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으로 아픔을 승화시키다!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창 29:35)
레아의 관심은 유다의 출산 전후로 바뀌었습니다. 즉 남편에게서부터 하나님께로 그녀의 관심이 옮겨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습니까? 자신의 상황들을 믿음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으며, 또한 감사와 찬양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창 29:35 상)
C.S.루이스는 “고난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확성기”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람들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레아 역시 무엇을 통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습니까? 고통입니다. 즉 그녀는 고통을 통하여 믿음의 눈을 뜨게 되었으며, 또한 하나님을 올려다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혹 지금 고난 중입니까?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복들을 미리 보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혹 지금 아픔 중에 있습니까? 믿음으로 그 아픔을 이겨내고, 감사와 찬양으로 승화시킬 수 있길 바랍니다.
한편, 레아와 라헬 두 사람은 친 자매였지만, 신앙인격 면에서는 레아가 라헬보다 앞섰던 것 같습니다. 동생 라헬은 선천적으로 아름다움을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낳지 못하는 콤플렉스를 자기 시녀를 통해(창 30:3~8), 혹은 합환채(合歡菜)를 얻음으로써(창 30:15) 해결하려고 했으며, 하란을 떠나올 때 아비의 드라빔을 훔치는 등 욕심도 많았습니다. “그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의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하고.”(창 31:19)
반면 레아는 어떠했습니까? 변변치 않은 외모에 남편의 사랑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신앙으로 승화시킴으로써 결국 어떤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 여섯 지파의 조상이 되는 한편, 후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녀의 아들 유다의 후손으로 나심으로써 메시야의 직계조상(直系祖上)이 되는 영광까지도 누렸습니다. 즉 여인이 얻을 수 있는 가장 영예로운 지위를 얻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녀는 남편 야곱과 함께 가나안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남편보다 먼저 하늘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녀가 가나안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았고 또한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녀의 시신이 막벨라 굴 가족묘지에 안장됨으로써, 야곱의 첫 아내로서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참고로 동생 라헬은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창 49:31) 이는 필시 오랜 세월을 참고 인내한 결과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할렐루야!
결국 레아의 소명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자식들, 그 중에서도 특히 유다를 통해 일하실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보고, 그 자식들로 하여금 이를 준비케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허락되어진 하나님의 언약들이 자기 자식들을 통해 이루어질 것을 소망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레아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재고되어야 할 것입니다. 혹자는 레아를 율법의 의무 아래 있는 유대교인으로, 라헬을 사랑의 복을 아래 있는 기독교인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성경의 전체적인 흐름을 고려치 못한 처사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레아가 자신의 고통을 신앙으로 승화시킴으로써 하늘의 신령한 복들을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현재의 고통들을 믿음으로 잘 승화시키고 있습니까? 우리의 자녀와 우리의 제자들을 통해 일하실 하나님의 계획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들로 하여금 이를 준비하게 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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