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권 한말 중기의병 / 제7장 대마도 유폐의병 1. 의병의 대마도 피수과정 2. 일제의 유폐의병 감시 3. 유폐의병의 일상 4. 유폐의병의 석방 3. 유폐의병의 일상 1. ‘감금소’ 일상 일제는 전술하였듯이 대마도에 유폐한 의병을 이른바‘국사범’, 곧 국기를 문란케 한 중죄인으로 규정하였다. 이와 같은 ‘중죄인’의 신분이었지만, 일제는 유폐의병에 대해 고문·구타 등 극심한 물리적, 신체적 가해행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감금소로 한정된 공간이었지만 유폐생활에서 요구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의식주 문제에서 다소간의 여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일상적으로 서신왕래를 비롯해 독서와 작문이 가능하였고, 나아가 감금소 주위를 산보하는 등의 제한적 신체의 자유를 어느 정도 보장받고 있었다. 의병을 유폐한 목적이 국내의 항일세력으로부터 이들을 철저히 격리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일제로서는 그 목적 외의 가해행위를 굳이 행사할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유폐의병은 덕망과 학식을 바탕으로 고매한 인격과 지적 능력을 겸비하고 있었으므로, 감금소를 중심으로 의병과 관계한 일본인들은 의병을 인격적으로 예우했던 것으로도 짐작된다. 유폐된 의병의 일상생활은, 부정기적인 산보 외에는 감금소 내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매우 단조로웠다. 유폐의병이 모두 한학에 상당한 소양이 있었던 만큼, 의병의 일상사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것은 독서와 작문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부정기적으로 행해지던 산보가 중요한 일과였다. 독서의 경우, 의병은 현지에서 조달할 수 있는 서책 가운데 한문으로 된 책들을 선호하였다. 하지만 한문 서책을 조달하는 일이 여의치 않아 서구 신문화와 근대 과학기술과 관련된 일본어 서책들도 가끔씩 보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서책을 조달하는 방법은 접촉하고 있던 일본인들로부터 제공받는 경우와 소개인을 통해 책값을 치르고 구입하는 경우 등 두 가지가 있었다. 유폐의병이 보았던 서책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유교의 경전이었다. 일본인으로부터 『논어』를 증여받는 경우도 있었고 註44), 경비대 병사에게 의뢰하여 일본에서 발간된 경서를 구입하기도 하였다. 註45) 유폐의병은 또 중국·일본 시인들이 남긴 명시집을 읽기도 하였다. 문석환은 그의 일기에 시촌좌일矢村佐一의 「해루간월海樓看月」, 가목성천加木聖川의 「추강조어秋江釣魚」 등 저명한 일본시인들이 남긴 서정시집인 『남도기행南道紀行』을 비롯하여 내목희전乃木希典 대장의 「즉사卽事」,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 대장의 「정도열병우광릉征途閱兵于廣陵」, 「입의주入義州」 등 러일전쟁 당시 일본 장군들의 진중시를 묶은 『정로시집征露詩集』 등을 보고 40여 수를 필사해 놓았다. 註46) 그가 『정로시집』과 같이 한국과 대륙을 향한 일제 침략의 정수를 담고 있는 시를 굳이 전사轉寫해 놓은 이유는 그 속에 들어 있는 일제의 침략성을 알리고자 한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군 위병으로부터 이백李白·왕유王維·장구령張九齡 등 중국의 저명한 시인과 약목고若木故 등 일본 시인들이 남긴 명시를 묶은 시집을 제공받기도 하였다. 註47) 유폐의병은 일본에서 발간된 서예와 문장에 관한 책을 보기도 하였다. 일본 근대 서예의 대가들인 일하부명학日下部鳴鶴과 암곡일육巖谷一六 두 사람의 작품을 모은 『난정첩蘭亭帖』과 『문장궤범교본文章軌範校本』이 그것이다. 『난정첩』은 동경 박애관博愛館에서 2책으로 발행한 서예집인데 역부를 통해 5냥에 구입한 것이다. 註48) 현지 주민이 역부를 통해 의병에게 제공한 『문장궤범교본』3책은 당송시대의 문장을 수록한 책으로, 그 중에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등이 실려 있 었다. 註49) 그밖에 의병은 일본에서 발행된 세계지도인 『만국여지도萬國輿地圖』와 『일본지도日本地圖』 등을 구입해 보기도 하였으며, 세계와 일본에서의 여권신장과 여학교의 현황 등을 소개한 『여자잡지女子雜誌』를 보는 경우도 있었다. 註50) 요컨대, 의병은 유폐되어 있는 동안 독서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지만, 직간접 제약으로 인해 그들이 갖고 있는 유교적 성향에 맞는 서책을 구해 보기가 어려웠으며, 대신에 왕성한 독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현지에서 조달 가능한 시문류의 서책을 비롯해 근대 과학문명과 관련된 신서적까지 섭렵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유폐의병의 일과 가운데 작문은 독서와 함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작문 가운데서도 가장 비중이 컸던 것은 국내의 일가친지와 사우들에게 보내는 서신이었다. 유폐된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 속에서 의병 자신들의 안부와 근황을 국내의 지인들에게 서신으로 알리고 있었던 것이다. 유폐의병 이식이 대마도에서 정산 본가에 보낸 서신 주소 의병이 남긴 일기 가운데 국내와 서신을 왕래한 기록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점이 이를 입증해 준다. 의병이 매일 기록한 일기도 작문 가운데 중요한 내용이다. 의병은 하루의 일과 가운데 특기할 만한 사건과 사실, 접촉한 인물, 국내외 소식 전문傳聞, 일상적 감상, 작시와 작문 등등의 내용을 매일 일기로 기록하였다. 일기를 남긴 것으로 현재 확인되는 인물로는 임병찬을 비롯해 문석환·신보균·남규진 등이 있지만, 나머지 인물들도 일기를 썼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의병이 쓴 서신이나 일기는 모두 일본군의 검열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항일적 내용이나 유폐생활의 고통 등을 진솔하게 표현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편지·일기 등의 작문과 함께 작시作詩도 유폐의병의 일상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의병은 모두 유폐기간 중 많은 시를 남겼다. 현재 의병이 남긴 일기에는 200여 수의 시가 실려 있다. 각종 기념일, 계절과 자연의 감흥, 특기할 사실과 사건 등 다양한 내용을 시제로 삼아 유폐 심경을 토로하였다. 의병 각자가 개별적으로 시를 짓기도 하였지만, 상호간에 시를 주고받는 경우도 많았다. 의병은 또한 국내의 친척사우들로부터 의뢰를 받아 작문하는 사례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최익현이 지은 「화동사합편발華東史合編跋」과 「열부이씨전烈婦李氏傳」 등이다. 전자는 춘추대의적 존화양이론尊華攘夷論에 입각한 화서학파華西學派의 역사정신을 담은 사서인 『송원화동사합편강목宋元華東史合編綱目』을 화서문파에서 발간할 때 그 발문을 의뢰받아 지은 것이며 註51), 후자는 최익현의 문인인 의령의 조재학趙在學이 대마도에 왔을 때, 그 조카인 조문현趙汶鉉의 아내 파산이씨坡山李氏의 열행烈行을 듣고 지은 전기이다. 註52) 그밖에도 신보균과 신현두는 이씨의 행장을 지었으며, 임병찬은 행장 후기를 썼다. 註53) 한편, 의병은 신문과 서책 혹은 전문傳聞 등에 의거해 일본의 군제 및 학제 등의 제도와 풍속을 비롯해 주요 장군의 명단, 군함의 종류와 명칭 등에 이르기까지 관심을 가지고 그 내용을 일기에 기록하였다. 또한 단군조선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의 한국사의 강역문제를 장문으로 개관한 것도 특기할 만하다. 註54) 여기에는 특히 한말에 관심이 크게 고조되고 있던 간도 감계堪界에 대해 백두산 정계비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인용하면서 논급한 것이 포함되어 있어 인상적이다. 유폐의병은 현지 일본인들의 요청에 따라, 또는 서책이나 식료·물품 등을 제공해 준 데 대한 사례로 시나 글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통역과 군의관, 그리고 감금소를 지키던 위병 등이 의병으로부터 특히 글을 많이 받았던 현지인들이다. 의병이 현지 일본인에게 준 시문詩文을 정리하면 다음〈표 3〉과 같다. 註55) 〈표 3〉 유폐의병이 일본인에게 준 시문 일람
의병은 심지어 상점의 현판까지 써주는 경우도 있었다. 문석환이 1906년 잠상실에 유폐되어 있던 시절에 어느 틀니 제작업자의 요청을 받고 ‘의치제술소義齒製術所’ 라는 현판 글씨를 써주었다고 한 것이 그러한 예이다. 註56) 유폐의병의 산보장소였던 만송원 입구 일본군 대마경비보병대대에서는 탈출 혹은 예기치 못한 사단을 미연에 차단하기 위해 처음에는 의병의 감금소 밖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였다. 하지만 최익현이 순국한 후 1907년에 들어와 유폐의병의 건강에 대해 주의가 환기되던 상황에서 도주 우려가 없다고 판단한 결과, 1907년 봄부터 제한적이지만 감금소 주변으로 매월 수차에 걸쳐 외출 산보를 허용하였다. 유폐의병의 외출 산보를 대마경비보병대대에서 독자적으로 허가한 것이 아니라, 대마경비대사령부나 12사단 본부 등의 상급부대에서 결정하여 허가한 것으로 추측된다. 의병이 외출 산보를 하는 경우에는 단체로 행동하게 하였고, 통역과 위병 2~3명을 또한 반드시 동행시켜 만약의 사태에 대비토록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일기를 통해서 볼 때 의병이 최초로 산보를 실시한 날짜는 1907년 4월 3일음 2.21이었고, 마지막 산보는 일기를 기록한 문석환이 석방되기 직전인 1908년 8월 16일음 7.20 동산東山의 옛 포대에 오른 것이었다. 그 이후에도 의병이 모두 석방되는 1909년 2월까지 부정기적으로 산보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유폐의병이 외출 산보를 했던 사례를 문석환의 일기에 의거해 정리하면 다음 〈표 4〉와 같다. 〈표 4〉 유폐의병의 산보 일지
위의 〈표 4〉에 나타나 있듯이 유폐의병은 주로 감금소 주변의 산과 엄원 시내, 바닷가, 사원과 신사 등지를 다녔다. 즉 시내 주변에 흩어져 있는 팔번신사八幡神社와 을궁신사乙宮神社 등의 신사와 국분사國分寺·성상사成相寺·광청사光淸寺 등의 사찰, 그리고 만송원萬松院, 대마번주對馬藩主 종가 묘소, 구암龜巖 등의 고적이 의병의 주된 산보 대상지였다. 하지만, 엄원 일대가 협소하고 이들이 산보하는 노정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의병의 산보 행로는 몇 개의 루트에 따라 거의 반복적으로 이루지고 있었다. 이러한 산보는 유폐된 의병이 일정한 체력과 건강을 유지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고, 외부로부터의 정보와 견문을 직접 확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2. 유폐의병과 접촉한 일본인 대마도에 유폐된 의병은 그 범위는 한정되어 있었지만 매일 현지 일본인들과 접촉하고 있었다. 유폐의병이 접촉한 일본인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의병을 감시·감독하던 장병들이다. 감금소를 관장하던 제12사단-대마경비대사령부-대마경비보병대대로 이어지는 지휘계통의 관련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제12사단의 사단장과 경리부장, 그리고 대마경비대사령부의 사령관 등은 의병과 간혹 접촉을 하였으며, 대마경비보병대대에서는 대대장을 비롯하여 중대장, 소대장, 그리고 윤번제로 매일 파수를 서던 위병 등이 의병과 접촉한 군인들이다. 두번째는 유폐의병과 함께 생활을 하면서 의병의 의사를 대변해 주던 통역이 있었다. 그리고 세번째는 의병이 유폐되어 있는 동안 급양給養과 노역勞役을 공여供與하던 민간인들로, 식사를 공여하던 식주食主와 감금소의 잡역을 맡았던 역부役夫 등이 그들이다. 유폐된 의병은 모두 한학에 조예가 깊은 전직 고관·유생들이었고, 도덕적으로도 인격과 덕망을 겸비한 인물들이었다. 일제에 의해 억지로 대마도로 끌려와 유폐당한 ‘죄인’의 처지에 있었지만, 이들은 대마도에서 접촉한 어느 일본인들보다도 지적, 도덕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었다. 특히 유폐의병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거의한 애국적 지식인이었으므로, 인류 보편의 가치에 따라 일본인들은 이들에 대해 인간적, 도덕적 견지에서 일면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과 이유로 말미암아 의병과 접촉한 일본인들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의병의 인격과 학식에 더욱 경도되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의병과 접촉한 일본군 장성으로는 감금소를 관할하던 제12사단장 천전신흥淺田信興 중장이 있었다. 북구주의 소창小倉에 본부를 두고 있 던 제12사단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그는 1907년 7월 13일 대마경비대의 훈련을 참관한 뒤 대마경비대사령관 천촌익직川村益直 소장 등 10여 명의 장교를 수행하고 감금소로 의병을 찾아와 유폐 실상을 점검하고 돌아갔다. 이때 그는 의병들에게 “안심하고 지내면 반드시 환국하는 날이 있을 것이니, 상심치 말고 돌아갈 날을 기다려 달라”고 하면서 위무하였다고 한다. 註57) 제12사단 본부에서는 사단장 외에도 참모들이 감금소를 찾아와 의병의 주거환경과 신변상황을 점검하는 경우도 있었다. 1907년 5월 15일에는 사단 감리부장이, 6월 10일에는 사단 경리부장이 각각 감금소로 찾아와 의병의 상태를 점검하였다. 註58) 1908년 6월 2일에는 사단 본부의 참모가 대마경비대사령부의 참모 등과 함께 감금소를 찾기도 하였으며, 그 며칠 후인 6월 8일 사단 경리부장이 대마경비보병대대장 등과 함께 와 감금실과 취사장 등의 시설을 둘러보고 의복과 음식 등 일상생활을 점검하고 또 의병의 동향을 살피기도 하였다. 경리부장은 이때 의병에게 “오래지 않아 귀국하는 날이 올 것이니 안심하고 지내라”고 위안하였다고 한다. 註59) 제12사단 소속으로 대마도 계지鷄知에 사령부가 있던 대마경비대의 사령관 천촌익직川村益直 소장은 유폐의병의 감시를 맡았던 대마도의 최고 책임자였다. 그도 감금소를 찾아 의병의 상태를 수차에 걸쳐 점검하였다. 사령관이 직접 찾기도 하였으며, 12사단장을 수행하기도 하였고, 참모로 하여금 유폐시설과 환경을 실사토록 하는 경우도 있었다. 1907년 2월 6일에는 대마경비보병대대장 부도이진과 부관 송전희위松田喜尉를 대동하고 찾아와 신축 감금소의 상태를 점검하고 최익현 상사喪事에 대해 위문을 하였다. 註60) 1907년 6월 23일에는 대마경비대사령관이 직접 감금소를 방문하였으며, 7월 13일에는 12사단장을 수행해 감금소를 찾았다. 註61) 사단장이 감금소를 점검하기 직전인 7월 8일에는 사령부의 참모가 대마경비보병대대의 대대장과 중대장 등을 대동하고 감금소를 찾아 의병의 유폐생활 전반을 점검하였다. 註62) 대마경비보병대대는 영내에 설치된 감금소 설비와 의병의 의식주, 그리고 그들에 대한 감시 등 유폐 실무와 책임을 직접 맡고 있던 부대였다. 1906년 7~8월 의병이 처음 감금되었을 때의 대대장은 소좌 부도이진副島以辰이었다. 그는 한학적 소양을 겸비한 군인이었다. 유폐의병의 ‘감금’ 실무 최고 책임자이기는 하였지만, 그는 인간적으로 의병이 견지한 도덕적 신념에 대해 경복하며 각별한 정의情誼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1907년 4월에 연대장으로 승진되어 구류미久留米로 떠날 때, 문석환·남규진·신보균 등이 석별시를 지어준 것으로 보아 그러한 정황이 짐작되기 때문이다. 註63) 그도 또한 이별에 임하여 의병들에게 “공 등과 함께 거처한 것이 거의 1년이니, 이제 이별을 당하여 어찌 서글픈 마음이 없겠는가. 교대해 오는 사람에게 잘 말하여 공 등을 보호하도록 하겠다. 장차 자신의 몸을 보중하시어 이역에서 근심으로 병이 나게 하지 마시오. … 강건하게 지내면 멀지 않아 반드시 석방되어 돌아가는 날이 있을 것이다”라고 당부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註64) 부도이진의 후임으로 대마경비보병대대장에 부임한 인물은 소좌 목하전생오랑目賀田生五郞이었다. 註65) 1907년 4월 초에 부임한 그는 4월 18일 처음으로 감금소를 찾아와 의병의 유폐 상태와 감금실 환경을 점검하였다. 註66) 이후에도 그는 대마경비보병대대를 찾아오는 12사단의 본부와 대마경비대사령부의 간부 등을 수행하여 감금실을 찾기도 하였으며, 1907년 7월 11일과 1908년 6월 1일에는 단신으로 감금실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註67) 대대장 이하 감금소를 담당하던 중대장과 소대장 등 하급장교의 성명은 잘 확인되지 않는다. 이들은 수시로 감금소의 의병과 접촉한 것으로 믿어지지만, 그 실상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실무적 입장에서 이들은 수시로 감금소를 찾아 의병의 상태와 감금소의 설비 등을 점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감금소를 담당하던 주번 소대장의 직임은 위병과 마찬가지로 각 소대별로 윤번제로 주어졌다. 그리하여 주번 소대장은 국내의 친척사우들이 의병에게 보낸 우편물을 전달해 주는 책임을 맡기도 하였고, 유폐생활을 밀착 감시하는 역할도 하였다. 유폐의병과 접촉한 일본군 장교로는 감금소를 관할하던 상기 부대의 일반 장교들 외에 군의軍醫가 있었다. 의병의 건강을 돌보았던 군의는 위관급 장교 2명이었던 것으로 짐작되며, 대마경비보병대대에 소속된 이들이 의병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었다. 최익현·임병찬·남규진·문석환 등 대부분의 의병은 유폐지에서 거의 매일 질병에 시달렸다. 감기와 복통을 비롯해 화농성 질환, 안질 등이 특히 의병을 괴롭히던 질병이었다. 군의들은 이러한 의병의 건강상태를 점검하고 환자들에게 약물투여와 외과처치를 통해 병을 치료하였다. 그러므로 의병은 군의들에 대해 대체로 호의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병이 대마도에 처음 도착했을 때 담당 군의는 삼구정행森口政行이었지만, 그의 신상은 알 수가 없다. 註68) 일등군의 청목은오靑木銀吾는 이등군의 원리책原理策과 교대로 의병을 검진하였다. 문석환은 그의 위인에 대해 “사람됨이 고상하며 우렁찼고 행동거지가 확실하다”고 호평하였다. 1907년 4월 2일 문석환은 자신의 병을 치료해준 답례로 그에게 칠언율시 두 수를 주었으며, 註69) 얼마 후에 청목은오는 다시 필적을 받은 댓가로 양지洋紙 2폭을 보내왔다고 한다. 註70) 그는 1907년 8월 하순경 소창小倉으로 전속되었다. 註71) 소위 원리책原理策은 이등군의였다. 1907년 3월 23일 이전부터 적어도 1908년 5월까지 유폐의병의 건강을 담당한 군의였다. 註72) 문석환은 1907년 3월 병을 치료해준 데 대한 답례로 칠언율시 두 수를 지어 주었다. 註73) 등호붕장藤戶朋藏은 청목은오의 후임으로 부임했던 인물인 듯하다. 그는 의병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었고 문사文辭를 애호하는 성품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의병에게 중국에서 간행된 서책들을 대여하기도 하였다. 註74) 의병은 그 답례로 글씨를 써주었다. 註75) 1907년 11월 그가 제대를 하게 되자, 문석환과 남규진은 글을 지어 그의 앞날을 면려해 주었다. 註76) 의병 가운데서도 특히 병이 잦았던 남규진과 문석환, 그리고 연소하였던 신현두 등과 친밀하게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대개의 경우 감금소에는 하사나 상등병 1명, 그리고 일반 병졸 3명이 배치되어 있었고, 통역이 상주하고 있었다. 또한 윤번제로 배정된 주번 소대장이 감금소의 상황을 매일 점검하고 있었다. 註77) 그러므로 의병은 감금소의 위병들과 매일 접촉하였던 것이다. 매일 교대로 배치되었던 위병들 가운데는 시일이 경과할수록 의병과 친밀하게 교제했던 인물도 다수 있었다. 상원증길上原增吉·산전무덕山田德茂·주정옥일酒井玉一·시천구마矢川求馬·목야무牧野務·중도우송中島牛松·송원전무작松園田茂作 등이 특히 유폐의병과 깊이 밀착되었던 위병들이다. 대마도에 유폐된 의병이 일상적으로 접촉했던 일본인으로는 통역이 있었다. 한국의 의병이 적국 일본의 대마도에 유폐되었기 때문에 통역은 반드시 필요하였으며, 그 역할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의병 가운데 신현두와 같은 경우에는 현지에서 어느 정도 일본어를 익히기도 하였지만, 註78) 기본적으로 의병은 일본어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한 실정이었다. 그러므로 의병이 현지에서 매일 접촉하는 일본인들과 상호 의사를 소통하기 위해서는 통역이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통역은 또한 유폐의병의 동정을 일지식으로 작성해 대마경비보병대대에 보고하는 임무를 맡고 있기도 하였다. 대마경비보병대대에서는 통역이 작성한 일지를 토대로 유폐의병의 동향을 매월 한 차례씩 정기적으로 상급부대인 대마경비대사령부로 보고하였고, 대마경비대사령부에서는 다시 12사단 본부로, 12사단에서는 최종적으로 육군대신에게 그 내용을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역의 역할과 비중은 이러한 면에서 그만큼 중대하였던 것이다. 감금소에 배정된 통역의 신분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배치된 통역 중에는 군인도 있었지만, 군속과 같은 민간인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 폐 초기인 1906년에는 여러 명의 통역이 배치되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대마경비대 군인 가운데 한국어 회화가 가능한 자를 선발해 윤번제로 배정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1906년 8월부터 12월 초순까지, 곧 유폐 이후부터 최익현이 순국하기 이전까지 4개월간 의병의 통역으로 배치되었던 인물은 중도고中島高를 비롯하여 아비류阿比留·좌호질佐護質·대포무태大浦茂太 등 모두 4명으로 확인된다. 註79) 최익현의 임종이 임박하던 1906년 말 이후에는 한국주차군사령부에서 파견한 천상춘치川上春治 한 사람이 끝까지 전담하였다. 이들 가운데 중도고와 천상춘치 외에는 신상이 거의 파악되지 않는다. 1906년 8월 8일 홍주 9의사가 대마도에 도착한 즉시 배치된 통역은 상등병 중도고中島高였다. 註80) 군인을 통역으로 배치한 이유는 그가 한국어를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유폐 초기에 의병이 의사소통 문제로 고초가 컸던 점으로 보아 그러하다. 그는 통역으로서보다는 위병으로 감금소에 배치되어 있던 관계로 더 의병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07년 2월 28일 임병찬과 안항식이 석방되어 환국할 때 이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배웅해 주기도 하였다. 註81) 그 뒤 제대 후에는 부모가 있는 부산으로 건너가 체류하였으며, 유폐의병과 서신을 교환하며 안부를 물었을 정도로 정의情誼가 두터웠던 인물이다. 註82) 통역 가운데 의병과 가장 오래 지냈던 인물은 천상춘치川上春治였다. 한국주차군사령부에서 파견한 그는 최익현의 병이 급속히 악화되어 죽 음을 눈앞에 두고 있던 1906년 12월 29일 감금소에 배치되었다. 註83) 이 무렵은 숙련된 통역이 절실히 필요하던 시기였으므로 한국어에 능통한 전문 통역을 고용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대마도 태생이던 천상춘치는 5살 때 부모를 따라 부산으로 이거한 이후 한국에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1906년 현재 28살이던 그는 통감부의 통역으로 있던 중에 한국주차군사령부의 명령을 받고 대마도 감금소로 파견되었다. 부친은 작고하였고 모친은 그 배경은 알 수 없지만 부산에 거주하고 있었다. 3형제 가운데 그의 형은 또한 원산항에 이어 군산항의 이사청에서 통역으로 근무하고 있었으며, 아우는 한어학교에 근무 중이었다. 註84) 또한 그의 숙부는 통감부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하였고, 1908년 초에는 궁내부 비서관이 되었다고 한다. 註85) 이처럼 그의 일가는 일제의 한국침략 과정에 깊숙이 관입되어 살아가던 전형적인 이른바 ‘내지인內地人’이었다. 천상춘치는 최익현의 운구 등 사후 처리에 도움을 주었고, 이후에도 의병의 생활상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시를 지을 수 있을 정도의 한학적 소양도 갖추었던 그는 1908년 10월 이후, 곧 마지막까지 잔류한 3명의 의병이 모두 석방되는 1909년 2월까지 유폐의병과 함께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註86) 제한된 공간속에서 매일 함께 생활했던 천상춘치를 매개로 의병은 외부의 소식을 듣고, 서적 등 필요한 물품 등을 제공받았으며, 생활 여 건상 개선 요구사항을 피력할 수 있었다. 곧 그는 의병과 외부세계 및 대마경비보병대대를 연결시켜주는 가교 역할을 담당하였던 셈이다. 유폐의병들과 천상춘치는 대체로 상호 호의를 갖고 있었다. 문석환이 그를 일컬어 ‘천성이 온화하고, 심덕이 넓고, 예의로 사람을 대하고, 정리情理로 사물을 대하는’ 사람이라고 호평한 대목을 통해서도 양자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천상춘치의 역할 수행에 대해 의병은 대체로 만족하였고, 대마경비보병대대에서도 역시 무난하게 여겼던 것으로 인정된다. 그만큼 상호간에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해 주었던 것이다. 註87) 의병들은 천상춘치에게 자주 글을 지어 주기도 하였다. 註88) 유폐의병과 일상적으로 접촉한 일본인 가운데는 민간인 신분이던 역부가 있었다. 감금소에 유폐된 의병에게 의식주를 공급하고 감금소 건물을 청소, 관리하던 이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주로 경비대로부터 관급을 맡고 있던 이들은 이윤 추구를 우선하는 경우에는 의병과 이해관계에서 상충되는 경우도 있었고 그런 만큼 가끔씩 상호 알력을 노정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의병에게 이들 역부의 존재는 유폐공간에서 삶을 영위하는 중요한 조건이 되었던 만큼 대체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특히 도웅장개島雄莊介와 사미오寺尾吾 등과는 인간적 정의로 깊이 교감하였을 만큼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도웅장개島雄莊介는 의병 11명이 처음으로 유폐된 잠상실의 주인이었다. 의병은 1906년 12월 1일 대마경비보병대대 영내의 신축 감금소로 옮아갈 때까지 4개월간 잠상실에 유폐되어 있었다. 도웅장개는 빈한한 가운데서도 의병에 대해 깊은 이해와 존경심을 갖고 있었으며, 의병이 기거하는 동안 정성을 다해 생활에 편의를 도모해 주었다. 그러므로 의병은 신축 감금소로 옮아간 이후에도 기회가 있을 적마다 그의 안부를 확인하곤 하였다. 1907년 2월 임병찬과 안항식이 석방되어 환국할 때에 그를 찾아가 인사를 한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였다. 註89) 1906년 잠상실에 유폐되어 있을 때 의병에게 식사를 공여한 ‘식주食主’는 통구행태랑?口幸太郞이었다. 그후 석전의일石田義一의 뒤를 이어 1908년 9월 18일부터 다시 식주가 되어 의병에게 식사를 공여하였다. 註90) 1908년 10월 8일 문석환·남규진·신현두·최상집 등 4명이 석방되어 환국할 때에는 4일간 그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註91) 식주 석전의일石田義一은 註92) 통역 천상춘치와 함께 유폐의병과 가장 오랜 기간 밀착되어 접촉했던 일본인이었다. 식주는 경비보병대대와 일정한 계약을 맺고 의병에게 음식을 공여하고 감금실 청소 등을 맡았다. 그가 식주를 맡은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1906년 하반기로 추정된다. 이후 1908년 8월경까지 거의 3년간 의병과 접촉한 셈이었다. 그는 음식과 제반 편의를 공여하는 과정에서 의병과 가끔씩 알력을 노정하고 대마경비대대측과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1908년 봄에는 음식의 질이 떨어지자, 천상춘치가 대대 본부에 그 문제점을 지적하였고, 관할 소대장이 그를 책망하기도 하였다. 註93) 그는 또한 대마경비대대로부터 의병에게 제공되는 연료비 등을 착복하는 경우도 있었다. 註94)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전의일은 의병과 오랫동안 밀착되어 있던 관계로 인간적 정리情理가 형성되어 있었다. 1908년 7월 16일 석방된 신보균 이 환국 전 그의 집에서 유숙하였던 것도 그러한 정리 때문이었다. 註95) 1908년 8월경 대마경비보병대대로부터 압박을 받아 식주 일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에 註96) 그가 의병에게 “3년 동안 공들과 한솥밥을 먹은 정은 다른 것에 견줄 것이 아니다. … 공들과 헤어지게 되어 마음이 몹시 서글프다”라고 석별의 정의를 토로한 대목과, 의병이 그에게 “아쉬운 정은 피차가 일반이다. … 그 동안 한솥밥을 먹은 일은 우리들이 잊을 수 없다. 오직 몸과 집안을 잘 보존하기를 바랄 뿐”이라고 답한 대목을 통해 양자간에 쌓였던 정리를 짐작할 수 있다. 註97) 사미寺尾의 성명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07년 8월 28일경부터 감금실의 역부로 고용된 인물이다. 의병의 의복과 이불 등을 세탁하고, 감금소 청소 등을 맡았다. 그러나 그가 식주에게 고용되어 있었는지의 여부는 불분명하다. 그의 나이는 59세로 비교적 연로하였으며, 집안 형편은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성격이 온화하고 의병에게 경의를 갖고 깊이 감복되어 있었으며, 의병도 또한 그의 후대에 사의를 갖고 있었다. 통역 천상춘치와 함께 의병이 가장 가까이 한 일본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註98) [註 44] 문석환, 『마도일기』, 114쪽. ☞ [註 45] 문석환, 『마도일기』, 133쪽. ☞ [註 46] 문석환, 『마도일기』, 41~52쪽. ☞ [註 47] 문석환, 『마도일기』, 73쪽. ☞ [註 48] 문석환, 『마도일기』, 224쪽. ☞ [註 49] 문석환, 『마도일기』, 274쪽. ☞ [註 50] 문석환, 『마도일기』, 141·145·213쪽. ☞ [註 51] 임병찬, 「대마도일기·반구일기」, 160~162쪽. ☞ [註 52] 임병찬, 「대마도일기·반구일기」, 184쪽. ☞ [註 53] 임병찬, 「대마도일기·반구일기」, 179~183쪽. ☞ [註 54] 문석환, 『마도일기』, 184~187쪽 ; 신보균, 『동고록』 1907년 8월 28일조. ☞ [註 55] 문석환과 신보균 등이 남긴 일기에 의거해 작성하였으나, 누락된 사례도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 [註 56] 문석환, 『마도일기』, 233쪽. ☞ [註 57] 문석환, 『마도일기』, 158쪽 ; 신보균, 『동고록』 1907년 6월 4일조. ☞ [註 58] 문석환, 『마도일기』, 122~123·135쪽. ☞ [註 59] 문석환, 『마도일기』, 313~314쪽. ☞ [註 60] 신보균, 『마도일기』 1906년 12월 24일조. ☞ [註 61] 문석환, 『마도일기』, 119·157~158쪽. ☞ [註 62] 문석환, 『마도일기』, 151쪽. ☞ [註 63] 문석환, 『마도일기』, 34쪽. ☞ [註 64] 문석환, 『마도일기』, 66쪽. ☞ [註 65] 문석환, 『마도일기』, 70쪽. ☞ [註 66] 문석환, 『마도일기』, 84쪽. ☞ [註 67] 문석환, 『마도일기』,157·313쪽. ☞ [註 68] 임병찬, 「대마도일기·반구일기」, 154쪽. ☞ [註 69] 문석환, 『마도일기』, 59쪽. ☞ [註 70] 문석환, 『마도일기』, 165쪽. ☞ [註 71] 문석환, 『마도일기』, 166쪽. ☞ [註 72] 문석환, 『마도일기』, 311쪽. ☞ [註 73] 문석환, 『마도일기』, 31~32쪽. ☞ [註 74] 문석환, 『마도일기』, 207쪽. ☞ [註 75] 문석환, 『마도일기』, 148쪽. ☞ [註 76] 문석환, 『마도일기』, 210~211쪽. ☞ [註 77] 임병찬, 「대마도일기·반구일기」, 151쪽. ☞ [註 78] 문석환, 『마도일기』, 270쪽. ☞ [註 79] 임병찬과 신보균의 일기에 산견된다. ☞ [註 80] 申輔均, 『同苦錄』 1906년 6월 19일조. ☞ [註 81] 문석환, 『마도일기』, 15쪽. ☞ [註 82] 문석환, 『마도일기』, 147·150쪽. ☞ [註 83] 임병찬, 「대마도일기·반구일기」, 204쪽. ☞ [註 84] 임병찬, 「대마도일기·반구일기」, 206쪽 ; 문석환, 『마도일기』, 218·316쪽. ☞ [註 85] 문석환, 『마도일기』, 288쪽. ☞ [註 86] 문석환, 『마도일기』, 229쪽. 『조선총독부직원록』에 1921년부터 1941년까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경기상업학교, 개성상업학교 등에서 서기로 재직했던 川上春治가 나오는데, 동일인 여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 [註 87] 문석환, 『마도일기』, 149쪽. ☞ [註 88] 문석환, 『마도일기』, 148·339쪽. ☞ [註 89] 문석환, 『마도일기』, 14쪽. ☞ [註 90] 문석환, 『마도일기』, 349쪽. ☞ [註 91] 문석환, 『마도일기』, 359~360쪽. ☞ [註 92] 자료에 따라서는 ‘石田儀一’로 나오기도 한다. ☞ [註 93] 문석환, 『마도일기』, 91~92쪽. ☞ [註 94] 문석환, 『마도일기』, 182쪽. ☞ [註 95] 문석환, 『마도일기』, 322쪽. ☞ [註 96] 문석환, 『마도일기』, 340·342·349쪽. ☞ [註 97] 문석환, 『마도일기』, 349쪽. ☞ [註 98] 문석환, 『마도일기』, 171·238쪽. ☞ |
출처: 민족, 한검수 원문보기 글쓴이: 어느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