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린 대로 거둔다
<사순 제2주간 월요일>(2014. 3. 17. 월)
(루카 6,36-38)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카 6,37)."
이 말씀은 "뿌린 대로 거둔다." 라는 속담,
또는 '인과응보, 자업자득' 같은 사자성어와 비슷한데,
차이점이 있다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주권으로 그렇게 하신다는 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행한 대로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선을 행하면 상을 주실 것이고, 악을 행하면 벌을 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의 '삶'은 나중에 받게 될 심판을 '예약'하는 것과 같고,
사실상 심판의 결과는 자기 자신이 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억울할 것도 없고 불공정하다고 불평할 수도 없습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에서
'탈렌트의 비유'에 나오는 세 번째 종이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마태 25,24)."
이 말은 "주인님은 제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시키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투자했다가 손해를 볼까 두려워서
최소한 원금이라도 보전하려고 탈렌트를 숨겨 두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선을 행하려고 했는데 그 일이 악한 결과를 만드는 일이 과연 있을까?
어떻든 그 종은 뭔가를 하다가 잘못되는 것을 피하려고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종의 말은 주인에 대해서 오해를 했기 때문에 한 말입니다.
주인은 그가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았음을 꾸짖습니다(마태 25,26-27).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인데도 안 한 것을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심판'과 '단죄' 라는 말은 사적인 복수를 뜻합니다.
어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복수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복수하려는 마음을 참는 것은
어렵긴 하지만 누구나 해야 하는 일이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참을 수 있는데도 안 참고 복수를 해버리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복수심을 참는 것은 할 수 있어도
용서를 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피해자 입장에서 가해자를 용서하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정말로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라면
예수님께서 서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용서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과
용서를 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용서가 안 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로마 12,19)." 라고 권고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면 하느님의 정의와 심판도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이 없다면,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저마다
자기가 정의의 심판을 집행하겠다고 나선다면,
세상은 그날로 난장판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악과 불의와 맞서 싸우는 것은,
그리고 선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그 방법이 악하면 안 되고,
또 개인적인 앙갚음이 되면 안 됩니다.
그 문제에 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21)."
우리는 악에 굴복하면 안 되고, 악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선(善)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공적인 사법제도를 부정하는 말씀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법이 제대로 집행될 것입니다.
범죄자의 처벌과 교화는 사법기관에 맡기면 됩니다.
용서와 자비란, 죄를 지어도 그냥 내버려두는 일이 아닙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5-17)."
그런데 이 말씀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는 말씀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뜻을 생각하면 모순되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꾸짖고 타이르는 것은 회개시키기 위해서이고,
회개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용서하기 위해서, 또는 이미 용서했기 때문입니다.
(회개했기 때문에 용서할 수도 있고, 회개시키려고 용서할 수도 있는데,
순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죄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용서를 청하려면 먼저 회개해야 하고,
회개한다면 스스로 보속을 해야(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 송영진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