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哭)
-오호애재(嗚呼哀哉)
이병철
아들 따라 손주놈들 앞뒤에 주렁주렁 거느리고 서울 메누리 앞세우고, 날만 따스해지면 남산공원으로 동물원으로 화신상회로 나들이 실컨 서울 구경을 하시겠다는 어머니
태백산 밑에서 나서 태백산 밑에서 여쉰 환갑토옥 밭갈기와 산에 산나물 이름 섬기기와 호박국에 농사는 천하지대본이라는 것과
열두 대문 집 마름 살이 한세월에 천한 사람의 말 두어 천 개쯤 귀에 익혔을 뿐, 흙빛 얼굴을
들어 유쾌한 웃음 한번 온전히 웃어 본적도 없이 느티나무처럼 늙은 어머니
멧돼지보다도 더한 등살에 자식 놈들 뿔뿔이 잃어 버렸든 자식 놈들따라, 인제사 좋은 세상 왔으니 기와집 한 채쯤 지니고 서울 살겠다고, 서울에는 사래 긴 밭도 많고 논도 많을 줄 알았다고
여름에 보리밥 먹기 좋은 상추쌈과 녹두랑 팥이랑 강냉이 당고투 같은 것이라든지, 봄철 들면
뿌려야 할 가지가지 씨앗을, 뜨내기 이불 봇짐 속에 이어 오신 어머니
왜놈들 가고 또한 더한 왜놈들 등살에 예나 제나 상기도 쫓겨 다니기만 하는 둘째의 이름을 불러 여느 때 참말로 좋은 세상이 와서 참말로 기와집 한 채쯤 지니고 살겠느냐고 물으시던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날씨가 풀리어 채 따스해지기도 던에 화신상회 동물원 구경을 하시기도 전에, 쫓겨 다니는 이 자식놈을 돌볼 겨를도 없이 어디로 어디로 이렇게 바삐 길을 차리시는 것입니까
목이 터지도록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이 하늘가 자꾸만 머얼리 바삐 가시는 어머니, 어디메 살기 좋은 나라 살기 좋은 번지수를 찾아 가시기에 이처럼 이처럼 바쁜 길이옵니까
가시던 길 돌아오이소 어머니
왜놈들과 왜놈들의 붙이는 아주 사뭇 쫓아버리고 봄이 틀림없이 이 땅에 봄이 오면, 이불 봇짐과 함께 가지고 오신 어머니의 씨앗을 갈아 꽃 피우겠습니다. 꽃 피우겠습니다.
(『문학평론』, 1947. 4)
[어휘풀이]
-당고추 : 당초(唐草). 작은 고추
-예나 제나 : 옛날이나 지금이나
[작품해설]
해방기의 좌익계 시단(詩壇)은 과거 카프 계열의 시인군과, 1930년대의 정지용·김기림·김광균·오장환·윤곤강(尹崑崗) 등의 순수문학 옹호론자 혹은 모더니즘 계열의 시인들, 또 1930년대 중반부터 현실주의적인 시를 발표해 온 이용악·여상현·임학수(林學洙)·김조규(金朝奎) 등의 시인들이 중심이 되고, 여기에 김상훈·박산운(朴山雲)·유진오·이병철(李秉哲)·최석두(崔錫斗) 등의 신인들이 가세하여 형성된다. 이들 신진 시인들은 일제 말기부터 조금씩 작품을 발표하다가, 암흑기의 공백을 거친 후에 해방 직후 일제히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친일이나 부일(附日) 문제에 있어서 떳떳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시성 시인들보다 훨씬 더 뚜렷한 정치 지향성을 지니고 활발한 창작 활동을 펴게 된다. 그 대표적인 성과물이 1946년 12월에 출판된 『전위시인집』으로, 여기에는 김광현(金光現)·김상훈·박산운·이병철·유진오 등의 시가 실려 있다.
이 시는 이렇게 신인으로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한 이병철의 대표 작품으로, 그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어머니의 죽음을 맞아 그 슬픔을 노래하고 있는 조시(弔詩)의 성격을 지닌다. 이 시는 그 내용으로 보아 1~6연까지는 어머니에 대한 회상을 담고 있고, 그 이후의 연에서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토로하면서 그 슬픔을 이겨내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담고 있다.
이 시에서 묘사되고 있는 어머니는 우리 시골의 전형적인 어머니 상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 어머니는 ‘실컨 서울 구경을 하시겠다는 어머니’이며, ‘농사는 천하지대본이라는 것’만 알고 ‘열두 대문 집 마름 살이’에 ‘느티나무처럼 늙은 어머니’이다. 그 어머니는 해방을 맞아 ‘인젯 좋은 세상 왔으니 기와집 한 채쯤 지니고 서울 살겠다고, 서울에는 사래 긴 밭도 많고 논도 많은 줄’ 알고 있고, 시적 화자에게 ‘어느 때 참말로 좋은 세상이 와서 참말로 기와집 한 채쯤 지니고 살겠느냐고 물으시던’ 순진한 어머니이다. 그러면서도 자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상추쌈과 녹드랑 팥이랑 강냉이 당고추 같은 것이라든지, 봄철 들면 뿌려야 할 가지가지 씨앗을, 뜨내기 이불 봇짐 속에 소중히 이어 오신 어머니인 것이다. 이 시에서는 이러한 어머니의 형상을 통해 한편으로는 해방기의 어수선한 상황과 그러한 현실 속에서 투쟁하는 시적 자아의 현실 의식을 은연중 드러내고 있다. 그 현실은 ’멧돼지보다도 다한 등살‘, ’왜놈들 가고 또 더한 왜놈들 등살에 예나 제나 상기도 쫓겨 다니기만 하는 둘째‘, ’쫓겨 다니는 이 자식놈‘에서는 비교적 직설적으로 드러나지만, ’인제사 좋은 세상 왔으니‘, ’어디메 살기 좋은 나라 살기 좋은 번지수‘ 등에서는 역설적으로 제시된다. 이와 함께 ’왜놈들과 왜놈들의 붙이는 아주 사뭇 쫓아버리고‘ ’어머니의 씨앗을 갈아 꽃 피우겠‘다는 결연한 시적 자아의 투쟁 의지도 천명된다. 이 시에는 투쟁의 현장보다 보이지 않고 격렬한 선동성도 없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서사적 사건을 시적 자아의 자각된 비애와 결합시켜 시인의 뚜렷한 목적 의식성을 드러내 준다. 이러한 시적 기교는 해방기의 시적 리얼리즘의 한 전범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작가소개]
이병철(李秉哲)
1918년 경상북도 영양 출생
1943년 『조광』에 시 「낙향 소식」을 발표하여 등단
1946년 『전위시인집』 편집, 조선문학가동맹 가담
6.25 전쟁 중 월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