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황
경황이란 말에는 경황景況과 경황驚惶이 있어서 혼동하기 쉽다. 경황景況은 흥미를 느낄 만한 겨를이나 형편을 뜻하는 말로, “집안이 이 지경인데 무슨 경황으로 놀러 가겠나?”와 같이 쓰인다. 경황은 ‘경황없다’의 어근이 되며, 몹시 바빠서 틈이 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경황驚惶은 놀라고 두려워함을 뜻하는 말이다. 경황망조驚惶罔措라 하면 놀라고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말이다.
또 경황실색(驚惶失色)은 놀라고 두려워 얼굴색이 달라지는 것을 가리킨다. 경황(驚惶)은 “그는 포탄이 떨어지는 그 경황 중에도, 아버지의 문집을 끝까지 등에 지고 다녔다.”와 같이 쓰인다.
잔도
잔도棧道는 험한 벼랑에 나무로 선반처럼 내매어 만든 길이다. 잔교棧橋는 계곡에 걸쳐 놓은 구름다리를 말한다. 그런데 잔교는 잔도를 가리킬 때도 쓰는데, 이것은 아마 양자가 다 아슬아슬하게 걸어야 한다는 개념상의 유사점도 있지만, 원래 이 잔棧자가 비계를 뜻하는 데서 더 큰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비계는 건축 공사 등에서 높은 곳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긴 나무나 쇠파이프 등으로 가로세로 얽어서 만든 시설을 가리키는데, 잔도나 잔교가 다 이 비계와 유사한 생김새와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가에 다리처럼 만들어 배를 댈 수 있게 만든 선창船艙을 잔교라고 하는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된다.
참고로 비계는 사전에 고유어로 실려 있으나, 한자어 비계飛階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소화전
소화전消火栓의 전栓 자는, 자전에 ‘나무못 전’ 자로 나와 있어서 일반적으로 소화 기구를 비치한 함을, 못을 박은 것처럼 닫아 보관하는 곳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본뜻과는 거리가 멀다. 이 글자는 현대 중국어에서 shúan으로 읽히는데, 기물器物의 개폐부開閉部를 가리키는 말이다. 외래어 콕cock의 의미와 같으며 고유어로는 고동이라 한다. 수도꼭지를 연상하면 된다.
그러므로 소화전은 불이 났을 때 불을 끄기 위하여 물을 뿜는 장치를 말하며, 기구함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이를 방화전防火栓이라고도 한다. 도로변을 걷다 보면 제수변이라고 쓰인 맨홀 뚜껑이 있는데, 이의 딴 이름이 지수전(止水栓)이다. 글자 그대로 ‘물을 멈추는 밸브’란 뜻이다. 제수변 곧 지수전은 큰 수도관의 물길을 열거나 닫기 위한 밸브 장치다. 작은 수도관의 고장 수리나 설치를 위하여 일시적으로 물을 잠글 필요가 있을 때 사용하는 전(栓) 곧 밸브다.
그런데 이 제수변(制水弁)이란 말은 일본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을 그대로 쓴 것인데, 이는 제수판(制水瓣)으로 바꾸어 써야 옳다. 판(瓣)은 관이나 용기 따위에 붙어 있어, 기체나 액체가 드나드는 것을 조절․제어하는 장치를 가리킨다. 일본은 이 판(瓣) 자와 변(弁) 자의 음이 둘 다 ‘벤(べん)’으로 똑같기 때문에, 복잡한 판(瓣) 자 대신에 간단한 변(弁) 자를 쓴다. 그러나 우리는 고깔 변(弁) 자와 꽃잎 판(瓣) 자는 그 뜻과 음이 완전히 다르다. 일본이 그렇게 쓴다고 하여 우리도 따라 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래 이 판(瓣)은 심장이나 정맥․림프관 따위의 속에 있어, 혈액이나 림프액의 역류를 막는 날름막이 꽃잎처럼 생겼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판막(瓣膜)이란 말도 이래서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제수판(制水瓣)으로 써야 물을 제어하는 밸브란 뜻이 된다. 제수변(制水弁)이라 하면 물을 제어하는 고깔이란 뜻이 되니 말이 안 된다. 아무렇게나 일본 말을 베껴 쓸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