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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뿌리 : 로맹 가리
“절망해서는 안되지. 오히려 미쳐야 돼. 폐도 없이 땅 위에서 살아보려고 물 밖으로 배를 내놓고, 어떡해서라도 숨을 쉬어보려고 애썼던 최초의 파충류도 미쳤던 거지. 어쨌건 그래서 인간이 생겨나게 되었지. 항상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거야.”
인용해두고 싶은 문장으로 넘쳐나는 이 책에서 가장 폐부를 찌르는 강렬한 문장이다. 2차 대전 중 레지스탕스로 전체주의에 저항하다 강제수용소를 겪은 프랑스인 모렐이 아프리카에서 학살당하는 코끼리를 보호하는 투쟁을 수행하는 동안 자신을 암살하려는 의도를 숨긴 채 보디 가드인 양 그를 쫒아 다니는 유세프 앞에서 혼잣말처럼 외친 대사다.
가뭄이 극심해진 건기, 유일하게 물이 있는 쿠루 호수에 몰려든 코끼리 떼를 보호하기 위해 파수를 서고 있던 모렐 일행은 아프리카 민족주의를 천명하며 세계적 이목을 끌고 싶었던 바이타리 일당의 습격을 받는다. 바이타리는 무기를 사기 위한 자금을 벌기 위해서, 그리고 서구 부르조아의 감상주의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모렐 일행의 이상을 좌절시키기 위해서 중무장한 용병들을 동원해 코끼리를 학살하고 모렐 일행을 살해하려 한다. 마침 쿠루 호수에 모여든 아프리카의 동물 떼를 촬영하기 위해 비행하던 세계적 사진 기자인 필즈가 비행기 사고로 인해 모렐 일행과 함께 머물고 있었다. 필즈의 기사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던 바이타리는 그에게 유리한 기사를 끌어내기 위해서 필즈가 요구한 대로 모렐 일행을 풀어준다. 피신의 길을 떠나기 전 진흙탕에 총을 맞고 쓰러져 있는 코끼리를 응시하며 모렐은 덧붙인다.
“걱정 말고 가거라. 모두들 갖게 될거야. 백인도, 흑인도, 회색인도, 황인도, 홍인도, 모두를 갖게 될 거야. 진흙탕이란 한 때뿐이야. 거기서 나오게 될 거야. 넌 보게 될 거야. 마침내 그들에게 폐가 생겨나 숨을 쉬게 되는 것을.”
너무나 가슴 아픈 대사다. 과연 우리는 진흙탕에서 나왔는가? 80여년이 지난 지금... 폐가 생겨 숨을 쉬게 되리라는 희망은 더 멀다. 아니... 2022년 7월의 대한민국은 그 폐를 잉태하는 막바지 몸부림을 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막바지란 없다. 그저 끝 없는 반복, 반복. 영원한 반복을 거듭하며 포스트 모던의 시대의 사람들은 막연하게 눈치 채고 있는 것이다. 숨 쉴 폐를 가질 수 있는 존재는 이 소설 속에서 로베르가 그랬듯이 상상 속 여인을 초대하거나 상상 속 코끼리를 통해 현실 너머를 꿈꿀 수 있는 미학적 존재들 뿐이라는 걸. 니체가 옳았을지도 모른다. 로맹 가리가 바로 그런 인물이고 이 소설은 그의 미학적 폐를 통해 전해져 오는 자유의 숨결의 환영이다. 이 저녁 아직도 아직도 자유를 꿈꾸는 내 기갈을 응시하며 환영만이 우리를 숨 쉬게 할지도 모른다는 서글픈 절망이 밀려드는 것이다.
로맹 가리의 소설에는 존엄한, 존엄해지고자 최선을 다해 투쟁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절망의 한가운데서도 인류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 끝에 서서 내 삶을 통해 인류의 한 걸음을 더 내딛고자 하는 의지를 지닌 인물들이다. 눈부신 품위가 있다. 그의 작품이 지니는 이런 품위와 낙관적 희망은 로맹 가리의 영혼의 뿌리가 그런 존엄성에 드리워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영혼의 바탕색이 그렇게 채색되어 있었고 그가 타고난 렌즈가 본질적으로 푸른색이었을지도 모른다. 로맹 가리의 소설을 읽다 보면 늘 좀 더 노력해야 한다는 격려를 받는다. 특히 이 소설은 내게 너무나 큰 축복처럼 느껴졌다.
최근 ‘문힉과 지성’사에서 <하늘의 뿌리>와 동시에 출간된 로맹 가리의 자전적 성장기인 <새벽의 약속>을 읽고 나서 로맹 가리의 낙천성의 근원을 알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여배우 시절 유부남을 사랑했고 미혼모로 로맹 가리를 낳았다. 짧았지만 강렬했던 사랑을 평생 간직한 채 어머니는 지치지 않고 치열하게 일하고 모색하면서 로맹 가리의 예술적 재능을 발굴하고 지지한다. 어머니의 진취성과 낭만성, 유머, 헌신적 사랑과 뜨거운 열정, 정신적 품위가 어머니와 완전히 밀착해 있었던 로랭 가리의 영혼으로 이식되었던 것이다.
“저는 무엇으로도 말살할 수 없고 영원히 온전하게 남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이지 그 무엇도 인간들에게 타격을 줄 수 없다고 믿습니다. 인간이란 쉽게 이길 수 없는 종입니다.” 소설 속에서 로맹 가리는 생드니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로맹 가리가 2022년 7월의 대한민국의 선택과 신자유주의의 물결, 무지성에 압도당한 대중을 본다면 어떨까? 이런 믿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씁쓸해지는 것이다. 이 소설은 물질주의적 충동에 채찍질 당하며 벗어날 길 없는 신자유주의의 쇠우리에 갖혀 소진되는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낯설어진, 전설이 되어 버린 지나간 시절의 빛바랜 역사화를 펼쳐 보이고 있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공리주의적 논리와 전체주의 체제의 폭력에 저항하는, 변증법적 인물들이다. 아도르노는 계몽의 결과가 총체성에 귀결되었고 그 정치적 괴물이 전체주의였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계몽의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극복한, 아도르노의 표현에 의하면 생동하는 미메시스를 통해 생성의 공간을 창조하고 있는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존엄성, 자유, 우정, 희망, 저항의 가치는 사유하고 고뇌하고 소통하며 공감하고 결단하고 투쟁하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통해 뜨겁게 피어오른다.
먼저 문학과 지성사의 책 소개글을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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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자기 앞의 생〉으로 잘 알려진 로맹 가리의 대표작이다. 코끼리에 대한 애정을 통해 진실하고도 따뜻한 인간미를 추구하는 생태소설로, 한 남자가 아프리카에서 말살당하고 있는 코끼리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56년 발표되어 콩쿠르상을 받은 이 작품은 최초의 생태주의 소설이라 일컬어진다.
인간의 존엄을 철저히 짓밟는 강제수용소에 수감 된 경험을 갖고 있는 주인공 모렐은 한 해에 삼만 마리의 코끼리가 사냥으로 죽는 아프리카에서 총을 들고 코끼리의 편이 된다. 모렐이 진정으로 구하고자 한 것은 코끼리로 대응되는 '자유', '인권', '존엄'과 같은 가치이다. 진보라는 허울 아래 학살되는 코끼리가 상징하는 것은 말살 위기에 놓인 인간의 존엄인 것이다.
모렐의 이 '명예 투쟁'에 동참하는 여러 인물들은 인간들로부터 치유되기 힘들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었음에도 인간을 증오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로맹 가리는 온갖 국적과 갖가지 직업의 이념도 다르고 제각기 살아온 경험도 다른 각양각색의 인물들로 모렐의 투쟁을 둘러싼 구도를 그림으로써, 그가 벌이는 이 투쟁이 국적도 피부색도 이데올로기도 뛰어넘은, 온 인류에 호소하고 지구 전체에 선포하는 투쟁임을 말하고 있다.
“그래, 맞아. 당신은 온갖 종류의 더러운 꼴을 보고 지냈지. 인간의 비참함을 말이야. 그래서 그 모든 걸 다 보았을 때, 인간의 밑을 닦았을 때 눈을 들고 싶은 마음이 없던가? 언덕 위로 올라 다른 무언가를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없던가? 단 한 번이라도 아름답고 자유로운 무언가를 보고 싶은 마음이 말이야. 전혀 다른 동반자를 갖고 싶지않더냐 말이야.”
“우리와 다르기는 하나 우리보다 열등하지 않은!”
코끼리를 구해주세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코끼리에 대해 말했다. 마치 그것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문제인 양. 아프리카에서는 해마다 수만 마리의 코끼리가 잡히고 있다. 작년만 해도 삼만 마리가 잡혔다. 그래서 그는 이 범죄가 계속되는 걸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래서 차드로 온 것이다. 그는 코끼리 보호 운동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이 멋진 짐승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 남은 자유로운 공간을 유유히 거니는 것을 본 사람이라면, 거기에 구해야 할 삶의 한 차원이 있다는 걸 알아차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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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나는 오랜만에 드라마 수업을 하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휩싸였다. 성인들을 위한 드라마 워크샵. 참여자들을 초대하여 쿠루 호수에 모여들어 기갈을 해소하는 코끼리 떼 곁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코끼리 떼에 몰려드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되어 그들의 현실적, 사상적 갈등을 치열하게 탐구하고 싶었다. 아프리카의 석양을 거침없이 달려가는 코끼리 떼에 로맹 가리가 부여했던 많은 의미들을 선사하고 싶었다. 그리고 모렐의 코끼리는 각자에게 무엇이었는지를 돌아보고 무엇보다 로맹 가리가 창조한 한 시대, 품위 있는 인간의 시대로 초대하고 싶었다. 아프리카의 평원, 하늘의 뿌리에 연결되어 서로를 돌보면서도 각자의 고독을 간직한 채 아프리카의 별을 응시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여행하고 싶었다.
하지만 소망은 소망일 뿐. 건강이 악화되어 가까스로 출퇴근만 가능하던 시절,,, 교직의 막바지에서 나는 그저 일하기 위해서 먹고 자고 주말이면 체증을 앓았다. 드라마 수업을 할 여력이 더 이상 없었다. 내 영혼에 물을 댈 수로가 차단되었다. 당시 주변의 사람도 일도 그저 대처해야 하는 의무, 극복해야 할 과업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럭저럭 흘러가던 관계들도 그저 그럭저럭 흘러갈 뿐 무언가 겉도는 것이었다. 내 어머니에게서도 불가능했던, 있는 그대로의 나로 완전히 수용해 줄 누군가와의 공존, 그저 함께 존재하기, 긴장하지 않고, 채근 당하지 않고, 공격당하지 않고 공격하지 않고, 모욕당하지 않고, 방어하지 않고...
외로움의 절정이었던 어느 추운 오후, 아파트 정원에서 한 길냥이를 만났다. 평생 사람의 숲에서 찾아 헤메었으나 결코 채워질 수 없었던 결핍감을 사람의 숲을 떠나 작디작은 낯선 생명에게서 구하고자 하는 끌림은 내겐 백기를 드는 투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무엇에 투항한다는 것인가? 무엇에... 이 글을 쓰면서 처음으로 떠오른 질문이다. 나는 무엇에 투항한 것일까? 인간 세계에 대한 환멸과 그로 인한 적대감, 자초한 고립에 투항한 것인가? 아니면 내 내면의 자연에? 아니면 더 큰 연대감에...
이 소설의 주제 의식도 이 질문과 닿아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중심주의, 공리주의를 통해 진보라는 이름으로 끝없이 나아가고 싶었던 인간의 도전은 전체주의와 홀로코스트라는 파국으로 귀결되었다. 폭력으로 상처 입고 폐허가 되어버린 영혼은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코끼리를 지키는 투쟁, 인간 이외의 존재를 인간의 폭력에 대항해 보호하려는 노력은 인간 세계에서 상처 입은 영혼이 지닌 적개심과 복수심의 발로인가? 아니면 짖밟힌 인간 존엄의 새로운 근거를 찾아 나선 연대와 우정의 발로인가?
점점 추워지던 한 겨울날 그 아이를 내 집에 들이고 땅꼬라 이름 붙인 날 이후 나는 난생 처음 경험하는 알 수 없는 안도감과 충만함으로 치유되면서도 늘 죄책감에 시달렸다. 이것은 패배이며 퇴보인가? 땅꼬와 공존하기 위해서 중성화 수술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엄청난 갈등을 겪으면서 또 다른 죄책감을 느꼈다. 두 세계, 양 방향에서 몰려오는 자책은 땅꼬와 나누는 교감을 통해 발견하게 된 완전히 새로운 세계의 오솔길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내 선택을 어떻게 정당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나의 이런 충동은 대체 어디서 기인한 것인가에 골몰하던 차에 이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흥미진진했겠는가? 전체주의에 대항해 싸우다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레지스탕스가 인간 세계의 악을 저지하기 위해, 완전히 정복당하지 않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 왜 아프리카로 가서 코끼리 학살을 멈추는 투쟁을 하고 있는가? 인간 존엄성과 동물과의 공존은 무슨 관계일까?
...
소설 속에서 냉혹한 사냥꾼 오르시니의 입을 빌려 부분부분 전해지는 모렐의 청원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프리카의 광막한 공간을 달리고 있는 짐승 떼를 볼 때, 인간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자라면 누구나 보기만 해도 유쾌해져 미소 짓지 않을 수 없는 자연의 찬란함을 우리 가운데 영속시키기 위해 어떠한 일이라도 하겠다고 맹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만의 시간은 끝났다.
그러니 우리는 좀 더 겸손한 마음과 이해심을 갖고 우리와 다르기는 하나 우리보다 열등하지 않은 다른 종의 동물로 눈길을 돌려야 한다.
인간은 이 땅에서 찾을 수 있는 온갖 우정을 필요로 하게 된 지경에 이르렀다. 고독 속에서 인간은 모든 코끼리, 개, 새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아직까지 우리 곁에 남아 있는 이 거대하고 어설프지만 찬란한 자유를 보존할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안심할 때가 되었습니다.”
모렐은 어떤 인간형인가? 생드니는 모렐을 이렇게 묘사한다.
모렐은 진지함으로 표명되는 단순함이, 다시 말해 자기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참으로 확신하는 그런 표정이 있었습니다. 그의 순진함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건 도무지 어쩌지 못하게 만드는 거대한 무엇이었습니다. 그는 수소폭탄이나 어떠한 강제 수용소로도 결코 용기가 꺾이지 않을 완강한 사람이었으며, 사람들에게 조용히 신뢰와 희망을 끊임없이 불어넣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도무지 냉소의 감각이라곤 눈곱만치도 없고 자기 코앞밖에 보지 않은 선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의 사람들이 단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코끼리까지 돌볼 만큼 충분한 관용을 갖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단순함이란 사람들이 이야기를 지어내고 천진성에 관해 끊임없이 말하는 모든 민중의 영혼들에게서 볼 수 있는 그런 단순함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식량이 떨어졌다는 소식만으로도 세상 사람들이 방방곡곡에서 식량을 갖다주려고 달려오리라고 진정으로 믿고 있는 것 같았지요.
코끼리를 보호하는 투쟁이 어떻게 인간 존엄을 지키는 일과 관련되어 있는 가에 대한 주장은 여러 등장 인물들 사이 갈등의 계기와 다양한 일화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전해지지만 그걸 진정 이해했다 장담하기엔 아직도 요원하다. 이 소설을 반복해서 읽었지만 앞으로도 나는 두고두고 오래오래 이 화두를 잡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 소설로 드라마 수업을 할 수 있으려면, 사람들을 아프리카의 쿠루 호수로 초대할 수 있으려면 아직도 막연한 이해가 진정한 이해로 무르익어야만 할 것이다.
소설은 모렐이 어떻게 그 깨달음에 도달하고 행동하게 되었는가를 다양한 일화를 통해서 소개하고 있는데 그 일화들이 압권이며 감동적이다. 소설의 말미에 소개된, 모렐이 시작한 최초의 동물 보호 투쟁인 풍뎅이 보호 일화부터 요약해 본다.
볼트 해 연안의 외펜 채석장에서 나찌들을 위한 거대한 작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시멘트 부대를 나르는 강제 노동 중에 일어난 일이다.
그때 갑자기 모렐은 무언가가 볼에 부딪혀서 발밑에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몸의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며 조심스레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그것은 한 마리의 풍뎅이였다. 풍뎅이는 뒤로 나자빠져 발을 버둥거리며 몸을 뒤집으려고 힘겹게 애쓰고 있었다. 거기에는 그가 지나쳐버릴 수 없는 무엇이 있었다. 그는 어깨 위 짐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무릎을 굽히고 집게 손가락을 움직여 그 벌레를 바로 놓아주었다. 그 행위에 정치범들이 동참하게 되었고 그들은 누구 하나 피로에 지쳐 쓰러지지 않았다. 그들을 감사하던 그뤼버 중사는 대번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렸다. 적을 알아본 것이다. 그는 모든 걸 빼앗긴 제로 상태의 인간들에게 허락될 수 없는 도전, 공공연한 신념 선언, 존엄성의 선포를 마주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즉각 사태를 알아차리고 정치범들을 매질하고 풍뎅이를 밟아 죽였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 그는 그가 노리는 것은 그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어 도저히 없애버릴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어떤 군대나 경찰이나 국민군이나 정당이나 조직도 성공할 수 없는 일을 시도했던 것이다. 어쩌면 마지막 한 사람까지 지상에 있는 인간을 모조리 쏘아버릴 수 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도 물리칠 수 없는 자연의 미소와 같은 어떤 흔적이 그들 뒤에 남게 될지도 몰랐다.
숙소에서 그 행위에 대한 대화를 하던 중 수감되어 있던 한 신부가 말했다.
-자네들은 자만심에서 그 짓을 하는 거야. 만약 자네들이 수용소에 있지 않았다면 풍뎅이들이 있는지도 모르고 짓밟고 지나갈걸. 자네들은 머릿속으로만 그러는 거지 진심으로 그러는 게 아냐. 오만하기 짝이 없어.
그러자 누군가 말했다.
-오만이 아니야. 그건 다른거야.
말미에 모렐은 이렇게 덧붙인다.
-결국 이렇게 됐소. 그렇다고 이것이 무엇을 증명해주는 건 아니오. 오해는 있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이해하기 시작했소. 굶주림과 공포, 그리고 강제노동을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연보호가 직접 자기와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지요.
다음 일화는 소설 속에서 ‘뒤파르크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인데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에피소드로 꼽을 수 있다. 역시 모렐이 수감 되었던 강제수용소의 블럭K에서 벌어진 로베르라는 레지스탕스의 저항 이야기다.
독일 수용소에 있을 때 로베르라는 레지스탕스 대원이 있었다. 그는 매사에 바닥까지 갔다가 확신을 가지고 돌아온 그런 사람이 갖는 쾌활함이 있었다. 어느날 그는 상상의 여인을 초대해서 블록K로로 들어온다. 그때부터 수감자들은 품위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 모두가 처한 상황에서 우리를 지탱해줄 어떤 위엄 있는 규율이 없다면, 허구나 신화에 매달리지 않으면 되는 대로 행동하고 아무 것에나 굴복하고 심지어 협력하게 되리라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느꼈지요.
자연적으로 수용소의 지휘관이 금세 사태를 알아차리고 로베르에게 여인을 내 놓으라고 협박했지만 로베르는 허리가 끊어지게 웃어댔다. 이 일이 완전히 자기에게 달려 있다는 생각에, 독일 친위대도 그의 정신이 창조한 이 보이지 않는 여인을 강제로 빼앗아갈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그녀를 내주거나 그녀가 존재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온전히 자기에게 달려 있다는 생각에 허리가 끊어지게 웃어댔죠.
그는 말한다.
-그녀는 여기 있겠답니다.
그 보복으로 독방에서 한 달을 지낸 후 돌아온 로베르는 말한다.
-일 미터 오십에 일 미터 십, 누울 수도 없었지만 정말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네. 그럴 때 나는 머리를 벽에다 처박고 자유로운 곳으로 나가고 싶었지. 밀실 공포증이라고 하겠지? 그래. 그러다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네. 기진맥진했을 땐 나처럼 해봐. 아프리카를 가로질러 달리는 자유로운 코끼리 떼를, 벽도, 철조망도, 아무것도 거칠 게 없는 수백의, 수백 마리의 경이로운 짐승을. 툭 터진 공간을 가로질러 달려들어 지나가는 길에 모든 것을 뭉개버리고 모든 걸 뒤엎어 버리는 수백의, 수백 마리의 코끼리를 생각해봐. 살아 있는 한 그 무엇으로도 그들을 멈추게 할 수는 없지. 바로 자유란 말이야! 살아 있지 않다 하더라도 저 세상에서도 여전히 자유로이 계속 달리고 있을지 누가 아나. 그러니 밀실공포증, 가시철망, 철근 콘크리트, 철저한 유물론으로 고통 받을 때 바로 이걸, 자유로운 코끼리 떼를 상상하고 눈으로 좇아봐. 달리는 녀석들에게 매달려봐. 그러면 모든 게 곧 나아진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실제로 모든 게 나아졌소, 눈앞에서 전능하고 살아 있는 자유의 이미지를 보며 살아가는 데서 우리는 야릇하고 비밀스런 흥분을 느꼈다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코끼리 떼가 그들 위로 지나간다면 묵사발이 돼버리겠지 하는 생각에 미소를 지으며 친위대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소. 자연의 심장부에서 터져나오는, 무엇으로도 멈추게 할 수 없는 이 힘이 다가오면서 땅이 진동하는 듯한 느낌마저 받게 되었지요.
아이러니하게도 코끼리 학살을 일삼는 농장주 뒤파르크를 처벌하기 위해 농장을 습격한 후 마주하게 된 뒤파르트가 바로 블록K의 로베르였다. 씁쓸한 재회였다.
나는 예술교육을 통한 미적 체험이 지니는 공적 가치에 대해서 강의하고 있다. 지난 학기 “어린 왕자”의 사례를 통해서 막연한 주제를 구체적 은유에 기대 전달할 수 있었다. 예술교육의 시선에서 다시 읽은 “어린 왕자”는 더욱 아름답고 깊었다. 오는 7월과 8월에 부산에서 강의를 의뢰받았다. “어린 왕자”와 더불어 이 사례는 그 힘을 전달하는 데 적확한 사례가 될 수 있을거라 생각하니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듯 힘이 난다.
다음 사례는 전후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모렐이 개와 함께하면서 벌인 투쟁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그 개들을 아주 유심히 관찰했소. 젤라틴과 비누가 된다는 그 개들을 말이오. 그리고 말했소. 조금만 기다려라. 더러운 인간들아, 그러면 자연을 존중하는 법을 내 가르쳐주리라. 당신들에게 내 생각을 설명해주겠다. 당신들의 가스실과 당신들의 원자 폭탄과, 당신들의 비누의 필요성에 대해서... 그날 나는 조그만 특공대 행세를 하러 동물보호소로 갔고. 수위들을 혼내주고 개들을 풀어주고 막사에 불을 질렀고. 그렇게 이 일에 뛰어든 겁니다.
그리고 코끼라 보호 투쟁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 모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각해 보시오. 지금까진 개들만으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만족했었지요. 사람들은 개와 더불어 위안을 받았지요. 그러나 얼마 전부터는 당신도 아시다시피 모든 사정이 바뀌었기에 개로는 더 이상 충분치 않게 되었습니다. 개들은 완전히 일에 지쳤습니다. 더는 견디지 못할 상태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토록 오랫동안 우리 곁에서 꼬리를 흔들고 발을 내미느라 이젠 지굿지긋해진 겁니다. 개들을 지긋지긋해진 거죠. 이해할 만합니다. 개들은 너무도 많은 걸 보아왔으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도 외롭고 버림받았다고 느끼고 있어 튼튼한 다른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지요. 참으로 견뎌낼 수 있도록 해줄 그 무엇을 말입니다. 개로는 충분치 않아 코끼리가 필요한 겁니다.
그는 유용한 이익도 손에 잡히는 효율성도 없지만, 인간의 영혼 속에 불멸의 필요로 남아 있는 것이 숨어 살 만한 여백을 옹호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강제노동수용소의 철망 뒤에서 깨달은 것이었고, 가르침이었다.
굶주림과 공포, 그리고 강제노동을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연보호가 직접 자기와 관계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지요. 내가 청원서를 들고 라이에 있는 수목감시관을 만나러 갔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소. “지금 상태에서 우리가 만들어낸 모든 것,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배운 모든 것과 더불어 우리에게는 모든 개와 새와,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모든 짐승들이 필요하오. 사람들에게는 우정이 필요하오.”
소설 속에는 모렐과 반대편에서 모렐의 이상주의를 비웃고 저지하려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이타리다. 바이타리는 아프리카인이지만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프랑스 의회의 의원직까지 지냈던 서구의 지성을 장착한 엘리트다. 그의 입장은 기후변화에 대한 협약을 강요하는 선진국에 반기를 드는 개발도상국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어 쉽게 무시할 수 없는 현실적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바이타리는 아프리카 민족주의에 기대 아프리카를 서구와 같이 근대화된 문명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는 사진 기자인 필즈에게 자신이 왜 쿠루 호수를 습격해서 코끼리들을 학살하고 모렐 일행을 해치려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강변한다.
-모렐의 캠페인은 우리의 민족적 열망을 가리기 위한 연막이었소. 우리는 마천루와 자동차에 싫증이 나서 원시 속에 몸을 담그고, 우리의 벌거벗은 모습과 동물 떼에 감동하러 오는 서구인들의 눈요기 노릇을 하는데, 세계의 동물원 노릇을 하는데 진력이 난 만큼 더욱더 능욕당한 기분이고 분개했소. 우리는 아프리카를 야만에서 벗어나게 하기를 원하오. 그리고 당신네 한가한 관광객들이 그렇게 찬탄하는 기린 목보다 공장 굴뚝이 우리가 보기에는 천배나 더 아름답다는 걸 단언할 수 있소. 우리는 가능한 한 많은 상아를 손에 넣어 그것을 판 돈으로 새로운 무기를 살 작정이오. 난 사냥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오. 난 우리 민족이 수렵민족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주었으면 하고 바라기까지 하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기필코 벗어나려고 하는 원시시대와 낡아빠진 시대와의 연결을 의미하기 때문이오. 당신 나라의 여론은 코끼리를 불쌍히 여기면서 아프리카 민중의 운명에는 무관심하거나 알지도 못하오. 난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아프리카의 코끼리를 모조리 희생시켜야 한다면 주저 없이 그럴 것이오.
바이타리는 모렐과 함께 투쟁하는 자연보호 투사인 페리 크비스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당신들은 모두 균형 잃은 사회의 전형적인 산물이오. 기예와 프롤레타리아와 생존조건이라는 거친 현실과 대면하게 될 때면 당신들은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 되지. 그래서 종교의식과 주술사의 아프리카, ‘마법’의 아프리카로 도피하거나, 혹은 성서 시대를 꿈꾸게 하는 코끼리 떼 사이로 숨어버리고, 당신들에게서 그 아편 같은 꿈을 빼앗아버리려는 이 버려진 땅의 젊은이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으려는 것이오. 하지만 노인장. 그 대가가 어떤 것인지나 아시오? 그 대가는 무지요 문둥병이요 열대병이고 상피병이며 사상충병이오. 이런 것들이 ‘초자연계’에 속해 있는 것이요. 어린 아이들의 죽음과 수천만 명의 만성 영양실조 또한 그 대가요. 이것이 당신들의 도피 욕구 때문에, 당신들이 존중하는 코끼리 떼 때문에 우리 민족이 지불해야 할 대가요. 우리는 마지막 코끼리까지 없어지는 걸 기꺼이 바라볼거요.
바이타리의 주장에 대해서 모렐의 생각은 어떨까. 모렐은 바이타리를 추종하는 청년의 무리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렇게 말한다.
-이상주의자란 코끼리보다도 더 시대에 뒤처지고, 구식에다, 낙오되고 무효하며 시대착오적인 개념이오.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거요. 그건 아마도 그들이 아직 강제노동수용소를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일 거요. 다시 말해 전진하며 전체 수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의 극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오. 그들은 코끼리까지도 포함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인간적인 여지를 옹호한다는 것이 어떻게 사람들이 주장하는 체제나 이데올로기가 어떠한 것이든 간에 한 문명의 생사를 걸 만한 유일한 대의명분이 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 못할 거요. 그들이 아직 대학이 주지 못한 인간교육을 받을 일이 남아 있단 말이오. 그런 건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들이오. 스스로 희생을 치르면서 배우는 것들이죠. 자연에 대한 존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면 몹시 힘들게 고생을 해봐야 하는 법이오. 그런데 그 세 젊은 녀석들은 받은 교육에도 불구하고 그런 걸 이해하기엔 한참 멀었소. 코르토로는 비록 읽을 줄은 몰랐지만 그 모든 걸 본능적으로 느꼈던 게 분명하오. 그는 무엇보다도 우정에 중요성을 두었소. 게다가 그는 아주 힘들게 살았기에, 그런 고생이 보존 본능과 보호의 필요성을 혹독하게 강화시켰던 거요
-원칙적으로 나는 이데올로기를 안 믿어. 대개 이데올로기가 자리를 다 차지해보라지. 게다가 코끼리란 크고 거추장스러워서 바쁠 때는 아주 이용 가치가 없어 보이지.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서나 볼 수 있듯이, 자기 자신밖에 모르고 코끼리 따위에는 개의치 않는 민족주의란 이 세상에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어리석은 바보 짓거리 가운데 하나야. 인간은 그런 바보짓거리를 여럿 만들었지.
-그런데 코끼리는 너무 크다, 너무 부담스럽다, 전신주를 넘어뜨리고 수확물을 짓밟는 등 제멋대로라고 사람들은 말하기 시작했소. 그러다 결국 자유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하게 됐소. 길게 보면 자유와 인간도 결국 짐스럽게 되는 거요... 그래서 내가 뛰어든 거요.
이 소설은 생드니라는 아프리카의 자연보호관이 어쩌면 사라진 모렐을 보호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타생 신부의 방문을 받고 모렐과 그 일행의 투쟁의 행적에 대해서 자신의 목격담을 전하는 만남에서 시작된다. 생드니는 백인이지만 서구 문명에 진력이 난 사람으로 죽어서 아프리카의 땅에 나무가 되어 태어나고픈 반서구적 지성인이다. 그리고 무척 고독한 사람이다. 아프리카의 별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고독하며 아프리카적 지성을 지닌 생드니의 해석을 통해 전해지는 모렐 일행의 이야기라는 구성은 단순한 사건과 일화적 스토리텔링으로만으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섬세한 사유를 풀어내는 데 적합하고 그래서 소설은 더욱 묵직한 깊이를 품게 된다.
생드니는 모렐의 투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결국, 이건 무엇보다도 고독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내 생각에 그 작자는, 그 모렐이란 친구는 너무나 사람이 그립고 그의 곁에 너무나 큰 구멍, 너무나 큰 공허를 느꼈기 때문에 그걸 메우기 위해서 아프리카의 모든 짐승 때가 필요했던 것이고, 그러고도 아마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이상주의의 성격을 띤 것이라면 무엇에건 도전을 받는 듯한 느낌을 갖는 그 이상한 강박증을 지닌 오르시니가 모렐을 향해 피어올리는 적개심을 피해 자리를 뜨는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자리를 떴습니다. 결국 거창해지더니 그 협소한 속에 이 세상 전체를 집어넣으려는 그 진부함. 그 말투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눈으로 우리들 주위, 땅 위와 하늘에서 끝없는 무한함을 발견할 필요가 있는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연장(延長)이 필요한 순간, 무게, 즉 물질의 존재 자체가 어떠한 불가능한 우정을 꿈꾸게 하는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나는 서둘러 밖으로 나가서 나의 별들에게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제대로 바라볼 줄만 안다면, 우리의 늙은 아프리카는 그런 별들로 만들어졌으니까요.
생드니는 바이타리에 항의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문명이 그들 길 위에 놓은 장애물에 맞서 흑인들이 스스로를 보호하도록 도울 수 있게 내가 그들 편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이외에는 이 세상에서 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사상의 침입으로부터, 전염성이 강한 물질주의로부터, 정치적 해독으로부터 흑인들을 구하고 보호하며, 그들의 부족 생활적인 전통과 경이로운 신앙을 보호하도록 돕고, 우리 길을 걷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에 대한 나의 가장 큰 근심은 우리의 독과 착취에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데 쓰이는 서양의 개념들과 편집광적인 우리 이데올로기의 선전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민중을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덩어리가 될 때까지 휘젓고 부수기 위해서 자기 민중의 영혼을 확성기와 전체주의적인 기계에 먹잇감으로 넘기려고 하는 자들에게 나는 합류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코끼리에 대한 생드니의 경탄도 아름답다.
-녀석들의 모습은 마치 어떤 근원적인 존재에 대해 안심이라도 시켜주는 것 같았지요. 이 무력한 나이, 금기와 억제와 거의 생리적인 예속에 묶인 나이에, 사람이 자신의 가장 해묵은 진리들을 극복하고, 자신의 가장 깊은 욕구들을 포기하는 이 나이에도 그 경이로운 소리를 들으면 나는 언제나 우리가 아직은 완전히 우리의 근원으로부터 단절되지 않았으며, 거짓의 이름으로 아직 거세되지 않았고, 아직 완전히 굴복당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지요.“
때때로 사람들의 가슴을 죄어오는 보호 욕구를, 자신이 열렬히 받고 싶은 것을 개에게 주도록 부추기는 그런 보호 욕구를 쇨세르(생드니)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방사능 낙진, 암, 인민의 천재적 아버지 스탈린, 원격조정을 통해 흉측한 버섯구름을 일으키며 전세계 대륙들을 파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원자폭탄의 시대보다 이 욕구가 더 불안했던 때는 결코 없었다.
생드니가 이해하게 된 모렐의 동기는 결론적으로 이러하다.
-그는 ”자연의 찬란한 광채를 보호“하려는 것이요. 바로 자유를 말이오.
-가엾은 모렐. 그 사람은 불가능한 상황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인간들과 더불어 인간적인 이상을 옹호하려고 하는 그 모순을 해결한 사람은 지금껏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한편 미나라는 여인이 등장한다. 독일 태생인 그녀는 2차대전 당시에 부모를 잃고 러시아 군인들에게 강간당하고 한 러시아 장교와 사랑에 빠진다. 그 후 삼촌의 보호 하에서 계속된 삼촌의 성폭행에 시달리다 탈출한 후, 바를 전전하며 스트립쇼와 매춘으로 연명하다 아프리카에 오게 되었다. 이렇듯 생에서 온갖 상처를 입은 미나는 모렐이 청원서를 들고 바에 나타난 날 모렐이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며 무얼 지키고 싶어 하는지를 단박 알아차린다. 미나는 생드니가 모렐과 접촉해 그가 어디 있는지를 알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생드니에게 모렐 일행과 합류할 수 있게 주선해 줄 것을 요구한다. 생드니는 미나와 모렐의 충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그러니까 나는 이 스물세 살의 아가씨가 인류가 보여줄 수 있는 온갖 추잡한 구경거리를 보았으니, 무기와 짐을 들고 코끼리 편으로 넘어가 아프리카의 밀림 속에서 인간에 대항해 싸우는 한 사내가 있다는 생각에 잠겨 이 순간 음흉한 기쁨을 느끼고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던 겁니다. … 다시 말해, 우리가 그들에게 너무나 고통을 주었으니 그들은 인류의 적 이외의 다른 것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나의 첫 반응도 그랬습니다. 정말이지 나는 이 아가씨와 모렐 사이에 존재하는 유일한 유대감은 원한과 경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행동이 사람들이 말하듯이, 또는 흔히 글로 표현되었듯이 인간의 존엄성과 관계된 것이요, 인간에 대한 신뢰를 이미 체험된 모든 한계를 넘어서서 끝까지 밀고 간 것이며, 또한 우리 스스로가 만든 엄격한 법률에 대한 반항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미나는 총탄이 떨어졌다는 모렐의 전언에 화답하며 총탄을 가지고 모렐을 찾아가고자 한다. 그녀에게 생드니는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사건을 너무 비극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으며, 모렐은 아마 의사들의 진단에 따라 정신병원에서 한두 해 지내면 될 것이라고...
그녀는 다음과 같이 쏘아붙인다.
-그러면 생드니 씨, 어떤 사람이 당신들에게, 당신들의 잔인성에, 당신들 얼굴에, 당신들 목소리에, 당신들 손에 질렸다고 해서 당신은 그 사람이 미쳤다고 보세요? 그 사람이 당신들, 당신네 학자, 당신네 경찰, 당신에 기관총과 더는 조금도 닮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 사람을 정신병원에 가둬야 합니까? 요즈음에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아셔야 해요. 다만 그 사람들은 그가 하는 행동을 할 용기가 없을 뿐이죠. 너무 비겁하거나 너무 지쳤거나 너무 냉소적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그이를 이해합니다. 아주 잘 이해하지요. 그 사람들은 그들의 사무실로, 수용소로, 군대로, 공장으로 가서 복종해야 하는 걸 지긋지긋해하지요. 그래서 할 수 있는 사람은 그이를 생각하고 미소 짓지요. 나처럼 말이에요.
체포된 후 심문을 받는 미나의 항변을 더 들어보자.
미나는 격한 감정을 억누르며 사령관에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사령관님. 그이는 오히려 사람들을 보호하고 방어하려 했어요. 사람들은 그를, 사람을 싫어하는 중오심에 찬 인간 혐오자로 만들려고 했지요.
모렐의 피신 행렬을 따라 이질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불사하며 동참하려는 그녀의 존재는 모렐에게 독일 민족에 대해 절대로 절망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훌륭히 증명해주고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그들이 코끼리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될 차례야. 아우슈비츠도 있었으니 이제 그들 역시 자연에 대한 사랑을 표시할 수 있을 때이고, 그들 역시 인간적인 여유를 얻기 위해 나설 때이며, 역사의 진보에 따라 더욱더 커져야 하고 인종과 국가와 이데올로기를 초월해서 우리 모두를 포용해야 할 이 여유를 확실하게 옹호해야 할 때야.
”하늘의 뿌리“라는 이 시적인 제목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소설의 주제의식을 압축적으로 전하고 있는 “하늘의 뿌리”의 의미는 생태운동가로 모렐과 함께 투쟁하는 페르 크비스트를 통해서 전해진다. 그는 온갖 동물 보호 투쟁을 해왔다.
-나는 한갓 늙은 자연주의자지요. 신이 대지에 심은 온갖 뿌리들과 인간의 영혼에 영원히 심어놓은 뿌리들을 난 옹호하오.
그 뿌리들은 전능한 힘이 대지에 심어준 것들로, 개중 일부는 영원히 인간의 마음속에 파고 들었다. 모렐과 마친가지로 그도 인간적 여지를 옹호했다. 그것을 위해 평생을 바쳐 정부와 제도와 정치체제와 전체주의에 맞서 싸운 것이다.
그는 얼마나 많이 싸우고 얼마나 많이 노력했던가. 그런데도 여전히 모든 걸 영원히 보호해야 할 형편이다. 살아 있는 모든 뿌리들, 다양성과 생명력이 아주 다른 그 뿌리들은 휴식도 휴전도 없이 보호되어야만 했다. 뿌리들이란 다양성이나 미적인 면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무한한 것이어서, 어떤 것들은 인간의 영혼 속에 아주 깊숙이 박혀 있다. 위와 앞을 향해 끊임없이 번뇌하는 하나의 열망, 영원에 대한 결핍, 기갈, 다른 곳에 대한 예감, 한없는 기다림,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손바닥만 한 차원으로 축소될 때 존엄성의 욕구가 되었다. 자유, 평등, 우애, 존엄... 이것들보다 더 깊으면서 더 위협받는 뿌리는 없었다.
-이슬람에서는 이것을 ‘하늘의 뿌리’라고 부르오. 멕시코 인디언들에게는 이것이 ‘생의 나무’로, 모두들 그 앞에 무릎을 꿇고는 눈을 들어 아프도록 가슴을 두드린다오. 모렐 같은 고집쟁이들이 청원서며 투쟁위원회, 보호 조합 등을 통해 밖으로 드러내려 애쓰는 어떤 보호 욕구 말이오. 그들은 가슴 속에 깊이 묻힌 이 하늘의 뿌리들을 드러내려는 겁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의 욕구, 자유 욕구, 또는 사랑의 욕구에 응하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지요.
만일 공산당이 아프리카에서 승리하면 코끼리가 제일 먼저 목매달려 죽을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는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으며 코끼리가 사실은 마지막 남은 개인들이라는 걸 내가 아는지 빈정거리며 묻더군요. 인간의 마지막 남은 기본적 권리, 서투르고 성가시고 시대에 뒤떨어지고, 사랑에서 위협을 받고 있지만, 인생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될 그 권리를 상징하고 있다고...
소설에는 아프리카에서 벌이고 있는 모렐 일행의 투쟁에 대해서 반응하는 전 세계의 사람들의 관심과 응원에 대해서도 묘사하고 있다.
-모든 것을 무릅쓰고 자신의 길을 똑바로 가는 사람이 어디엔가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건 기분 좋은 일이야. 그 덕에 우린 편안하게 잠들 수 있지.
모렐이 곧 체포될 거라는 소문이 포르라미에 퍼지더니 곧 전 세계 신문에 실렸다. 이따금 마음속으로 은근히 흡족해하며 그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들 내부에 내재해 있는, 실패하고 망치고 받아들이고 감내해버린 모든 것을, “언젠가 그들에게 내가 그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말해주고,” “이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그들에게 보여주고, 끝장내고 싶은” 그 모호하면서도 격렬한 욕구를 대변해줄 임무를 암묵적으로 그에게 맡기기라도 한 것 같았다.
우정이 너무도 필요한 다른 수백만의 사람들을 위해 그는 시위를 계속해야만 했고, 체포당하지 않아야 했고, 술책을 써서 몸을 숨겨야 했으며, 최악의 역경 속에서도 끊임없이 인간적 여유를 간직해야 했고, 알려지지 않게 정글 깊숙이 어딘가에 마지막 남은 코끼리들과 더불어 하나의 위안, 하나의 약속, 꺽이지 않는 하나의 신뢰로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미래에 남아 있어야만 했다. 무엇보다 살아 있을 필요가 있었다.
소설은 생드니와 헤어져 말을 타고 아프리카의 대지를 가는, 어쩌면 피신한 모렐에게로 돌아가는 타생 신부의 고백으로 끝이 난다.
나무는 그가 오래전부터, 십자가보다 먼저 좋아하던 기호였다.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땅꼬와 함께 하면서 인간 아닌 존재의 세계와 만나면서 세계는 겹겹이로구나, 무궁무진하구나 경탄하게 되었다. 막다른 길이 예상치 않은 방향에서 새롭게 열리고 있었다. 인간의 세계에서 막다른 길에서 주저 앉고 싶을 때,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접고, 고개를 기울여 삭막한 인간의 도시, 으슥한 골목길에 주차된 차 밑을 살필 수 있다면... 내 닫힌 마음을 열게 하는 또 다른 우정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어쩌면 이 소설에서 생드니가 전한 한마디가 땅꼬와의 우정이 가능했던 이유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 이들 모두가 내 주위에 있는 걸 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선 나에게는 별것 아닌 것. 그저 다른 날보다 더 맑은 하룻밤, 유난히 절절한 한순간의 고독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로맹가리가 어떻게 이렇게 엄청난 소설을 쓸 수 있었는지를 역시 <새벽의 약속>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그는 그를 어떤 절망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고 살아낼 수 있게 한 힘은 짐승을 늘 사랑했기 때문이라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전쟁 후 나는 호되게 앓았다. 왜냐하면 개미를 밟으며 걷거나, 물에 뜬 풍뎅이를 차마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침내 나는 인간이 자연보호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주 두꺼운 책을 썼다. 나는 짐승들의 눈 속에서 내가 보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들의 시선 속에는 어떤 무언의 힐난과 어떤 이해력 상실의 표정과 어떤 질문이 깃들어 있다. 나에게 무엇인가를 생각나게 하고, 그래서 나를 완전히 뒤흔드는 것이다. 또한 나는 내 집에 짐승들을 두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금방 애착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잘 따져보면 대양을, 빨리 죽지 않는 대양을 사랑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내 친구들은, 내가 가끔 길거리에서 멈춰 서서 마치 아직도 누군가를 즐겁게 하려는 양 자부심 강한 표정을 지으며 한참 동안 눈을 들어 빛을 바라보는 버릇이 있다고 주장한다.
...
물개들은 바위 위에서 입을 다물고 있고, 나는 미소 지으며 눈을 감고 가만히 있는다. 그러고는 그들 중에 한 마리가 가만가만 내게 다가오는 것을, 갑자기 내 뺨 혹은 어깨 사이에 그 다정한 콧마루가 느껴지는 것을 상상해 본다... 나는 살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