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말에 이르러 미국은 베트남에서 패배가 점점 분명해지기 시작했으며 심각한 재정적자와 반전시위에 정권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이런 시점에서 아시아 전략은 불가피하게 수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로 돌변합니다.
1969년 미 대통령에 취임한 닉슨은 베트남 전쟁의 종결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합니다.
그 해 7월 해외 주둔 미군의 단계적 철수, 동맹국의 자주 국방 노력 강화 등을 골자로 하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합니다.
(베트남 전쟁의 실패로 재정악화에 놓였던 미국으로서는 냉전유지에 본인들 부담만으로는 어려움을 느끼고 동맹국의 국방력강화를 강요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택한 동북아 전략이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입니다.
중국을 반소 진영에 끌어들임으로서 미중일 대 3각 동맹을 실현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이미 한미일의 소 3각 동맹을 구축한 상태였지요.)
그러나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한반도의 대립관계 였던 것입니다.
이에 미국은 한반도에서 제한된 긴장 완화 정책을 추구하기 시작하였고 주한 미 대사를 통해 남한정부가 남북대화를 시도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와 동시에 미국은 중국과의 긴장완화 시도 노력으로 주한미군의 부분적 철수를 개시합니다.(유명한 ‘핑퐁외교’가 실현되던 시점이 이 시기입니다.)
한편 이승만에 이어 통일노력을 불법으로 막고 있던 박정희의 국내사정은 어땠을까요?
이 시기 미국의 압박에 허수아비 정권이었던 박정희가 끌려 다닐 수 밖에 없던 것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박정희는 국내에서도 정치적 위기상황을 맞이하며 어떠한 돌파구라도 필요하던 시점입니다.
1969년 국회 별관에서 공화당 의원들만 모아놓고 3선 개헌안을 통과시켜 장기 집권 의도를 노골화 하였던 박정희는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사실상의 패배를 맛보게 됩니다.
<이번이 민주적 마지막 선거>임을 선언한 김대중에 온통 불법유세와 불법선거로도 46%라는 지지율을 빼앗기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곧 바로 이어진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신민당에 89석을 빼앗겨 민심이 떠났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또한 1970년 전태일의 분신으로 민중 운동 역시 폭발적으로 고양됩니다.
1971년 경기도 광주에선 서울에서 강제 철거당한 주민들의 데모로 광주가 6시간 동안 주민들에게 장악당하기도 하였으며 한달 뒤 에는 한진 상사 파월 노동자들이 임금 체불에 항의하여 격렬한 투쟁을 벌였고 영세 상인 노점 상인들 역시 과중한 세금부과에 본격적으로 불만을 토로하며 철시,시위등의 집단행동에 돌입합니다.
1971년 부터는 대학내에서도 교련교육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데모가 시작되었으며 2학기 부터는 전국 대학에서 교련 철페와 현역 교관 철수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집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10월부터 서울 전역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특별 명령을 발표합니다.
서울 시내 대학교정에 군인을 진입시켜 학생들을 연행 구속하였으며 문교부에서는 시위 학생들을 제적처리 하였고 이들을 곧바로 입영 조치하여 버립니다.
또한 대학의 각종 서클 조직을 해체하였으며 각종 간행물을 폐간 조치하여 버리는 엄청난 탄압을 가합니다.
권력의 나팔수 역할을 하던 언론에서도 신문사 기자들이 주축이 되어 언론 자유 수호 선언을 발표하고 권력의 간섭을 반대하는 집단 반발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에 자극받은 권력의 시녀 사법부에서도 양심적 판결이 내려지기 시작하는데 1971년 신민당사 농성 사건, 월간 <다리> 필화 사건 관련자등을 무죄 판결을 내려 박정희에 정면으로 맞서며 정치적 타격을 입힙니다.
1971년 8월 서울대 교수 600여명 으로부터 시작된 사학의 자주화 선언은 전국의 국공립 대학은 물론이고 사립 대학 교수들까지 동참하여 박정희를 압박합니다.
박정희는 이런 민중의 요구를 묵살하고 무자비한 탄압으로 제압하려 합니다.
1971년 12월 국가 비상 사태를 선언하고 국가 보위에 관한 특별 조치법을 전격 통과시켜 엄청난 비상 대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합니다.
이 법은 국가 동원령 선포, 옥외 집회 및 시위 규제,언론 출판에 대한 조치,노동자들의 단체 행동권 규제,군사상의 목적으로 세출액 조정가능등 상상을 초월하는 무자비한 악법입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도 민중의 저항을 잠재울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점점 더 악화되어 가는 국내사정에 전전긍긍하던 박정희는 그 돌파구를 남북대화에서 찾으려 시도합니다.(비슷한 시기에 미국의 압박 또한 작용하였던 것입니다.)
1970년 8월 15일 박정희는 대북 협상의 용의가 있음을 천명하였으며 이에 대하여 북한은 1971년 8월 6일 남한의 모든 정당 사회 단체 및 개별적 인사들과 접촉할 용의가 있음을 표명합니다.
(이는 남북분단이후 남한에서 제기한 최초의 남북 협상 제의 였던 것이고 북한은 계속적으로 남북협상에 대한 제의를 해왔던 바이라 쉽게 받아들일 수가 있던 것입니다.)
이에 1971년 9월부터 남북 적십자 회담이 열려 일년동안 41회의 교섭이 진행되는 등 회담의 초기는 순조로운 출발을 보입니다.
그러나 회담은 얼마 가지 않아 난관에 봉착하는데 그것은 이산 가족 상봉에 대한 상호의견 차이때문 이었습니다.
북한은 아무런 제약없이 자유롭게 이산가족이 왕래 및 상봉할 수 있도록 보장하여야 한다 주장한 반면 남한은 정부의 알선을 받은 이산 가족에 한해 상호 접촉을 허용한다 맞서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남북 적십자 회담이 난관에 봉착하였을 무렵에 이후락의 평양방문이 성사되었던 것이고(1972.5) 상호간의 비밀회담이 추진되어 7.4남북 공동 성명 발표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7.4남북 공동 성명은 경위와는 상관없이 온 겨레의 가슴에 통일의 열망을 가득 채웠고 전세계의 이목을 한반도에 집중케 하였습니다.
특히 공동성명이 합의한 조국 통일 3대 원칙은 남북 협의에 기초하여 전 민족 앞에 선언한 것으로서 오늘날까지도 민족적 합의와 국제적 지지를 넓히며 한민족 공동 통일 원칙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조국통일 3대원칙이란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원칙을 이루자는 말로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적으로 해결한다.(주한 미군 철수 문제가 걸림돌이 됩니다.)
둘째, 통일은 무력으로 이루려 해서는 안되며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반도의 전쟁위험 요소를 제거해야 하는데 이는 군비 축소 및 핵전쟁 방지를 위한 비핵화를 말합니다.
특히,1976년부터 연례적으로 행해지던 팀스피리트 훈련은 핵전쟁까지 상정된 종합 군사 훈련으로서 방어훈련이 아닌 공격훈련으로서 이에 대한 문제가 제기됩니다.
또한 휴전상태가 아닌 평화상태를 유지키 위한 평화협정 체결에 대해서도 논의됩니다.)
셋째, 사상과 이념을 초월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한다는 원칙입니다.
(민족 내부의 적대 의식, 대결의식을 제거하고 민족의 하나됨과 전민족의 단결을 강조합니다. 국가 보안법 문제가 걸림돌이 됩니다.)
민족 분단이 현실로 다가오던 1948년 백범 김구는 <3천만 동포에게 눈물로 고함>이라는 담화문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3천만 형제 자매여, 조선이 있고야 조선 사람이 있고, 조선 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또 무슨 단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마음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
7.4남북 공동 성명은 민중적 대중적 통일 운동의 뒷받침 없이 남북 집권자간의 밀실 합의로 나온 것이라는 한계 때문에 집권자들 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민족의 열망과는 전혀 다르게 결과로서 나타납니다.
우선 공동성명 발표 직후 남북의 반응을 보면 전혀 다른 대조적인 반응이 나옵니다.
북한은 “조국의 자주적 평화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서 우리 민족 앞에 밝은 서광이 비치게 되었다.”고 논평하고 통일의 3대 원칙에 대해서는 “전체 조선 인민의 한결같은 의사와 염원을 반영한 민족 공동의 행동강령”이라고 적극적으로 평가합니다.
반면 남한은 공동 성명 발표가 갖는 의미를 축소 해석하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듯한 태도를 보입니다.
(어차피 박정희의 목표는 남북통일이 아닌 독재체제의 강화로서 남북통일은 자신의 권력유지와는 상반되는 것이므로 가식적인 행동에 불과하였으니까요.)
공동성명 발표 다음날 국무총리 김종필은 “통일에 대한 환상은 금물이다. 반공법,국가 보안법은 폐기하지 않는다.”라고 발언하고
7월7일에는 “북한을 인정하지 않는다.북한의 전쟁 도발 위험성이 상존하므로 비상 사태 선언은 철회할 수 없다.”고 천명합니다.
또한 박정희 역시 반공 교육 계속적 강화를 지시하였고 공화당 정치인들 역시 담화문을 발표하여 “공동 성명은 조약이 아니며 그런 성격 또한 아니다. 이 몇 장의 성명에 우리의 운명을 점칠 수 없으며 믿을 수 없다.국민은 남북 공동 성명에 대해 기대를 가지지 말라.”고 발언하면서 통일열기를 잠재우기에 힘씁니다.
이런 남북 대화를 뒤에서 계획하고 지시했던 미국은 남북 공동 성명 직후 상해 성명에서 “한반도 긴장 완화와 대화 증진을 모색하려는 한국 정부의 노력을 지지한다.”고만 발표, 공동성명에 대한 지지가 아닌 남한만의 지지를 드러내며 한반도의 통일을 원하는 것이 아닌 제한된 긴장 완화 정책에 있음을 시사합니다.
박정희의 7.4 남북 공동 성명에 대한 태도는 기만적 이었습니다.
북한과의 통일 시도를 일체 불법화하여 막아왔던 그가 자신의 독재체제가 흔들리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민중의 통일 열기를 이용하여 권력 강화를 꾀했던 것으로서 그의 일생과 비교해 본다면 여전히 기회주의적이고 반민족적인 행동이었던 것이지요.
이런 공동성명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인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 선언을 발표하여 그 무시무시한 유신체제를 선포한 것만 보아도 그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역사가 증명을 해주는 것입니다.
<나는 박정희가 적십자 회담을 통해서 북한과 비밀 접촉을 시작할 때부터 이것이 국내에서 그의 독재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계락일 뿐 진심으로 분단된 민족을 통합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했다.>(김형욱 회고록에서.)
이렇게 미국의 정책변화와 박정희의 국내문제가 민족의 가장 큰 희망인 남북통일 노력을 이용한 것이며 그로인해 권력붕괴를 모면한 박정희에 의해 유신체제가 선포되며 대한민국은 독재 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독재를 겪으며 격동의 70년대를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출처 - http://blog.daum.net/jinguoo/5808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