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콤달콤 사랑으로
이 남 순
자리에 누우니 깊은 늪으로 가물가물 아늑하게 빠져드는 것 같다. 눈을 감으니 오달진 포도알이 아롱거린다. 포도 익는 팔월이 열리고 벌써 며칠째 동틀 녘부터 땅거미 질 무렵까지 포도송이 매만지는 일을 하고 있다.
포도, 그 싱그럽고 달콤한 맛은 그저 오는 것이 아니다. 봄바람에 연둣빛 포도 순이 돋아 나오고 순을 잡아주는 일로 포도 농사는 시작된다. 아기 손가락 같은 꽃망울이 지면 이때부터 포도송이가 만들어진다. 꽃 진 자리 오밀조밀 포도알이 앉으면 알알이 알 솎기로 포도송이 가꿔지기에 포도는 손으로 만져 만든다는 말이 맞는 듯하다.
연일 기록을 경신한다는 무더위에 포도밭은 위로는 비 가림 비닐을 쓰고 아래 땅에도 비닐이 깔려있다. 밭은 쏟아붓는 햇볕 뜨거운 열기로 후끈 달궈진 가마솥 같다. 솥이 달궈지기 전 포도를 따려고 동트기에 앞서 포도밭을 향한다. 어슴푸레 동이 틀 즈음 밭에 이르러 농막 문을 사방으로 활짝 연다. 손수레에 스티로폼 상자를 싣고 포도송이 술렁이는 밭으로 든다.
송이를 요리조리 둘러보고 잘 익은 포도를 조심조심 한 손으로 살포시 잡아 가위로 쌀 툭 자른다. 딴 송이는 귀한 손님 모시듯 상자에 모셔 작업장으로 옮겨온다. 서너 수레 따왔다.
그새 동산을 넘는 눈부신 아침 햇살에 이슬 입은 포도 잎새는 바람결에 윤슬로 반짝이는데 감당할 더위 생각에 ‘햇볕 그만! 여기서 달궈지기를 멈춰준다면 좋으련만….’ 해는 슬슬 중천을 오르며 이글이글 열기를 뿜는다.
‘즐기자! 한증막 즐겨 드나들듯 즐겨 보리라. 이 포도 찾는 분께 새콤달콤 행복한 맛 듬뿍 담아 정성스레 내어 드릴 마음은 더위도 무색하게 하리라.’
먹기만 하던 포도를 동생 덕에 포도 농사일로 오뉴월 염천을 포도밭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더위와 다툰다.
동생이 포도 농사지은 지 삼 년 되었다. 딸 셋을 둔 동생은 훗날 딸들이 성가하여 교통 편리한 이곳에 모여 즐길 수 있는 집을 짓겠다며 산 집터가 포도밭이다. 집을 짓기 이른 때라 농사하고 있다.
경험 없이 시작한 첫해는 이 사람, 저 사람 말 듣고 알 속기를 성글게 하여 포도알이 마치 자두 같았다. 포도가 익을 무렵 포도 먹기를 기다렸지만 무소식이다. 포도가 병을 입어 다 썩어버렸다. 섞은 포도 따서 버리는 수고만 했단다.
이듬해 올케는 경험자 말을 믿고 따르자고 했지만, 동생은 스스로 공부한 대로 하겠다고 고집부려 열매를 너무 많이 달아서 익지 않는 폐단을 겪었다.
올해는 겨울부터 다른 사람은 해보지 않은 동생만의 농법으로 거름하고 잘해보려고 애를 썼다. 포도꽃이 피는 시기 농법 대립으로 동생 부부는 다투고 올케는 “포도 농사 혼자 해봐라!” 하고 집으로 가버렸다. 그 후 다시 포도밭에 오지 않는다.
포도알이 커가면 때맞춰서 알 솎기를 해야 한단다. 그래야 포도가 알맞은 크기로 자라 익어 간다는데, 올케는 그 절실한 시기에도 나 몰라라 한다. 동생은 얼마나 답답했는지 아무것 모르는 내게 도움을 청한다.
경험자 손을 빌려 배워가며 알 솎기를 한다. 처음 가위질은 뚝 딱 날이 지날수록 똑딱, 똑딱 가위질 소리 경쾌하고 빠르다. 알 솎기를 끝내며 동생은 “누나 품삯 받아도 되겠네.” 한다. 웃자란 포도 순 따는 일까지 배워서 간간이 일손을 보탠다.
선녹색 포도알이 비취옥으로 영글고 동생은 포도 농사 잘 지었다는 인사를 듣기도 했다. 누군가는 포도 농사는 포도 돈을 사야지 농사 성패를 가름한다고 한다.
작년 폐단을 거울삼아 올해는 포도송이를 적게 달았다. 제때 색이 나고 당도가 오른다며 좋아한다. 익었다는 소식을 기다리는데, “누나, 포도 탄저가 왔어! 탄저 걸린 포도 따내야 하는데…….” 하며 말끝을 흐린다. 일손 돕기를 은근히 바라고 미안해서 한 말 같다.
벌여놓은 일 많은 동생이 다른 일로 분주해서 포도 병충해 방제 시기를 놓쳐 병이 확산하였단다. ‘일 좀 줄이고 잘할 것이지 아이고 마누라한테도 다정다감하지 못하고, 윽박지르는 고집불통이니 고생 사서 해도 싸다.’라는 생각에 동생 부부가 밉고도 애석하다.
칠월 복더위에 속까지 태우며 붙이라 거절하고 속앓이하기는 더 힘이 들 것만 같아서 이틀 거리로 탄저 방제와 새순 따기를 한다. 팔월 더위 속에 포도는 자색 빚으로 주절주절 익어 간다.
이웃 농장은 벌써 포도를 출하한다. 동생은 출하를 계속 미룬다. 색깔이 까맣게 되질 않는다. 경험 많지 않은 동생은 포도 품성을 알지 못하고 검게 익기를 애타게 기다린다. 앞서 농사한 분에게 포도를 사 간 사람들이 찾아왔다. 포도 따기를 기다린다며 수확을 재촉한다.
동생 포도 종류는 까맣게 익지 않는 피오네라는 자색 포도란다. 그제야 동생은 당도를 측정한다. 까만 포도보다 당도가 3, 4브릭스 높게 나온다.
이웃 농장 포도보다 달다. 과즙도 풍부하고 부드러워 맛은 월등하다. 이는 자색 포도로 가꾸기가 까다로워 생산이 많지 않다고 한다. 청과시장은 때깔로 평가를 한단다. 첫 수확에 색이 좋지 않다는 평이다. 가격 또한 신통찮다. 동생 시무룩한 모습을 본다.
다음 날은 포도 가격이 잘 나왔다며 동생이 싱글거린다. 사 먹고, 맛으로 진가를 평가해 줘서 사 가는 이가 많은지, 모르겠단다. 맛을 알아주는 사람 많아져 동생 웃는 얼굴 보면 좋겠다.
더위를 땀으로 삭이며 따 온 포도를 보고 또 보아 다듬어서 송이송이 포장한다. 상자에 부족하지 않게 낙낙하게 넣는다. 정성 담아 저울에 올린다. 이제껏 애쓴 보람이 사 가신 분 맛있게 드시고, 동생 주머니 넉넉히 채워주기를 바라며 포도 상자 채워 간다.
멋없는 내 동생아! 고집 그만 부리고 마누라 말 좀 들어라. 내년에는 부디 송알송알 포도송이처럼 새콤달콤 사랑으로 포도 가꾸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