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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대
여동생이 집을 지었다는 데 가 봐야지 하면서도 몇 달이 훌쩍 흘렀다. 부르길 기다렸는데 그냥 눌러산다는 말에 날을 잡아 올라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봄비가 줄줄 내린다. 창원에 들러 제수씨를 태워 현풍, 대구로 둘러 갔다. 뒷자리에서 아내와 쌓였던 얘길 정답게 나누게 하고 나는 앞만 보고 달렸다.
오록 읍내에 음식점을 하다가 건물과 넓은 대지를 농협에 팔고 옆에다 2층 슬래브를 지었다. 팔각지붕이 없어 겉은 상자 같고 수수한 게 멋없이 생겼다. 네모진 집이어도 안은 잘 만들었다. 크고 작은 방이 네 개이고 거실이 큼직하다. 작은 2층은 강과 학교, 창마와 너다리, 어릴 때 자랐던 거렁골을 쳐다 볼 수 있게 큰 창을 냈다.
삼십 리 내성에서 미수 딸 김밥 만드는 일을 돕는다. 여러 해 동안 해서인가 척척 잘한다. 가지 수가 많다. 온갖 것을 만들어낸다. 가다 오다 한 번씩 들리면 칼국수를 맛나게 끓여준다. 버스정류장 앞이고 시장 건너편이다. 큰길 가여서 사람들이 들끓는다. 이 골 저 골에서 장날이라고 나온 사람들로 붐빈다. 바쁠 땐 ‘눈코 뜰 새 없다.’
썰면 으깨지고 칼에 묻길 잘하는데 콩닥콩닥 잘도 썬다. 센 불에 무엇이든 퍼뜩퍼뜩 끓여낸다. 오늘은 오빠 온다고 일찍 마치고 올라와 넷이서 얼싸안았다. 오랜만에 만났다. 아직 살 나이인데 이래저래 가족이 일찍 죽고 남은 형제들이다. 서로 살갑게 지내는데 이리 만나니 찔끔 눈물도 훔쳐댄다.
“축하 축하. 집 잘 지었다.”
다 칠십을 넘긴 나이로 제수와 여동생은 벌써 남편을 여의고 혼자 살고 있다. 셋이서 편히 얘기하라 두고 집을 나섰다. 강둑길을 따라 저벅저벅 걸어 올라갔다. 강이 얕았는데 길을 높여선가 저 아래 내려앉아 있다. 양쪽 돌벽을 쌓아 말쑥하다. 장마 때 흙탕물이 굽이쳐도 무너질 염려가 없어 보인다. 불기로 올라가는 학교 산 아래 길옆에는 까만 이끼로 덮인‘예바위(古巖)’가 웅크린 곰처럼 오도카니 앉아있다.
외딴 이곳을 지나노라면 좀 으스스하다. 해 질 녘이나 밤이면 오래 묵은 여우가 나온대서 그렇게 믿고 살았다. 지금은 장터와 불기 사이에 집들이 들어서고 포장도로가 오전, 쑥밭 쪽으로 휑하니 났다. 학교 파하고 이곳을 지날 때면 바위에 올라 소리치고 했는데 덩그런 위에 있던 큰 바위를 누가 가져가고 밑둥치만 남았다.
물레방아에 자리 터에 이르러 좌우 어디로 가야 하나 망설였다.
송장기 가운데쯤이다. 우선 집 구하기 전에 진성이네 사랑방에서 한 해를 보냈다. 한데 부엌으로 비 올 때는 두들겨 맞으며 음식을 만든다. 건너 불기 마을이 훤히 보이고 앞은 내성천 좌우로 논이 펼쳐졌다. 언덕 기슭의 초가집으로 뒤를 오르면 밭이 저 산기슭까지 이어졌다. 둔덕 아래 꽤 넓은 벌판은 조무실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작은 도랑이 있고 아름드리 밤나무가 죽 늘어섰다. 그 끝에 벌판 속 작은 산 하나가 난데없이 우뚝 멈춰 섰다.
불기와 한 마을로 이장이 가끔 건너와서 무엇을 전달하고 간다. 여긴 띄엄띄엄 대여섯 채 집이다. 비 올 땐 이방 저방으로 다니며 놀다가 처마에 쌓은 보릿단 속에서 한두 살 많은 진성이와 냅다 장난질이다. 그러다 추녀 아래 집단이 떨어져 젖으면 얼른 주워 올리곤 했다. 보리밥은 꺼칠해서 먹기 힘들어도 뽀얀 감자가 먹음직하다. 열무김치에 고추장을 넣어 비벼 먹고 나면 잘 먹은 듯 입 안이 얼얼하다.
강원도 상동 광산촌에서 이곳 초등학교로 옮겼다. 2학년으로 낯설다. 부대끼며 살다 보니 점점 익숙해져 갔다. 선생님이
“강신수 돼지 소풍을 읽어라.”
큰 소리로 읽어서 정말 돼지 목소리라고 놀렸다.
졸졸 개울물 흘러가는 논두렁길을 따라 꼬불꼬불 학교길을 다녔다. 순학이와 정선이, 원태, 걸대가 한두 살 차이 어깨동무로 온 들판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하루해가 길기도 해라. 저물 줄 모른다. 여름방학이 이리 길까. 우리 학생 맞나. 언제 등교하는 날짜인지도 모른다. 찔레 순 꺾어 벗기고 연한 시금치를 씹었다. 털복숭아를 베어먹고 이가 시려 저녁밥을 넘길 수 없다.
불기 마을 아래 외딴집으로 옮겼다. 강가여서 논과 물레방아 물 끌어대는 보엘 들어가 멱을 감고 겨울엔 썰매를 탔다. 꽁꽁 언 얼음을 도끼로 깨어 배를 만들어 타기도 했다. 산기슭 바위틈이나 논두렁 아래 뿌연 우물을 퍼먹었는데 모두 멀어서 보 도랑물을 사용했다. 전쟁으로 불타서 모래 산이 많았다. 사방의 날에 잘 번지고 무성한 숲을 이루는 아카시아와 오리나무를 심으러 다녔다. 집집이 나가는 부역으로 아이들이 머릿수를 채우기도 했다. 나가면 하루 품삯으로 밀가루 한 됫박을 받아온다.
그래도 비 오면 흙모래 황토물이 강을 넘치게 한다. 흐르는 요란한 물소리 속에 돌 부딪치는 소리가 쿵쿵 들린다. 다시 살던 송장기 마을 아랫집을 사서 옮겨갔다. 얼마 안 되어 강가 집은 그만 장마 물에 휩쓸려 허물어져 정말 물밀듯이 떠내려가고 말았다. 있었으면 급류에 휩쓸릴 뻔했다. 서둘러 이사 오길 잘했다. 예닐곱 집 중 언덕이 끝나는 작달막한 산기슭으로 그늘진 서북향이다. 심심하면 야트막한 산 위에 올라가 무덤 잔디에서 구르고 놀았다.
더운 여름날 바로 집 앞 사오대에 가면 시원하다. 굵은 돌로 둘러친 대가 있는데 계단을 오르면 앉아 놀기 좋다. 큰 소나무가 대 가장자리에 자라 아름드리 그늘나무이다. 바위를 비집고 뿌리를 내렸는데 솔잎에 스치는 바람이 시원한 느낌이다. 앞엔 연못이 있고 낙엽 나무가 높이 자랐다. 장마 땐 물이 반쯤 고여 연못처럼 보인다.
대와 못 사이에 비스듬한 바위 두 개가 잇닿아 포개져 있고 그 앞에 넓은 바위가 있다. 여기에 여동생들과 이웃 여자아이들이 모여 소꿉장난 세간살이를 했다. 큰 바위를 움직여 대를 쌓고 아래엔 넓적 바위 여러 개를 눕혀둔 것 같다. 처음은 반반했지만 어쩌다 기울어진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이런 바위들을 옮겼을까.
학교에서 올라오면 송장기 앞 사오대를 지나 덕고개를 넘어 오전 쪽으로 올라가는 아이들이다.
“산돼지를 잡을라. 노루를 잡을까 옥노야.”
놀렸다.
어릴 때 집에서 불렀던 맏이 이름이 옥례이다. 올가미 올무인 옥노라 놀려댄다. 약이 올라 토라지니 재밌어서 더 대든다. 여자는 못 들은 척 그러려니 하래도 그럴 수 없단다. 얄미워서 뭐라 해야 속이 시원하단다. 흙을 뿌리고 나쁘다고 설치면 저만치 도망간다. 둘째와 셋째는 정례, 신례로 례 돌림으로 지었다.
마을 사람이 깊은 산에 갔다가 수리 새매 집에서 새끼 여러 마리를 털어와 한 마리를 줬다. 다리를 묶어 처마에서 키웠다. 개구리를 잡아 통통한 다리를 찢어 먹였다. 나뭇가지에 앉아있도록 했는데 폴폴 날다가 마당 구석으로 떨어져 펑퍼져 늘어졌다. 다쳤는가 놀라 보듬어 올렸다. 감싸 안아 자리에 갖다 놓으면 뭐라‘직직’되며 눈을 부라린다.
그렇게 껄끄러워하다가 어찌할 수 없는가 고분고분해지는 것 같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사오대를 지날 때쯤 찍찍거리며 반긴다. 아는가 배고플 때 먹이 주는 사람이란 것을. 부스스한 털을 갈고 매끈한 데가 있다. 꽤 깔끔하고 날렵해 보인다. 그동안 잘 먹여선가 기름기가 좔좔 흐른다. 그래도 눈에서는 먼 하늘을 쳐다보며 어미 그리는 빛이 보인다.
“쭈- 쭈-. ”
하면 저 이름인 줄 알고 돌아보며 날겠다고 버둥거린다. 외치는 소리로 비슷한 이름을 지었다. 반기는 표정이다. 사과 상자로 집을 만들어 주고 밤낮으로 개구릴 잡아 대령한다. 포동포동하다. 작대기로 풀밭을 휘저으면 날뛰는 개구리를 잡을 수 있다. 굵은 떡개구리를 넣어주면 찢어서 먹는다. 커 보여도 가는 목에 걸리지 않고 잘도 삼킨다. 잘 먹을 땐 내 배가 불러오는 것 같다. 개 목줄 잡듯 노끈을 꼭 쥐고 바깥바람을 쐰다.
팔등을 꽉 잡고 있으면 날카로운 새매 발톱이 파고들어 아프다. 눈이 커서 부리부리하다. 뭣이든 걸리기만 해 봐라 잡아제친다는 험상궂은 눈썰미다. 훅 띄우면 머리 주위를 휘 날아다닌다. 줄이 있어 맴돌기만 한다. 한참 운동한 뒤 상자에 넣으면 푸드덕푸드덕 찍찍한다. 더 날도록 해 달라고 졸라대며 야단이다. 여러 달이 지나서 겨울 찬 바람이 부니 꼬부라진 부리가 매섭다.
높이 날 수도 멀리 갈 수도 없자. 던지는 먹이를 짧게 날아 가로챈다. 문 앞 나뭇가지에 앉았다가 상자 주위를 발목 줄 길이만큼 작게 날곤 앉길 잘한다. 팔을 내밀면 냉큼 올라온다. 입 주위를 닦아주고 머리에서 등을 쓰다듬어주면 가만 있는 게 절 위하는 줄 안다. 줄을 풀어주고 먹이를 주며 같이 놀았다. 날다가도
“쭈 쭈 -.”
부르면 얼른 내려와 팔에 앉길 잘한다. 어떨 땐 사오대 나무에 올라 찍찍 소리를 낸다.
“여기 있어요.”
하는 소리다. 먹이를 들고 흔들면 날아온다. 멀리 안 가고 주위를 맴돌며 먹이를 받아먹었다. 배고픈가 반가워선가 저 멀리 오는 게 보이면 소리치다가 날아와 올랐다 내렸다 한다. 여럿이 모여 가는데도 잘 아는가. 내 머리 주위를 헤맨다. 학교 청소 당번 땐 오래 기다릴 때도 있어서 지쳤는가 소식이 없다.
며칠 뒤 나타날 때도 있다. 이젠 불러도 반갑다 찍찍하는 소리가 없고 머리 위를 날지 않는다. 겨울바람이 불자 온 데 간 데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방학이 끝나고 따스한 봄날에도 돌아오려나 사오대에 자주 나갔지만 가뭇없다. ‘쭈쭈’하면 곧 날아올 것 같은 데-. 내 소리만 울려 맴돌아온다.
밤이 익을 때쯤 하나둘 주워 주머니에 넣는다. 주머니마다 가득 차서 집에 돌아온다. 그냥 까기도 하고 구워도 삶아서도 먹는다. 바람에 떨어진 밤송이를 까발리느라 가시에 찔려 손가락이 겨울 입새 어귀까지 뜨끔거린다. 검정 고무신을 뚫어 발가락도 아프다. 높은 데 익어 벌어진 알밤을 보고 돌을 던져 떨어뜨린다. 자주 하니 잘 맞춰서 밤알 줍는 재미가 쏠쏠하다.
열 번 던지면 예닐곱은 맞춰 떨어뜨렸다. 돌팔매질이 늘게 되었다. 나무토막을 던지면 빙글빙글 돌면서 여러 개를 부딪쳐 떨군다. 돌은 어디론가 달아난다. 토막은 그대로 땅에 떨어져 또 주워 사용하길 거듭한다. 불그레한 밤송이가 네 조각으로 떡 벌어져 갈라져선 두세 개 반들거리는 밤알이 탐스럽게 드러나 뵌다.
그걸 건드리면 그대로 우수수 아래 풀밭으로 떨어져 내려 보석처럼 줍는다. 해봐야 여남 개로 주머니에 넣고 까먹는다. 안에 떫은 막을 베내고 노란 알을 뽀드득 씹으면 고소하고 단맛이 감돈다. 오다가다 보이면 그렇게 해서 지났다. 덜 익어 떨어지는 푸른 감이 며칠 삭아지면 달콤한 게 먹을 만하다. 함께 늘 허전한 배를 채웠다. 작은 감 알 고욤이 달콤해도 떫어서 목에 걸린다. 다니면서 껄떡이며 찾았던 시절이다.
하얀 한복을 입은 아주머니가 나타나 밤나무 아래에 오지 말라고 야무지게 이른다. 대나무를 베어 털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매서운 한 마디에 겁이 나 안 갔는데, 가끔 지나다 보이면 손이 근질거려 줍다가 나무막대를 던져댔다. 그러다 저 멀리 주인 오는 게 보이면 얼른 집으로 도망쳤다. 나른하고 입이 쓰디쓴 하루거리에 걸려 금계랍을 먹고 집안에서 눌러 지났다.
열나고 심하게 아픈 뒤 다음 날은 멀쩡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괜찮다가 날 밝으면 오싹 움츠리며 아프기 시작한다. 여러 날 힘없고 자꾸만 벌벌 떨려 들앉아 있었는데 어느 날 느닷없이 집으로 찾아왔다. 어머니에게
“신수가 요즘 엄청 착해졌어요. 밤밭에 안 보여요.”
그 뒤론 갈 수 없었다. 서리 사는 밤 주인 여자는 해마다 가을이 되면 찾아와 친구 고순학의 사랑채에 머물다가 다 익으면 놉을 사서 몇 며칠간 털어 알밤을 추수해 간다.
“따지 말라는 말보다 더 무섭구만.”
추석 무렵 들이닥친 태풍으로 농작물이 한쪽으로 스러졌다. 과일 피해도 컸다. 특히 늙은 밤나무는 밑동이 뚝 부러져 밭으로 굴러다녔다. 얼마나 사라호 바람이 세었으면 덩치 큰 나무가 꺾이거나 뿌리까지 뽑혀 희뜩 넘어질까. 온 동네 사람이 과실을 따고 주우러 다녔다. 풍성한 한가위였다. 그런데 나는 들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엄청 착한 아이기 때문이다.”
밤만 오면 걱정이다. 오늘 밤은 무사하려나. 일어나면 자리가 흥건하게 오줌을 흘린다. 뜨끈뜨끈하고 축축해서 깨 보면 그렇게 일을 저질렀다. 날 샐 때까지 잠은 무슨, 찹찹한 자리에 그대로 누워서 얻어터질 일로 걱정이 태산이다. 이 일을 어쩌면 좋아. 결국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발가벗겨 빗자루로 두들겨 맞고 쫓겨서 나가야 했다.
여동생들 보는 앞에서 오빠가 이게 뭔가. 옆집 경란이 볼까. 뒤 언덕으로 숨었다. 발발 떨린다. 겨울엔 눈이 쌓여 발이 시리다. 따스한 안방이 그리 좋은 줄 알게 해 줬다. 오늘 저녁은 물도 적게 먹고 일찍 소변보고 자야지 하며 조심조심했다.
“하나님 마려우면 깨워 주세요.”
하고 빌었다. 밝은 대낮에 길 가다 풀숲에 들어가 실컷 눴다. ‘아아 이제 됐다’ 시원하고 편하구나. 했는데 그게 꿈이었다. 벌을 서고 꾸지람 들으니 더 심하다.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닥치고 걷잡을 수 없어서 어릴 땐 낭패였다. 송장기 산기슭 외진 집이니 그나마 다행이다. 얼룩진 이불을 내 널고 말리는 일이 흔하다. 짜릿짜릿한 냄새가 난다.
“한바탕 벌어진 새벽 일은 언제 그랬나.”
오후 조무실 골짜기 땔 나무하는 일은 잘한다. 공부는 뒷전이다. 오글보글한 방안에서 공부가 되나. 나돌아다녀야 한다. 한두 집 빼고 또래 친구가 있다. 그들도 일손이 모자라는 농사철에 눈치 없이 놀다가 이끌려 일하기 일쑤다. 주로 땔나무를 했다. 멀리 가기 힘들다. 오늘은 가까운 뒷산에 가자 하고 지게를 지고 우 몰려간다.
잔잔한 나무와 마른 푸성귀를 베내고 금방 떨어진 듯 붉은 알 갈비를 깍지로 끌어모아 한단 두 단 지게에 올리면 멋진 나뭇짐이 된다. 겨울 난방과 농사철 준비를 가을 내내 해둬야 한다. 다 끌고 없으면 더 멀리 가야 하는데 구차해서 청솔을 해 올 때가 있다. 무겁다. 나무 져 나르고 논밭의 농산물을 끙끙 짊어지니 키가 작달막하다.
물 못자릴 만들고 올라온 나락에 피를 골라낸다. 고만고만해서 어느 것을 뽑아야 할지 눈이 어질어질하다. 끝이 약간 붉은 것을 찾아 뽑는데 무논 속에 오래 있어서 발이 짓무르고 얼굴이 붓는 듯 부석부석하다. 조밭을 매는데 더부룩해서 곱하기식으로 호미를 긁어 성글게 해야 한다. 너무 후벼파서 도로 묻어줘야 했다.
감자밭과 콩밭에 북을 돋우는 일도 앉아서 하지 못하고 엉덩이를 치켜세우니 얼굴에 온통 피가 몰리는 것 같다. 어머니 따라 일하는 게 쉽지 않다. 친구들과 놀면
“신수야-!”
동네가 다 들리도록 큰 소리로 찾아낸다. 지금도 그 부름이 울리는 듯 가슴 뜨끔하게 들려온다. 자주 불러 일을 시켰다. 둑을 넘어 흙탕물이 들어왔다. 이제 익어가는 벼가 넘어지고 흙모래가 쌓였다. 일으켜 세우는 게 힘들다. 옆구리에 짚단을 달고 한 줌씩 뽑아 묶어줘야 했다. 빨리 안 세우면 싹이 난다. 얼마 안 되는 것 같아도 모래를 퍼내는데 끝이 없다. 손톱이 닳아지고 피부가 패여 아리다.
가물 때 논물 대는 일이 야박하다. 물꼬를 터놓으면 이내 막아버린다. 아래 논으로 흐르게 만든다. 삽을 들고 설치는 게 찌를 듯 눈을 부라리며 무섭게 나댄다. 논으로 물이 솔솔 들어갈 때면 막혔던 목이 탁 트이듯 시원하고 다 개운하다. 위 논이 차면 아래로 졸졸 내려간다. 그래도 저 끄트머리 논엔 이르지 않아 바닥이 떡떡 갈라지면 안타깝다.
농사짓는 게 아니라 전쟁이다. 장마 때는 물이 넘쳐 난리다. 엎치락뒤치락한다. 큰 고개 넘어 납(나마리)광산에 측량 일하는 아버지가 가끔 들러 집안을 다독인다. 산판에서 메다 놓은 나무를 도끼로 잘라 다 패서 장작으로 쌓아 놓는다. 그렇게 몇 해 지나다 건넛마을 저 아래 외딴집으로 또 옮겼다.
밭머리 호대네 집이다. 떠내려간 집에서 몇 발치 떨어진 맞은편 언덕이다. 세 식구가 단란하게 살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자 정신 흐린 어머니와 어디 다른 살만한 곳으로 가려는가. 집과 딸린 논밭을 팔아버리고 서둘렀다. 윗마을을 가거나 때 되어 안 보이면
“호대야 호대야”
하고 큰 소리로 불러 이웃에 다 들렸다. 귀가 어두운가. 목소리가 큼직하다. 아들이 조금만 안 보여도 찾아 나서는 어머니다. 그런 어머니가 안쓰러운가. 얼른 뛰어가는 호대 아들이다. 길가의 갑태네와 두 집뿐이다. 좀 적적한 곳으로 밭들만 가득한 드넓은 안쪽 산기슭엔 으스스하다. 상여 갈무리하는 초가 곳집도 있어서 해 저물거나 비 오는 궂은날 그곳으로 지날 땐 도깨비나 귀신이 나올 것 같아 꺼림칙한 곳이다.
불기 마을로 질러가는 길이다. 어쩌다 곳집 옆 감나무에 올라 떨어질 듯 익은 홍시를 따서 감질나게 먹는데
“흐흐흐 감 땄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호대 어머니가 뒤에서 굵은 눈을 부릅뜨며 뭐라 한다. 걸핏하면 불쑥 나타나 깜짝 놀라게 하길 잘한다. 그런 어머니를 모시고 좋은 곳으로 이사 간 줄 알았는데 엉뚱한 데서 호대를 만났다. 영주중학교에 다니며 시내를 지나다 중국 음식점에서 자장면을 먹는 호대가 보였다.
“호대야 여기서 뭘 하나.”
“응 삼천리 연탄공장에서 일한다.”
얼마 뒤 보따리를 가슴에 안고 이곳저곳 시골 마을을 돌며 걸식하는 호대 어머니를 봤다.
“호대야 호대야 ---.”
“밥 좀 줘요. 배고파요.”
하며 아들을 찾아다니는 어머니다. 겨울이 오자 더는 보이지 않았다. 정신이 나간 어머니를 버리고 저 혼자 도시로 떠돌아다니는 호대였다. 세 가족이 단란하게 살 땐 참 좋아 보였는데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서둘러 집과 농토를 팔고 떠났다. 어디 어머니 모실 좋은 곳이라도 있나 여겼다. 예전에 살던 고향으로 들어가는 줄 알았다.
그래서 그 집을 사서 들어갔는데 이게 뭔가. 안방과 사랑방, 부엌에 딸린 외양간이 있었다. 타작하던 마당이 큼직하다. 마당 가장자리엔 봉선화와 백일홍, 달리아가 피어있는 알뜰히 살던 아담한 집이다. 1천 평 정도 되는 밭이 저 산자락까지 이어졌다. 그 밭머리의 집으로 뽕나무도 한 줄로 이어져 누에를 길러 고치를 만들 수 있다. 호대와 오디를 한 주먹씩 따먹던 밭이다.
어머니를 버린 집안을 생각하니 서늘한 마음이 든다. 그의 손길이 구석구석 박힌 집이다. 떠내려간 집에서 보면 바로 건너 집이다. 날마다 보 도랑물을 퍼 나르는 호대 어머니를 보고 자랐다. 이마에 흐르는 동이 물을 손등으로 떨치며 걷는 모습이 선하다. 끙끙 농사짓고 가족을 보살피던 아버지 장사 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내 일처럼 돕고 슬퍼했다.
보이는 앞산 언덕에 묘소를 닦아 모셨다. 북서향의 송장기 구석 집보다 사방이 트인 남향집이 좋다며 호대 집으로 옮겼다. 송장기 집은 모두 방향이 같다. 언덕을 등지고는 그렇게 지어야 하는가 보다. 비 오면 시냇물이 불어 건너다니기 어렵고 마실 갈 땐 구석이고 패지며 밤마다 오줌싸던 곳이 힘들었다. 이제 불기 마을 가기 좋다. 학교와 아래 장터에 가는 일도 수월하다. 바로 앞에 갑태네 집이고 그 앞은 물방앗간이다.
중학교에 다니면서 주말에 왔다가 일요일 오후엔 이것저것 짊어지고 들고 영주로 떠난다. 봉화까지 걸어가는 길이 멀다. 삼십 리 길이다. 산판 차가 가끔 다니는데 나무를 잔뜩 실은 차를 탈 수 있나. 여러 번 강물을 건널 때가 구차하다. 옷을 벗어 모두 머리에 이고 물살을 몸으로 받으며 힘겹게 건너야 했다. 한 주 먹고살 자취 음식에다 책가방이다.
떠내려가면 큰일이다. 기차를 타고 내리면 보름골 가는 길도 꽤 멀다. 걷는 게 일이다. 등교 땐 멀쩡한 길을 두고 기찻길로 걸어간다. 누가 잘 걷나 하며 레일을 밟고 간다. 그러다 미끄러지면 좌우 복사뼈를 건드려 절뚝이며 다녔다. 같은 반이고 불기마을 또래 친구인 영진이와 논에 들어가 붕어를 잡았다.
모처럼 고기를 먹어보자며 모심기 전 써레질해 놓은 논두렁 밑으로 붕어를 건지러 들어갔다. 무논이어서 살던 붕어와 미꾸라지가 갈아엎고 밀어붙이니 한쪽으로 몰렸다. 황새가 잘 먹는 올미도 주워 먹으며 한 마리 두 마리 잡아 통에 넣는데 가려워서 긁으니 찰거머리가 다리에 붙는다. 서로 떼 주며 한 사발 담았다. 간장 넣고 끓였는데 그게 그리 맛있어서 여태 잊지 않고 생각이 난다.
주말 오전 학교를 마치고 챙겨 영주역으로 달려갔다. 어둑어둑해서 집에 들어가는 데 없다. 있어야 할 밭머리 집이 텅 비었다. 보니 타다 남은 숯덩이와 재만 나뒹굴었다. 멍하니 한참을 그렇게 쳐다보고만 서 있었다.
“엄마-”
하고 불렀지만 휑하니 어둠에 싸였다. 뒤돌아설 수 없다. 곳집 주위에서 무엇이 어기적어기적 걸어오는 것 같다. 호대 어머니가‘흐흐’하고 부스스한 머리로 나타나기라도 할 것 같다. 짙은 어둠의 회오리에 휩싸여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이 서리서리 다가오고 옥죄여 엉겨 붙는다. 한참 동안 옴짝달싹을 할 수가 없었다.
불기 마을 중간쯤에 마침 빈집을 얻어 저녁상을 차려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어머니가 이웃에 간 사이 불이 붙었다. 치솟는 뭉개 연기를 보고 마을 사람들이 달려들어 가재도구를 끄집어냈단다. 사랑방 앞 짚단에서 여동생 셋이 놀다가 불장난을 한 것이 옮겨붙었다. 지붕 이을 이엉과 용마름 짚가리이다. 이게 좋은 불쏘시개였다.
이 마을에 와서 다섯 번째 집이다. 마을 가운데로 변두리를 돌다가 제대로 들어온 셈이다. 건너 송장기 중간 성진이네 곁방살이와 불기 아래 강가 떠내려간 집, 다시 송장기 아래 오줌 싸던 산기슭 집, 타 버린 호대네 집에서 이리 올라오게 된 것이다. 외진 곳에 살다가 마을 가운데로 오니 포근하고 따스하며 훈기가 있어 보인다.
임수창이네와 태섭이, 점남이, 섭주, 진봉, 복재, 태종이를 이웃해서 급우를 쉬 만날 수 있어서 좋다. 앞 시내 봇물은 얕아서 덕고개 아래 신담으로 멱감으러 간다. 골짝을 흐르면서 큰 바위와 바위 사이에 고인 물이 넓고 깊다. 한번은 고개 넘어 금정(우구치)광산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청산가리(사이나)를 풀었다. 뒤집혀 흰 배를 드러내고 둥둥 떠다니는 물고기가 보인다. 팔뚝 크기의 뱀장어가 술술 기어 나와 손으로 움켜쥔 적이 있다.
미끄러워 놓쳤지만 그런 고기를 만져본 것만으로도 놀랍다. 가물 때 강바닥이 드러나면 물길을 돌리고 돌을 들어내 버들치, 꺽지, 꾸구리, 가재. 모래무지를 잡는다. 봇물이 낮아지면 물 많은 신담을 찾는다. 깊은 웅덩이에 물이 가득하다. 펀펀한 큰 바위도 우릴 부른다. 그 바위에 발자국이 선명하다. 새 발자취도 보인다.
그 옛날 모래 위를 밟았던 게 굳어졌는가. 걸어간 구멍을 따라 밟아본다. 넓적한 큰 구멍도 띄엄띄엄 나 있어 코끼리가 걸어갔는가 싶다. 바위에서 뛰어내려 물속을 쏙 들어갔다 나온다. 모두 개헤엄으로 앞 손을 흔들며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물놀이다. 물장구치고 정신없이 풍덩거리고 놀다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옷을 주섬주섬 입는데
“옷이 남았다.”
보니 섭이 옷이다. 주위를 아무리 살펴도 보이질 않는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헤엄 잘 치는 나이 든 형이 뛰어들어 다리를 잡고 물 위로 올랐다. 깊은 물 속에 가라앉아 있는 섭이가 어른어른 보였었다. 우리 노는 사이에 가에 있다가 빠져서 들어갔다. 이를 어쩌나 서로 엎고 집으로 뛰었다. 하나뿐인 아들을 안고 통곡하는 어머니다.
“우야노 우야노”
할머니가 울부짖으며 외친다. 소식을 듣고 들에서 돌아온 진섭이 아버지가 덮어쓴 이불을 걷어치우고 번쩍 들어 마당으로 내던졌다.
“부모 앞에 죽는 놈 못된 놈--”
꼬꾸라진 손자를 안고 같이 뒹굴며 흐느끼는 할머니다. 달려가 그 위에 엎어져 이마를 쓰다듬는 어머니가
“섭아 섭아 --”
비명을 지르며 덮쳐 운다. 땅거미가 지고 마을 사람들이 마당 가득히 골목까지 메워 온통 울음바다이다.
이제 살던 곳에 이르렀다. 여울물 보를 쉬 건너갔다 오곤 했는데 그럴 수 없다. 저 위쪽을 올라 내려와야 할 것 같다. 울퉁불퉁 산판 차도는 그대로 넓혀져서 미끈한 포장도로로 바뀌었다. 떠내려간 집 바로 아래 물방앗간에 이르러 어디로 갈까 망설였다. 징검다리를 건너 우측 송장기로 가던 곳은 양쪽 높은 강둑으로 막혔다. 비만 오면 넘쳐 내리는 내성천 물길을 둑을 잔뜩 높여 다스렸다. 장터 술 도가의 술을 팔던 권갑태 집에서 고순학의 할머니가 술 취한 아들을 이끌고 건너던 곳이다.
“엄마 나 술 한잔 더 먹고 싶어요.”
비틀거리며 사오대 숲으로 가던 게 보이듯이 떠오른다. 거기 주막에서 좌측 수십 미터 떨어진 타버린 집으로 포장도로가 났다. 동이 물을 이고 다니던 호대 어머니 길이다. 지척지척 걸어 들어갔다. 길섶에 돌무더기 서낭당이 있었고 고목 느티나무도 모두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 위에 떠내려간 집터도 간 곳이 없다. 골프장 비슷한 것이 울타리와 잔디로 덮여 넓디넓다. 그 옆 누군가 사는 집 마당에서 길쭉한 밭을 보며 한참 멍하니 서 있었다.
“여기가 타버린 집이다.”
“호대야 호대야”
그의 어머니 목소리가 맴맴 돈다. 계속 걸어서 으스스한 홍시를 따먹던 곳집을 찾는데 그만 없어지고 논밭으로 바뀌었다. 풀이 무성한 오솔길이 뻥 뚫려 마을로 시원하게 통했다. 호대 어머니가 나타날 기미도 없다. 길길이 자란 풀밭 오솔길이 훤한 도로로 변했다. 물이 졸졸 흘렀다. 농수로가 잘 만들어졌다. 어디든 논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구석구석 물이 흘러 가게 했다. 사과와 복숭아, 자두 등 과수원도 곳곳에 예쁘게 자리 잡아 농약 살포와 호수를 이어 물을 그루마다 쉽게 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앞산 고개는 범 고갠데 으슥한 긴 골을 빠져 넘어가면 사골과 압동, 재기, 부석 쪽으로 가는 길이다. 고개 위에 무덤을 둘러본 적이 있다. 고려장 같은 것을 봤다. 돌로 지은 사각형 돌집이다. 삐죽이 열린 안쪽을 들여다보니 텅 비어 있었다. 그릇 같은 부장품도 누가 가져갔는가 뼛조각도 녹았는지 하나 없이 말끔하다. 산자락 곳곳에 돌무덤도 듬성듬성 있는 게 애장인 듯하다.
잔잔했던 솔이 그사이 굵은 나무로 자랐다. 육이오 전쟁 때 인민군이 오전과 서벽, 춘양 주위를 오르내리면서 쑥대밭이 됐다. 포탄으로 집과 산의 나무는 모두 불타 민둥산으로 바뀌었다. 젊은 남자는 마구잡이로 짐 지워 일을 시키고 끌고 다녔다. 그러다 풀려나거나 도망친 사람은 또 지서 순사가 붙들어서 혼쭐을 냈다. 남자들은 먹을 것을 들고 뒷산에 들어가 돌 틈이나 나무 사이, 땅을 파고 숨죽이고 지내는 험한 세상이었다.
이 생각 저 맘으로 마을을 지났다. 집들이 모두 예쁘다. 울타리나 돌담을 친 이지러지고 스러질 듯한 그때의 초가는 없다. 모두 번듯한 양옥이다. 자연석을 마당 가에 놓고 사이사이 군데군데 짙붉은 사랑초꽃과 모란꽃이 한창이다. 흰 꽃과 분홍이 섞인 것도 있어서 목단이 이다지 예쁠까. 적이 놀란다. 어루만지며 집집이 들여다보며 거닐었다. 마주쳐도 아는 사람 하나 없다. 6, 70년이 훌쩍 지났으니 누군들 그때 나 신수를 알아보겠나.
가운데쯤 살았던 집을 찾으니 지척을 알 수 없다. 태섭이와 수창이네 집 사이였는데 모두 확 바뀌고 달라져서 어디엔지 분간할 수 없다. 임장웅의 집 앞 그늘터 고욤나무도 온데간데없고 휑하니 차도가 났다. 앞 여자 반 친구 권점남 집은 기와집으로 예뻐서 사진을 찍어뒀다. 그 앞 김섭주의 돌담집은 그만 뜯겨 드넓은 밭으로 바뀌었다.
“그 많은 돌담이 다 어디로 갔을까.”
섭주와 집 앞 보리밭 가운데로 들어가 까만 오디를 따먹었다. 뽕나무 아래 독이 놓인 것을 보고 뭔가 열었다. 복작복작 달콤한 냄새를 피우며 술이 괴고 있었다. 뽕잎으로 퍼먹었다. 귀한 쌀밥으로 먹음직하게 삭아있었다. 얼굴이 붉어지고 열이 올라 견딜 수 없었다. 봇물에 들어가 이른 목욕을 하며 잔뜩 취한 몸을 식혔다.
마실 다닐 때 봇둑을 건너 우리 논두렁으로 송장기 집을 다녔다. 지금은 갈 수 없어 저 위 다리를 건너 배골마을에서 아래로 내려와야 했다. 여기도 찻길을 높이고 양쪽 강둑도 올려 번듯한 도로를 만들었다. 시내가 훨씬 낮아져 훌쩍 내려가 있다. 오전 생달이나 옻밭골, 밤마, 쑥밭 아이들이 뛰어서 학교 다니던 길이다. 논둑길 따라 농수로 개울물이 같이 달려간다. 멀어서 내닫지 않고는 제시간에 닿을 수 없어 좁은데다 꼬불꼬불 논둑을 그렇게 뛰어서 다녔다.
송강기 마실 서넛 집은 사는 것 같다. 다른 집은 비어 있거나 오래되어 주저앉은 집들이다. 처음 살던 진성이 집과 원태네, 내 살던 끝 집은 뜯겨 풀밭이다. 걸대네 집은 비 새자 무너지기 시작해 반쯤 기울어졌다. 송장기는 건너 불기와는 달리 폐허처럼 됐다. 진성이네 집만 위쪽 언덕 아래 말쑥하게 지어졌다. 들어가는 도로에서부터 윤기가 흘렀다.
“자넨 나와 비슷한 데가 많아.”
순학의 친척인 고문수도 진성의 사랑채에서 살았다. 솔안으로 이사 가고 뒤따라 바로 우리가 들었다. 전혀 모르고 살다가 얼마 전 물야초등 동창 모임에서 고향 교직자가 있다는 배 총무의 전갈로 만났다. 그는 진정이네 집이라 하는데 그가 누군가 했다가 뒤에 같은 이름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 두 집을 따뜻이 보듬어 주었던 그의 형 김진수 부부는 벌써 세상을 떠났다.
순학과 정선의 집 가운데로 지어 옮기고 보고 싶은 그 집은 뜯어 빈터만 남게 됐다. 문수에게 조례 때 안동사범중학교에 합격해 진학하는 학생을 소개하는 걸 봤다.
“그가 바로 낼세.”
우리 모두 박수로 축하해 준 것을 기억한다. 안동 사범고등학교를 나와 감포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부산으로 오게 됐으며 할아버지가 노름을 좋아해서 집안을 어렵게 했다는 말도 했다. 해학집 책을 지어 펴낸 것을 읽으니 글을 참 잘 썼다. 매달 만나 저녁 먹으면서 지난날을 얘기하는 게 벌써 여러 달 지나 해가 바뀌었다.
“어찌 그 먼 외딴 바닷가 감포에를 다 갔나.”
사범학교 같은 학년 마음에 드는 친구가 그곳으로 발령이 나자 따라 지원해 갔단다. 중간에 군을 마치고 가 보니 그만 다른 남자와 결혼해 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지하 찻집에 들어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주절주절 끝없이 주고받았다. 대개 어릴 때 친구가 평생 가는데 우린 금방 만나 오랜 친구처럼 사귄다.
“우리 한번 고향을 찾아갑세.”
“아는 사람이라곤 진성이와 순학이 뿐인걸.”
이야기 속에 그때를 보는 것 같다. 같은 집에 살았고 접장을 했으며 부산에 살고 있다. 글 쓰고 악기를 다루는 솜씨가 있다. 거기다 조부의 노름까지 닮았으니 기막힐 일이다. 키도 엇비슷하고 ‘도리구찌’모자도 같이 쓰고 있다. 한두 살 많은 진성이를 자꾸만 진정이라 불러서 다른 집의 사람을 말하는가 했는데
“그게 같은 이름이야.”
믿음이 좋아 기독교 장로인 진성이에게 전화해 알았다. 힘이 장사여서 끙끙 농사일을 잘했는데 지금은 팔순이 넘어 그만두고 부부가 ‘시니어’ 일터에 나가 소일하고 있단다. 처음엔 진정으로 부르다가 진성으로 바꿔 불렀다.
“문수와 한번 올라갈 테니 재워달라”
부탁했다.
그냥 멍하니 진성이네 집터만 쳐다보다가 설설 내려 살던 아래로 터덜터덜 걸었다. 순학이네와 정선이 집은 보이는데 원태네 집은 뜯겨 뒷담 조릿대만 무성하다. 걸대 집은 반쯤 비바람에 무너져 이지러져 있다. 내 살던 집은 돌담만 덩그렇고 집은 뜯겨나가 휑뎅그렁하다. 집집이 열심히 다독이던 논밭과 집터만 우두커니 남았다. 마실 다니던 정다운 오솔길은 없어지고 넓혀진 신작로만 번듯하게 났다.
네 집 내 집 없이 드나들었다. 삶은 옥수수와 감자, 고구마를 쥐여준다. 고치실을 물레로 뽑으며 익은 번데기를 입에 넣어주던 그리운 부모들은 보이지 않는다. 눈에 선한 그때 마을 사람들은 너나없이 모두 저세상으로 떠났다. 백세 시대라는데 어찌 한 분도 남아 있지 않을까. 또래만 몇이 보이는 속절없는 고향이다. 너나없이 천년만년 살 것같이 지났는데 어김없이 때 되면 가야 하는 게 새삼 섬뜩하다.
온갖 풀들로 뒤엉켰다. 그 사이로 머위가 곳곳에 너풀거린다. 돌 틈에 하얀 줄무늬가 든 복륜 같은 매끄러운 엽예 풀도 비집고 자랐다. 뱀 밟을라. 두려워 조심조심 둘러보고 사오대로 나와 너럭바위에 앉아 쉬었다. 땅이 없어 빈터만 있으면 갈아엎고 논밭을 만들거나 축사를 짓는데 여긴 버려진 땅이 남아돈다. 내 살던 마을이 왜 이렇게 됐을까.
불기 마을을 돌아 돌아 건너 송장기 끝 사오대에 이르렀다. 한참 앉아 쉬었다. 그것도 걸음이라고 나이를 이기지 못하는가 흐느적흐느적 칠렐레팔렐레하다. 다시 타박타박 걸어 학교 가는 길을 따라 내렸다. 다니던 길이 끊겨 너다리 쪽으로 올랐다. 하릴없이 차 도로가 된 길로 따라갔다. 마을 앞 키 높은 노송이 여러 그루였는데 몇 나무만 서 있다.
하얀 황새 수십 마리가 둥지 있는 나무 위를 날거나 앉아있는 게 보였다. 지금은 새는 보이지 않고 그래도 아직 몇 그루 남은 그때 소나무가 반가웠다. 학교에 이르렀다. 운동장 가장자리에 노송이 여러 개 있다. 하도 늙어서 쳐진 소나무 가지를 일일이 떠받쳤다. 가을 운동회 때 ‘땅’하고 출발하는 달음박질하던 은행나무도 그대로 한 쌍이 우뚝하다. 나무는 더 굵지 않고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베내고 다시 심었는가.”
씨름하는 터의 휘어진 그늘 소나무도 구부린 채 여태 엉거주춤 웅크리고 있다. 사람은 이리 늙었는데 저건 푸르고 늠름하기만 하다. 학교 앞 시냇물을 가로지른 다리가 근사하다. 어릴 때 여기 나무다리는 큰물이 지면 그냥 떠내려가고 등교는 무슨, 물이 가라앉을 때까지 건너다볼 뿐이었다. 한 바퀴 돌고 나니 고단하다.
다음날 위암 수술했다는 재산 여동생 집을 찾아가려는데 머위 많은 곳을 봤다니 잠깐 머위를 뜯으러 가잔다. 땅에서 올라오는 호박잎 같은 풀로 줄기를 먹다가 요즘은 잎까지 쌈을 싸 먹는다. 아내와 제수가 빈 집터에 들어가 베기 시작한다. 낫과 부엌칼을 들고 설쳤다. 어디 이렇게 지천이냐며 정신없이 베어 비닐에 담는데 돌 틈 사이로 매끈한 게 수북이 보였다. 명이나물이 아닐까 하며 갸우뚱한다. 휴대전화로 찍어 확인하니 금잔화로 뜬다.
머위와 금잔화 몇 포기를 캐 담았다. 부산 남쪽 명지 바닷가 텃밭에 심어 키우련다. 회초리로 이곳저곳 저 돌담 뒤 정낭까지 풀밭을 두드리고 휘저어 뱀과 개구리를 내쫓았다. 둘이서 안전하고 편하게 뜯게 하고 집터를 한 바퀴 둘러보고 나왔다. 어찌 이리 작을까. 안방과 사랑방, 부엌에 딸린 마구간이 있고 큰 마당과 두엄자리 텃밭도 넓었다.
그런데 살던 데가 이리 좁나 손 한 뼘 같다. 돼지와 닭 몇 마리를 키웠다. 새매 키우던 솜씨로 살뜰히 건사했다. 꼴망태를 들고 잘 먹는 쇠뜨기를 베러 다녔다. 흔해 빠진 풀이래도 찾으면 없다. 한아름 넣어주면 꼭 사람 눈을 닮은 새끼 돼지가 흘겨보면서 ‘꿀꿀’ 맛나게 먹었다. 그렇게 풀 뜯어 바치고 뜨물을 먹이며 보살폈는데 소 오줌 나가는 구멍으로 도망쳤다. 돌로 막았지만 밀치고 나갔다.
장터 쪽으로 줄행랑을 놨다는데 찾아봐도 간 곳이 없다. 나갔다 이내 들어올 것이지 가긴 어딜 가나. 그게 살았나 죽었을까. 내내 마음에 걸렸다.
어릴 때 이 바위 저 바위로 넘나들며 해 저물도록 놀던 사오대로 나왔다. 우리의 놀이터였다.
“신수야--”
어두컴컴 사방이 어두워야 끝났다. 어머니가 찾아 나서서 불러야 들어갔다. 갈팡질팡 땅거미가 질 때까지 오르내리며 친구들과 숨바꼭질했다. 그 사이 후딱 70년이나 흘러버렸다. 새들이 찾아와 얄궂은 온갖 소리를 내며 울던 연못 가 고목 나무는 어디 가고 다시 컸는가 작은 나무들이다. 건너 불기 마을 중간으로 농수로가 이어지듯 여기도 포장도로 가에는 졸졸 물이 흘러가는 도랑을 다듬어놨다. 농촌이 아니라 아름다운 넓은 정원이다.
맨땅을 팠던 그 옛날과는 달리 시멘트로 깔끔하게 만들었다. 곳곳에 구멍을 내어 비닐관을 끼워 넣어서 물 대기 좋게 만들었다. 마을 우물터가 있었는데 매워져서 보이지 않았다. 상수도가 잘 되었는가 보다. 길 아래 논 옆인데 졸졸 나오는 물이 고였다. 가물 때나 겨울에도 끊이지 않고 나오니 샘으로 판 것 같다. 가끔 목말라 바짝 엎드려 추기고 들이켰다.
바닥에 가재가 기어 다니고 버들치가 돌 구멍으로 설레설레 드나들며 거니는 뿌연 물을 마시고 살았다. 좌우로 난 오르막길로 아낙들이 똬리를 받치고 물 이고 다니는 아침 풍경이 아른거린다. 눈 쌓인 추운 겨울에는 어떻게 다녔을까. 오금이 저려 아랫목으로 파고들던 그 시절 추위는 얼마나 심했나. 밤중에 강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쩌렁쩌렁 들렸다.
사오대에 모여 놀던 게 언뜻언뜻 떠오른다. 한길 넘는 큰 바위 대와 넓은 세 개의 반석, 앞에는 연꽃 없는 연못이다. 대에는 정자는 없지만 큰 소나무가 그늘지는 멋진 쉼터다. 어릴 때는 아이들이 오글오글 모여 늘 대여섯은 놀았다. 돌계단을 따라 오르면 펀펀해서 앉아있기 좋다. 들판과 마을이 다 보인다. 굽이치는 시냇물 소리가 겨울 솔바람 스치는 소리처럼 들린다.
어릴 때 큰 소나무가 돌 틈에서 치올라 죽지 않고 그냥 서 있다. 쓰다듬으며 반갑다 인사했다. 비바람 추위에 견뎠으며 해마다 찾아오는 태풍에도 잘 참았으니 당당하구나. 밑둥치를 보니 바위에 비스듬히 박혀있다. 굵은 엉덩이가 바윈지 나무도 어찌 이런 데서 모질게 자랐나 싶다. 저절로 이런 게 있을까. 누가 만들지 않고서 암반과 아래 못이 생겼겠나.
지난날 무심코 올랐던 터라. 지금 보니 하도 신기해서 내려 둘레를 살폈다. 바위가 저들끼리 모여졌을까.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다. 글자가 새겨졌다. 오래되어 희미하다. 손가락을 넣어 이끼를 뜯어내니 사우대(四友臺)라 쓰였다. 여태껏 사오대라 불렀는데 어찌 이렇게 틀렸을까. 감쪽같다. 모두가 사오대라 해서 그렇게 부르고 살았다.
연못 가에 푯말이 세워졌다. 칠성지(七星地)로 이곳에서 선비들이 모여 시 읊고 공맹을 얘기하던 곳이었다. 야산 기슭으로 풀 나무가 덮여 폐허가 됐어도 조선조 한때 풍광이 거룩하고 아름다웠던 곳이었다. 이젠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하기만 하다. 지나는 바람결 따라 어른어른하게 들릴 듯 보일 듯하다. 신선의 놀이터였다. 네 벗과 일곱 선비, 열 한 분이 모여 3백 편 시경 읊조리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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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거의 전부는 아니어도, 몇가지는 제 기억속에도 있는 추억입니다..
너무 급변하는 세상을 살고있으니, 저 역시도 가끔씩은 기록으로 남기고싶은 충동이 생겨도 그때지나면 잊고 삽니다. 엄마 떠나신 시골집도 머잖아 그리될지도 모르겠어서 안타깝지만...모든 세상역사가 그리 흘러흘러 왔지않나.
허물어져 주저않은 시골동네집들도 모두 그러한 역사를 가지고 사라질것같습니다.
긴글 쓰시노라 수고하셨습니다.!!!
성도님 반가워요.
얼마전 살던 고향을 오랜만에 찾았습니다.
떠내려가고 불타며 풀밭으로 변한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늘 즐겁고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