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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 진행과정
1948년 4월 3일
1948년 4월 3일 자정, 마침내 무장항쟁의 신호탄인 봉화가 각 오름에서 붉게 타올랐다. 제주 도민의 무장전위대인 '자위대' 5백여 명과 그 동조자 1천여 명은 도내 20여 개의 경찰지서 중 10여 개의 경찰지서를 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숙사 및 국민회, 독립촉성회,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의 요인과 관공리의 집을 공격하였다.
초기 공세에 성공을 거둔 무장세력은 곧 도민과의 협력체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조직개편을 단 행하여 각 면에서 투철한 사상성 및 전투 경험을 소유한 자를 30명씩 선발하여 연대와 소대로 구 분 편성된 '인민유격대'를 조직하였다.
유격대의 기습 공격에 놀란 미군정은 이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하여 4월 5일 제주도 비상경비사령 부를 설치한 후 통행증제를 실시하고, 4월 10일에는 부산 주둔의 국방경비대 제5연대 제2대대를 제9연대에 배속하여 경비대의 병력을 증강시켰으며, 또한 유격대와의 연고가 짙어서 진압작전을 효율적으로 치르기에 부적당한 제주 출신의 경찰 대신 타도로부터 차출한 1,700여 명의 경찰을 파견하였다. 특히 미군정은 국방 경비대가 폭동 발생의 초기부터 도민의 불만을 정당한 것으로 보고 적극적인 진압작전을 추진하지 않는 것에 강력한 불만을 표시하는 한편, 제9연대장 김익렬에게 사람을 보내 '초토화작전' 을 계속 요구하였다.
4.28 평화협상과 5.1 오라리 방화사건
미국은 김익렬의 거부로 초토화 작전이 시행의 불가능해지자, 유격대와의 협상을 명령했다. 이리 하여 4월 28일 김익렬과 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이 대좌하여 72시간 내 전투중지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평화협상은 그 다음날 미 군정장관 딘(W. Dean)의 내도 후에 즉각 파탄에 직면하게 되었다. 딘은 평화협상을 거부하였던 것이다.
5월 I일 오전 12시 경 제주읍 외곽 오라리가 서북청년단 및 대동청년단 소속 청년 30여 명에 의 해 기습되어 12채의 민가가 불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마을에서 1.5km가량 떨어진 민오름 주변에 있던 유격대원 20여 명이 총과 죽창을 들고 내려와 이 청년들을 추적하자, 이 청년들의 보고를 받은 경찰이 즉각 출동하여 유격대가 이미 사라진 마을을 향해 총을 난사하며 진입하였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유격대와 경찰에 의해 경찰관 가족 I인과 마을 주민 1인이 각각 희생되었고, 경찰은 오후 4시 30분까지 마을에 주둔하면서 주민들을 심문하다가 김익렬 등의 국방경비대 가 출현하자 황급히 마을에서 철수하였다.
이후의 사건 진상규명 과정에서 미군정과 경찰은 오라리방화사건이 우익청년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국방경비대의 진상보고를 묵살하고 이를 유격대의 소행이라고 몰아 붙이는 조작을 감행하였다. 그들은 {동아일보} 등의 언론을 통하여 조작된 보도를 하도록 하는 한편, 사건 당시 오라리 상공을 정찰하면서 찍은 필름을 편집하여 {제주도의 5월 1일 (May Day on Cheju-do)}라는 기록 영화를 제작하고 이를 유격대의 만행을 증언하는 홍보물로 이용했다.
5월 3일에는 미 고문관 드루스 대위의 지휘 하에 귀순자를 호송해 오던 제9연대 7명과 미군 사병 2명에게 괴한들이 총기를 난사하여 귀순자 중 일부가 죽고 나머지는 다시 산으로 도망하는 사건 이 발생하였다. 경찰은 처음 이를 유격대의 소행이라고 발뺌하였지만, 미군에 의해 체포된 괴한 중 1인이 제주경찰서 소속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다시 이것을 경찰에 대한 중상모략을 위해서 경찰과 미군정, 그리고 경비대와의 이간을 시킬 목적으로 자행된 유격대의 경찰 가장기습사건이라 고 주장했다.
미군정은 이에 4.28평화협상과 이후 조작된 사건의 책임을 9연대와 김익렬에게 뒤집어씌웠다. 미군정은 김익렬을 용공으로 몰아 해임하고 강경파인 박진경을 기용하여 대규모 초토화 작전을 준비해 나갔다.
5.10선거 거부 투쟁
이에 대응하여 '인민유격대'는 5.10선거가 다가오자 그것을 파탄시키기 위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이 공세로 관련인사와 경찰, 우익청년단체 관련 인사들이 살해되었고 각종 시설이 습격당하여 파괴되었다.
이와 함께 도민들도 5. 10선거를 거부하기 위한 투쟁에 동참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선거 관련 공무원들이 근무지를 이탈하거나 선거 사무를 보지 않았다. 도민들은 경찰 및 극우청년단체의 회유 와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향보단에 가입하기를 완강히 거부하였고, 선거날이 되자 더욱 강화 된 협박과 폭력에도 불구하고 입산해 버림으로써 적극적인 선거 거부를 단행하였다. 이 결과로 제주도에서의 5.10선거는 3개 선거구 중 북제주군 갑, 을 두 선거구의 선거가 무효화되고 남제주군 선거구만의 선거가 간신히 치러졌다. 도민들은 그들의 항쟁목표의 하나로서 5.10단선 을 완벽하게 파탄시킨 것이다.
박진경의 초토화작전
이에 미국은 즉각 제주도의 해안선을 봉쇄하고 박진경에게 초토화작전을 명령한다. 초토화작전을 명령받은 박진경은 5월 12일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2개 마을에서 218명의 도민들을 체포한데 이어 5월중에만 무려 3,126명의 '포로'를 붙잡는 전과를 올린다. 6월 중순이 되면 '포로' 의 숫자는 6천 명으로 불어난다. 한라산 서쪽에서 동쪽으로 일소하는 박진경의 강력한 투망식․토끼몰이식 공격 은 도민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의 광폭함은 국방경비대에 대한 이전의 도민의 호 의적인 반응을 무색케 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국방경비대는 ' ,,,,미군 철모에 미군복, 미군화에 미군 총, 비가 오면 그 위에 미군 우장을 쓴다. 멀리서 보면 키가 작은 미군부대가 전진하고 있는' 모습으로 '동족의 섬멸에 동원되기' 시작한 것이다.
박진경과 국방경비대의 이와 같은 강력한 토벌에 대응하여 유격대는 5월말 그 편제를 '인민해방 군'으로 바꾸었고, 도민들 또한 생존의 극한 상황에서 국방경비대의 동향을 적극적으로 탐지, 감시하기 시작하였다.
6월 18일 토벌 방식에 불만을 품은 문상길 등이 박진경을 살해하자, 미군정은 최경록을 그 후임 에 임명하여 박진경 암살사건의 전모를 파헤치는 한편, 도민들에 대한 수색작업을 계속하였다. 이 어 7월 15일에는 송요찬을 새로운 연대장으로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약 한달 동안 새로이 부대정 비를 하게 한 다음 유격대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때 8월 초순, 김달삼, 강규찬 등 유격대 주요 지휘관 6명이 해주의 남조선인민 대표자회의 참석을 명분으로 제주를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또한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등 의 정치일정 등으로 인하여 유격대는 장기항전 준비에 돌입함으로써, 경비대의 대유격대 진압작 전 또한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학살 - '삼광(三光)', '삼진 (三盡)‘ 작전
그러나 부대를 정비한 송요찬이 9월초부터 대유격대 진압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무차별적인 초토화작전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송요찬과 그의 뒤를 이은 김상겸에 의해 강력한 토끼 몰이식 수색작전과 모두 불사르고, 모두 죽이고, 모두 약탈하는, 그리하여 불태워 없애고, 죽여 없애고, 굶겨 없애는 이른바 '삼광(三光)', '삼진 (三盡)' 작전이라는 전율할 대량학살작전이 전개되면서 유격대는 축소되어 갔고, 유격대 세력의 몇 배에 달하는 숫자의 '폭도사살' 전과가 기록되어 갔다.
특히 제주도 출동을 거부한 국군 14연대의 여․순 봉기를 진압한 10월 하순 이후에는 유격대와의 연결을 차단한다는 명분으로 중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소개작전과 소개민 심사, 이를 명분으로 한 대량 학살이 연일 이어졌다.
1949년이 되자 정부와 미국의 주한임시군사고문단은 여․순 봉기를 성공적으로 진압한 함병선의 제2연대 병력을 제주도로 이동시켜 육․해․공군의 연합작전으로 대토벌을 더욱 강화하였다. 해군에서는 18척의 함정을 동원하여 해안선을 완전 봉쇄하고 37밀리 포로 함포사격을 가하였고, 공군에서는 L-4, L-5형 연락기를 이용하여 수류탄과 폭탄 투하작전을 개시하였다. 또한 동시에 육군은 대전차포, 박격포, 0.5인치 기관총, 로케트포, M1 소총 등의 새로운 무기로 무장하여 집단 학살과 무차별 방화를 자행하였다. 이러한 무자비한 육․해․공군의 연합작전의 결과로 해안에서 4km 이상 떨어진 한라산에 오르는 부락은 그나마 남아 있던 것도 완전히 초토화되었고, 학살을 피한 도민들은 삶을 찾아 다시 산으로, 해안의 안전지대로 도피해야 하는 운명에 직면하게 되었다.
하산민들
그러나 이들의 삶 또한 죽음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이었다. 입산한 도민들은 여전히 토벌대의 추적에 시달려야 했고 여기에 다시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라는 새로운 적과 직면하였던 것이다. 해안부락의 안전지대로 피신한 도민들 또한 형편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산 사람과 협력한 마을 사람'으로, 또는 '공산당 물이 들었다'고 많은 의심과 감시의 눈초리를 겪어 야 했으며, 끝내는 목숨을 잃기도 했다. 또한 그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면서도 소개된 마을 을 유격대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대대적인 축성 작업에 의무적으로 참여하고 민보단원이 되어 이를 지킴으로써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의심을 해소할 필요가 있었다.
지속되는 대학살과 항쟁의 종식
제2연대의 육․해․공군 연합작전에도 불구하고 유격대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고 판단한 정부 와 미국은 1949년 3월 2일 제주도지구 전투 사령부(지휘관:유재흥 대령, 참모장:함병선 중령)를 설치하고, 김용주 대령의 독립 유격대대를 투입하여 유격대의 잔존 세력을 일소하기 위한 최후의 총공세를 감행한다.
유재흥은 한편으로 3월 25일 기한의 사면계획을 발표하는 선무공작을 전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는 강력한 무장진압의 2단계 작전을 구사하였다. 이 결과 사면기간 동안 강경한 토벌작전에 대한 공포와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에 시달리는 죽음 같은 삶을 벗어나려는 하산민의 두려움과 의구심 에 찬 투항이 늘어나고, 이들에 대한 회유, 고문, 협박 등을 통하여 유격대의 규모와 주둔 위치, 무장력 등이 속속 드러나게 되었다.
선무공작을 전개하면서, 한편으로 여전히 강경한 무장진압을 전개하던 유재흥 부대는 사면기간이 끝나자 즉각 대대적인 최후공격을 단행하였다. 이 결과로 3윌 12일부터 4월 12일간의 한달 동안 유재흥 부대는 2,345명의 '유격대'를 살해 혹은 부상시켰고 1,608명의 민간인을 살해하였으며, 동시에 3,600여 명의 유격대 동조자를 생포하였다. 이러한 전과는 당시 미군 비밀 문서가 과장 집계 한 무장유격대의 숫자가 250여 명, 그리고 그 동조자의 숫자가 1,000~1,500명에 불과하였다는 것 에 비추어 볼 때, 유격대 색출을 빙자하여 도민에게 가해진 철저한 대토벌, 대학살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즉 유재흥 부대는 '선무'라는 탈의 뒷면에 도민 대학살이라는 본모습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유격대 세력은 거의 붕괴되었다. 이에 따라 1949년 4월 9일 이승만은 제주도를 방문하여 폭 동이 종식되었음을 대내 외에 과시했다. 같은 해 5월 10일 북제주군 갑, 을 두 선거구에 대한 재선거가 실시되었다, 5월 15일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해체되고, 대부분의 군경이 17일, 18일에 걸쳐 육지로 철수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항쟁과 그것에 따른 피의 보복, 대살륙이 일단락 되었다.
백조일손지지 (百祖一孫之地)
그러나 학살은 이에 멈춘 것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도내 도처에서 소위 '전향 자' 에 대한 대검거 및 처형을 재개하였던 것이다. 이 와중에서 경찰은 대정, 한경, 한림, 애월, 안덕, 중문, 서귀 등지에서 이전에 체포되었다 풀려난 양민들을 예비검속이란 명목 하에 소집하여 모슬포 송악산 부근 섯알오름에 위치한 식민지 시대의 탄약고로 끌고 간 다음, 이들을 학살했다. 사망자 192명, 도민들은 뒷날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수습하여 사계리 공동묘지에 '백 할아버지에 한 자손의 땅'이라는 뜻의 백조일손지지 (百祖一孫之地)를 조성하여 이들의 억울한 죽 음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