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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사화 때 선조
김신동 23세, 김명윤 24세, 김홍윤 24세, 김의윤 24세,
김극통 24세, 김경희 23세, 김 기 23세, 김 개 25세,
김인경 25세, 김질충 24세, 김 규 24세, 김 호 22세,
김우서 23세, 김 신 24세, 김윤재 29세. 김 강 24세
김승로 22세, 김 식 22세, 김기서 22세, 김 구(24세)
사림파는 중종이 훈구파를 견제하는 정책을 펼칠 때마다
중앙 정치에 진출하였다.
인조 원년(1545)에 을사화 때 또한의 타격을 받는다.
을사사화: 명종 즉위년(1545) 소윤의 윤원형이
대윤의 윤임을 몰아낸 사건이다.
중종은 반정으로 즉위 하자 마자 단경왕후 신씨가 신수근의
딸이라 하여 폐위시켜 후사가 없었다.
윤여필의 딸을 제 1계비(장경왕후)로 맞아
세자 호(인종)를 낳았으나 곧 죽었다.
윤지임의 딸을 제 2계비로 맞아들이니 이가 문정 왕후인데
경원대군(환)을 낳았다.
문정왕후의 친정 오라비인 윤원로와 원형 형제와
세자호의 외숙인 윤임을 축으로
윤임 일파를 대윤, 윤원형의 일파를 소윤이라 하였다.
중종이 승하하자
세자가 왕위에 오르니 윤임 일파의 세력이 크게 떨쳤다.
인종은 기묘사화 때 은퇴했던 사람들을 중용했으나
재위 8개월 만에 죽었다.
경원 대군이 불과 12세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문정대비가 대리 첨정을 하게 되었다.
소윤이 득세하자 대윤을 제거하여
5‧6년 동안 화를 당한 사람이 100여명이 넘었다.
무오사화(1498)이래 큰 참화는 을사사화로 막을 내렸다.
외척에 의한 정치권력 전횡의 길을 열어 놓았으며 이후
붕당이 형성되어 당쟁이 치열하게 펼쳐진다.
50년간 네 차례에 걸친 사화는 명분과 구실은 달랐지만,
기본적으로 지배층 훈구파와 선비 중심인 사림파가
권력을 놓고 벌인 싸움이었다.
훈구파는 사람을 탄압하고 그들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
나누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16C 말에 들어와서 헝클어지기 시작한 조선의 봉건질서는
지배층의 분열과 민중의 대립까지 심화시켰다.
사림파는 그 때 마다 큰 타격을 받지만 완전 몰락한 것은 아니나.
사림은 향촌에서 서원과 형약을 기반으로 계속 성장하였다.
16C 후반에 다시 정권의 주도권을 갖는다.
김숭로(崇老: 22세)는
은진 현감으로 있다가, 기묘사화 후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김 식(軾: 22세)은
조광조가 죄가 없다고 구제상소를 올린 금강 11현중의 한분이다.
김기서(기서: 22세)는
조광조와 도의적으로 시귀었다는 연고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낙향하였다.
후핫을 양성하고 돈목재라는 강당을 설하였다.
현존하여 지방문화재로 지정,
24세 문의공 휘 구(사온직장공파)
1488(성종20)-1534(중종29) 조선중기 문신. 자는 대유. 호는 자암. 시호는 문의공.
아버지는 증 좌승지 계문. 어머니는 증 숙부인 전의이씨
1507(중종2) 생원 진사 양시 장원으로 합격하고
중종 8년 별시 문과에 2등 1인으로 급제하였다.
홍문관 정자. 저작박사. 수찬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에서 곧
정랑으로 승진했다. 사간원 헌납. 사간. 장악원정을 거쳐
홍문관 응교를 지냈다.
한때 홍문관 사성으로 휴가를 받아 옥당에서 글을 읽었는데
어느 날 밤 촛불을 밝히고 글을 읽을 무렵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보니 임금이 서있었다.
그 옆에 별감이 술병을 들고 서 있었다.
깜짝 놀라 엎드리니 중종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달이 밝은데 글 읽는 소리가 들리기에 내 여기에 왔노니
어찌 군신의 예가 필요하리오.“하며 술을 함께 마셨다.
승정원 동부승지에 오르고 좌승지로 승진되었다가
부제학에 이르고 호당(유능한 인재를 뽑아 월급은 주되 독서에만
전념토록 하던 제도)에 들어갔다.
이때 중종은 조광조, 김구, 김식, 김정 등 젊은 사류를 등용하여
성리학을 장려하고 문민정치를 구현하여
왕도정치를 실현하고 종전의 제도를 혁신하려 하였다.
그러나 남곤, 심정 등이 원한을 품고 임금에게 대역으로 모함하여
중종14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나이 31세로 개령에 유배되었다.
또다시 남해로 귀양 가던 중 화전별곡을 지었다.
문학적인 작품으로 유배가 아니고서는 생각 할 수 없는
귀한 소산으로 이 작품은 음양으로 후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중종 26년 임피(현 옥구군)로 옮겼다가 중종 28년에 석방되어
향리로 돌아와 보니 그 동안 부모님이 돌아 가셨다.
부모의 산소에서 통곡을 하다가 기절까지 하셨고 여막을 지어
조석으로 통곡함에 풀이 다 말라 버렸다.
이로 인해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 효우가 돈독하였고
학문이 고매하였다.
글씨를 잘 썼는데 인수방에 살았으므로 공의 서체를 인수체라 한다.
선조조에 광국종원 일등공신에 추록되고,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증 되었다가,
영조 때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가 증직 되었다.
시호는 문의공이며 예산의 덕잠서원, 임피의 봉암서원,
남해의 죽림서원, 장단의 임강서원에 배향 되었다.
김 강(綱: 24세)은
구의 종제로 기묘사화로 구가 남으로 귀양을 가자
출사에 뜻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
10년만에 나라가 조용하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직을 거쳐
춘추관 편수관(정3품)이 됐다.
김신동(神童:23세)은 현량과로 급제하다.
종부시 주부를 거쳐 승정원 도승지에 추증되다.
김명윤(明胤: 24세)는 평정공 극핍의 아들이다.
경기도 관찰사, 의정부 좌찬성(종1품). 기묘사화에 연루되다.
김의윤(懿胤: 24세)는황해도 관찰사(종2품)를 지냈다.
24김홍윤(弘胤: 24세)은세)은
홍윤의 아우로 명종조 문과급제.
사헌부 지평을 받았으나 사직했다.
광릉에 은거하면서 서화담 선생과 오묘한 이치를 토론하였다.
명예나 이권에 뜻이 없어 벼슬을 사양하니 ‘염태고개’라 불렀다.
김극통(克通; 24세)은 벼슬은 동명교관이다. 기묘사화 때 희생됨.
김경희(景憙: 23세)는
중종조에 문가 급제하였으나 김안로의
농간으로 탈락되었다.
을사사화와 정미사화에도 연루되 벼슬을 단념하고 향리에 은거했다.
취석정이라는 강당을 짓고 후진양성에 힘을 쓰니
문하생중 많은 명사를 배출하였다.
시에도 능했고, 중종조 동국필원에 참야한 명필이다.
저서로 ‘성리설’과 ‘노계집’이있고 고창 노산사에 배향되었다.
김 기(紀: 23세)는
중종조에 급제, 의정부 사인(정4품).
임금이 장례를 돌보게하고 제스를 하사하였다.
25세 청백리 휘 개(양간공파 ‧의정공파)
1504(연산11)-1569(선조3) 조선 중기 문신, 자는 방보, 호는 독송정, 청백리.
아버지는 증 판서 소윤, 어머니는 증 정부인 파평 윤씨
1525(중종20) 진사시 장원 합격하였고 중종35년 식년시
문과에 7인으로 급제하여 승문원 주서로 선임되었다.
세자 시강원. 설서. 사서와 성균관 전적. 사헌부 장령. 집의.
홍문관 응교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다.
1552(명종8) 정시에 장원 급제하자 특별히 통정에 가자되었다.
승정원 동부승지를 배수하였다가 병으로서 외직을 구하여 안동
부사를 제수 하였으나 정시의 시종관으로 만류되었고
황해. 충청 양도의 안찰사가 되었다.
공조, 이조, 형조 참의와 장례원 판결사,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
명종 15년에 특별히 가선으로 승자하여 대사헌.
이조참판. 평양 감사를 역임하였다.
명종 17년에는 한성부 판윤, 호조, 형조 판서와
의정부 좌참찬 돈영부사가 되어
특진관으로 경연에 들어가 포부를 전달하였다.
당시 사람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서
금천 농막에 물러 나와 생을 마쳤다.
성품이 청렴 강직하여
명종이 청렴한 신하를 뽑아 연회를 베풀 때에
퇴계, 동고와 함께 참석하였으며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공의 논주한 일에 대하여 상감이 그 직언을 매우 가상히 여겨
공의 진 사를 사관에게 명하여 다시 써서 조정에 반포하였다.
공의 효성은 천성에서 우러나와 거상과 제사 받드는 일을
세인이 모두 칭찬하였다.
성품이 간략하고 정직함으로 집안 모든 사람이 모든 일을
사사로이 행하지 못하였다.
내외가 분별이 있고 소시부터 노경에 이르도록
남에게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참고문헌: 광산 김씨사
25세 광천위 휘 인경
1515(중종10)-1583(선조17) 조선 중기 문신. 자는 경유. 호는 송월헌.
아버지는 증 판서 헌윤, 어머니는 증 정부인 구성이씨.
7세 때에 중종 임금의 부마로 선발되어 순의대부 광천위가 되었다.
1527(중종22) 옹주의 어머니인
경빈 박씨가 작서(당시 세자였던 인종을 저주하던 일로
진범은 김안노의 아들 연성휘 김희로 밝혀졌음)의 변에 화를 입었다.
상주로 쫓겨 간 뒤 중종28년에 김안노가 다시 옥사를 일으켜,
당성위 홍려가 장살杖殺 되었고
경빈 박씨와 그의 아들 복성군 미를 죽였다.
그 일로 연루되어 서천으로 귀양 갔다가 이듬해
적소를 공주로 옮겼다.
중종32년 김안노가 복주되자 즉시 석방되어 복작 되었다.
1546(명종2년) 원종공신에 책록되고 자의대부로 승진되었다.
명종16년 왕의 종실 부마들을 모아 제술시를 보이는데
장원하여 통의대부로 승진되었다.
자질이 뛰어나고 도량이 너그러워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제매와 우애가 돈독했다.
불천위(자손 대대로 올리는 제사)의 은전을 받았다.
광천위 인경 묘지
공의 휘는 인경이요 자는 경유이니
7세에 중종 대왕의 따님 혜순옹주의 배필로 선발되어
순의 대부 광천위에 제수 되었다.
중종 정해년에 옹주의 어머니 경빈 박씨가
작서지변을 만나 성주로 쫓겨 간 뒤
계사년에 김안노가 옥사를 일으켜 그 옥사에 공도 서천으로 귀양 갔다.
정유년 겨울에 김안노가 복주됨으로 공은 석방되어 복작되었다.
명종 병오년에 원종공신으로 책록되어 자의대부로 승진 하였다.
경신년에 상감이 종실 부마들을 모아 제술시를 보이는데
공이 지은 글이 수위로 뽑혀 통헌대부로 승진하였다.
공의 자질이 뛰어나고 도량이 너그러워
효로서 부모를 섬기고 아우와 우애하였다.
항상 말씀하시기를
“어버이를 섬기되 항상 그 뜻을 맞추어야 한다.” 하고
성질이 안정하여 교유를 즐기지 않으며 사람을 대할 때
신의가 있고 일을 처리함에 사정에 구차하지 않았다.
외간상을 당하여 삼년간 시묘살이 할 때
어머니께 문안드리는 일 외에는 집에 내려오는 일이 없었다.
어머니 상사에는 너무 슬퍼하여 병이 되어 복제를 마친 뒤
두 달 만에 애석하게 돌아 가셨다.
명하여 가로되
광산 김씨 족보를 보라.
대대로 잠신의 명문이요, 이름이 나타 나신 분이 많았도다.
공이 이에 이르니 가업은 다시 살아났고 덕은 다시 빛났고
누린 수명 또한 길도다.
진실로 옹주는 아름답고 유순하였네. 길일 가리어
같은 날에 안장 하였도다.
양주군 북평 지문을 무덤에 묻어 뒷일을 위하여 마련했네.
여성위 송인 찬
김질충(質忠: 24세)은
명조에 급제. 형조좌랑과 지제교를지냈다.
김계휘와 함께 호당에 뽑혔다.
김 규(24세)는
명종조에 급제, 중종실록 편찬에 기사관으로 참여했다.
성균관 사성을 거쳐 장악원저에 승진되다.
빠른 승지에 시기하는 윤원형 일파의 무고로 경원에
유배되었다가 풀려 전리로 돌아옸다.
김 호(浩: 24세)는의주목사, 충청 관찰사 엮임.
김서우(禹瑞: 23세)는
김 호의 아들로 북병사로 국경수비대의 업적이있다.
김 신( 24세)은 승정원 우승지거쳐 관찰사를 지냈다.
김윤제(允悌: 29세)는
중종조 문과급제. 고창, 부안등 10여
고을의 수령을 거쳐 나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었다.
을사사화 후 사직하고 향리 광주에서 환벽당을 짓고 후진 양성을 하였다.
광산김씨사. 광산김씨 약사. 2023년, 5월.
대구 경북 종친회 전 부회장. 편집 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