전화를 받을까. 그는 일주일 동안 많아야 서너 통의 전화를 받는다. 또 그 정도의 전화를 하고 산다. 좀 적은 편이리라. 그러고 보면 그가 그리 사교적이지는 않은 모양이다. 벨이 자주 울리지 않는 만큼, 일단 울리면 놀란다. 아직도 연이 확실히 끊기지는 않은 자들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들은 특히 피곤하다. 무슨 모임들이 그리 잦은가. 그들로서는 한 달에 한 번쯤이겠으나, 그것이 중첩되어 나타나는 그에게는 너무 잦다. 그래서 일단 벨이 울리면 그는 거절의 각오부터 다진다.
받아 드니 낯선 목소리다. 잠시 후에 통화자가 이름을 밝히고 나서야 그는 아하, 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 친구와 그가 함께 일했던 시절은 일 년 정도, 대학교 4학년 때니까 스물세 살 무렵이었을 게다. 게다가 그는 늘 별명으로 불리었으니 그 친구의 본명은 여전히 낯설다. 그 친구의 이름은 달라졌지만 그래도 그는 움츠러들었다. 그 친구는 그에게 있어서 일종의 끈덕진 채권자 같은 존재이다. 잊을 만하면 찾아오고, 찾아오면 그리 유쾌하지 않다. 그 친구가 한 번도 그에 대해서 화내지 않았다는 사실만이 채권자와 그 친구를 구별시키는 특성인데 그것마저 그에겐 불쾌함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가 그 친구에게 무슨 큰 빚을 진 것도 아니다.
―이번 토요일에 우리 애들 모임이 있어.
우리? 한때는 ‘우리’ 였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 일까? 한때 어떤 이념적 경향에 동조했던 이들이 있었고 그도 그중의 일원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가 졸업한 이후 그 모임에 나간 건 기껏해야 두 번쯤 될 것이다. 졸업한 지 사 년째인데 두 번이라면 결코 많은 횟수가 아니다. 그 정도면 더 이상 그에게 전화하지 않아도 괜찮을 횟수가 아닌가.
―무슨 일인데?
―유 모가 결혼했잖아. 집들이를 겸해서 우리 애들 모임을 했으면 해서.
유 모가 결혼했잖아, 라고 그 친구는 그에게 말했지만 그는 금시초문이었고 어쩌면 그 친구도 그가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런 말투는 그가 유 모의 결혼에 대해서 당연히 알고 있었어야 한다는 식으로 들렸다. 그는 자신의 무지를 확인시켜주어야만 했다.
―그래? 유 모는 요즘 뭐 하는데?
―뭐 학원 선생 하고 있다나 봐.
그는 요즘 놀라지 않는다. 총학생회장을 지냈던 형이 아무개 여대에서 잘나가던 멋진 여자와 결혼을 해서 지금은 그녀가 경영하는 학원에서 봉고차로 아이들을 싣고 다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그는 놀랐다. 전국적 학생운동 조직의 부의장까지 하던 사람이 속셈학원에서 봉고차나 몰고 있다니.
그에게 아주 중요한 결단을 요구했던 단과대 학생회장이 자석요를 파는 피라미드 조직으로 넘어갔고 그 과정에서 그의 동기 한 명을 함께 데려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는 놀랐다. 그러나 이제 그는 여간한 일로 잘 놀라지 않는다. 산개전*의 시대로, 생존이 곧 투쟁인 시대로 보고 싶지도 않다. 그냥 무덤덤해졌다. 유 모 역시 학내에서 한 단과대의 학생 회장이었으면서, 동시에 한반도의 재통일을 해보자고 만든(또는 만들어진) 위원회의 장이었다. 단상에 올라서면 자신을 소개하는 인사말이 아주 길었던 친구였다. 수배 기간도 길었고 결국은 실형을 살았을 게다. 그 친구가 지금 학원 선생을 한대서 그가 뭐라고 할 입장도 아니고, 그저 지금의 그로서는 세월이 무상할 따름이다. 그 친구가 결혼을 했고 집들이를 한다는 거다.
―토요일은 안 되겠는데.
―왜?
저렇게 묻는 친구들이 그에겐 퍽 피곤한 통화자들이다. 여전히 그 친구에게는 조직사업을 하던 시절의 냄새가 배어 있다. 그래서 아직도 그들은 친구가 아니다. A란 친구가 조직사업을 한다면 B라는 사람은 사업의 대상일 뿐이다. 그들 나이쯤 되면, 안 되면 안 되는 거다. 내일 시간 있어요?라고 묻는 남자에게 시간이 없다고 대답하는 여자는 시간이 없을 수도 있고 시간을 낼 의사가 없을 수도 있고 둘 다일 수도 있는 거다. 어느 쪽이든 확실한 것은 그 남자와 그 여자는 그다음 날 만날 수 없다흔 것이고 설령 만나더라도 피곤한 만남이리라는 것이다.
―선약이 있어.
그 친구가 조직사업을 할 때부터, 그는 그 친구를 대하는 법을 터득했다. 절대로 구체적인 이유를 대지 않는 것이다. 그 친구가 구체적인 변명에 대해서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돌파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마치 노련한 세일즈맨을 대하듯이 그 친구를 대해야 한다는 게 그동안 그가 터득했던 지혜 중의 하나이다. 물론 그 친구는 성실하고 유능한 친구였다. 그건 좋은 품성이겠으나 그에겐 숨 막히는 기질이었다.
―늦게라도 오지 그러니.
도대체 그 친구는 그에게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스스로도 말쑥한 기업의 샐러리맨이면서, 누가 봐도 ‘애국적 사회 진출’로 봐주지 않을 곳에서 먹고살면서, 학원 선생과 대학원생과 방위병들과 삼성 맨들이 모여서 뭘 하겠다고 그더러 늦게라도 오라는 것 일까. 그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가기 싫어, 라고 말하지 못하는 자신의 느물스러운* 사회적 속성에 대해서, 그리고 기호 뒤편에 숨겨진 의미에 둔감한 그 녀석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가기 싫단 말이다. 그저 한때 운동을 했다는 연으로 만나서 웃고, 떠들고, 술 마시고, 옛날 얘기하고, 먹고사는 얘기하면서, 배 나오고 머리 벗겨진 그 옛날의 4·19세대들처럼 변해가는 순간순간들이 싫단 말이다.
그 친구는 그가 다시 성당에 나가길 원하는 그의 어머니 같았다. 성당에는 신이 없고 헌금통과 고백성사실만 있다. 아마 ‘우리 애들 모임’도 그럴 것이다. 결혼한 이들에게는 돈을 모아 주고, 자신들끼리는 거짓 고백을 하고 보속*을 받을 것이다. 사제는 없다. 그들 모두가 사제다. 의식은 없다. 술이 의식을 대신하리라. 술이 들어가면 지은 죄들을 고백하겠지. 먹고사는 죄, 결혼하는 죄, 자동차를 좋아하는 죄. 미사가 끝났습니다. 나가서 복음을 전하십시오. 복음? 기쁜 소식?
ㅡ봐서 갈 수 있으면 가지. 그치만 못 가기가 쉬울 거야. 근데 넌 결혼 안 하냐?
―올해엔 안 할 생각이야. 넌?::
―난 안 해.
그 친구는 그저 피식 웃었다. 선언들이 무너지는 것을 많이 봐온 그들은 이제 선언에 무감하다. 그래서 그 친구의 웃음에는 좀 너그러울 수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전화선상에서 몇 초의 침묵은 참 견디기 힘들다. 그 친구는 그의 거절이 견디기 힘들겠고 그는 그 친구의 권유가 견디기 힘들다.
―그래 그럼 혹시 모르니까 유 모네 전화번호 알려줄게. 제발. 그 친구는 정말 끈질긴 친구였다. 이제 그가 그 모임에 나가지 않는 책임은 오로지 그에게 전가된 것이다. 그 친구는 그가 어떻게 반응하든지 자신의 책임을 완수하면 그만인 것이었다. 누군가(아마 한 명도 묻지 않겠지만) 그에게 연락했냐고 묻는다면 그 친구는 연락했어, 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그 친구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다. 그 친구는 모임을 통보했고, 늦게라도 올 수 있도록 전화번호까지 일러주었던 것이다. 전화번호를 받아 적으며 그는 자신의 두려움에 대해서 생각했다. 도대체 난 무엇이 두려운 거지? 그들도 다 나처럼 사는데. 산처럼 의연하게 버티는 녀석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래서 누군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면 그의 이 신경증적인 반응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가서 편안하게 아늑하게 그 옛날 교문 앞에서 쇠파이프를 들고 전경들을 타격하던 전설적인 무용담이나 떠들면서 술이나 퍼마시면 되는데……
아니다. 얘기는 간단한 것이었다. 바로 이 전화 때문이다. 녀석과 그가 나누었던 대화 속에서 형성되었던 불쾌하게 끈적거리는 이 기류 때문이다. 감색 양복과 꽃무늬 넥타이를 걸치고도 마치 ‘선’을 대듯이 연락하는 그 기질과의 부조화. 서로를 경멸하고, 때론 연민하면서, 공유하는 것은 과거밖에 없는 사람들이 만나서 이 모든 부조화 속에서 고백성사를 치르는 의식에 대한 예감 때문이다. 고통보다는 고통의 예감이, 패배보다는 패배의 예감이, 페스트보다는 페스트의 예감이, 사랑보다는 사랑의 예감이,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그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는다.
산동성 싸움은 치명적이었다. 그것을 계기로 오나라와 위나라는 다시 강화를 맺었고 백성들의 충성심은 10포인트 하락했다. 23번 주에서는 모반이 일어나 새로운 제후가 나라를 세웠다. 유비의 카리스마 지수는 점차 하락해서 이제는 70선 아래로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이럴 때는 전쟁을 중지하고 내치에 주력해야 한다. 치수와 농경에 주력하면서 장수들과 백성들을 다독거려야 한다. 그리고 다른 나라와는 강화를 맺어야 한다. 그렇게 지루한 몇 년을 보내야 한다.
그러나 이미 카리스마 지수가 떨어진 유비의 강화 제의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전쟁이 끊이지 않을 것이며 위나라와 오나라, 그리고 다른 군소제후들도 틈만 있으면 유비와 전쟁을 벌이려 할 것이었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변방의 주들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 주를 넘겨주고 장수들로 하여금 군량과 돈을 싸그리 쓸어 오도록 하는 것이다.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 러시아가 썼던 전략이다. 그러고 나서 힘을 기르는 것이다. 천하통일은 그때 시작해도 늦지 않다. 그래 차분해지자. 그게 가장 합리적인 대안이다.
그가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한참을 생각하다 전화를 받았다.
―내가 너 거기 있을 줄 알았다. 너 이 빌어먹을 놈의 자식아. 회사가 밥을 공짜로 처멕여주는지 알아? 삐삐를 치면 응답을 해얄 거 아냐? 너, 삐삐는 네 돈으로 샀냐? 회사에서 차 팔라고 달아준 삐삐차고 어디서 자빠져 있는 거야? 너 당장 이리 못 와.
지점장이었다. 그는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내가 이 인간에게 무에 그리 큰 잘못을 했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그의 악다구니에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더 화가 났다.
―상담하러 나왔다가 밥 먹으러 잠시 들렀습니다. 곧 들어가겠습니다.
―밥이고 죽이고 간에 당장 들어와. 안 그러면 삼시 세끼 다 집에서 밥 먹 게 해줄 테니까.
전화가 툭 끊겼다. 그는 담배 한 대를 깊이 피워 물며 그의 반지하 셋방 속으로 주먹만 한 햇빛을 들여보내주는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나서 그는 다시 자판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는 맹장들을 모두 한 주에 모으기 시작했다. 합리적 대안? 웃기고 있네. 조자룡, 장비, 제갈량, 그리고 충성도 낮은 여포. 그리고 유비 자신을 직접 출정시켰다. 한 번의 싸움에 다섯 명의 장수밖에는 출진시킬 수 없는 게임의 룰을 잠시 원망하고 나서 그는 산동성으로 진격했다. 이제 산동성의 영주는 관우로 바뀌어 있었다. 산동성으로 다가가는 도중에 가장 먼저 맞닥뜨린 장수는 위연. 그는 조자룡과 여포로 하여금 단번에 총공격으로 위연을 공격토록 하였다. 이 개새끼. 배신자. 반골. 삐리리릭. 격렬한 비프음이 컴퓨터에서 울려 나오고 있었지만 그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위연. 뒤통수가 갈라진 채 튀어나온 자. 힘만 세고 머리는 없는 놈. 차 못 파는 게 어째서 내 죄냐? 차만 좋아봐라. 길 가는 거지에게도 할부로 팔 수 있어. 내가 너에게 전생에 무슨 그리 큰 죄를 지었기에 날 그리 못살게 구는 거야? 이놈의 막장 인생이 나도 지긋지긋해. 이 사디스트 자식아.
삑삑삑삑. 평소와는 다른 소음이 나서 그는 정신을 차렸다. 이미 위연의 군대는 여포와 조자룡에게 전멸한 지 오래였던 듯, 모니터에 위연의 부대를 표시하는 기호가 사라져버리고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가 요란하게 반복적으로 두들겨댔을 자판 때문에 컴퓨터가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조자룡과 여포의 군사도 각기 이천 명 가량 줄어들어 있었다. 그는 계속 군대를 진격시켜 산동성으로 다가갔다. 산동성에서 하후연이 나와 군량미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는 장비를 시켜 하후연에게 총공격을 개시했다. 장비의 군사가 반으로 줄고 하후연도 비슷했다. 조자룡더러 장비를 돕게 하여 하후연을 전멸시켰다. 자 이제 남은 것은 관우뿐이다. 모든 군사의 말머리를 산동성으로 향하게 했다. 그때 쯤 예상했던 대로 위나라와 오나라의 지원군이 도착했다. 두 나라의 총 병력은 십일만. 아군은 이미 두 번에 걸친 총공격으로 만 명을 잃었으니 사만.
그만 후퇴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모사 제갈량이 진언했으나 그는 무시한다. 장비와 조자룡, 그리고 여포는 산동성을 포위한 채 공격 중이다. 오나라 군대와 위나라 군대가 이들을 다시 포위하는 바람에 갇힌 것은 오히려 장비와 조자룡, 여포였다. 유비 자신과 제갈량은 산악지형을 등지고 군량미를 보호하고 있다. 적들은 한발 한발 유비와 제갈랑 쪽으로 다가서고 있다.
삐리리릭.
여포의 깃발이 바뀌었다. 충성심이 낮은 여포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오나라로 투항해버렸다. 그는 오나라의 장수가 되어 함께 있던 조자룡을 공격한다. 조자룡과 장비가 분투하는 동안 성 안의 관우가 불을 놓았다. 장비와 조자룡의 군사들이 삽시간에 사라져간다. 그들의 비명 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군량 쪽으로 다가오는 태사자와 주유, 그리고 하후돈을 향해 불을 놓았다. 유비는 산악을 넘어 그들의 후면으로 다가간다. 유비의 전투력은 고작 65. 그들의 상대가 되지 않는 터. 그러나 유비는 태사자를 공격한다.
삐리릭. 조자룡이 전사했다. 이어 군사가 오백 명밖에 남지 않은 장비가 화공에 이은 관우의 공격으로 전사. 싸움은 절망적 이다. 유비는 태사자와 일전을 벌이는 동안 만 명의 군사 증 벌써 오천을 잃었다. 제갈량은 아직 무사하다. 그는 화공을 적절히 사용, 적군으로 하여금 아예 공격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그의 지력은 100. 당대 최고의 지략가다.
군량미 공격을 포기한 주유와 여포, 그리고 공성군을 섬멸한 오나라와 위나라의 병사들이 일제히 유비에게 달려든다. 유비는 4면에서 공격을 받으며 싸운다. 요란한 비프음. 드디어 제갈량이 군량을 포기하고 주군의 위기를 구하러 달려온다. 삐리리릭. 태사자가 총공격을 해온다. 태사자가 죽든 유비가 죽든 이제 둘 중의 하나다. 결과는 명약관화하다. 유비의 군사가 2000, 1500, 800, 300, 100으로 줄어든다.
싸움은 끝났다. 모니터는 황혼이 지는 무렵, 망나니에 의해 목이 떨어지는 유비의 모습을 삼차원 그래픽으로 보여준다. 그는 한동안 그 모니터를 망연히 바라본다. 그러고는 고리 모양으로 걸려 있는 넥타이를 꺼내 목에 건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목을 조인다. 때묻은 셔츠의 깃이 그의 목에 완전히 밀착할 때까지. 그런 후에 그는 컴퓨터의 전원을 끄고 자신의 방을 한번 둘러본다.
그는 언제나처럼 마을버스를 타고 고개를 얼마간 숙인 채 다시 영업소로 돌아간다. 그가 이미 죽여버린 위연에게로.
장마철인데도 여전히 비는 내리지 않고 그의 게임도 계속된다, 언제까지나.
『리뷰』 9호(1996년 겨울) ; 『호출』 (문학동네 1997)
김영하(金英夏)
1968년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연세대 경영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5년 계간 『리뷰』 에 「거울에 대한 명상」 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도시적 감수성과 속도감 있는 문체로 현대 도시인의 고독과 단절, 죽음에 대한 욕망, 가치 파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세태 등을 그려왔다
소설집 『호출』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오빠가 돌아왔다』, 장편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아랑은 왜』 『검은 꽃』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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