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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재상서(上宰相書)는,
재상에게 올리는 글이란 뜻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호교론서입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분은 체포될 것을
예상하시고 이 글을 저술해두었답니다.
1839년 1월에 체포되자,
이글은 재상 이지연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엎 드려 아뢰옵건대,
맹자가 양자와 묵자를 사설이라 하여 배척한 것은
그 사상이 유교학계를 해칠까 두려워 하였기 때문이요,
한유가 석가와 노자를 쳐서 물리친 것은
그 사상이 일반을 미혹하여 혼란케 할까 했어였습니다.
옛 군자가 법을 세워 금령을 펼 때
반드시 그 뜻과 이치가 어떠하고 해됨이 있는가를 알아 보았습니다.
무릇 의리에 맞는 것이라면 비록 나무꾼의 말이라도
성인이 반드시 받아들여 내 버리면 안되는 말로 되어 있거늘,
우리나라의 천주성교를 금하시는 것은 그 뜻이 어디 있습니까?
우선 그 뜻과 이치가 어떠한지 물어보지도 않고
몹시 원통스러운 말로 사교로 몰아 큰 법을 세워놓고
신유년(1801)을 전후, 많은 인명을 없애면서도
한 사람도 그 기원과 전통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 이 도를 배우면 유교에 해를 끼치겠습니까,
일반 백성을 혼란케 하겠습니까?
이 도인 즉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사용하고 늘 실행해야 할 도이오니
해가 된다던가 혼란이 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제 감히 그 도리가 그릇되지 아니함을 간단하게 말하겠습니다.
천지 위에는 주재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거기에는 세 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하나는 만물이요, 둘은 양심이요, 셋은 성경입니다.
만물은 무엇을 말함이겠습니까?
집을 가지고 비유하건대
그 집에는 기둥과 지추돌이 있고
대들보와 서까래와 문과 창과 담과 벽이
서로 홀연히 합해지고 저절로 섰다고 말하면
반드시 미친 사람의 말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제 생각컨데 천지는 커다란 집입니다.
나는 것, 뛰는 것, 움직이는 것, 심어 자라는 것,
기기묘묘한 형상들이 어찌 저절로 생겨 났겠습니까?
만일 저절로 이루어 졌다면
해와 달과 별들이 어떻게 그 위치를 지켜 그르침이 없으며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그 순서를 그르치지 않습니까?
흥하고 망하고 번영하고 시들음을 지배하는 이가 누구이며
착한 자에게 복을, 음난한 자에게 화를 주장하는 자 누구이겠습니까?
높이 솟은 하늘이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데
모든 세상 사람이 죽어 무덤으로 가는 것을 자연으로 돌림은,
이는 마치 유복자가 그 아비를 보지 못했다하여
그 아비가 있음을 믿지 아니함과 무엇이 다르리있까?
세상사람들이 한편의 묘한 문장이나
한폭의 명화를 보면 흠모하고 찬탄하여
반드시 누구의 재주로 된 것인가를 물어
결코 평범히 무시하여 그저 보아 넘기지 않습니다.
우주의 만물이 가지각색으로 빽빽하게 들어차
한없이 많은 것도 역시 일종의 명작이요, 명화인데
예로부터 이제까지 거의 없다시피 드물게
이것만은 그 작자를 묻지 아니하는 것이 웬 일이오니까?
이 세상 사물이 질과 모와 작과 위의 넉자를 벗어나지 못하옵니다.
질은 재료요, 모는 상태요, 작은 작자요, 위는 이용함입니다.
가까이는 우리 몸에서나
멀리는 모든 물건에서 그렇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이와같이 위대한 천지가 어찌 그 작자가 없겠습니까?
만물을 보고 그 주재가 계심을 아는 것입니다.
양심이라 함은 무엇을 말합니까?
만일 밝은 낮이 캄캄해지고 우뢰와 번개가 서로 마주치면
어린 아이라도 떨며 무서워하고 눈을 부릅뜨며
발이 무거워서 몸둘 곳이 없음을 압니다.
이로써 선을 상주시고 악을 벌하시는 대주재께서 계심이
마음과 머리 속에 박혀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항간에 어리석은 남녀들이 만일 당황하고 막다른 지경이나
슬프고 원망스러운 때를 당하면 천주를 불러 부르짖으나니
이것은 그 본연의 심정이요, 타고 난 천성을 가릴 수 없기 때문에
가르치지 않아도 알고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무엇을 어떻게 할 바를 몰라 두려워함이 모두의 상태입니다.
이것은 양심을 통하여 상주께서 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무엇을 말합니까?
옛적의 요, 순, 우, 탕, 문, 무,
주, 공의 전기가 경서와 사기가 있어 나려왔습니다.
만일 정서와 사기가 아니었으면,
요 순 우 탕 문 무 공이 어떠한 사상이나
어떠한 제도를 전하였는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사상이나 제도가 대쪽에 새겨지고 책 속에 적혀 있음으로
예로부터 옳다고보아 금석같이 믿습니다.
우리 성교의 전해옴도 경전을 통하여 된 것입니다.
천지창조부터 역사가 끊임없이 기록되어
구약과 신약에 뚜렷하게 증명되고 오늘에 이르러
집집마다 입으로 외오고 소리로 노래합니다.
소가 땀을 흘릴 만큼 실어다가
집에 채우더라도 해 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이러한 글이
중국의 경서와 사기에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고 봅니다.
중국의 경서 가운데 이런 말들이 들어있지 않습니까?
역경에 “상제께 바치나이다”
시경에 “상제께 아뢰나이다”
서경에 “상제께 제사하나이다”하였고
공자는 “하늘에 죄를 얻으면 기도를 바칠 곳이 없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을 공경하라 하늘을 두려워하라.
이 세 가지 증거를 들어 주재(천주) 계심을 이미 밝히 알았으니
천주께서 천지만물을 만드심은
우리에게 그 복을 보내주시고
그 나타내시려고 하심을 마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늘을 만드사 우리를 덮으시고 땅을 만드사 우리를 실으시고
해와 달과 별을 만드사 우리를 비추시고
초목과 금수와 금은동철은 우리가 누리고 사용하게 하셨습니다.
모태에서 나서부터 장성할 때까지
가지가지 큰 은혜가 이와같이 한이 없은 즉,
인간의 본분은 마땅히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만일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입고 먹기만 하면
인류를 내신 큰 은혜를 저버림이 이보다 더 클 수 없습니다.
비유하여 아버지가 집을 짓고 살림을 마련하여
아들에게 주어 쓰게 하였는데
그 아들이 그 집에 살며 살림을 쓰면서 제가 잘난체하며
부모를 섬기는 도리와 근본을 갚는 뜻을 모르면
이것이 효도입니까 아니면 불효입니까?
계명이란 천주께서 계시로서 가르쳐 주신 열가지 계명입니다.
1은 하나이신 천주를 만유위에 흠숭하고,
2는 천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불러 거짓 맹서를 하지 말고,
3은 첨례날(주일)을 지키고,
4는 부모를 효도하여 공경하고,
5는 살인하지 말고,
6은 사음을 행치 말고,
7은 도둑질을 하지 말고,
8은 망년된 증참을 말고,
9는 남의 아내를 원치 말고,
10은 남의 재물을 탐하지 말라는 것인데,
이 열가지 계명을 종합하면 두가지로 돌아가니
즉, 천주를 만유 위에 사랑하고 남을 자기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위 세가지 계명은 천주를 흠숭하여 섬기는 절차요,
아래 일곱가지는 자기를 닦고 성찰하는 공부입니다.
안씨의 네가지 말라는 것이나
대기의 아홉가지 생각이 이에 비교할 바가 되지 못합니다.
충성과 관서와 효도와 우애와 인애와 의리와
예의와 지혜가 이 안에 들어 있어 터럭만치도 부족된데가 없습니다.
이 도를 한 집안에서 실행하면 집안이 정돈될 것이요,
한나라에서 실천하면 나라가 다스려질 것이요,
온 천하가 실행하면 온 천하가 태평할 것입니다.
열가지 계명 가운데 한 가지라도 범할 수 없으며
몸으로 범하기 뿐만 아니라 더욱 마음으로 범함을 금합니다.
무릇 사람의 잘못은 그 마음 속에서 일어나서 그 행동을 그릇칩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법은 그 행동을 다스릴 수 있으나
그 마음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천주의 계명은 행동만 다스릴 뿐 아니라 마음까지 다스립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위태롭고
도를 구하는 마음이 미약하여 자칫하면 죄를 범합니다.
사욕과 편정이 백방으로 유인하여 교만으로 꾀이고
분노로 꾀이고 탐도로 꾀이고 사음으로 꾀이고 질투로 꾀이고
해태로 꾀여 사람을 사지에 몰아 넣습니다.
스스로 경계하여 물리치지 아니하고
또 그때 그때 공격하지 아니하면 함정에 빠짐을 면치 못합니다.
죽을 때까지 싸우고, 싸움이 계속될 때 싸워 이기면 공이 되고
이기지 못하면 죄가 됩니다.
공과 죄의 판결은 육신이 죽는 날에 있습니다.
천주께서는 지극히 공의로으사 선을 아니 갚으심이 없고,
천주께서는 지극히 공의로으사 악을 아니 벌하심이 없습니다.
만일 육신이 죽은 후에 영혼까지 없어진다면
상이나 죄를 어디다가 베푸시겠습니까?
그래서 영혼이 죽지 않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무릇 혼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생혼이요,
둘째는 각혼이요,
셋째는 영혼입니다.
생혼은 초목의 혼으로 나서 자랄 수 있으나
앎과 깨달음이 없고
각혼은 금수의 혼으로서 앎과 까달음이 있으되
뜻과 이치도 모르고 옳고 그른 것도 모릅니다.
영혼은 사람의 혼으로서 능이 나서 자라서
알고 깨달을 수 있고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수 있고
도리를 추궁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만물 중에 가장 높습니다.
사람이 높다고 하는 것은 그 혼이 신령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천명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모태에서부터 타고 난 것입니다.
어찌 초목이나 금수처럼 더불어 썩어 없어지겠습니까?
예전에 유학자들도
혼이 세가지가 있고 영혼이 없어지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3혼이
여러번 흩어진다 또는 혼이 올라가고 혼이 내려간다 하고
그 혼이 셋이 있고 영혼이 죽지 아니함이 분명합니다.
이미 죽지도 아니하고 없어지지도 아니하면 어디를 가야 하겠습니까?
선자의 영혼은 천당에 올라 상을 받고
악자의 영혼은 지옥에 나려 벌을 받습니다.
상은 천당의 영원한 복락이요,
벌은 지옥의 영원한 고통입니다.
만일 천당을 보지 않고 지옥을 보지 아니 하였다 해서
천당 지옥이 있음을 믿지 아니하면
이는 눈먼 사람이 하늘을 보지 아니하였다 해서
하늘에 해가 있음을 믿지 아니함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일이 이치에 합하면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고
이치에 합하지 아니하면 보일지라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을 믿을 수 있고 믿을 수 없음이
보고 못보는데 매이지 아니하고
다만 이치에 합함과 이를 합하지 아니함에 있을 따름입니다.
이치에 합한다면 천년후에 올 일이라도
가만히 앉아서 알아낼 수가 있으니 하필 내가 몸소 보아야 하겠습니까?
국가에도 상과 벌이 반드시 있습니다.
공로가 있는 자는
조정에 불려 올려 벼슬과 녹을 받게 하고 황금과 비단을 주고
죄가 있는 자는 쫒아내어 옥에 가두고 사형에 처합니다.
한 국가의 임금에게도 상벌의 권한이 있거늘
하물며 천지의 대군에게랴
그 상은 이 세상의 벼슬과 녹에 비할 바가 아니요
영원히 끝없는 고통입니다.
천당에 오르고 지옥에 나리는 결정이 한번 이루어지면
다시는 변경할 도리가 없습니다.
오! 세상 사람들이 영혼이 죽지 아니함을 밝히 알면서도
어디 있는 줄을 모르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이 이미 영원한 상과 영원한 벌이 있은즉,
세상 일이 헛된 환상임을 알 수 있겠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길어야 백년을 넘지 못하면서도
이로운 것만 탐하는 마당에서
얻지 못한 것을 얻으려고 애를 쓰고
이미 얻은 것은 잃을까봐 걱정하는 새
어느듯 늙음이 닥아온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몸이 한번 죽으면 부귀공명이 필경 허무로 돌아가고 맙니다.
하물며 부귀공명은 한 평생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이어늘
이 티끌같은 꿈에서 깨나기가 어찌 그리 어렵습니까?
오! 이 세상의 복은 어그러져 완전치 못하고
천상의 복은 완전하여 어그러짐이 없습니다.
이 세상 복은 잠시 뿐이요,
천당의 복은 영원하여 잠시 뿐이 아닙니다.
어그러지고 잠시 뿐인 이 세상 복을 얻고저 함은
완전하고 영원한 천당의 복을 얻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비록 천당의 영복을 얻지 못할지라도
지옥의 후환만 없다면 세상의 잠시 영화를 도모하여도 좋겠지만
이 지옥의 영원한 벌을 어찌하겠습니까?
이 세상에 있을 때 정신을 차리지 못해 깨닫지 못하다가
육신이 죽은 뒤에야 뉘우친들 이미 늦었습니다.
이러므로 목을 끊을 큰 도끼가 앞에 있고
몸을 삶을 큰 솥이 뒤에 있더라도
꿋꿋하게 굽히지 아니하는 자가 대대로 적지 않습니다.
이것도 진정한 교의 한 증거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해 말하면
지극히 거룩하고 지극히 공번되고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참되고 지극히 뛰어나고 오직 하나요 둘이 없는 교입니다.
어찌하야 지극히 거룩한 교라 하는고 하면
천주께서 친히 세우셨고,
예로부터 성인들이 대대로 뒤를 이어 그 옳음을 탄명하였고,
그 규칙을 정하여 생명을 바쳐서 증명하기까지 이르렀으니
지극히 거룩하다 이를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지극히 공번되다 이르는고 하니,
지위가 높거나 낮거나 학식이 있거나 없거나,
늙고 젊음을 막론하고
세계의 모든 사람이 다같이 봉행하여야 할 도이오니
지극히 공번되다고 이를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지극히 바르다 이르는고 하니,
광대명백하고 크고 평평하여 터럭만치도 치우친 행위나
바른 것을 도루시키는 일이 없으니 지극히 바르다고 이를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지극히 참되다 하는고 하니,
천하에 교가 없는 나라가 있는 적이 없으되,
그 교가 참되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노자나 장자는 허무사상에서 참됨을 잃었고,
선도와 불교는 환상과 망상에서 참됨을 잃었고,
이밖에 군소 사상과 미신과 방술은 입으로 논할 가치도 없으나
성교의 도리는 진실하여 거짓이 없어
영원히 그르치지 아니하니 지극히 참되다 이를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지극히 완전하다 하는고 하니
초목으로 비유하면 이단교들은 어떤 것은 줄기가 있어도 가지가 없고,
어떤 것은 잎이 있어도 꽃이 없고,
어떤 것은 꽃은 있어도 열매가 없어
시작과 결말이 서로 연결되지 못하고 접속될 수도 없으되,
성교는 줄기가 있고 가지가 있고
잎이 있고 꽃이 있고 열매가 있어
천지와 천신과 마귀와 인류의 내력과
과거 현재 미래의 질서가 가지가지로 다 갖추어 있으니
지극히 완전하다고 이를 수 있습니다.
슬프다. 금과 옥을 가르켜 억지로 기와라 자갈이라 하고,
먹어서 이로운 것을 가지고 억지로 못먹는 것이라 하니,
이 일을 장차 어찌할고.
또 말하기를 부모를 멸시하고 임금을 업신여긴다 하니
이는 성교의 주요한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십계의 제 4계명이 부모를 효도로 공경하라 하였습니다.
충과 효의 두 글자는 만대에 변할 수 없는 도리입니다.
부모의 뜻을 받들고, 그 육신을 봉양함은
사람의 자식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이로되
성교를 봉행하는 사람은 더욱 절실히 삼가고 조심합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섬김에 그 예를 다하고 봉양함에 그 힘을 다합니다.
충성을 임금님께 옮겨
자기 몸으로 하여금 생명을 없애 끓는 물 속에 들어가고,
타는 불을 밟기도 하여 감히 회피하지 아니 하나이다.
이대로 아니하면 계명의 가르침을 어기는 것이 되오니
이래도 과연 부모를 멸시하고 임금을 업신여기는 학설입니까?
다만 나라의 임금이 금하는 데도
백성이 실행하는 자 있고,
집안 아비가 금하는 데도 자식이 실행하는 자가 있어
이것을 가지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까?
이것도 역시 말은 되오사 지위에는 높고 낮음이 있고,
일에는 가볍고 무거운 것이 있으니,
집안의 아비가 가장 중하나,
한 집안의 아비보다 높은 이는 나라의 임금이요,
한 나라 안에서 임금이 가장 중하나
나라의 임금보다 더 높은 이는 천지의 큰 임금이십니다.
집안의 아비의 명을 듣고
나라 임금의 명령을 듣지 아니 하면 그 죄가 무겁습니다.
나라 임금의 명령을 듣고 천지 대군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면
그 죄는 더욱 커 비할 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주를 받들어 섬김이
임금의 명령을 일부러 어기려는 것이 아니오
부득이 한데서 오는 것인데,
이것을 들어 부모와 임금을 업신여긴다 함이 옳은 말이 오니까!
또 말하기를 재물과 여자를 서로 융통한다 합니다.
재물의 융통은 예로부터 국가를 다스리고
집안을 다스리는 사람에게는 하루라도 없어서는 아니 될 일입니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융통해야만 백성은 서로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만일 재물을 융통하는 법이 없으면
온 나라 안에서 살아나갈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바로 이것을 좋지 못한 법이라 하여 도리어 금해야 될 일입니까?
여자를 서로 융통한다고 하는 것으로 말하면
금수도 그렇지 아니한 것이 있거늘 하물며
그것을 성교에 돌리려 합니까?
십계의 여섯째에 간음을 행하지 말라 하였고,
아홉째에 남의 아내를 원치 말라고 하였습니다.
여섯째 계명은 몸으로 범함이요,
아홉째 계명은 마음으로 범함입니다.
성교에서 간음을 엄격하게 금함이 이와 같이 거듭 겹쳐 있는데도
여자를 융통한다는 말을 퍼뜨리니
어찌 이와 같이 윤리를 거스리고 떳떳한 질서를 어지러이 하는 교가 있겠습니까?
교리의 참되고 거짓됨과 사리의 바르고 그름은 한쪽으로 밀어놓고
얼토당토 아니한 말을 가지고 공격하고 배척하니,
외국의 교라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까?
금은 산지를 가리지 않고 오직 순금이면 보배가 되듯이
교가 어디서 왔건 그 거룩함이 참되면
그 교의 전래함에 어찌 이 나라 저 나라의 경계가 있겠습니까?
중국으로 말하면, 각국 사람들이 왕래하며 서로 교제합니다.
불교의 스라마나의 숭상도 버려둡니다.
외국사람들이 많이 와서 사나,
일찍이 금할 줄을 몰랐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불교의 해 끼침이 오래 되었습니다.
전국에 있는 사찰의 건축은 가장 사치를 다한 것이요,
금부처와 동불상들은 재산을 낭비한 것입니다.
저 불교는 인도의 이단입니다.
성교의 글을 훔쳤고,
성교의 규칙을 본떳으나 옳은 도리를 그르쳤고,
기강이 뒤집혔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붉은 빛깔을 망치는 자줏물이요,
못자리를 망치는 가라지입니다.
길흉화복의 설을 퍼뜨려
무식한 사람들을 공갈함이 이제 이르러 괴상한 폐풍이 되었습니다.
무당, 풍수, 점장이, 상장이와 같은 사람들 까지도
부녀와 아이들을 홀리고 혹하게 하여,
돈과 재물을 살살 낚아감을 예사로 보아 넘기면서
홀로 성교만이 포섭의 은전을 받지 못함은 어찌된 일입니까?
가정에 해를 끼쳤습니까?
나라에 해를 끼쳤습니까?
그 하는 일을 보고 그 행실을 살피면 그 인간이 어떠함을 알 수 있고,
그 가르침이 어떠함을 알 수 있습니다.
저희들이 일찍이 역적질을 하였습니까,
도둑질을 하였습니까,
일찍이 간음을 하였습니까,
살인을 하였습니까,
또 법에도 없는 형벌을 해서 천주를 배반케하고
더러운 폭설로 모독하는 사실이 허다합니다.
대저 천주는 만물을 만드신 큰 부모시오,
만물을 다스리시는 큰 주재십니다.
옛 성현들은 일이 생겼을 때 우러러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늘의 사람들은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해마다 계속 흉년을 당하고 있습니까?
백성과 나라가 곤궁에 빠진 이 때 바라건대,
우리의 어지신 임금께서는
밤에도 옷을 벗지 마시고 해뜰 무렵 진지를 잡수실 만큼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시사 어지심을 베푸시고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덕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흡족케 하시옵소서.
아! 저 성교를 믿는 사람들만이
홀로 우리 임금님의 백성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이 인간들이 어찌하여 극도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아낌이 없는고.
옥안에서는 지쳐서 죽고,
문밖에서는 목이 잘려 죽음이 연달아 끊이지 아니하여,
피눈물이 도랑을 이루고,
통곡하는 소리 하늘을 찌르고,
아비는 자식을 부르고,
형이 아우를 부르고,
궁지에 몰려 몸을 돌이킬데가 없는 것 같이 되었으니 이게 무슨 꼴입니까?
대저 목숨을 덜고 생명을 바쳐서 천주의 참된 교의 증거가 되고,
천주의 영광을 드러냄은 우리들의 분수에 있는 일입니다.
이 몸도 장차 죽을 목숨입니다.
이렇게 감히 말할 때를 만나
한번 머리를 들고 길게 외치지 못하고
슬프게 입을 다물고 죽는다면
산처럼 쌓인 이 하회를 장차 백대의 후세에 폭로할 수 없겠습니다.
엎드려 빌건대 바로 이때에 밝히 비추어 굽어 보시와,
도리가 참된지 거짓인지 그릇된지 올바른지 자세히 판단한 다음,
위로는 나라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일변하여
도의로 돌아와 금령을 늦추어 체포하는 법을 거두고
옥에 같힌 사람들을 내놓고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제 자리에 돌아가
제 업을 즐기면 한가지로 평화를 누리게 하시기를 천만번 바라옵니다.
또 한 말씀드립니다.
죽은 사람 앞에 술과 음식을 차려놓는 것은
천주교에서 금하는 바입니다.
살이 있을 동안에도 영혼은 술과 밥을 받아 먹을 수 없거늘,
하물며, 죽은 뒤에 영혼이 어찌 하겠습니까?
먹고 마시는 것은 육신의 입에 공급하는 것이요,
영혼의 양식은 진리와 덕행입니다.
아무리 지극한 효자라 해도 맛좋은 것이라해서
잠들어 있는 부모앞에 차려드릴 수 없는 것은,
잠들었을 동안은 먹고 마시는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잠시 잠들었을 때도 그렇거든,
하물려 영원히 잠들어 버렸을 때는 어떻하겠습니까?
쌀과 수수와 기장과 피와 향기로운 과일로 된 잿상을 차려 놓음이
헛된 일이 아니면 거짓된 일입니다.
사람의 자식이 되어 헛되고 거짓된 예로
어찌 이미 죽은 어버이를 섬길 수 있겠습니까?
양반 집의 신주라고 하는 것도
천주교에서는 금하는 것입니다.
이미 정신의 기백과 육체의 골격이 서로 연결된 것이 없고,
또 낳아서 길러준 노고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아비라 어미라 함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목수가 만들 것이요, 분을 칠하고 먹을 찍은 것을 가지고
참 아비와 참 어미라 부릅니까?
바른 이체에 근거가 없고 양심이 허락지 아니합니다.
차라리 양반에게 죄를 지을지언정
천주교에 죄를 얻고 싶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