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의 예술성을 발견한 비평가-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신형철, 문학동네, 2008.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가나타리 고진은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고했다. 일본문학이 ‘1980년대에 끝났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비평가로서 끝났다고 진단하는 힘은 문학에 대한 총체적 안목에서 비롯된다. 비평가 눈은 거시적이면서도 다각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비평가는 무엇보다 그 대상을 사랑해야 하며 작품을 해체·분석해 긍정적인 비판을 주저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비평은 한 번 더 그 작품을 빛나게 해줘야 한다. 여기에 적합한 신예비평가가 2008년 한국에 탄생했다. 그는 신형철이다. 약력도 짧고 책 한 권도 낸 적이 없는 그가 첫 평론집을 들고 문단에 데뷔했다. 바로 <몰락의 에티카>(2008)이다.
21세기에 문학을 어떻게 읽어야하는지 <몰락의 에티카>는 설명한다. 총 5부로 구성되었고 700쪽이 넘는 분량이다. 1부는 소설에서 윤리를 찾고 있다. 2부는 태만하지 않은 시를 소개한다. 3부는 5부는 단행본에 수록된 해설들에 대해 썼고 4부는 한국시의 역사를 보여준다. 신형철을 가리켜 문단은 ‘제2의 김현’이라는 찬사와 함께 팍팍한 비평계에 신선한 활기를 몰고 왔다는 평이다.
신형철은 <몰락의 에티카>에서 문학을 어떻게 비평했을까? 문학비평가로서 그는 확실한 기준점을 들고 나왔다. 그 기준은 ‘에티카(Ethia)’이다. 그는 작품마다 각각의 윤리학이 창안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문학작품 주인공들은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참혹하게 잃어버린다. 그것이 참혹할지라도 그 안에서 진실 되고 숭고한 삶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주인공은 몰락할지라도 끝까지 놓지 않는 그 무언의 에티카를 발견해내는 일. 그것이 비평가의 의무다. 에티카가 작품 안에 있을 때 ‘문학적’이라고 말한다. “그 진실의 윤리학을 위해 문학은 있다.”(p.19)
그렇다면 그는 왜 문학에서 에티카에 집착하는가? 인간이 그렇게 이성적인가. 인간이 그렇게 합리적인가. 되물어본다. 문학의 존재이유, 문학의 아득한 심연, 고독한 사유를 그는 존중한다. 온 세계가 성공. 이성, 합리성을 말하며 동일선상에서 한 지향점을 찾아 뛰고 있을 때 동일성을 거부한 선택에 대해 대변하는 것이 문학장르라고 말한다. 비평가는 그 선택에 대해 ‘문학적인 것’을 발견해내고 그것을 질문으로 전환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문학은 답을 주지 않고 질문한다. 문학이 무엇을 질문하느냐 찾고, 문학은 그 질문을 찾을 수 있게 작품을 써야한다고 그는 항변한다. 이것이 문학을 읽는 이유가 될지 모른다.
<몰락의 에티카>에서 다룬 시나 소설들은 이런 ‘질문’을 담았는지 그 유의미성에 대해 평론한다. 그는 “문학은 이제 대답하지 말고 질문하라”(p.19)는 방점을 찍고 비평을 시작한다. 신형철의 소설에서 사용하는 준거틀은 세계, 문제, 해결의 요소에 어느 정도 현실성이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인훈 <광장>, 강영숙 <리나>는 이 모든 것이 반영된 소설이며, 김영하 <빛의 제국>, 박민규의 <핑퐁>은 세계와 문제의 현실성은 있으나 해결의 현실성이 미흡하다는 평가다. 소설의 주식은 여전히 ‘현실’이며 현실성을 담보하지 못하면 소설 안으로 독자를 끌어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기존통념에서 비판받았던 작품들을 충실하게 재검증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김남천<물>, 김영헌<벌레>는 똥과 오줌으로 대변했을 뿐이라는 비평에 김훈의 <화장>을 같은 선상에 놓고 변론한다. 두 작품은 한국소설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유물론이고 작가가 비인간적인 면을 대면하지 않는다면 모든 윤리학은 허위다라고 주장한다.
그의 비평은 논리적이다. <몰락의 에티카>에서 다룬 시와 소설은 신뢰성을 담보해준다. 그 힘은 철학적, 정신분석학적 근거가 탄탄하게 받쳐주기 때문이다. 철학은 문학의 엉킴을 풀어주는 역할을 해준다. 작품이 혼란스럽고 망연자실할 때 철학적 사유와 정신분석으로 힘을 얻기도 한다. 그의 문학평론에 자주 등장하는 철학과 정신분석이 매개되는 이유다. <올드보이>를 슬라보예 지젝의 정신분석과 <오이디푸스 왕>와 연결한 평은 그 인과성에 압도당한다. 주인공의 행위를 오이디푸스의 서사에 근접해 “잃어버린 기억-기억의 회복-정체성의 붕괴”(p.65)라는 구도로 풀고 있다. <올드보이>에서 에티카는 이우진이 자신의 ‘죄’를 직면하는 것이다. 이우진이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누나의 손을 자발적으로 놓았던-을 본다. 오대수의 욕망과 향유가 근친상간이 되어 돌아오고 이우진과 이수아, 오대수와 미도는 결국 실패한 사랑을 한다. 관객은 난감하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문학이 할 수 있는 급진적인 윤리학이다. “이것은 비극이지만 사랑 그 자체가 고도로 병리적인 상태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p.76) 이 세상에 불가능한 사랑은 있을지라도 해서는 안 될 사랑 따윈 없다고 말하는 몰락의 에티카를 신형철은 독자에게 선물한다.
그의 비평은 넓은 포용력을 안고 간다. 왜냐하면 신형철은 문학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문학비평에 날을 날카롭게 세우기도 하지만 그 밑바닥엔 애정과 감동을 전하는 비평을 하고 싶다는 소망이 드러난다. 그건 그가 작가에 대한 애정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다. 저 수많은 작품을 뜯어보고 해체하고 다독거리긴 쉽지 않은 일이다. “손택수의 시도 아주 드물게 서정의 함정에 빠질 때가 있다.”(p.253)의 완곡한 표현이 증명해준다. “이 독창적인 소설미학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하나. 이 소설의 장르는 그래서 그냥 ‘은희경’이다.”(p.628)의 자신 있는 찬사를 주기도 한다. 김애란을 애틋해하고, 곡괭이를 들고 소설을 파는 이기호에겐 “힘내세요”라고 말한다. 뉴웨이브 시인들(김민정, 황병승, 이민하, 김행숙 등)을 향해 하찮은 시를 써주어 고맙다고 외친다. 과잉 감각으로 사유하는 김경주, 사랑의 느낌을 대변한 김행숙을 애정으로 비평한다. “진실은 언제나 건강한 자들이 아니라 앓는 자들의 편에 있다”(p.230)고 말하는 작가들을 향해 그는 한치의 혼란도 없다.
그럼에도 <몰락의 에티카>는 다소 난해한 측면도 보인다. 특히 서술어의 특징의 느닷없음이 독자들로 하여금 평론집을 읽을 때 방해요소로 작동한다. “시는 어떤 이즘(ism)을 설득하려 들기보다 그것을 살아버린다”(p.245)는 표현에서 ‘설득’과 ‘살아버린다’의 간극은 아득하다. “소설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먹는다”(p.23)에서 ‘소설’과 ‘먹는다’의 낯선 문장들이 그런 예이다. 그렇지만 이런 문장들은 독자를 사유하게 만든다. 상투적이지 않고 일반적이지 않아 그의 문체는 낯설고 아름답다. 아름다운 문체의 향연을 보게 된다. 불친절하고 불명확하고 부자유스러울 때 우리는 사유한다. <몰락의 에티카>가 흥미로운 지점이다. 독자는 신형철을 통해 문학을 재해석하는 사고를 숨 가쁘게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신형철만이 가진 비평의 세계에 몰락하고 싶다면 강독을 권한다. 비평도 예술이다.
<서평-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