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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20년대 초, 염불하여 목숨 다할 때 일주일간 빛을 낸 평등월 보살
일타, 『기도』 (도서출판 효림, 1995)
내 가족은 친가 · 외가를 모두 합하여 모두 41명이 승려가 되었습니다. 이 41명의 출가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 일족의 출가 이후 가장 많은 숫자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41명의 출가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인가? 아닙니다. 나의 외증조할머니인 이평등월李平等月 보살의 기도와 입적入寂, 그리고 방광의 이적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안성이씨安城李氏 평등월 보살은 일찍이 우리나라 제일의 양반으로 치던 광산김씨 光山金氏 집안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그녀는 남편 김영인金永仁의 아낌없는 사랑 속에서 3형제를 낳아 기르며, 학식 있는 양반집 안방마님으로 부족함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이 60이 조금 지났을 때 갑자기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남편이 남의 빚보증을 섰다가 재산을 대부분 날려버렸고, 연이어 시름시름 앓던 남편은 끝내 저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평등월 보살님이 실의에 잠겨 헤어나지 못하고 계시니 이미 장성하여 가정을 꾸리고 있던 만수萬洙, 완수完洙, 은수恩洙 세 아들은 머리를 맞대고 상의했습니다. “이제 시대는 바뀌었다. 우리가 양반이라고 마냥 이렇게 살 것이 아니다. 노력하여 돈을 벌어야 한다.” 이렇게 결의한 세 아들은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조금도 염려 마십시오. 이제부터 저희가 집안을 꾸려 어머니를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그러고는 남은 재산을 모두 처분하여 목화를 솜으로 만드는 솜틀 기계 한 대를 일본에서 샀습니다. 기계를 발로 밟으면서 목화를 집어넣으면 껍질은 껍질대로, 씨는 씨대로 나오고 솜은 잘 타져서 이불 짝처럼 빠져나오는 당시로선 최신식 기계였습니다. 이렇게 공주 시내 한복판의 시장에다 솜틀공장을 차린 3형제는 작업복을 입고 하루 여덟 시간씩 3교대로 직접 솜틀 기계를 돌렸습니다. 기계는 24시간 멈출 때가 없었습니다. 공주 사람들은 그 솜틀 기계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공주도 이제 개명하는구나!” 하면서 ‘공주개명公州開明! 공주개명!’을 외쳤습니다. 마침내 공주 주변에서 생산되는 목화는 모두 이 공장으로 들어왔고, 산더미 같이 쌓인 목화가 솜이 되어 나오는 양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집안에는 돈이 쌓여 갔습니다. 월말이 되면 3형제는 한 달 번 돈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세 몫이 아니라 네 몫으로 나누었습니다. 남는 한 몫은 누구의 것이겠습니까? 바로 어머니 평등월 보살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돈을 어머니께 직접 드리지는 않았습니다. 어머니께서 한 달 동안 ‘3형제 가운데 누구 집에 며칠을 계셨느냐’에 따라 그 집에 직접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막내아들 집에 열흘을 계셨으면 3분의 1을 막내아들 집에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니 며느리들은 서로 시어머니를 잘 모시기 위해 갖은 정성을 다 부렸습니다. 집마다 어머니 방을 따로 마련하여 항상 깨끗하게 꾸며 놓았고, 좋은 옷에 맛있는 음식으로 최고의 호강을 시켜 드렸습니다. 때때로 절에 가신다고 하면 서로 시주할 돈을 마련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이 집안은 공주 제일의 효자 집안으로 소문이 났고, 벌어들인 돈으로는 논 100마지기를 다시 사들이기까지 하였습니다. 평등월 보살은 신이 났습니다.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매일 평안함과 기쁨 속에서 지내던 할머니가 막내아들 집에 가 있던 어느 날, 한 비구니 스님이 탁발하러 왔습니다. 그 스님을 보자 할머니는 눈앞이 밝아지는 듯했습니다. “아! 어쩌면 저렇게도 잘생겼을까? 마치 관세음보살님 같구나!” 크게 반한 할머니는 집안에서 가장 큰 바구니에다 쌀을 가득 퍼서 스님의 걸망에 부어드렸습니다. 그때까지 비구니 스님은 할머니를 조용히 보고만 있다가 불쑥 말을 했습니다.
“할머니! 요즘 세상사는 재미가 아주 좋으신가 보지요?”
“아, 좋다마다요, 우리 아들 3형제가 모두 효자라서 얼마나 잘해 주는지 …. 스님 제 말 좀 들어 보실래요?”
할머니는 신이 나서 아들 자랑을 시작했고, 며느리 자랑, 손자 자랑까지 일사천리로 늘어놓았습니다.
마침내 할머니의 자랑은 끝에 이르렀고, 오랫동안 아무 소리 않고 듣고만 있던 스님은 힘주어 말했습니다.
“할머니, 그렇게 세상일에 애착을 많이 두면 죽어서 업業이 됩니다.” “업?” 충청도 사람들은 ‘죽어서 업이 된다’라고 하면 구렁이가 된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죽어서 큰 구렁이가 되어 광 안 쌀독을 칭칭 감고 있는 업! 할머니는 그 ‘업’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머리카락이 하늘로 치솟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고 스님! 어떻게 하면 업이 되지 않겠습니까?”
“벌써 업이 다 되어 가는데 뭐 지금 와서 나에게 물은들 뭐하겠소?”
스님은 벼랑을 짊어지고 돌아서서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업만은 면해야 한다’라는 일념으로 5리, 10리 길을 쫓아가면서 스님께 사정했습니다.
“스님, 제발 하룻밤만 우리 집에 머무르시면서 업을 면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스님, 제발 저 좀 살려 주십시오.”
간청에 못 이겨 다시 집으로 온 스님은 할머니가 이끄는 대로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윗목에서 벽을 향해 앉아 말 한마디 없이 밤을 새웠고, 할머니 역시 스님의 등 뒤에 앉아 속으로만 기원하고 있었습니다.
“제발 업이 되지 않는 방법을 일러 주십시오. 제발.”
마침내 날이 밝아오기 시작하자 스님은 할머니 쪽으로 돌아앉았습니다.
“정말 업이 되기 싫소?”
“아이고, 제가 업이 되어서야 하겠습니까? 안 됩니다. 스님. 절대로 안 됩니다. 인도환생人道還生 하든지 극락세계에 가도록 해 주십시오.”
“정말 업이 되기 싫고 극락에 가기를 원하면 오늘부터 행실을 바꾸어야 하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부터 발은 절대로 이 집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하고, 입으로는 ‘나무아미타불’만 부르고, 일심으로 아미타불을 친견하여 극락에 가기만을 기원하시오.”
스님의 ‘집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말씀은 몸단속하라는 것이고, ‘나무아미타불을 불러라’라는 것은 입을 단속. ‘일심으로 극락왕생할 것을 기원하라’라는 것은 생각 단속입니다. 곧 몸(身)과 입(口)과 생각(意)이란 3가지 업이 하나가 되게 염불할 것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스님 다시 한번 자세히 일러 주십시오.”
“보살님 나이가 70이 다 되었는데,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살겠소? 돌아가실 날까지 ‘나무아미타불’을 열심히 부르면 업 같은 것은 십만 팔천 리 밖으로 도망가 버리고, 극락세계에 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오늘부터는 첫째나 둘째 아들 집에도 가지 말고, 이웃집에도 놀러 가지 마십시오. 찾아오는 사람에게 집안 자랑하지도 말고. 오직 이 집에서 이 방을 차지하고 앉아 죽을 주면 죽을 먹고, 밥을 주면 밥을 먹으면서 ‘나무아미타불’만 외우십시오. 그리고 생각으로는 극락 가기를 발원하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까?”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할머니는 다짐하면서 큰절을 올렸고, 스님은 옆에 놓아두었던 삿갓을 들고 일어서서 벽에다 건 다음 슬며시 방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걸망도 그대로 둔 채 …. “변소에 가시나 보다.” 그러나 한번 나간 스님은 영영 돌아올 줄 몰랐습니다. 사람을 풀어 온 동네를 찾아보게 하였으나 ‘보았다’라는 사람조차 없었습니다. ‘아! 그분은 문수보살님이 틀림없다. 문수보살님께서 나를 발심시키기 위해 오신 것이 분명하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더욱 발심發心이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방의 가장 좋은 위치에 스님의 삿갓과 걸망을 걸어 놓고, 아침에 눈만 뜨면 몇 차례 절을 올린 다음 ‘나무아미타불’만 불렀습니다.
어느덧 할머니는 앞일을 내다보는 신통력神通力이 생겼습니다. “어멈아! 오늘 손님이 다섯 온다. 밥 다섯 그릇 더 준비해라.”
과연 끼니때가 되자 손님 다섯 사람이 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루는 막내아들을 불러 각별히 당부하였습니다.
“얘야. 너희들 공장에 화기火氣가 미치고 있다. 오늘은 기계를 돌리지 말고 물을 많이 준비해 놓아라. 위험하다.”
그 말씀대로 세 아들은 아침부터 솜틀 기계를 멈추고 물통 준비와 인화물질 제거에 신경을 썼습니다.
그런데 오후가 되자 바로 옆집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둘러 옆집 불을 껐습니다. 만약 목화솜에 불이 옮겨붙었다면 솜틀공장은 삽시간에 잿더미로 변하였을 것입니다. 다행히 할머니의 예언으로 조금도 손상을 입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웃집의 피해까지 줄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도 외증조할머니의 말씀에 따른 것입니다. 손녀인 어머니가 결혼 적령기가 되었을 때, 외증조할머니는 큰아들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북쪽으로 30리가량 가면 구름내(雲川)라는 마을이 있다. 김창석 씨네 둘째 아들과 네 딸 상남上南이와는 인연이 있으니, 찾아가서 혼사를 이야기해 보아라.”
이렇게 외증조할머니는 가 보지도 않고 신통력으로 나의 부모님을 결혼시켰습니다. 마침내 주위에서는 외증조할머니를 일컬어 ‘생불生佛’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어느 날부터인가 외증조할머니가 ‘나무아미타불’을 부르지 않고 ‘문수보살’을 찾은 것이었습니다. 갑작스러운 변화를 걱정한 아들 3형제는 인근 마곡사의 태허太虛(鏡虛 대선사의 사형) 스님을 찾아가 상의했습니다. “문수보살을 부르는 것도 좋지만, 10년 동안이나 아미타불을 불렀으면 끝까지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 좋다. 그리고 앞일을 자꾸 예언하다 보면 자칫 마섭魔攝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이라는 글을 써줄 테니 벽에 붙여놓고 ‘나무아미타불’을 항상 부르도록 말씀드려라.”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 언제나 대광명을 뿜어낸다는 이 글을 보면서 할머니는 다시 ‘나무아미타불’을 열심히 불렀습니다. 그리고 앞일에 대해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부지런히 염불 기도를 하다가 할머니는 88세의 나이로 입적入寂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야말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7일장을 지내는 동안 매일같이 방광放光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낮에는 햇빛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으나, 밤만 되면 그 빛을 본 사람들이 ‘불이 났다’라며 물통을 들고 달려오기를 매일같이 하였습니다. 그리고 문상객으로 붐비는 집안 역시 불을 켜지 않아도 대낮같이 밝았습니다.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 그야말로 외증조할머니는 염불 기도를 통하여 상방대광명을 이루었고, 그 기적을 직접 체험한 가족들은 그 뒤 차례로 출가하여, 우리 집안 친가 · 외가 41인 모두는 승려가 되었습니다. 몸과 말과 뜻을 하나로 모아 염불하고 기도하는 공덕. 그 공덕을 어찌 작다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부처님의 불가사의가 어찌 없다고 하겠습니까? 외증조할머니의 염불 기도는 우리 집안을 불심佛心으로 가득 채웠고, 41명 모두를 ‘중노릇 충실히 하는 승려’로 바꾸어 놓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나미아미타불!
卍 보정의 꼬리말
일타 스님이 밝힌 외증조모의 방광 이야기는 이미 많이 알려져 유명하다. 이평등월 李平等月 보살의 염불 수행과 이적은 보살이 극락에 갔다는 것을 아주 뚜렷하게 보여주는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막상 이 실화를 『극락 간 사람』에 실으려고 하니 난처한 일이 생겼다. 이평등월李平等月 보살이 언제 세상을 떴는지 날짜는 물론 연도도 나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보정의 꼬리말을 달 필요가 없을 만큼 완벽하지만 ‘언제’ 문제로 꼬리말을 달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평등월 보살이 극락 간 해를 정확하게 밝힐 수가 없지만 적어도 1924년 이전이라는 기록이 있다.
일타 스님 집안 41인 승려 가운데 가장 먼저 출발한 분은 (일타) 스님의 큰외삼촌인 김학남金學南으로, 일타 스님 어머니인 성호性浩 비구니의 바로 밑 동생이다. 큰외삼촌은 할머니 평등월 보살의 기이한 입적을 접하고 열심히 절에 다니다가, 23세의 나이로 1924년에 출가하였다. (김현준, 『아! 일타 큰스님』, 효림, 2001, 20쪽).
그러므로 보살이 극락 간 해는 1942년 이전이 된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는 ‘1920년대 초’로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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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공덕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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