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01월 29일 66세에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2017년 9월 2일 91세로 어머님이 소천하셨다.
양천( 현재 강서구 가양동)에서 이씨 문중의
맏딸로 태어나셔서 오정리 ( 현 부천시 오정동)
민씨 문중으로 시집을 오셨다.
그 옛날 우리집은 잘 살지 못하고 식구들만 많은
집안이었고, 할아버님이 농사로 그리고 아버님은
동네에 있던 미군부대 근로자 반장으로 계셨었다.
고모님들이 4분, 삼촌이 한분. 내가 어려서 기억은
아버님이 둘째이고 그 밑으로 셋째, 넷째가 고모님
다섯째가 삼촌 막내가 고모님이셨다.
(부천순천향병원 장례식장)
아들이 귀하다고 아버님을 애지중지 키우셨단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나중에 삼촌 한분이 더 태어났지만.
이런 집안에 어머님이 시집오셔서는 아들들만 8을 두셨으니
동네에서는 아들부자라 하였었다.
(부천순천향병원 장례식장)
그 많은 형제들을 고모님들과 할머님께서 많이 업어주고
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머니는 집안을 꾸려 가느라
산에서 나무도 해 오시고, 밭일은 도맡아 하셨고,
닭도 많이 키우느라 흙벽돌로 커다란 닭장도 만들고
그 옆에 방도 만들어 우리가 그 곳에서 자기도 하였었다.
지금 생각하면 완전히 황토방이었다. 안채와는 별개로 지은
건물이었다. 내가 아마도 중학생인 1961~2년도이었다.
그 때 삼촌과 할아버님과 같이 흙벽돌을 나무형틀에 넣어
만들 때 황토흙에 짚을 썰어 넣고 발로 밟아 반죽 한 후에
만들던 기억이 있다.
(구 현대전자 퇴직자모임 아미회 전임회장 이현희 회장)
초등학교 고학년일 때는 어머니와 같이 산에 나무하러 가서
같이 짊어지고 온적도 많았다. 오정리 우리동네는 야산이 없고
논과 밭들만 많은 곳이다. 야산 가려면 지금 보면 2키로정도는 가야
야산들이 있었다. 어렷을 때는 보폭이 적으니 상당히 많은 시간이
소요된거 같다. 이렇게 어머님은 억척스러우셨다.
(구 현대전자 퇴직자 모임 현 회장 김병훈 회장)
내가 중학교 때에는 무슨 공사들이 동네에 많이 생겼었는지
공사 인부들 밥을 우리집에서 해 준게 있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한바식당이다. 아파트나 어떤 건설 현장에서 인부들이 밥을 먹는
식당을 한바식당이라 부른다. 이런 것도 해 가며 많은 식구들을
배 곫지않게 하시느라 고군분투하셨었다.
( 대학동창 주 한웰 박정부 회장)
아버님은 곱게만 자라셔서 그렇다는데 전혀 농사일을 하지 않으셨다.
할아버님, 삼촌 그리고 우리 형제들과 어머니 몫이었다.
미군부대가 대구로 이사가고 다른 부대가 들어왔는데
그 때 같이 대구로 가지 않으시고 그 일을 그만 두셨었다.
그리곤 동네 이장직을 오랫동안 맡아 하시느라 동네 일에만 관심이지
집안 일에는 전혀 무관심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니 그 집안 일들은
모두 어머니 몫이었다.
(구 현대전자 동료 김영부 사장)
아들들 8 명을 키우는데 오죽 일이 많고 돈도 많이 들어갔을까.
어머니의 억척으로 우리는 모두 할 수 있는 공부들을 다 할 수가 있었다.
큰형은 장손이라고 특히 잘 키우려 하였고 들째부터 다섯째 까지는
본인들의 능력으로 학업을 하였었다. 여섯째 부터는 형이 사업을 일찍 시작하여
많은 지원을 하였기에 대학까지 무난히 다니는게 가능 하였었다고 본다.
(50년간의 친구들 모임 사구회)
어머니는 아들들의 학비로 인해 고통을 많이 받으신걸로 안다.
초등하교때부터 기성회비라고 내고, 중고등학교는 학비가 있었고,
그 돈을 낼 때가 되면 어머니는 잘살던 큰할아버지 댁에서 돈도 빌리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빌리곤 하셨다. 아버님의 월급 갖고는 다 감당하기가
어려웠을 게다.
(서울시립승화원 주건물)
내가 경험한 바로는 그렇다. 초등학교 기성회비 낼 때면
어머니에게 이야기 해야 되는데 수중에 돈이 붙어있을 날이 없으니
항상 내일 갖고가라 하셨다. 바로 그날 갖고 간 예가 아마도 없었다.
내가도 그리 겪었지만 동생들도 줄줄이 있었으니.
(서울시립승화원 로비)
내 바로 아래 동생은 머리가 좋와 공부도 잘 했는데
나와 형의 서울에서의 학비로 인해 좋은 고등학교에
들어가지 못한게 항상 미안한 마음이다. 지금도
나를 잘 따라주고 항상 긍정적이고 모양내지 않는
그런 동생이다. 나와 많이 닮아 친구들이 우리집안 행사에 오면
잘 혼동을 할 정도이다.
(서울시림승화원 관망실)
어머니가 우리가 나이들어 살면서 그 동생이 스포츠 용품점을
할 때 언제나 신경 써주신 분이 어머니였다. 그 때의 미안함이
어머니께서도 갖고 계셨다. 제대로 맘껏 공부시키지 못한 미안함.
동생이 스스로 나중에 대학공부를 하였지만, 어렸을 때의 그 미안함이
그를 위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늘문 추모공원 전경)
어머님이 혼자 사시면서 기독교인으로 종교를 갖게되셨다.
막내가 명문치대를 나와 치과의원을 일찍이 개원하여
수입이 형제들 중에는 제일 좋와 어머니의 생활비들을
많이 지원한 형제이다. 우리는 매월 들이는 돈의 액수가
정해져 있었지만 그 동생은 몫돈이 필요할 때면 대는 형제였다.
그 막내가 독실한 기독교인이라 어머님을 기독교인으로 만들었다.
(하늘문 추모공원 앞 마당)
어느 부모나 다 마찬가지이겠지만 형제들이 많다고
잘 나가는 놈과 그렇지 못한 놈들의 차이를 대 놓고
이야기 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용돈을 드리는데 처음에는
모두 공동으로 걷어서 드렸었다. 그런데 어느날 모임에서
왜 걷어서 내느냐고 야단을 치셨다. 자기 능력껏 내라고.
이런건 나중에 이해한게 넉넉하게 살지 못하는
아들을 배려 한 것이었다. 그후로는 누가 얼마를 드렸는지
알수가 없었다.
(하늘문 추모공원 현관)
어머니가 요양원에 계시는 동안 소변 곤란 문제로
움직이지를 못하고 계시다 보니 하체가 부실해졌다.
그게 결국은 어데 다니지를 못하는 악순환이 되버렸다.
형제들이 많다보니 그 비용을 추렴하는데도 나누어서 하기도.
추렴도 잘 내는 형제가 있고 잘 않내는 형제들도 있었지만
많은 부담들 아니니 안내도 그만이었다. 낼 수 있는 사람들끼리
부담하곤 했다.
( 하늘문 추모공원 3층 홀)
요양원에 계시면서 정신은 맑아 모든 기억을 다 하고 계셨었다.
어떤 때는 잠깐 흐리해 진 경우도 있긴 하엿지만.
내가 방글라데시 에 국제협력단원으로 파견 될 때 가 뵙고
귀국해서 가 뵙고 하는데 이제 다시 나가냐고도 물어보실 정도로
기억력이 좋았다. 한가지 에피소드는 집사람과 같이 가 뵙는데
네처도 왔냐 하시기에 옆에 여기있어요 했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너 아직도 애비와 살고있냐 하신다. 모두 박장대소를 한 일이있다.
(하늘문 추모공원 1층 홀)
셌째 동생이 욕창이 생기지 말라고 매트를 하나 장만하여 한상 그걸
깔고 눕게 만들어 드리고 공기정화기도 작은걸 준비해 와 머리맡에
놓게 해 드리곤 했다. 요양원과 가까운 곳에 사니 자주가 뵈는게 3째였다.
(하늘문 추모공원 홀)
한달반 전부터는 상태가 좋지않아 요양병원으로 옳기어 계셨었다.
옳긴 곳에 몇 번 가 뵈었지만 첫 번째 외엔 두 번 다 대화를 못 나누었었다.
주무신다고 하여 못하고 깨워도 깨지를 않으셨다. 돌아가시기까지
대화를 못 나눈게 정말 아쉽다.
( 하늘문 추모공원 기독교 사랑관)
요양병원으로 옮긴 후에 막내가 추천한 벽제쪽에 있는
기독교 납골당인 하늘문 추모공원에 가서 계약을 해
놓았었다. 아버님도 같이 모시게 두분 자리를 마련 했다.
이런 곳을 처음 방문해 보니 정말 깨끗하고 청결하게 잘
만들어 놓았다. 묘지같은 생각에 이런 곳은 좀 침침할 것이란
내 선입감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려버렸다.
(하늘문 추모공원 3층 관)
형제들이 카톡방을 만들어 이런 저런 어머님 관련 한 것들을
상의하고 결정을 보았다. 어머님이 기독교인으로 살다 가셨으니
기독교 장례로 하자하여 막내가 그걸 주관하도록 하엿엇다.
(하늘문 추모공원 2층 부모님 집)
9월2일 토요일 나는 집사람과 화양계곡에 있는 도명산에 등산을 갔었다.
그 곳은 금강송 한그루가 용이 승천하듯한 모습으로 있는게 십여년 전에 와
인상에 막혀있는 곳이다. 다시 그걸 본다고 왔엇다. 저녁 하산하여 집에
5시경에 막 도착하는데 형이 전화하여 어머니가 위중하다 연락을 하엿다.
바로 준비하여 요양병원으로 가는 도중 7시 40분경에 운명하셨다고
동생이 문자로 연락이왔다. 결국 어머니 생전을 뵙지못하는구나를 생각하니
눈물이 나온다. 어쩌랴 이게 내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어머님 모셔놓고 온 가족들)
사전에 형제들이 협의한대로 부천 순천향병원으로 모시기로 했었기에 그리고 갔다.
시신 안치하기 전에 모든 형제들이 다 모여서 봐야한다고 기다렸었다.
내가 늦게 도착하고 형이 사업일로 인해 마지막으로 도착하여 뵈엇엇다.
너무 편안하게 돌아가셧다고 한다. 마지막 뵌게 일주일 전이였는데 그 때도
어머니는 좀 고통스러우신지 신음만 내시고 눈은 안 뜨셧었다. 혈압이 내려간다고
조치를 취하고 있었을 때 였었다.
(외할아버님 묘소에서)
지인들에게 연락을 해야하는데 토요일 밤 늦은 시간이었다.
연락처를 미리 준비해두었기애 그 대로 연락들을 취했다.
지인들 동창들 친구들 모두가 일요일 하루뿐이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찿아와 위로를 해 주었다. 너무 고맙다.
(큰외삼촌 내외 묘소에서)
월요일 벽제에 있는 서울시립 승화원에서 화장을 하고
곧바로 미리 준비해 둔 하늘문 추모공원에 안치를 했다.
우리가 초기에 예약한 위치는 3층 에있는곳 제일 하단이었는데
다른 형제들이 보고는 너무 밑이라 하여 2층에 있는 곳
3단으로 올려서 재 계약을 하였다. 추가되는 돈은 8명이
다시 분담하여 갹출을 하였다. 모두 만족한 위치였다.
91년을 살아오신 우리 어머니.
8 형제들이 모두 영원히 사랑합니다.
첫댓글 그 사이 모친상을 겪으셨군요. 훌륭한 어머님이셨네요.
8명이나 되는 형제분들이 해오신 일들도 본받을만 합니다. 형제가 단 몇명만 되어도 쉬운 일이 아니던데요.
위의 에피소드에 있는 것처럼 어머님의 현명함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어머님도 형제분들도 모두 존경합니다.
정선생님. 그간 잘 지내시죠? 연락도 못해 보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