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소주의 아름다운 풍광
밤
3경에 소주에 도착을 했으니 제대로 보았을 리
없는데 부교나 홍문 촘촘한 집들의 형체만으로도 소주란 도시를 최부는 바로 알아보았던 모양이다. 이른바 동남방의 큰
도시. 이방인 마르코폴로에 비친 소주도
특별했다. 그는 베네치아가
고향이다. 흡사 베네치아를 빼어 닮은 수로의 도시
소주를 보고 자신의 고향을 떠올렸을 것이다. 북경에서 떠나기로 작정을 하고서도 다시 들른
소주가 아닌가. 최부보다 200년 앞선 때 마르코 폴로는 소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비단이 대단히 많이 생산되며 사람들은 교역과
수공업으로 살아간다. 비단으로 된 옷감을 많이 만들어 옷을 해
입는다. 대상인들이 있고 도시가 얼마나 큰지 둘레가
40마일에 이른다. 이 도시에는 돌로 만든 다리가 거의
6천개나 있으며 그 아래로는 갤리선이 충분히
지나갈 정도다.>
중국 사람들조차도
소주는 번성해 사방교외에 빈 땅이 없고 그 풍속은 사치스러우며 검소함이 적다고 평한 소주 땅을 드디어 최부가 밟는다. 최부는 다음과 같이 글에 적고
있다.
<소주는 곧 옛날 오왕(吳王) 합려(闔閭)가 오자서(伍子胥)로 하여금 성을 쌓아 도읍 했던
곳입니다. 성 둘레는 또한 항주와
같았으며, 부치와 오현(吳縣)·장주현(長洲縣)의 치소도 모두 성안에
있었습니다. 성의 서문(胥門)에 옛날에는 고소대(姑蘇臺)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역이
되었습니다. 물 속에 나무를 세워
황주(滉柱, 제방을 방호하기 위한
목책)를 만들고 돌 제방을 3면에 쌓았는데, 황화루(皇華樓)는 그 앞에 있고, 소양루(昭陽樓)는 뒤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동쪽에는 체운소(遞運所)가 있고, 또 산해진(山海鎭)이 있었는데, 태호의 물은 석당을 경유하여 운하로 흘러
들어가고, 성 동쪽을 거쳐 서쪽으로 가서 역에 도달하고
있었습니다. 오자서(伍子胥)가 살았던 곳이기 때문에 또
서호(胥湖)라 부르는데, 호수의 넓이는 백여 보 쯤 되었으며
북쪽으로는 시가지를 둘러싸고 돌고 있었는데, 햇빛이 반사되니 난간 사이로 빛이 떠서
움직이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성 서쪽의 여러 산 가운데
천평산(天平山)을 고을의 진산으로 부르고
있었으며, 그 여러 산 중에서 경관이 뛰어난
곳이, 영암(靈岩)·오오(五塢)·앙천(仰天)·진대산(秦臺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산들이 질서 정연히 줄지어
있었습니다. 역이 우연히도 그곳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경치가 빼어났습니다.>
최부의 글에 나와 있는
것처럼 소주는 원래 고소(姑蘇)산
이라는 명칭에서 유래한다. 고소에 蘇자가 바로 소주의 蘇자와 같지 않은가. 오나라 합려는 재상인 오자서를 믿고 신임하였던
모양이다. 성을 쌓게 하고 오자서의 서(胥)자를
따서 서호(胥湖)라
하고 성의 출입문을 또한 胥
자를 따서
서문(胥門)이라
하고 고소산의 고소대(姑蘇臺)를
또한 서문에 옮겨다 놓았으니 말이다. 합려가 오자서의 충언을 끝까지 들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최부가 말한 내용을
참고하고 지금의 소주성과 대비를 해 보았다. 최부는 소주의 서쪽의 운하에서 동북으로
서(胥)강을 따라 올라 소주의 남단에 도착하여
서(胥)강과 합류한 외성하, 즉 네모꼴 소주 성을 둘러싼 해자를 복쪽으로
올라가 고소대가 있었다는 바로 서문(胥門: 중국말로 쉬먼/ 그림 참조)밖 고소역에 머물렀던
것이다. 고려말 충신 정몽주(鄭夢周)는바로 이 "姑蘇臺(고소대)"를 배경으로 시를
읊었다. (<동문선>권22 칠언 절귀에 나온다.)
衰草斜陽欲暮秋(이울어진 풀은 저녁볕에 기울어
저물려는데)
姑蘇臺上使人愁(고소대 위에선 사람을 애끓게
하네)
前車未必後車戒(앞 수레 엎어진 것을 뒷 수레가 경계하지
못하여)
今古幾番미鹿遊(지금까지 들 사슴들이 여기서 몇 번이나
놀았던고!)
정몽주가 할 일이
없어서 남의 고사를 따다가 시를 읊었을까? 전국시대 오나라 오자서가 오나라 임금이 미인
서씨(西施)를 데리고 향락에 빠졌으므로 오래지 않아서
망할 것을 탄식하기를, '마침내 고소대에 들 사슴들이 노는 것을
보리라!"하더니, 과연 오나라는 그 월나라의 군사들에게
망했는데, 그 뒤에 그 땅에 나라를 세운이도 그것을
거울삼아 경계할 줄 모르고 여러 나라가 망하였음을 탄식한 노래다. 이것을 단순한 고사의 인용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그곳이 곧 조선이 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의 인식인지는 오로지 독자의 식견의
수준에 달렸다.
그리고 소주 성의
해자간 거리는 백여 보 정도이고 바로 근접하여 황화루, 소양루,채운소가 있었다고 최부는 말하고
있다. 이 해자의 물들은 어찌 순환을 하는
걸까. 최부는 이에 대해 지도상에 현재는 석로라
하는 석당을 거쳐 태호루부터 유입된 물이 해자의 동편을 뺑 돌아 고소역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북쪽으로는 지금도 아름다운 초록이 펼쳐진
산들이 그대로 있다는데 산들 이름까지 정성들여 최부는 적어 놓았다. 2월 17일 그 날 낮에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 날 밤
3시경 달빛을 이용하여 노를 저어 잠시 외출을
한다. 그때 그가 본 정경이다.
<창문(閶門)을 지나니 창문 밖에는
통파정(通波亭)이 호수를 굽어보고
있었는데, 옛 이름은 고려정(高麗亭)이라고 합니다. 송나라 원풍(元豊, 1075~85) 연간에 세워진 것으로 고려의 조공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정자 앞에는 가옥과 담장이 연이어져
있었고, 배가 빗살과 같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접관정(接官亭)에 이르러 배를
머물렀습니다. 정자의 서쪽을 바라보니 큰 탑이 있었는데
즉, 한산선사(寒山禪寺)로 이른바 “고소성 밖 한산사”라고 합니다. 그 지명을 물으니 풍교(楓橋)라 했고, 그 강 이름을 물으니
사독하(射瀆河)라고 하였습니다.>
지도에서 보듯이 쉬먼에서
나와 환한 달빛에 의지하고 외곽으로 벗어나 경항운하쪽으로 다시나와 북으로 거슬러 올라가 한산사를 본 것이다. 가는 도중 어딘가 통파정이란 고려정이 있는가 본데
아마도 고려정을 본 조선 사람은 최부가 마지막이 아니었다 싶다. 지금은 흔적을 알 길이 없다고
한다. 아무튼 사독하라는 물위에 자리한 풍교에 위치한
한산사를 최부는 보았다. 지금도 그 동네는 풍교라 하고 한산사도 예전
그대로 현존한다. 그런 한산사를 후세의 문인들은 모두 기억을 하고
있다. 최부 역시 이를 몰랐을 리
없다. 큰
절이라고는 하지만 그것 때문 기억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한산사를 유명케 한 사람은 소주시인 장계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
필 한 획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지 나는 그로 다시금 새긴다.
장계가 지은
풍교야박이라는 시, 그는 이 시 한편으로 중국의 역대 유명 시인
반열에 오를 수 있었고, 무엇보다 이 시가 일본 학생들의 교과서에 실리는
바람에 일본관광객들이 중국 소주에 와서는 꼭 들려가는 필수 관광지로 되어 있다고 하니 문화관광에도 한 몫을 톡톡히 한
셈이다. 장계의 이 시를 명나라 시대의 명필
문징명(1470~1559)이 썼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글씨가 희미해 져서
청나라 말 유월(1821~1906)이 글자를 보완해서 새 비석을 새웠다는 내용이
후기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楓橋夜泊
/ 장계
月落烏啼霜滿天
월락오제상만천
江楓漁火對愁眠
강풍어화대수면
姑蘇城外寒山寺
고소성외한산사
夜半鐘聲到客船
야반종성도객선
달은 지고 까마귀 우니
천지에 찬 서리가 내리고
강풍교 고깃배 불빛
바라보며 시름에 겨워 조는데
고소성 밖 한산사에서
울리는 한밤 중 종소리가 객선에까지 들리누나.
장계는 당나라 현종 때
사람. 실력이 없었는지. 운이 없었는지, 아님 줄이 없었는지 몇 번이나 과거에 낙방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에 지은 시. 그
나이 56세였다니 당시 나이로는 이미 노쇠한
터. 풍교 근처의 부두에 정박하다 듣게 되는 한산사의
종소리는 그로 하여금 불후의 명작을 낳게 만들었다. 실제 그동네 이름은 풍교가 아니었는데
楓橋夜泊
이라는 이시의 아름다움을
받아들여 풍교라 하였다고 한다. 아무튼 새벽 3시경
최부는 한산사라는 곳을 달빛에 기대어 그곳을 찾았다. 나는 이 대목을 달리 보고
있다. 불교를 억제하던 그 시대 절을 찾는 소회를 온전히
적을 수는 없는 처지 이에 대한 감상을 적을 수는 없었다. 그는 지친 몸으로 먼 길을 가는
운수납자였다. 누구든 아픔에 젖어 있을 때 그것이 아니라도
외롭다 싶은 때 잠은 오마지 않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산사의 범종 소리는 그야말로 복받치는 서러움과 형언할 수 없는 감동에 젖게
한다.
이런 감동은 꼭 불자로서만이 아니다. 익히 알고 있는 중국의 소상팔경에 한산모종(寒山暮鐘)이 들려오는 순간, 그로서는 늦은 밤인데도 나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 역시도 산길을 걷다 범종소리를 들으면 귓전에 닿은 여음이 끝없이 되살아나 상념에 잠기곤 한다. 범종은 천 마디 교언보다도 더 귀한 마음의 빗장을 여닫게 한다. 마음을 어루만지듯 일탈의 문지기로서 불식간에 접어든 자각은 깊은 애수를 부른다. 저 멀리 심산의 늑대가 달빛에 현혹되어 임을 그리며 바보처럼 울어대듯. 그쯤 이끌려 닿는 풍경소리는 단순한 청음이 아니다. 인이 있으니 연이 있다 말하듯 듣는다는 현상이 이제는 아무 상관이 없다.
소리를 보고 빛을 듣는 관음의 길, 그쯤 영혼과 맞닿는 고요한 무형의 형상을 불현듯 마주하지 않을까.사뭇 감상에 젖은 최부는 짧은 외출임에도 소주에 대해 많은 말들을 쏟아냈다. 그의 소주 예찬에 굳이 다른 사족이 필요 없지 싶다. 실크로드를 쫓아 서역 인들이 쏟아져 들어온 이래 세상은 수없이 바뀌었지만 소주 사람들은 상관없이 태평성대를 누렸다. 경치 수려한 곳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면 그만이지 세상이 어떠한들 무슨 상관이 있으며 달리 천당이 존재하겠는가. 그곳이 바로 지상 낙원이며 천당이지. 그는 정말 감격했던 모양이다.
<소주는 옛날 오회(吳會)라고 불렸는데, 동쪽은 바다에 연해
있으며, 삼강(三江)을 끌어당기며 오호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기름진 땅은 천리나 되고 사대부가 많이
배출되었다. 바다와 육지의 진귀한 보물
즉, 사(紗)·라(羅)·릉단(綾段) 등의 비단, 금·은·주옥, 그리고 많은 장인과
예술인, 부상대고(富商大賈)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들었습니다. 예로부터 천하에서 강남을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했고, 강남 중에서도 소주와 항주가
제일이었는데, 이 성(소주)이 더 뛰어났습니다. 낙교(樂橋)는 성안에 있는데 오와
장주(長洲) 두 현치 사이의 경계에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상점이 별처럼 펼쳐져
있었으며, 여러 강과 호수가 많이 흐르고 있어 그
사이로 배들이 관통하여 드나들었습니다. 사람들과 물자는
사치스럽고, 누대(樓臺)는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또 창문과 마두(馬頭, 부두·나루터) 사이에는 초(楚, 호남성)와 민(閩, 복건성)의 상선들이 핍주(輻輳)하여 운집해 있었습니다. 또 호수와 산은 맑고 아름다웠는데 그 경치는
형형색색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