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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문학관.한국시낭송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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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문학 스크랩 익산 연안이씨 종중문적 박물관(延安李氏 宗中文籍 博物館)
지리산문학관.한국문학문화재협회 추천 0 조회 312 18.11.23 12: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연안이씨 종중문적 박물관

전라북도 익산시 삼기면 기산리 현동마을

 

 

연안이씨 종중문적 박물관 안내판

 

 

 연안이씨 종중문적 안내문

 

 

익산 연안이씨 종중문적 박물관은 지상 1층 지하 1층 635㎡로 2013년 4월 13일에 개관하였다.

전시실과 시청각실, 수장고와 학예실을 갖추고 있으며, 연안이씨의 뿌리와 유래,

후손의 모습을 다양한 자료와 영상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현등사 뒤편에 자리한 연안이씨 종중문적 박물관에는 익산시에 거주하는

연안이씨 집안에서 간직해 온 것으로  「공신녹훈교서」 「공신회맹문 」「교지」 등이 있다.

 공신녹훈교서(功臣錄勳敎書)는 조선 성종 3년(1472) 성종의 즉위에 공을 세운

이숭원(李崇元, 1428~1491)을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정하면서 내려준 문서로,

 공신으로 지정한 사유와 그에 따른 혜택 및 다른 공신의 이름이 적혀있다.

공신회맹문(功臣會盟文)은 국왕과 공신들이 모여 충성을 맹세하는 자리에서 쓴 글로,

 국왕을 비롯한 참석자들의 벼슬과 이름을 나열하고 있다.

성종 때부터 숙종까지의 각종 공신의 회맹문(會盟文)을 인쇄하여 책으로 묶어 놓았는데,

이 가운데는 정인지. 신숙주 등 이름난 신하의 서명이 실린 것도 있다.

교지는 이숭원 일가에게 나라에서 내린 문서이다.

 

 

전시관 안내문과 안내도

 

 

 양근군 지도

 

 

연안이씨 가문(家門)의 의미

 

 

연안이씨 시조 이무(李茂)

 

 

연안이씨의 유래

 

 

연안이씨의 중시조와 주요 세거지

 

 

연안이씨의 중시조와 주요 세거지

 

 

이숭원 초상화

 

오른쪽 초상화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된 것이고,

 왼쪽 것은 전라북도 익산 종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연안이씨 대표학자

 

 

가문을 빛낸 인물들

 

 

연표로 보는 충간공 이숭원(李嵩元, 1428~1491)의 일생

 

 

 

 

연안이씨 보물의 의미

 

 

홍패(紅牌). 백패(白牌)

 

국왕이 신하에게 관직. 관작. 자격. 시호. 토지. 노비 등을 내려주는 문서를 교지라 한다.

교지는 관료에게 관작. 관직을 내리는 고신(告身:사령장), 문과 급제자에게 내리는 홍패(紅牌),

생원. 진사시 합격자에게 내리는 백패(白牌) 죽은 사람에게

관작을 높여주는 추증교지(追贈敎旨)등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용어도 조선개국 초에는 왕지(王旨)라 하였으며, 대한제국에는 칙명(勅命)이라 하였다.

교지는 국왕의 신하에 대한 권위의 상징이라 할 수 있으며, 봉건적 관료 정치의 유산이기도 하다.

한 개인에게 내려진 일련의 교지는 그 시대의 관료 정치 및 양반 사회의 성격을 연구하는데 중요한사료가 된다.

 

 

문종실록(文宗實錄)

 

조선시대 1450년(문종 즉위년)

 

 

세종실록(世宗實錄)

 

조선시대 1420년(세종 2)

 

 

이숭원 생원 백패(李崇元 生員 白牌,  보물 제651호)

 

1450년(문종 즉위년) 9월 초5일에 유학(幼學) 이숭원이

생원 3등 제18인으로 입격(入格)하고 받은 백패이다.

이숭원(1428~1491)은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자가 중인(仲仁)이고

참판 이보정(李補丁)의 둘째아들이다.

 

 

이보정 홍패(李補丁 紅牌, 보물 제651호)

 

 

이계륜 교지(李繼倫 敎旨, 보물 제651호 )

 

이 교지는 1546년(명종 원년) 12월 12일에 이계륜을 통훈대부(通訓大夫) 송화현감(松禾縣監)

으로  임명하는 고신이다. 송화현감은 종6품의 관직으로 황해도에 속해 있었으며,

 6명의 현감이 있었다. 현재 북한의 황해남도 송화군 일대의 지역이다.

 

 

이백겸 추증교지(李伯謙 追贈敎旨, 보물 제651호)

 

이 교지는 1485년(성종 16) 1월 27일에 순성명량좌리공신. 자헌대부. 이조판서. 연원군의

 조고(祖考)인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 이백겸을 가정대부(嘉靖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한다는 교지이다. 이 고신(告身)은 사후에 추서된 것으로 추증이라 하는데 실직(實職)

2품 이상의 문무관은 본인의 처,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의 관직이 추증되었다.

부모에게는 본인의 품계(品階)를, 조부모 및 증조부모에게는 그의 품계에서 각각 1품씩을

 순차로 강등하여 추증한다. 이백겸은 이미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추증된 상태였으며,

이숭원의 벼슬이  이조판서(吏曹判書:정이품)로 오르자 다시 한단계 높은

 품계 가정대부(종2품 상)로 추증된 것이다,

 

 

영조대왕사제문 편액(英祖大王賜祭文 扁額)

 

편액은 널판지나 종이. 비단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문위에 거는

액자를 가리키는 말로 흔히 현판(懸板)이라 한다.

이 현판은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다가 정희량(鄭希亮)에게

피살당한 화촌(和村) 이술원(李述原, 1679~1728)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포충사라 편액하고

영조대왕께서 친히 쓴 사제문이다 이술원 장군은 거창 출신 무신으로 이인좌의 난 당시 거창 좌수로 있었다.

인근 안의현(현 경남 함양군 안의면 일대)의 정희량이 이인좌에 호응해 난을 일으키자

 나아가 대적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생포되어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시호는 충강(忠剛)이다.

 

 

충간공실기 목판본(忠簡公實記 木版本)

 

충간공실기는 충간공 이숭원의 일대기와 시문(詩文), 공신록권 내용, 가계도 등을 수록한 책이다.

목판활자와 필사본은 1729년(영조 5)에 제작되었고, 목판본은 1889년(고종 26)에 인쇄되었다.

 

 

연안이씨 통례문부사공파 족보(延安李氏 通禮門副使公派 族譜)

 

 

연안이씨 소부감판사공파 족보(延安李氏 小府監判事公派 族譜)

 

 

연안이씨 태자첨사공파 족보(延安李氏 太子詹事公派 族譜)

 

 

임진왜란 의병장 이보 정려각 명정(壬辰倭亂 義兵將 李寶 旌閭閣 命旌)

 

익산시 은원마을에 살다 임진왜란기에 의병장으로 순국한 이보(李寶)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1741년(영조 17) 충신 정려를 하사받은 현판이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금산을 함락하고 전주 마저 손아귀에 넣고자

 그 길목인  이치(梨峙,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일)로 진격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이보(1544~1592) 의병장은 사재(私財)를 털어 익산에서 모집한

의병 400여명을 인솔하여 이치에서 호남으로 진격하려는 왜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임진년(1592년 음) 8월 27일 순국하였다.

숙중조에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으로 증직되었고 이공과 함께 목숨을 바친

 무명(無名)의 400여 익산 의병들의 충의와 호국정신을 후대에 널리 알려

귀감을 삼고저 1741년(영조 17) 영조대왕이 현판을 내려주었다.

 

 

제수용품(祭需用品)

 

제례의 의의

죽은 조상을 추모하며 후손들이 지내는 제사는 산자와 죽은자의

유대관념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의식절차라 할 수 있다.

이 제수용품은 충간공 이숭원의 불천위 제사를 모실 때 종가에서 종가에서 사용하던 제수용품이다.

불천위(不遷位)는 나라에 큰 공이 있거나 시호를 받은 학문 도덕성이 높은 사람의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 제사를 지내도록 허락된 신위를 가리킨다.

 

 

초립(草笠)

 

 

병대(餠台), 유건(儒巾)

 

 

촛대(焦臺), 주병(酒甁)

 

 

위패함(位牌函)

 

 

묵재 이귀 초상화(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93호)

 

묵재 이귀의 반신상 초상화로써 사모단령에 1품관이 착용하는 공작흉배와 서대를 착용하고 있어

도상 자체는 인조반정으로 정사공신1등 연평부원군에 봉해져 1품에 오른 당시의 품계와 일치한다.

그리고 사모가 낮고 둥글며 모정을 거의 명함 차이가 없이 짙게 칠한 점, 양각의 큰 운문,

 붉은 주사를 바탕에 칠한 공작흉배 같은 도상들도 정사공신상 단계의 도상적 특징을 보여주어 이 반신상이

 본래 이귀의 정사공신상에서 유래한 것임을 말해준다. 조선후기 초상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조선 중후기의 역사를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은 인조반정의 핵심 주역인 이귀는 본관이 연안(延安),

 자가 옥여(玉汝), 호가 묵재(默齋)로 부사용 이정화의 아들이며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인이다.

선조 36년(1603)에 문과에 급제하고 평산 부사로 있던 광해군 15(1623) 인조반정을 주도하여

 정사공신 1등 연평부원군에 봉해지고 호위대장이 되었으며 벼슬이 좌참찬에 이르렀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충정(忠定)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귀 아들 조암 이시백 초상화(1581~1660, 경기도 유형문화재자료 제144호)

 

이시백 초상은 정사공신 영의정 연양부원군 충익공 조암이선생진상

(靖社功臣 領議政 延陽府院君 忠翼公 釣巖李先生眞像)이라 묵서 되었다.

사모(紗帽)를 쓰고 녹색 단령(團領)을 입고 있는 반신상이다.

이귀 초상(신수 1781)과 기본적인 형태, 화법이 동일하다. 자세 및 복식에 있어

 17세기 고신상의 형식을 보이나 얼굴의 채색법과 음영법, 필선의 사용법 및 흉배의 묘사방식이

 18세기 초반 이후의 양상을 보이고 있어서 조선 후기의 이모본(移模本)으로 생각된다.

 

 

이호민 초상화(1553~1634,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44호), 

 

영정은 비단에 채색을 하였다. 이 초상화는 17세기 초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제작된

공신도상의 전형을 보여 주고 있다.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가슴에 쌍학과 모란 문양의

 흉배를 단 관복 차림으로 채전(彩氈) 위에 놓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의자의 팔걸이는 좌우로 벌려져 있고 오른팔 팔걸이 뒤에는 옷깃이 사선 방향으로 뻗쳐 있다.

채전은 점묘식으로 문양을 찍어 표현한 점에서 17세기 초 초상화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이시방 초상화(1594~1660, 보물 제1482호)

 

이시방은 이귀늬 아들로 형인 이시백과 함께 인조반정의 주역으로 정치적으로

성공함으로써 연리(延李:연안 이씨)를 조선 명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인물이다.

이 영정은 그가 인조반정에 성공한 뒤에 그린 영정으로 인물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가

 주를 이루었다고 표현된다. 눈썹과 눈, 이마 부분과 코가 마치 실제 앉아 있는 모습처럼 표현되었다.

 

 

8공신병풍

 

 

8공신병풍

 

 

시첩(試帖)

 

조선후기 6명의 사대부가 모여 만든 시첩이다.

참여한 사람들은 가의대부  문화  유명위(柳明渭) 선생, 자의대부 연안 이징대(李徵大) 선생,

가의대부 남양 홍주만(洪周萬) 선생, 가선대부 해주 오명구(吳命久) 선생,

가선대부 이의형(李宜馨) 선생, 통정대부 경주 이부만(李溥萬) 선생이다.

 

 

8공신회맹록(八功臣會盟錄)

 

1471년(성종 24월 6일 성종대왕이 8공신과 자손 등을 거느리고 경복궁의 북문 밖에

 있는 맹단(盟壇)에 모여 맹세하기를 의식(儀式)과 같이 하였다.

희맹에 참석한 4백여 명의 명단이 실려 있으며, 옛 공신들의 아들 및 유고로 참석하지 못한

 공신들을 수록하여 그 연유를 후세에 알리도록 기록하고 참석한 공신 및 그 장자, 적장손들의

 군호( 君號), 공신호(功臣號), 직함(職銜), 성명(姓名)을 기록한 책이다.

이때 직접 수결(手決)한 168명이 수록되어져 있는 책이다.

 

 

연리필보(延李筆譜)

 

이 책은 1938년 간행한 인쇄본이다. 연리필보라는 제하의 초서로 된 모첩(募帖)을

 탈초(脫草)하고 증보 간행한 것이다. 고려조부터 조선조를 거치는 동안 문장과 명필을

 겸비한 명신석보(名臣碩輔)로 세교(世敎)의 지침(指針)이 되는 많은 저작들을 남긴 연안이씨

선조들의 유묵이다. 조암공 17세손(釣巖公 十七世孫 이병원(1938~1914)이 간행하였다.

 

 

 

 

연안이씨 이유길 가전고문서(延安李氏 李有吉 家傳古文書)

 

이유길과 그의 아내에 관한 교지 11매, 아들인 이우인과 그의 아내에 관한 교지 2매,

손자 이석고와 그의 아내에 관한 교지 3매, 증손자 이징국과 그의 아내에 관한 교지 3매

등으로 이유길가에 주어진 포상내용의 교지와 자손들에게 특별대우하는 은전 등에 관한 고문서이다.

이 문서는 무주군 안성면 장기리레 살고 있는 이유길의 후손인 이호용이가 보관하고 있다.

 

이유길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유지(有之), 할아버지는 광국공신이 된 이후백(李後白)이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 이선경(李善慶)이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자 복수할 생각으로

 18세 때 이순신의 휘하에 들어가 명랑해전에서 공을 세워 9품직을 받았다.

또한 명나라에서 후금의 침입으로 원병을 청하자, 이유길이 우영장(右營將)으로

 출전하여 최후까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숙종 때에 정려되었으며,

용정사(龍井祠)에 이순신 장군과 같이 배향되어 있으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이호민영정외 일괄유물(李好閔影幀外 一括遺物)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호민(1553~1634) 선생의 초상화와 그것을 담았던 함, 교지와 교지함,

시호족자 등 6점의 유물이다. 선생이 공신으로 책봉될 당시에 그린 것으로 보이는 초상화는

16세기 말. 17세기 초의 유행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교지는 2점으로 선생의 시호를 내리는 내용을 담은 시호교지와 중국 명나라의

 윤씨와 허씨부인에 관한 내용을 적은 교지가 있다.

 

현감 이국주(李國柱)의 아들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이천현감의 아들 우민(友閔)의 주선으로 비안박씨(比安朴氏)와 재혼을

 하여  67세 때 아들을 두었는데 그 아들이 바로 호민(好閔)이다.

1584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한 후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이조좌랑으로

왕을 호종하였으며, 이후 부재학에 임명되어 명에 대한 외교문서를  전담하였다.

1604년 왜란 때의 호성공신 2등으로 책록되어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지고 후에 부원군으로 책봉되었다.

 

 

차자혈손봉사교지(次子血孫奉祀敎旨)

 

봉사손(奉祀孫)과 장손(長孫)은 같은 의미이나 정양공(靖襄公)의 장자(長子)

홍문관 수찬(弘文官 修撰) 휘 세범(諱 世範)께서 일찍 졸하자 이천현감(伊川縣監)

휘 국주(國柱) 공께서 대를 잊게 되었는데 이 때 임금께서 차자혈손봉사교지를 내려

차자 세즉(世則)공을 봉사손으로 잇게 하였다.

 

이숙기(1429~1489)는 증연성부원군 이말정(李末丁)의 아들로서 조선 전기의 무신이다.

단종 1년(1453)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쳤으며,

세조 13년(1467)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또한 가정대부에 오르고 이조참판에 발탁되었으며,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졌다.

이후 성종 2년(1471)에는 좌리공신 4등에 책록되었다.

그는 성품이 강하고 재기가 있었으며 사사로움에 공을 버리지 않았다.

경상도 지례(知禮)의 도동사(道東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정양(靖襄)이다.

 

 

 나오면서 바라본 박물관 입구

 

 

백봉정

 

 

백봉정 현판

 

 

박물관 야외에는 단청을 한 정자도 있고

 

 

청렴함을 상징하는  백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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