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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시 지례면에서 4·9일마다 열리는 지례장은 1970년대 말까지 우시장의 번성과 더불어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3번 국도의 확장·포장과 차량보급 등 교통의 발달로 인해 쇠락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
김천의 대표 장시(場市) 중 한 곳인 지례장은 화려한 과거를 품고 있다. 지례장은 1870년부터 김천시 지례면 교리 일원에서 정기적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시기였지만, 김천시내와 거리가 먼 증산·부항·대덕면 주민들도 자주 찾던 나름 큰 규모의 시장이었다. 지례장이 본격적으로 번성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다. 특히 우(牛)시장의 규모가 컸으며, 경남 거창과 전북 무주사람까지 드나들만큼 큰 상권을 자랑했다. 하지만 1980년대 교통의 발달과 더불어 쇠락의 길을 걷는다. 그나마 아직까지 시장의 명맥을 잇고 있지만, 과거의 영화를 가늠할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장터를 가득 메운 사람과 그 속에서 일어난 일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감천 150리를 가다 18편은 사람사는 냄새가 짙게 배어있는 지례장터와 이곳을 드나들던 옛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1.거창장과 김천장의 중간기착지
김천우시장은 전국 5대 우시장으로 손꼽힐 정도로 유명하다. 하지만 김천우시장 못지않은 규모의 우시장이 지례장에서 열렸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지례우시장의 소 거래량이 김천우시장의 절반 수준을 넘어설 정도였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안타깝게도 지례우시장은 1980년대까지 운영되다가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중장년층 이상의 주민에게 지례우시장은 치열한 삶의 터전으로 각인돼 있다.
지례우시장은 경남과 김천을 잇는 중간기착지 역할을 담당하며 성장하기 시작했다. 경남 거창장과 김천장의 가운데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을 십분 활용한 것이다. 각 시장의 장날 역시 소(牛)상인(이하 상인)과 장꾼들의 이동경로와 딱 들어맞았다. 경남 일대의 소가 모여드는 거창장의 경우 3·8일장이었다. 이 때문에 5·10일 열리는 김천 우시장으로 향하려면 4·9일 장이 서는 지례장을 거쳐가야 했다. 상인의 입장에서는 이동 중에도 소를 거래할 수 있으니 지례장 경유는 손해 볼 것 없는 일이었다.
김천의 상인들은 거창 우시장을 제 집 드나들듯 했다. 거창에서 소를 사들여 시장이 더 큰 김천에서 내다팔면 조금의 이익이라도 더 남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인들은 보통 10마리 이상의 소를 거창에서 구입하곤 했다. 과거 우리나라의 경제규모를 따져봤을 때, 소를 취급하는 상인들은 대상(大商)이라 불릴만 했다. 소 두 마리면 논 한 마지기(660여㎡) 이상을 구입할 수 있었다. 손바닥 만한 땅뙈기마저 아쉬운 빈농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대단한 사람들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제아무리 부유한 상인이라 할지라도 소를 몰고 100리가 넘는 길을 걷는 것은 힘들었다. 이 때문에 우시장이 열리는 곳마다 전문 소몰이꾼들이 있었다. 거창장을 비롯한 지례·김천장에도 마찬가지였다.
소몰이꾼들은 대개 한 사람당 10마리의 소를 몰고 상인이 원하는 곳까지 소를 몰았다. 소 한 마리당 얼마를 받는 식의 계약거래였다.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직업이었지만, 때에 따라 며칠을 꼬박 걸어야 하는 고달픈 일이기도 했다.
거창장에서 소를 몰고 10시간을 내리 걸어온 소몰이꾼들은 김천장으로 향하기 위해 우두령(경남 거창과 김천의 경계선)을 넘어 김천시 대덕면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우두령 아래 꼭두바위라는 곳에서 쉬어가곤 했다. 목을 축일 주막과 함께 마방까지 있어 휴식을 취하기에는 그만이었다. 요즘으로 치자면 ‘화물차 휴게소’와 같은 곳이었다.
꼭두바위에서 소에게 먹이를 준 뒤 휴식을 취한 소몰이꾼들은 야심한 밤이 되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최종 목적지인 김천장에 가기전, 지례장을 경유하기 위해서였다. 쉬지않고 30리를 걸으면 오전 4시께 우시장이 들어선 지례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새벽쯤이면 소 워낭소리가 온 마을에 울려퍼졌다. 그 소리가 마치 아침을 깨우는 은은한 합주처럼 들렸다. 소가 지례장에 도착하면 이때부터 본격적인 거래가 시작됐다.
지례면 토박이 전호환씨(68)는 지례우시장의 화려한 과거를 기억하고 있었다. 전씨는 “주로 거창군 가조·가북면의 소를 사서 지례우시장에 내다팔곤 했다. 지례우시장은 거창 뿐만 아니라 무주·성주 등 안정적인 공급원을 배후에 두고 있어 크게 번성할 수 있었다”며 “(소주인과 소장수 간) 이른 아침부터 탐색전을 벌이다 오후 3~4시 사이에 거래가 이뤄지곤 했는데, 지례우시장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1973~74년 사이에는 하루 소 거래량이 300여두 정도 됐다”고 말했다. 지례우시장의 규모를 증명하듯 시장에는 소·돼지 등을 묶는 말뚝만 500여개가 있었다고 한다. 지례우시장이 파장되면 상인과 소몰이꾼들은 이튿날 또 다른 우시장이 열리는 김천장으로 향했다.
#2.축제이자 소통의 장이었던 지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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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낮 지례장터의 풍경은 한가하기만 하다. 새벽같이 일어난 주민들이 아침 일찍 장을 본 후 농사일에 나선 탓이다. |
수많은 물산과 사람이 거쳐간 지례장은 숱한 이야기를 남겼다. 돈과 사람이 집중된 장소였던 만큼 별의별 인간군상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지례면 남정네들을 홀린 ‘팜므파탈(femme fatale, 치명적인 매력을 이용해 남성을 파멸로 이끄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과거 지례장터에는 유명한 기생이 한 명 있었다. ‘나미코’라는 일본 이름으로 불리던 조선 여성이었는데, 뛰어난 자색과 화장술로 뭇 장꾼들의 애간장을 녹였다고 한다. 여기에 도시에서 흘러들어온 아가씨까지 가세한 나미코주점의 인기는 주변의 여러 주점을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나미코주점은 1961년 5·16을 기점으로 전환기를 맞는다. 손님의 주류가 장꾼에서 공무원 및 지역 유지들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입이 뻔한 공무원들의 주점 출입은 적잖은 부작용을 낳았다. 당시 몇몇 공무원은 나미코의 주점에 눌러 살다시피 했다. 이들은 주민으로부터 걷어 들인 세금까지 유흥비로 탕진하는 바람에 공금횡령으로 처벌을 받고 주민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숱한 스캔들을 낳으며 지례장터의 밤문화를 이끌던 나미코는 1980년대까지도 주점영업을 이어갔다고 한다.
왕성한 소 거래로 현금이 넘쳐나자 도박도 성행했다. 장이 서는 날이면 어김없이 지례장을 찾았던 한량들은 집에 갈 생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노름판에서 1년 농사 지은 돈을 한꺼번에 날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부지런히 일하는 이가 대다수였지만, 어느 시대이건 ‘한 방’을 꿈꾸는 탕아는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지례장의 돼지국밥은 일미 중의 일미였다. 지금은 지례돼지 구이로 유명한 지례장이지만, 외지인까지 일부러 와서 먹고 갈 정도로 지례장의 돼지국밥은 인기가 있었다. 소고기에 비해 가격도 싸고 가마솥에서 끓여낸 돼지국밥의 맛은 일품이었다고 전해진다. 1970년대 말 돼지국밥 한 그릇의 가격이 100원이었다고 하니 그 인기를 짐작하게 한다. 돈과 사람이 몰리다보니 설·추석 같은 대목장에는 김천시내의 소매치기들도 지례장에서 진을 쳤다고 한다.
지례장은 일종의 축제이면서 소통의 장이었다. 단지 물건을 사고파는 장터였지만 장을 찾는 사람들은 나름 예의를 갖춰 장터를 출입했다.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흰 옷을 입고 장으로 향했다. 이 때문에 부항·대덕면에서 지례장으로 향하는 인파의 행렬은 마치 하얀 양떼가 줄지어가는 듯한 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부산한 지례장의 풍경은 1970년대 말 절정에 달한다. 1980년대까지도 두루마기에 갓을 쓴 채 장터를 찾는 노인의 모습을 흔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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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례우시장은 하루 300여두의 소가 거래되던 큰 규모의 우시장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를 끝으로 지례우시장의 명성은 종말을 고했고, 우시장이 열리던 자리는 공터로 남아있다. |
30여년 전까지 지례면을 비롯한 우리나라 농촌의 재산 1호는 단연 소였다. 이 때문에 소를 이용한 ‘재테크’도 활발했다. 소 한 마리를 구입해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고 그 새끼를 나누어 재산을 불리는 방식이 있었는데, 일명 ‘배내놓기’라고 불렸다. 소를 빌린 이는 소를 이용해 밭을 일구는 등 농사에 이용했다. 배내놓기로 소 10마리를 가진 사람도 있었으니 나름 수익률 높은 투자였다. 특히 소를 팔아 불린 돈으로 자식교육을 시킨 이가 많았다. 자녀들의 대학졸업장이 ‘우골탑(牛骨塔)’으로 불리던 마지막 시절이었다.
#3.신작로와 함께 사라진 영광
한창 잘 나가던 지례장도 현대화의 물결을 피할 수는 없었다.
1978년, 경남과 김천을 잇는 기존 3번 국도가 확장포장되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교통이 편리해지자 더이상 상인들은 지례장을 거쳐가지 않았다. 당시 3번 국도는 개발도상국 발전을 위해 미국이 제공하는 장기융자인 AID(Act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loan) 차관으로 조성됐다. 이 때문에 미국의 감리단이 직접 나서 도로건설을 감독했고, 3번 국도는 우리나라의 국도 중 최고의 선형을 자랑하는 도로로 거듭났다. 커브길의 노면이 자동차의 운행에 적합하도록 기울어지고 국제적 도로규격에 맞게 정확히 시공되는 등 당시로서는 최신기술이 적용됐다.
이후 사람의 왕래와 물산의 유통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지례장의 상권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이 되자 지례장의 상권침체는 심각해졌고, 지례우시장도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당시 전국 각지의 중소규모 우시장도 쇠락의 길을 걷긴 마찬가지였다. 반면에 김천우시장 등 대규모의 우시장은 교통발달로 인해 더욱 활성화되었다.
김천=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도움말=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참고 문헌= 김천시사, 김천상공회의소 105년史
공동기획 : 김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