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는 1881년 10월 25일 스페인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 그림에는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너무나 공부를 못해 졸업장을 겨우 받았다. 그 졸업장을 들고 바르셀로나 미술학교에 들어갔는데, 학교 규칙에 적응을 못하고 그만두었다. 그 후 입학한 마드리드의 왕립 미술학교에서도 마찬가지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 중퇴했다. 이때 피카소의 나이 17세였다. 대한민국이라면 이 소년이 ‘세계의 화가’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19세이던 1900년 피카소는 파리에 처음 가보았다. 피카소는 모네 등 인상파 화가들, 고갱의 원시주의, 고흐의 표현주의 그림들을 보게 되었고, 마음속으로 감동과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당시 피카소는 프랑스어를 할 줄 몰랐다. 그에 견주면 우리나라는 우리 말글 구사 능력 신장에는 관심이 없고 어릴 때부터 영어 조기 교육에 목을 매달고 있지만 자신의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업적을 창조해내는 천재는 배출되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이라면 어떨까? 17세의 피카소처럼 그 나라 말도 못하는 청소년을 혼자 외국으로 보내줄 수 있을까?
24세부터 어느 정도 가능성 있는 화가로 파리의 인정을 받게 된 피카소는 26세인 1907년 최초의 ‘입체주의’그림으로 평가받는 〈아비뇽의 여인들〉을 발표한다. 입체주의는 화면이 자연스러운 평면 상태가 아니라 입방체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통적인 원근법도 무시하고, 시선이 한 면에 여러 각도로 배치되기도 한다. 이 역시 기존 회화에 대한 도전 정신을 담고 있다. 게다가 〈아비뇽의 여인들〉은 바르셀로나 아비뇽 사창가 여성 다섯 명의 누드를 화폭에 담고 있다.
대한민국이라면 이런 피카소가 가능할까?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되던 이상의 〈오감도〉가 독자들의 거센 항의로 중단된 일이 떠오른다. 그로부터 30년 후인 1965년에는 반미反美 사상이 깃들어 있는 단편소설 〈분지〉를 발표한 남정현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다. 다시 30년쯤 뒤인 1992년에는 연세대 국문과 교수 마광수가 소설 《즐거운 사라》를 출간했다가 '음란물 유포' 혐의로 수업 중 강의실에서 체포된다.
1937년 피카소는 349×775cm의 〈게르니카〉를 제작했다. 게르니카는 스페인의 소도시로, 독재자 프랑코와 그에 반대하는 공화파 사이의 내전 중 프랑코를 지원하는 독일 비행기의 폭격으로 무고한 시민 2,000여 명이 죽음을 당한 곳이다. 그 무렵 피카소는 파리 만국박람회 스페인관 벽화 제작을 의뢰받아 어떤 그림을 그릴까 고민 중이었는데, 게르니카 비극을 듣고 분노에 차서 전쟁의 비인간성과 민중의 고통을 상징하는 대작 〈게르니카〉를 그렸다. 그러나 독재가 자행되는 조국 스페인에 협조할 수는 없다면서 뉴욕 근대미술관에 작품을 무기한 대여 형식으로 빌려주었다.
대한민국은 어떠했던가? 1967년 6월 17일 우리나라의 중앙정보부는 베를린에서 활동 중인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을 간첩이라며 서울로 납치했다. 파리에서 활동 중이던 세계적 화가 이응노도 강제로 끌고 왔다. 중앙정보부는 고문 등을 거쳐 두 사람을 투옥했지만 간첩죄는 인정되지 않았고, 세계적 압력에 못 이겨 석방하고 말았다. 또 1973년 8월 8일에는 도쿄에 머물면서 독재 정치를 비판하는 야당 인사 김대중을 납치해 동해에 빠뜨려 죽이려다가 미국 비행기가 나타나자 포기하고 서울로 끌고 오기도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지만 피카소는 우리나라의 6·25전쟁을 주제로 한 그림과 벽화도 창작했다. 1951년작 〈한국에서의 학살〉과 1952년작 〈전쟁과 평화〉가 바로 그것이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무장 군인들이 발가벗겨진 임산부와 아이들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광경을 담고 있다. ‘전쟁’과 ‘평화’ 두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는 〈전쟁과 평화〉도 역시 반전反戰을 주제로 하고 있다.
다시, 대한민국은 어떠했는가? 〈두산백과〉에 따르면 〈한국에서의 학살〉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개입한 신천 양민 학살이 창작 배경이란 설 때문에 반미 작품으로 찍혀 1980년대까지 반입 금지 예술품 목록에 오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은 미군 개입 양민 학살 사건을 제재로 한 예술작품을 감상할 자유가 없는가?
6·25전쟁을 전후로 우리나라는 방방곡곡에서 양민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피카소는 〈한국에서의 학살〉의 군인들이 서양인인지 동양인인지, 나아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전혀 파악할 수 없도록 그려놓았다. 머잖아 학살될 것으로 여겨지는 여인들과 아이들도 거주지가 어디인지 가늠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
피카소는 제목에는 ‘한국’을 넣었지만 실제로는 지구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학살 자체를 그림으로 고발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데만 신경을 썼다. 인권 신장을 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좋지 못한 사건이 생기면 감출 생각만 했다. 〈한국에서의 학살〉 국내 전시 금지도 그런 인식이 낳은 ‘나라 망신’이었다.
이런 일을 보면 노장 사상이 왜 무군 사회無君社會를 꿈꾸었는지 헤아려진다. 무군사회는 군주도 신하도 없는 세상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