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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우주전쟁(War of the Worlds)'>
오랜만에 영화를 한편 보았다. 옛날 부지런히 영화관에 출입하였으나... 될 수 있는 되로 현실과 맞쳐 살아가려고... 짜임새있는 글 내용이라 퍼 보았다.솔뫼생각.
뉴요커 친구 하나가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우주전쟁(War of the Worlds)’을 감명 깊게 봤는데 또 보고 싶다고 해서 같이 봤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니 이 영화는 ‘뉴요커들을 위한, 9.11 진혼곡’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9.11 테러의 악몽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뉴요커들의 이야기를 들어왔고, 이 영화를 보기 전에 그 친구에게서 이 영화가 왜 그리도 뉴요커들을 사로잡는 지 설명을 자세히 들었기에,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서울에 있는 친구 말이, 한국에서는 이 영화를 본 사람들 중 실망했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사실 저도 ‘9.11 테러’를 떠올리지 않고 이 영화를 봤더라면 하나도 재미가 없었을 것 같습니다. 외계인의 지구인 살육이라는 식상한 소재도 그렇고, 웃기기까지 한 ‘허무 결론’도 그렇고, 별로 ‘스마트’한 면은 찾아 볼 수 없는, 그렇다고 그다지 오락적이지도 않은 영화니까요.
하지만 이 영화는 뉴요커들에게 ‘9.11 테러’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뉴요커들에게 ‘우주전쟁’은 아주 특별한 영화이고, 그래서 이 영화는 뉴요커들에게 바치는 스필버그의 ‘9.11 진혼곡’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영화가 왜 ‘9.11 테러’에 대한 암시로 뒤덮여 있는 지, 여기 사람들에게 들은 얘기를 바탕으로 몇 개만 적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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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사고 전과 후 로어 맨하튼의 스카이라인>
1. 쓸쓸한 로어 맨하튼의 스카이라인
이 영화는 현재 ‘로어 맨하튼(Lower Manhattan)’의 스카이라인을 조용하게 보여주면서 시작합니다. 뉴요커들은 ‘로어 맨하튼’의 스카이라인을 볼 때 ‘이제는 없어져 버린 두 빌딩’을 자연스럽게 떠올립니다. 스필버그는 쓸쓸한 로어맨하튼의 스카이라인을 엄숙하게 보여줌으로써 뉴요커들에게 ‘9.11’에 대한 기억을 되살릴 준비운동을 시킵니다.
2. 파란 하늘과 검은 연기
외계인이 처음 뉴욕을 공격한 직후, 하늘에는 순식간에 시커먼 구름 같은 것이 생깁니다.
이 하늘은 월드트레이드 센터에 비행기가 충돌한 직후, 맨하튼과 강 하나를 둔 퀸스나 브룩클린, 또는 뉴저지 지역에서 맨하튼을 바라보았던 사람들에게 ‘눈에 익은 하늘’입니다. <사진 google.com> 파란 하늘에 순식간에 퍼져 오르던 검은 연기. 그래서 그 하늘 장면을 보는 순간 뉴요커들은 ‘9.11’ 생각을 합니다.
3. 하얀 가루로 뒤덮인 사람들
‘9.11’ 사건 당시 월드트레이드 센터 바로 옆 건물에 있었던 자스민이라는 친구의 얘기입니다. 사고 직후 옆 건물에서 정신 없이 빠져 나왔는데, 바깥으로 나온 순간 눈 앞이 온통 새하얗게 덮여서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월드트레이드 센터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해 공중에 먼지와 시멘트 가루가 가득했기 때문이지요.
그 가운데에서 자스민은 아무 방향으로나 무조건 달렸습니다. 한참 달리다가 가족에게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멈춰 섰을 때, 자스민은 자신의 머리며 얼굴이며 옷이 온통 하얀 가루로 뒤덮여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잿가루가 눈에 들어가 눈이 따갑고, 목구멍으로도 들어가 목도 따가운 것을 그제야 느꼈습니다. 자스민은 무서워 덜덜 떨면서 온몸에 붙은 하얀 가루를 털어냈다고 합니다.
<9.11 당시 AP 보도사진(왼쪽)과 영화 '우주전쟁'>
영화 ‘우주 전쟁’에서는 톰 크루즈를 비롯한 사람들이 외계인의 공격을 목격하고 공포에 질려 도망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높은 건물과 비좁은 도로, 그 가운데에서 사방으로 정신 없이 달리는 뉴요커들. 그리고 넋이 빠진 채 집에 들어온 톰 크루즈가 자신의 머리와 얼굴을 뒤덮은 하얀 가루를 발견하고 공포에 질려 미친 듯이 얼굴을 씻는 장면을 보면서 뉴요커들은 그 때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저도 그 장면을 보면서 자스민 얘기가 떠올랐으니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톰 크루즈가 얼굴을 씻는 그 장면에서 사람들은 숨을 죽이게 되지요.
4. 실종자를 찾는 벽보
첫 공격 이후 톰 크루즈가 안정을 되찾고 다시 시내로 나왔을 때 나오는 한 장면. 건물의 벽면 하나가 실종자의 사진을 붙인 가족들의 애타는 벽보로 가득합니다. 이건 물론 9.11 직후 월드 트레이드 센터 주변에서 볼 수 있었던 장면이겠지요. <사진 goog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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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7일 런던 테러 이후에도 폭탄이 터졌던 지하철역 중 하나인 ‘킹스 크로스’ 역 주변에 이런 벽보들이 붙어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가슴 아프게 만드는 벽보. 이 벽보 장면은 뉴요커들에게 선명하게 ‘9.11’의 기억을 되살려 줍니다.
5. 휘날리는 성조기
영화 ‘우주전쟁’에서 뉴욕에 처음으로 괴상한 번개가 떨어진 직후 톰 크루즈는 무슨 일인지 살피기 위해 시내로 나갑니다. 그 때 스쳐가는 한 장면에 성조기가 가득 휘날립니다. 성조기는 9.11로 공포에 질렸던 미국인들이 ‘애국심’으로 뭉치고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입니다.
6.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물건들
이 영화에서 거대한 우주 괴물은 사람들을 마구 잡아 하늘 높이 끌어올립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들의 옷과 물건은 괴물의 몸체에서 떨어져 나와 땅 위로 하나 둘씩 떨어져 내립니다. 이 장면 역시 뉴요커들에게는 낯선 장면이 아닙니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 주변에서도 이렇게 종이 같은 것이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져 내렸으니까요. 그래서 뉴요커들은 여기에서 또 ‘9.11’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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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당시 AP 보도사진(왼쪽)과 영화 '우주전쟁'>
이 밖에도 선착장에 몰려들어 배를 타는 사람들, “테러리스트 공격이냐”고 묻는 아이들 등, ‘9.11’을 연상하게 만드는 장면은 이 영화 곳곳에서 나옵니다. 영화를 볼 때 몇몇 장면에서 훌쩍거리는 미국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아마 ‘9.11’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스필버그는 ‘9.11’을 직접 소재로 쓰지는 않았지만, 암암리에 그 사건의 장면을 재현하면서 이 ‘싱거운 스토리’를 심각한 영화로 만듭니다. 런던의 잇따른 사고와 이집트의 테러로 더 우울하고 불안한 이 때, 영화 ‘우주 전쟁’은 뉴요커들에게 특별하고 슬픈 영화가 될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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