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신여성 나혜석
1948년 12월 10일 어둑어둑해오는 저녁 8시 30분에 용산에 있는 서울시립 자제원의 무연고자 병동에서 늙은 여자 노인이 사망했다. 소지품 하나 없이 병사한 것으로 기록되었고, 죽기 직전 여러 질병으로 대화가 어려웠던 그는 행려병자, 무연고자로 처리되고 만다.
1949년 3월 14일 관보에 시신을 찾아가라면서 딱 한 줄이 실렸다. 이 관보로 그의 죽음이 알려졌다. 관보는 이랬다.
“ 신원미상, 무연고자, 사망원인 영양실조, 실어증, 중풍, 추정 년령은 65-6세입니다.”
1945년에 광복이 되었을 때는 파킨슨병을 앓고 있었고, 주변 사람들은 모두 외면했다. 오빠인 나경석 집에 들렸다가 집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여 몰래 골방에 숨어 있었다. 오빠인 나경석의 집을 방문했을 때를 회고한 조카 나영균은 이렇게 말했다.
“해방이 되자 미군이 서울로 들어와 지프를 타고 돌아다녔는데, 막다른 골목인 우리집 앞까지 오는 일도 많았어요. 하루는 미군 장교가 우리집 대문을 두드려요.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더니 마침 집에 와 있던 혜석 고모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어요. 고모는 “이 집에 피아노가 있느냐? 있으면 하룻밤 피아노와 피아노방을 빌려줄 수 있느냐고 묻고 있다”고 통역해 줬어요. 거지처럼 망가진 모습의 고모가 그런 어학 능력을 갖춘 것을 알고 놀랐던 것이 기억나요“
광복이 되기 전부터 여기저기로 떠돌면서 거지처럼 살았다. 1946년 노숙하고 있는 그를 행인이 발견하여 서울시립남부병원에 입원했다. 그 뒤 병원에서 나와 1948년 공주(公州)의 마곡사(麻谷寺)에 갔으나 병세가 악화되자 스스로 마곡사를 나와 그해 11월 스스로 용산에 있는 서울 시립 자제원(慈濟院)으로 갔다.
시립 자제원을 스스로 찾아갔을 때 그는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지나간 세월이 파노라마가 되어서 펼쳐졌으리라 생각해본다. 수원의 명문세가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호조참판이었고, 아버지는 시흥군수를 지냈다. 오남매의 넷째로서, 오빠도 언니도, 동생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신식 교육을 받았다. 나혜석은 수원의 삼일여학교에 다니다가 서울의 진명여학교로 편입했다. 이때 미술공부를 하고, 문학에 심취했다. 오빠 나경석의 권유로 동경의 ‘여자 미술학교 유화과’에 유학했다. 여자 유학생은 통 털어서 30명쯤 이었다. 그 중에서 박인덕, 김일엽 등과 친하게 지냈다. 이들은 오늘의 여성주의자들이 기리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의 머리를 스쳐가는 사람은 숱한 남자들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손가락질을 하면서 떠나버린 사람들이다.
유학시절에 유학생들이 펴낸 잡지 學之光에 글을 발표했다. 그는 여성운동에 깊이 빠져 있었다.
“현모양처는 이상으로 정할 것도, 반드시 가져야 할 바도 아니다.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부덕(婦德)을 장려한 것이다.
( 학지광 1914년 12월호)”
그는 글로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고 행동으로 실천했다. 신여성이라 불리는 이들은 동경 유학시절에 서구의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사상의 받아들였다. 낭만적 사랑이야기를 담은 고전 소설 탐독했고, 여성주의 운동을 펼치는 일본의 선각자를 직접 만나 보았다. 그리고 조혼으로 인해 대부분 기혼이었던 조선인 남자유학생들과의 연애를 했다. 여성이 봉건적 유습에서 해방되기 위해 자유연애를 주장했다.
나혜석도 조선에 아내가 있는 유학생 최승구와 연애를 했다. 오빠도 말렸고, 집에서는 노발대발했다. 그러나 나혜석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최승구가 25세의 나이로 폐결핵으로 사망하자 사랑 유희는 끝이 났다. 그러나 최승구의 장례식에 참석함으로 또 하나의 이야기를 남겼다. 그는 이야기만이 아닌 전설도 남겼다. 뒤에 김우영과 결혼하였을 때 신혼여행을 최승구의 묘소에 참배하는 것으로 했고, 남편에게 최승구의 묘비도 세워주기를 요구하여 약속받았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성운동일까? 아니면 자신의 권력에 대한 자만심이었을까? 순진한 문학소녀가 저지른 꿈의 세계일까?
내가 나혜석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이와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졸업 후에 조선으로 돌아와서 여기저기서 미술교사를 하면서 서양화 개인전을 가졌다. 사진이지만 내가 보아도 재능이 뛰어난 화가는 아니지만 한국 미술사에는 언제나 그의 그림이 큼지막하게 나온다. 1910년에 고희동이 조선 최초로 서양미술을 공부하려 일본에 갔고, 줄을 이어 1911년에는 김관호가, 1912년에는 김찬영이, 1913년에 나혜석이 조선에서 네 번 째로 일본에 서양화 공부를 하러 갔다. 한국의 서양화 미술은 이렇게 시작했다.
나는 미술사를 공부한 탓으로 그녀를 서양화가로만 알았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는 친구가 나더러 나혜석의 문학작품을 소장한 것이 없느냐고 하여 놀랐다. 문학작품이라니, 라는 내 말에 자신들은 화가로서가 아니고 문인으로 기억한다며, 많은 시와, 소설을 썼다고 알려주었다. 창조와 백조의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김억, 오상순, 김일엽, 염상섭과 교류했다.
1919년 3. 1 운동 때는 5개월 간 옥고도 치른다. 누가 무어래도 이 점은 기리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우영과 결혼생활이 행복하였는지, 불행하였는지는 모르지만 한 명의 딸을 비롯하여 네 자녀를 두었다. 아들 하나는 요절했고, 김선은 대학교수였고, 김건은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 그의 가족사를 보면 불행이라고 느껴진다. 김우영과 이혼한 후에 아들을 만나려 하였으나 김우영은 도덕적으로 더럽고, 추한 몸의 여자라면서 만나지 못하게 했다. 그의 전기를 잃다보면 자녀를 만나지 못해서 모정에 우는 장면이 여러 곳에서 나온다. 그가 서울 시립 자제원으로 찾아 갔을 때에 아마도 자기의 아들들을 가장 많이 떠올리지 않았을까? 아무리 강인하였더라도 어머니의 굴레는 벗어던지지 못한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다.
김우영과 이혼한 이유는 파리에서 최린(33인 대표이다)과 바람을 피웠다는 것이다. 귀국한 후에는 최린도 ‘나 몰라라’ 했다. 그는 여자도 남자처럼 성을 즐길 수 있다는 ‘정조 취미론’을 발표했다. 최린이 변심하자 그는 ‘정조 유린죄’로 그를 고소했다. 그러나 그 시대 사회에서, 대부분의 남성들은 최린보다 나혜석을 더러운 년이라면서 욕했다고 한다.
이혼을 당한 후에 화실을 차려서 전업작가로 생활했으나 곤궁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에게는 ‘이혼녀’라는 딱지가 붙어서 그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혔다.
이때 일본인인 후원자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1931년 11월 29일 서른다섯의 나혜석은 일본인 지인인 야나기하라 부부에게 편지를 보냈다.
“염치없는 청이지만 죄송합니다. 댁이 (그림을) 사 주시면 행복하겠습니다.
가격은 300원이 되어 있지만(전시회 작품에 붙은 가격) 250원이면 넘겨드리겠습니다.“
일본 제국미술대전에 입선한 ‘정원(庭園)’을 팔기 위해서였다.[39] 생활고에 찌든 그는 그림 작품 전시와 판매, 칼럼 활동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지만 빠듯했다. 1931년 말의 한 편지에서는 “ 과도기에 태어나서 예술을 위해서 살려고 했으나 시어머니, 남편의 몰이해 때문에 당분간 별거하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다 저의 부덕의 소치라고 생각합니다”라는 사정 설명으로 편지를 시작했다.[39]
나혜석의 영락이 시작된 이 시기는, 그의 예술 인생의 절정이기도 했다. 제국미술대전 입선작이 도쿄를 거쳐 교토로 순회전을 다니던 때였다. 나혜석은 야나기하라 부부에게 바로 이 그림을 판매하려 하였다.
1935년에 생계를 위하여 전시회를 가졌지만 그림은 팔리지 않았다. 삶의 고달픔을 뼈저리게 느낀 그는 수덕사의 김일엽을 찾아갔다. 1936년부터 몸도 망가지면서 경성의 여러 병원을 순례하다 중이 될 마음으로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김일엽과 주지 만공스님은 거절했다. 그의 성품이 도저히 중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대신에 절 앞에 있는 수덕여관에 머물도록 했다. 이때부터 그림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나혜석은 이들을 지도하면서 5년을 보냈다. 이때 배운 대표적인 화가가 이응노이다. 이응노는 나중에 이 여관을 인수하여 자신의 본 부인이 운영하도록 했다.
그러나 바깥 세상이 고달프고 차갑기는 변하지 않았다. 다시 수덕여관으로 돌아와서 1943년까지 머물렀다. 이후로는 병든 몸을 이끌고 전국의 사찰을 돌아다니다가 1944년에 서울의 인왕산 자락에 있는 사찰에 의탁해 있었다.
오빠 나경석의 아들인 나영균(이화여대 영문과 교수)은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집 앞에 아이들이 떼를 지어서 거지 할머니를 따라다녔다,. 입을 벌린 체 덜덜 떠는 할머니가 우리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할머니가 아버지의 여동생, 고모인 것을 숨길 수밖에 없었어요,”
둘째 아들인 김진은 열 네 살 때 중학교 복도에서 어머니를 처음 만났다. 네 살 때 떠난 어머니를 기억할 수 없었다.
“아주머니 누구세요?”
“내가 네 어미다.”
창백한 안색에 머리칼은 흘러내렸고 옷은 남루하기 이를데 없었다. 아버지에게 심하게 혼이 나고는 다시는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다.
나혜석이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는 것은 그의 작품이 전혀 조명 받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1970년 이후로는 그를 재평가하기 시작하면서 1974년에 회고전이 열렸다, 그는 약 800여점의 작품을 그렸으나 100여 점이 남아있다. 염상섭과 박종화가 그의 예술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나혜석이라면 불순한 이름의 대명사로 생각했다.
1990년대 이후로는 그를 조명하는 일이 더더욱 활발해졌다. 1999년 11월에는 이달의 문화인물로 ‘정부인 인동장씨 부인’을 선정했다. 그는 재령이씨로서 대학자이고, 숙종 때 남인을 이끈 인물인 이현일의 어머니이다. 보수적인 시각에서 가장 바람직한 어머니상이었다. 이듬해인 2000년 2월의 문화인물로 나혜석을 선정할 때는 논란이 있었다. 그러서 여성계에서는 장씨부인의 인고의 삶이 현대여성에게 귀감이 될 수 없는다는 강력한 주장을 펼친 덕에 문화인물이 되었다.
그의 진보적인 여성관과 신여성으로서의 행동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 2008년에는 고액권 화폐의 도안인물로 신사임당 외에 나혜석을 거론했다. 그러나 삶이 불행했고, 비극적이었다는 것이 이유로 탈락했다.
아직도 부정적인 시선이 거두어진 것은 아니다.
이후로 여러 곳에서 나혜석을 추모하는 사업이 시행되고 있다.
하늘의 나혜석이 지금도 시립 자제원을 찾아갈 때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참고로 탈렌트 나문희씨는 큰 오빠의 손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