죠스떡볶이는 2007년 고려대 앞 30㎡(9평)짜리 한 서점의 절반 공간에서 시작한 나상균 대표가 여전히 수장을 맡고 있다. 그런데 왜 이런 루머가 돌았을까? CJ・오뚜기와 기술협약을 맺은 데다, 떡볶이집에 어울리지 않는(?) 깔끔한 인테리어, 고품질의 식재료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성공신화의 주역이 베일에 가려 있던 것도 루머에 힘을 실었다. 죠스푸드 나상균 대표를 만났다. 언론 최초 인터뷰라고 한다. 그간 인터뷰를 고사한 이유부터 물었다.
“좀 쑥스럽기도 하고, 아직 나서서 인터뷰할 만한 시기가 아니라고 봤어요. 성공이라는 게 수치를 대변하는 건 아니지만,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다 보니 이런 루머를 키웠네요. 저 소문처럼 대인기피증이 있거나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웃음)”
서울 안암동에 있는 본사 사무실 곳곳에서는 그의 세밀함이 묻어났다. 회의실 의자는 죠스의 지느러미 모양을 살려 주문 제작했고, 직원용 책상과 서랍은 옅은 브라운과 레드로 통일했다. 종이컵이나 서류함, 심지어 파일에도 죠스푸드 로고를 그려 넣었다. 본사 사무실과 죠스떡볶이 매장의 인테리어가 일관성 있었다. 고려대 앞에 첫 매장을 열 때에도 그가 8개월 동안 직접 톱과 망치를 들고 인테리어를 했다고 했다. “떡볶이 회사를 넘어 외식기업으로 사랑받길 원한다”는 그는 직원들을 위해 ‘죠스문화행사’를 연다. 특급 호텔의 스파, 고급 레스토랑 등을 체험하게 하는 것. 지난주에는 신라호텔 뷔페식당 ‘더 파크뷰’에서 전 직원이 회식을 했다.
죠스떡볶이는 어릴 적 먹던 떡볶이의 맛을 현대적으로 재현했다. 옛날 떡볶이 특유의 향을 살리되, 길고 가느다란 밀가루떡 대신 100% 쌀을 사용해 굵고 짧게 뽑았다. 찐득하게 늘어지지 않고 쫄깃하다. 튀김은 길거리표 튀김과는 딴판이다. 김말이, 만두, 오징어 등 메뉴는 살리되 오징어는 껍질을 벗긴 몸통만 사용하고, CJ와 공동개발한 현미튀김유, 오뚜기와 공동개발한 튀김가루를 사용한다. 가볍고 바삭한 식감을 살리기 위해 개발한 것으로, 죠스푸드 전용이다. 당시 매장이 10개도 채 되지 않던 죠스떡볶이와 CJ의 기술개발 협약은 업계에서 흔치 않은 일이었다. 허무맹랑해 보이는 제안을 들은 CJ의 실무자는 거절했지만 나 대표는 포기하지 않고 운영계획안을 담은 USB를 본부장에게 직접 보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저희가 원하는 바삭함을 꼭 구현하고 싶었습니다. 탕수육은 단단하게 바삭하지만 저희는 가볍게 바삭하기를 원했죠. 현미유는 일반 식용유보다 훨씬 단가가 높지만 영양가도 높고 깔끔하면서 고소합니다. 식용유로 튀기면 콩비린내 같은 특유의 냄새가 있어요. 매운맛 역시 형태가 다양합니다. 저희는 고추장을 쓰지 않고 고춧가루만으로 매운맛을 냅니다. 색깔 내는 고춧가루, 매운맛 내는 고춧가루, 단맛 내는 고춧가루 이렇게 세 가지를 섞어서 씁니다.”
죠스떡볶이는 옛날 떡볶이 특유의 향이 살아 있다. 여기에 죠스떡볶이의 비결이 숨어 있다. 매운맛을 내는 화학성분인 캡사이신을 쓰지 않고 이 향을 내기 위해 연구를 거듭한 결과 찾아냈다.
“유명한 떡볶이집의 떡볶이를 먹고 나면 독특한 향이 남아요. 그 향에 대한 의문이 가시지 않았죠. 그 비결을 찾아내기 위해 할머니들한테 물어보고, 곁눈질로도 보고, 떡볶이집 쓰레기통을 뒤지기도 했어요. 결국 알아냈죠. 어떤 곡물에 비밀이 있었어요. 곡물 상태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맛인데, 매운맛과 합쳐지고 가열되면서 지금의 향이 되죠.”
나상균 대표는 미각이 예민하다. 입맛 까다로운 아버지, 음식 솜씨 없는 어머니를 둔 덕에 외식이 잦았다. 짬뽕 하나를 먹어도 ‘가장 맛있는 집’을 찾아다니는 아버지는 그에게 일찌감치 미각의 세계에 눈을 뜨게 해주었다. 그는 “꿀・백설탕・흑설탕・엿의 단맛이 다 다르다는 걸 훈련을 통해 알았다”고 했다. 가죽 관련 무역업을 하시던 아버지는 그에게 “큰 장사꾼보다는 규모가 작더라도 사업가가 돼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랬던 아버지가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셨다. 충격을 받은 그는 군 복무를 마치자마자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일종의 도피성 유학이었다. 니혼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그곳에서 일본인들의 철두철미함과 디테일을 배웠다. 일본의 애완용품 시장의 잠재력을 본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애완용품 무역회사를 차렸다. 그럭저럭 잘되던 와중에 동물 제약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회사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제의를 받아들였다. 진취적으로 임했고, 성과도 괜찮았지만 일이 재미없었다. 그러던 중 떡볶이 사업이 눈에 들어왔다.
“고대 앞에서 모임이 있었어요.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이리저리 거닐고 있었는데, 유독 한 집만 손님이 바글거렸죠. 떡볶이집이었어요. 알아보니 특별히 맛있지도 않고 위생적이지도 않은데 대안이 없어서 잘되는 거였어요. 저거다 싶었죠. 대중성과 지속성을 만족할 수 있는 메뉴. 유행을 타지 않으면서 두루 사랑받을 수 있는 메뉴로 떡볶이만한 것도 없다는 걸 알았죠.”
낮에는 회사를 다니면서 밤에는 떡볶이집 오픈 준비를 했다. 그는 대박을 낼 확신이 있었다. 서울과 수도권 일대의 유명한 떡볶이집 50~60곳을 섭렵했다. 8개월 후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오픈 준비에 착수했다. 고객층을 젊은 여성으로 정하고 각 분야에 적용해나갔다. 달달하고 매운맛, 화장 한 여성들을 위해 떡은 한입 크기로 썰고, 백열등 조명에, 젊은 남성을 직원으로 채용했다. 상호명인 ‘죠스떡볶이’는 강렬하고, 누구나 다 알면서도 흔하지 않은 소재를 찾다가 발견한 이름이다. 결과는 예측대로였다. 손님이 들끓었고, 손이 쉴 틈 없었다. 여기저기에서 가맹점을 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특히 홍대 앞 매장은 큰 결단이었다. 주위 사람들은 “땅값 비싼 홍대 한복판에 떡볶이집이 웬 말이냐? 미친 거 아니냐”고들 했지만 지금 홍대점은 죠스떡볶이의 대표 매장이 됐다.
죠스떡볶이의 메뉴는 딱 네 가지다. 떡볶이・튀김・순대・어묵. 메뉴군은 앞으로도 더 늘릴 생각이 없다. “메뉴를 늘리면 브랜드 가치가 희석되고 식재료 관리가 어려워진다”는 게 이유다. 죠스떡볶이는 당일 생산, 당일 소비를 원칙으로 한다. 공장에서 새벽 3시 30분에 나온 떡을 아침에 배달하고, 밤에 남은 재료는 전량 폐기한다.
그는 아버지의 유훈을 이어받아 ‘장사꾼’이 아닌 ‘사업가’가 되고 싶어 한다. “식재료에서 비용을 낮추는 것은 중요하지만, 제품의 질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낮추는 건 매우 어렵습니다. 장사꾼의 마인드라면 그럴 수 있지만, 사업가 마인드라면 그러면 안 됩니다. 일관된 맛을 유지하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요”라고 말한다. “매장의 개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매장당 매출이 중요하다”는 말 또한 같은 맥락이다. 점주의 만족도가 높아야 서비스 질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브랜드 공부를 많이 한다는 그의 소망은 소박한 듯 장대하다.
죠스떡볶이가 대표 곰탕집인 하동관이나 식품기업 풀무원처럼 친숙하면서도 따뜻한 브랜드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