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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空) 사상
공(空)이란 불교사상의 근본적인 개념을 나타내는 말로서 반야경(般若經)을 비롯한 대승경전에서 특히 강조되고 있는데, 이 말은 자성(自性, svabhava)과 실체(實體, dravya) 또는 본성(本性, prakrti)이나 자아(自我, atman) 등과 같은 인간들이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인연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생겨난 연기적(緣起的)인 존재에 불과함으로 실제로는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공(空)의 원어 범어 Sunya를 순야(舜若)로 음역하여 '부풀어오름' 또는 '속이 텅 빈' '공허한 것' 등으로 해석하며, '무엇인가 없는 상태' 또는 '결여되어 있는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반야경을 중심으로 하는 대승불교에서는 불교사상의 근본적인 개념으로 다루고 있는데, 이러한 공(空)의 의미를 사상적인 관점에서 논의하는 것을 공사상(空思想)이라 하고 공사상을 주장하는 논조를 공론(空論, Sunyavada)이라고 한다.
1. 공사상의 역사
초기불전 가운데 최고(最古)의 경전인 숫다니파타(Suttani-pata, 經集)에서 '항상 생각을 집중하여 자아(自我, atman)에 집착하는 견해를 타파하여 세간(世間)을 공(空)으로 관찰하라 그러면 죽음을 초월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세간을 공으로 관찰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의 왕(王)을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라고 하여 부처님 당시부터 자아에 대한 집착을 타파할 수 있는 것은 세간이 공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대승불교 운동은 먼저 반야경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반야경의 중심사상은 공사상으로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고정화된 것을 거부하면서 집착을 떠나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를 천명하고 있다. 반야경은 기원전 2세기경에 남인도에서 시작하여 기원 후 2세기까지 서인도와 북인도로 옮겨가면서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반야경의 공 사상은 공(空)의 언어적 반복에 의한 독주와 설득력이 부족한 점은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반야경의 공(空)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시킨 사람은 바로 제2의 석가라고 하는 용수(龍樹, Nagarjuna)로서 그의 대표적인 저술인 중론(中論)의 공사상은 바로 오늘날의 대승불교 사상의 근간이 되고 있는데, 그는 중론에서 공사상의 역사적인 위상은 바로 '부처님의 교설(敎說)에 의한 것'이며, '연기법(緣起法)에 의한 것'임을 밝힘으로서 반야경에 나타나는 공사상의 이론적인 체계를 수립하였다.
가. 용수와 공사상
대승불교 사상사에서 용수가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다. 그가 활약한 연대는 대략 서기 150-250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으며, 남인도 비달마의 한 돈 많은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학문의 연구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바라문의 성전(聖典)인 4베다(beda)를 비롯한 천문(天文)과 지리(地理)를 포함한 당시의 모든 학술을 골고루 연구하고 남김 없이 암기하였다고 한다.
청년시절에 이미 모든 학문에 정통해 버린 그는 친구 3명과 함께 '정욕의 극치를 누려보자'고 하면서 은신술(隱身術)을 써서 왕궁으로 잠입하여 무려 백여 일 동안이나 궁궐 안에서 궁녀들을 희롱하면서 정욕을 탐닉하다가 결국 발각되어 그의 친구 3명은 모두 붙잡혀서 살해되었고 혼자만 겨우 탈출하여 '욕망은 괴로움의 근본'이라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고 깨달은 후에 불문(佛門)에 입문한 인물이다.
그는 고향의 어느 산 위에 있는 탑사(塔寺)를 찾아가서 그 곳에서 출가수계하고 90여일 동안 수행하면서 스승이 가지고 있던 경(經)·율(律)·론(論) 삼장을 모조리 독파한 후 또 다른 경전을 구하기 위해서 동북인도로 가다가 히말라야 지방에서 한 나이 많은 스님으로부터 대승경전을 얻어 탐독하였으며, 외도(外道)들과 만난 논쟁의 자리에서는 그들을 모조리 논파하였다.
그는 또 다른 경전을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용궁에 이르러 대룡보살(大龍菩薩)로부터 일곱 개의 칠보함에 숨겨져 있던 심오한 비전인 '무량(無量)의 묘법(妙法)'을 받고 그것을 읽으면서 선정(禪定)에 들어가서 심법(心法)을 깨달았으며, 만년에는 남인도로 가서 그 나라의 국왕을 불교로 개종시키면서 많은 논서를 저술하여 대승불교를 크게 선양시킨 사람이다.
그는 중론(中論) 500게(偈)를 지어 인도에서 대승불교를 크게 일으켰는데, 그가 지은 중론 제24장 18게에서 '무릇 연기(緣起)하고 있는 것 그 모든 것을 우리는 공성(空性)이라고 설한다. 그것은 임의로 시설되어진 가명(假名)이며, 그것은 중도(中道) 그 자체이다.' 라고 하여 반야경이 설하고 있는 공(空) 역시 연기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밝힘으로서 공사상에 대한 이론적인 근거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또한 그는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인(因)과 연(緣)의 상호관계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일 뿐 고정 불변하는 자성이 없기 때문에 모두가 공(空)인 것이며, 자성(自性)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의 잘못된 망상으로 그것은 희론(Prapanca, 戱論)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중론(中論)의 중심 내용을 '연기(緣起)=무자성(無自性)=공(空)'으로 연결 지울 수 있다고 하였다.
용수는 중론 제24장에서 '여러 부처님은 이제(二諦)에 의거해서 법을 설하시는데, 첫째는 세속제(世俗諦)이고, 둘째는 제일의제(第一義諦)이다. 이 이제의 구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어 깊고 진실한 뜻을 알지 못한다. 세속제에 의하지 않으면 제일의제는 설해지지 않고 제일의제에 의하지 않으면 열반은 얻을 수 없다'고 설하고 있다.
용수가 이제설(二諦說)에서 말하는 세속제(世俗諦)란 연기(緣起)와 공(空)을 바탕으로 하여 성립하는 세간의 언어습관을 말하는 것으로 만약 연기와 공을 부정하게 되면 세간의 삶을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일의제(第一義諦) 또는 승의제(勝義諦)는 연기와 공의 이치를 이해할 수 있을 때 얻어지는 최고의 진실 된 진리로서 바로 열반에 이를 수 있는 길이라고 하고 있다.
나. 용수 이후의 공사상
'어떤 것이 그 자체의 존재를 가지지 않는 모습이 곧 공(空)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이라는 것을 터득하는 자는 모든 것을 터득할 수 있다. 그러나 공을 터득하지 못하는 자는 일체의 모든 것을 획득되지 못한다.'고 하는 용수(龍樹)의 공사상을 중심이론으로 하는 사상을 중관사상(中觀思想)이라 하고 중관사상의 흐름을 이어받은 논사(論師)들을 중관파(中觀派)라고 한다.
초기의 중관파로는 용수 당시의 제자로서 아리야데바와 라훌라바드라 등이 있으며, 이들 중에 아리야데바(Aryadeva, 聖提婆, 서기 170-270년)는 사백론과 백론, 백자론 등의 저술을 남기고 있는데, 백론(百論)은 용수의 중론, 십이문론(十二門論)과 더불어 중국 삼론종의 기본 전적(典籍)으로 중요시되고 있으나 용수의 사상을 선양하기 위해서 외도사상을 너무 심하게 비판한 까닭에 논적들로부터 암살 당했다고 한다.
초기 중관파에 이어 중기의 중관파 학자는 붓다팔리타(Budhapalita, 佛護)와 바바비베카(Bhavavi-veca, 淸弁) 찬드라키르티(Candrakirti, 月稱) 등이 있고 후기 중관파에는 이제분별론을 지은 즈냐나가르바(Jnanagabha, 智藏)와 날란다 승원의 대학장으로서 후기 대승불교 최고의 사상가로 꼽히는 샨타라크시타(Santaraksita, 寂護)와 티베트 불교의 전래와 교단확립에 큰 역할을 한 카말라실라와 아티샤(Atisa) 등이 있다.
중국의 중관사상은 구마라집(鳩摩羅什, 서기 344-413)이 번역한 용수의 중론(中論)과 십이문론(十二門論) 및 아리야데바(Aryadeva, 聖提婆)의 백론(百論) 등 삼론(三論)을 기반으로 길장(吉藏)이 집대성하여 삼론종(三論宗, 法性宗)으로 발전하였으나 현장(玄장, 서기 602~664년)에 의해서 유식계통의 법상종(法相宗)이 들어오면서 삼론종은 급속히 쇠퇴하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의 관법사(貫法師)와 인사(印師), 혜관(惠灌) 등이 이를 연구하였으며, 특히 혜관은 일본에 삼론종을 전하여 일본 삼론종의 초조로까지 추앙을 받았으며, 신라에서는 원효가 이제장(二諦章)과 삼론종요(三論宗要), 중관론종요(中觀論宗要) 등 중관사상 계통의 저술을 많이 지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없다.
2. 공을 설한 경전
불교사상의 가장 핵심적이고 중심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공(空)과 무아(無我)사상을 중심과제로 다루고 있는 대표적 경전은 반야경으로 이들 반야경에는 대반야경과 대품반야경, 소품반야경 등 모두 16가지가 있으며, 그 중에서 가장 많이 독송되는 경전은 금강경(金剛經)과 반야심경(般若心經)이다. 그리고 소승을 억제하고 대승을 선양한 경전이라 해서 억양교(抑揚敎)라 불리어지는 유마경(維摩經)도 공을 설하는 대표적 경전이다.
가. 금강경
금강경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의 약칭으로 범어로 Vajra-Prajna-Paramita-Sutra라고 표기하는데, 요진에서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진본(秦本)과 북위에서 보리류지(菩提流支)가 번역한 위본(魏本), 진나라에서 진제(陳諦)가 번역한 진본(陳本) 등 모두 다섯 종류가 있으나 내용에는 별 차이가 없고 현재 우리나라에서 주로 독송되는 경전은 구마라집이 번역한 진본 금강경이다.
금강경은 다이아몬드(金剛)와 같이 견고하고 날카롭고 빛나는 반야(般若)의 지혜로서 모든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삼독심(三毒心)을 잘라 버리고 집착과 분별에서 벗어나 보리열반(菩提涅槃)의 저 언덕으로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는 철저한 공사상(空思想)을 설한 경전이지만 경전의 전문에서 공(空)이라는 글자가 한 자도 없는 것이 이 경전의 특징이기도 하다.
금강경은 대반야경(大般若經) 600부 중의 577권에 해당되고 내용은 약300송 정도이기 때문에 '삼백송 반야경'이라 불리어 지며 내용은 세존께서 사위국 기원정사에서 먼저 '경계(境界)가 공'함을 가르치고 다음 '혜(慧)가 공'함을, 마지막으로 '보살공(菩薩空)'을 밝힌 것으로 '공혜(空慧)로 체를 삼고 일체법 무아(無我)의 이치를 밝히고 있다. 범본(梵本) 원전은 중국, 티베트, 중앙아시아, Gilgit등 여러 곳에 보관되어 전해져 온 것들이다.
금강경은 선종 계통의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경전에 자주 등장하는 바라밀(波羅密) 또는 바라밀다(波羅密多)라는 말은 범어 파라미타(paramita)를 음역(音譯)한 것으로 '완성' 또는 '완전한'을 나타내는 말이다. 한역(漢譯) 경전은 이 바라밀다를 '도피안(度彼岸)' 또는 약해서 '도(度)'라고 해석하여 '지혜에 의해서 피안의 이상세계에 도달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깨닫지 못한 중생들이 살고 있는 '사바세계의 이 언덕 차안(此岸)'에는 미혹한 중생들이 탐진치(貪瞋癡) 삼독심에서 생기는 번뇌에 의해서 업(業)을 짓고 고통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어두운 곳이다. 그러나 반야의 지혜에 의해서 번뇌와 미혹이 사라진 '보리열반(菩提涅槃)의 저 언덕 피안(彼岸)'에는 불행과 고통이 없는 완전한 평화와 행복이 넘치는 삶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반야(般若)의 지혜는 부처님과 같은 성인(聖人)이나 어리석은 범부(凡夫)들이 똑 같이 평등하게 지니고 있으나 성인들은 감추어진 반야의 지혜를 스스로 찾아내어 자신의 삶에 활용할 줄 알지만 범부중생들은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기 때문에 경전이라는 방편을 통해서 그들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 설하는 것이 바로 이 금강경이다.
금강경의 성립시기는 대략 서기 150-200년경 대승경전 최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양(梁)나라 무제의 아들인 소명태자가 이 경을 연구하여 경전 전체를 32분(分)의 단락으로 나누고 각 단락마다 그 내용을 요약해서 주제를 달았는데, 이 '32분 법'은 오늘날까지 금강경을 이해하는데 가장 좋은 분류법으로 전해지고 있다.
서문인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은 법회가 열리게 된 동기를 밝히는 부분이다. 경을 설한 장소인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은 부처님과 제자들을 위하여 급고독(給孤獨) 장자가 기타태자의 동산에 황금을 뿌리는 정성을 보이고 나서 그 땅을 기증 받아 절을 지어 부처님에게 바쳤다는 지극한 신심이 깃들어 있는 장소로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이곳에서 가장 오랫동안 안거하면서 수많은 경전을 설한 곳이다.
부처님은 하루에 사시(巳時) 즉 오전 9시부터 11시 사이에 한 차례만 공양을 하시면서 언제나 걸식으로 해결하는 것이 일상의 생활이었다. '나(我)'라는 체면과 '아상(我相)'을 버리지 못한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남의 물건을 훔치는 일 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이 걸식(乞食)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걸식에 대한 내용을 경의 첫 머리에 나타낸 것은 본문에서 설할 '공(空)과 무상(無相)'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걸식은 칠가식(七家食)이라고 해서 어느 위치에서 시작하든지 차례대로 일곱 집에서만 밥을 빌어야 하는데, 부처님의 큰 제자인 가섭존자는 작은 복이라도 짓게 하기 위해서 가난한 집만 찾아 다녔고 수보리는 부잣집만 찾아 다녔는데, 그것을 본 유마거사(維摩居士)는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가난하고 부자라는 차별을 두는 것은 평등하지 못한 처사라고 하여 경계하였다고 한다.
제2분에서부터 제31분까지는 본론인 정종분(正宗分)에 해당하는데, 여기서 설하는 중요한 내용은 우리들 마음속에 돌덩이처럼 굳어져 있는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은 물론 법상(法相)과 비법상(非法相)까지의 모든 전도된 소견을 잘라버리고 그 어떠한 일이나 그 어디에도 안주하거나 집착하지 말고 큰 삶을 살아가라는 가르침과 함께 공사상에 관한 내용을 설하고 있다.
'공(空)'이란 그것을 존재론적으로 말하면 '실체가 없다'는 것이고 실천론적으로는 '사로잡히지 말 것' 또는 '집착을 버릴 것' 등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말고 모든 집착을 떠나라는 것이 경의 주된 가르침이다. 그래서 공(空)과 무상의 이치를 가장 잘 깨달아서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 불리는 수보리 존자가 무상(無相)과 무주(無住)의 도리를 가르치는 이 금강경의 법을 청(請)하고 있다.
금강경에서 설하고 있는 가르침 중 가장 중요한 내용은 무상과 무주, 그리고 경전 전체 내용을 함축해 놓은 네 개의 '사구게(四句偈)'인데, 꼭 기억해야 할 구절들이다. 또한 근본불교 수행의 4단계인 사향사과(四向四果)를 설하면서 비록 이 네 가지 수행단계를 거쳤거나 과(果)를 얻었더라도 그것을 느끼거나 집착하면 즉각 '상(相)'에 떨어져서 '도(道)'를 이루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설하고 있다.
1) 무상
'상(相)'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견(所見)이나 인식(認識), 또는 번뇌(煩惱)가 생각 즉 상(想)의 상태를 지나서 하나의 '고정된 형상(形相)'으로 견고하게 우리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 등 네 가지 전도된 상(相)을 말하는데, 반야(智慧)의 보검으로 반드시 잘라 없애야 할 것들이며, 금강경 전체를 통해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용어들이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혜능대사-
중생衆生과 불성佛性이 본래 다름이 없건만 사상四相이 있으므로 인하여 무여열반에 들어가지 못하니,
四相이 있으면 곧 중생이요 사상이 없으면 곧 부처이니라.
미迷하면 불佛이 곧 중생이 되고 깨달으면 중생이 곧 佛이로다.
迷한 사람이 재보와 학문과 족성族姓(가문)이 있음에 의하여 모든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것을 아상我相이라 하고 비록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행行하나 뜻이 높다는 자부심을 가져서 널리 모든 사람들을 공경하지 않고 말하기를‘나는 仁義禮智信을 행할 줄 안다’하고 남을 공경하지 않음을 인상人相이라 하도다. 좋은 일은 자기에게 돌리고 나쁜 일은 남에게 돌림을 중생상이라 함이요,
어떤 경계에 대하여 취사 분별함을 수자상이라 하니 이것들을 범부의 四相이라 하느니라.
수행인修行人도 또한 四相이 있으니.
마음에 능소能所가 있어서 중생을 가볍게 여김을 아상이라 하고, 자기가 계戒가짐을 믿고
파계자를 업신여기는 것을 人相이라 함이다.
삼악도의 고통을 싫어하여 천상天上에 나기를 원하는 것이 중생 상이요,
마음에 오래 삶을 좋아해서 부지런히 복업을 닦아 모든 집착을 잊지 못하는 것이 수자상이니,
사상(四相)이 있으면 곧 중생이요 四相이 없으면 곧 부처이니라.
2) 무주
수보리(須菩提)가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 제2분에서 '깨어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 즉 보리심(菩提心)을 발한 사람들은 어떻게 머물고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 받습니까' 하고 법을 청하였을 때 부처님께서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제3에서 '마음을 항복 받는 법'을 말씀하시고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제4에서 다음과 같이 '안주(安住)하는 법'을 말씀하시었다.
경전에서 [須菩提 菩薩 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이를 우리말로 풀이하면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법(法)에 머물지 말고 보시할 것이며, 이른바 물질에도 머물지 말고 보시할 것이며, 소리나 향기 맛과 감촉과 법이 어떻다는 분별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 수보리야 보살은 이처럼 보시하되 상(相)에 머물지 말아야 하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주(住)'라고 하는 것은 '머무는 것' 또는 '안주(安住)하는 것'을 말한다. 금강경에서는 어떠한 법이나 어떠한 존재에도 머물러 안주하지 말 것이며, 어떠한 행위나 어떠한 대상에 대하여도 집착하거나 주착(住着)하여 작은 삶을 엮어 가지 말고 반야(般若, 智慧)의 빛이 번쩍이는 힘있는 삶을 살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베풀고 있다.
3) 사구게
산문(散文)형식의 경전내용 중에서 특히 강조해야 할 부분을 운문(韻文)형식으로 다시 표현한 것을 게송(偈頌)이라 하고 그 중에서 특히 '네 구절로 표현된 게송을 사구게(四句偈)'라 하며, 많은 경전에서 이 사구게의 뜻만 잘 이해하면 그 경전 전체의 뜻을 거의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금강경에는 이러한 사구게가 네 곳이나 있어 이들 게송의 내용만 제대로 알면 금강경의 내용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가) 제1 사구게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제5에 나오는 구절로 금강경이 설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는 구절이다.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 우리말로 풀이하면 [무릇 세상에 모습을 가진 모든 것은 모두가 허망한 것이니 만약 그러한 모든 모습이 진실 된 모습이 아닌 것으로 보게 되면 곧 여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여리실견이란 모든 사물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감추어진 '본래의 모습을 이치에 맞게 보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에서 현상을 바라보는 가장 기본적인 시각이며, 또한 가장 바람직한 태도로서 결코 현실을 부정적으로 보거나 허무하게 보는 태도가 아니라 깨어 있는 눈으로 바로 보는 것이며, 이치대로 보는 것이다.
현실에서 겪는 모든 문제와 고통은 무엇 때문에 생기는 것일까, 그것은 상(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상(相)이란 지(地)·수(水)·화(火)·풍(風)의 네 가지 요소인 사대(四大)가 인연의 법칙인 연기에 의해서 잠시 동안 모여서 어떠한 형상(形相)을 지니고 나타났다가 그를 구성하는 인연이 다 하면 저절로 흩어져서 없어지는 것으로 그 근본은 '공(空)'이라는 것이다.
나) 제2 사구게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제10에 나오는 구절인 {불응주색생심(不應住色生心)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 이를 우리말로 풀이하면 [마땅히 색(物質)에 얽매이는 마음을 내지 말 것이며, 또 소리나 맛이나 향기나 느낌 또는 법에 얽매이는 마음을 내지 말고, 마땅히 머무르는 바 없는 그 마음을 일으킬지니라.]
장엄정토란 불교가 꿈꾸는 이상세계인 부처님의 세계를 가꾸어 간다는 말이다. 커다란 사원을 세우고 소리내어 염불하는 외형적 꾸밈이 아닌 반야의 지혜로서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이타행(利他行)의 보살이 아무런 마음의 흔적을 남기지 않을 때 이 세상은 저절로 정화될 것이며, 정화되었다는 마음조차 없을 때 아름다운 불국토가 장엄하게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어디에 머문다는 것은 바로 상(相)이 있기 때문이며, 상이 있기 때문에 머물게 된다. 따라서 상이 없으면 머물러지지 않게 되고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은 상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중생들은 주위의 온갖 물질이나 현상, 또는 감정에 치우쳐서 생각을 붙이고 시비를 가리면서 스스로 상처받고 살아가는 것이다.
거울이 온갖 사물을 모두 비추고 있으나 애착(愛着)이나 의지(意志)를 가지고 비추는 것은 아니다. 잘 나고 권세를 가졌다고 해서 더 비추어 주고 못나고 비천하다고 해서 적게 비추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무심하게 비출 뿐이며, 비추는 대상이 사라지면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우리들의 마음도 이 거울과 같이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을 때 그 마음을 청정(淸淨)한 마음이라고 한다.
이 사구게(四句偈)는 육조(六祖) 혜능(慧能)대사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 구절이다. 즉 혜능이 출가하기 전 나무를 팔아서 홀로 계시는 어머니와 함께 생계를 이어가던 어느 날 땔나무를 팔러갔다가 돌아 나오는 길에 방안에서 흘러나오는 금강경의 이 사구게를 듣는 순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갑자기 온 세상이 환하게 밝아지더라는 바로 그 구절이다.
당시 혜능(慧能)은 견성(見性)인지 깨달음인지도 전연 모르던 시절이었으나 그것이 인연이 되어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으며, 그 길로 황매산(黃梅山)으로 5조 홍인(弘忍)대사를 찾아가서 제자가 되어 금강경으로 깨달음을 얻어 스승으로부터 가사와 발우를 전수 받고 중국 선종의 제6조가 되었는데, 이 때부터 금강경은 선종의 소의경전으로 등장하였으며, 돈오돈수(頓悟頓修)의 남종선(南宗禪)을 탄생시키게 된다.
다) 제3 사구게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제26에 나오는 구절로서 {약이색견아(若而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이다. 이를 우리말로는 [만약 32상(相)으로만 나를 찾고 들리는 음성만으로 여래를 찾는다면 이 사람은 바르지 않은 길로 떨어져서 여래의 참 모습을 볼 수 없게 되리라]로 풀이하고 있다.
진리 그 자체인 법신(法身)은 항상 그 자리에 여여(如如)하게 자리하고 있으며, 진여(眞如)인 법계에 충만하여 있으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형상(形相)일 수는 없기 때문에 형상을 통해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되며, 모양이 아니기 때문에 육안으로는 절대로 볼 수 없다. 그러나 그 법신은 나투지 않는 곳이 없으며,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항상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라) 제4 사구게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 제32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내용으로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이 게송을 한글 경전에서는 [일체의 만들어진 모든 법은 꿈과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은 것, 또 이슬 같고 번개와 같으니 마땅히 이같이 여길 것이다.]로 풀이하고 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생각으로 그리며 마음에 잡히는 법인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눈만 뜨면 흔적 없이 사라지는 꿈이나 아무런 바탕도 없는 환상과 같은 것이며, 한 순간에 생겼다가 순식간에 없어지는 물거품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실체(實體)의 흐트러진 모습인 그림자와 같은 것이고 햇볕만 비치면 금방 없어지는 아침 이슬과 같은 것이며, 번쩍하고 사라지는 번개와 아무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순간적이고 허망한 삶을 살아가는 동안 어느 한 가지 또는 한 곳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반대로 자포자기도 하지 말고 반야의 지혜로 환하게 등불을 켜들고 어두운 세상 구석구석을 비추면서 무상(無相)과 무주(無住)의 도리를 깨우치면서 활기찬 원력(願力)과 이타행(利他行)의 삶을 펼쳐나가도록 하라는 것이 바로 금강경이 설하고 있는 본래의 뜻이다.
4) 사향사과
사향사과(四向四果)란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 제9에 나오는 근본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의 단계로서 소승의 성문이 수행을 통해서 아라한(阿羅漢)이 되기까지는 모두 네 가지 단계의 수행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각각의 단계를 향해서 수행해 가는 과정을 '향(向)'이라 하고 수행의 결과 그 단계에서의 깨달음을 성취하였을 때를 '과(果)'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일상무상(一相無相)이란 우리가 상(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느 것 한 가지도 아무런 실체가 없는 허상(虛相)이며, 무상(無相)일 뿐이라는 것이다. 수행의 결과 나는 사향사과(四向四果)를 얻었다는 상을 가질 때 그는 이미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으며, 무상(無相)이라고 생각하는 그 상마저도 상(相)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 수다원
수다원(須陀洹)은 첫 번째 수행단계로서 입류(入流), 성류(聖流), 예류(預流) 등으로 풀이하는데, 말 그대로 성인(聖人)의 무리 또는 수행자의 무리에 들어가려는 단계이다. 그런데 비록 최초의 수행단계이지만 수행단계에 올랐다는 마음의 때가 있으면 그것은 수다원 과(果)를 얻은 것이 아니며, 불교에 겨우 입문한 사람이 '나는 불교인이다'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은 진정한 불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나) 사다함
사다함(斯陀含)이란 수행의 두 번째 단계로서 일래향(一來向) 또는 일왕래(一往來)로 해석하는데, 말 그대로 '한번 갔다가 온다'는 말로 사다함에 올랐다는 것은 한 번 천상으로 가서 성인의 단계에 오른 후 다시 인간으로 내려와서 최후에 아라한이 되는 것을 말하는데, 경에서는 비록 사다함 과(果)에 올랐다 하더라도 나는 도(道)를 알았다. 또는 얻은 바가 있다는 상(相)이 남아 있으면 그것은 사다함이 아니라고 한다.
다) 아나함
아나함(阿那含)이란 세 번째 수행단계로서 '불래(不來)' 또는 '불환(不還)'으로 해석하여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이든 천상이든 그 곳에서 아나함과를 얻은 다음 한번 다른 세상으로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바로 아라한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나함(阿那含)의 오지 않는다는 것도 역시 하나의 상(相)일 뿐이라고 한다.
라) 아라한
아라한(阿羅漢, Arahan)이라 함은 수행의 마지막 단계인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상태로서 응공(應供)·무쟁(無諍)·이악(離惡)·무학(無學)·살적(殺賊)이라고 풀이하는데, 초기불교에서는 이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으면 탐진치(貪瞋癡) 삼독과 마음속의 망상과 번뇌가 사라지고 갖출 것은 모두 갖추게 되어 천상과 인간의 공양을 받을 만하다고 하고 있으며, 다시는 윤회의 사슬에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사향사과에서 세 번째 단계까지는 유학(有學)의 성자라 하고 아라한이 되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기 때문에 무학(無學)이라고 하는데, 이와 같은 수행의 단계는 인도의 전통 종교인 바라문교에서 사용하던 수행의 용어를 불교에서 빌려온 것으로 아들이 태어나서 7-8세에 이르면 출가를 시키고 스승을 만나 기초를 다지게 하는데, 이것이 수행자의 무리에 들게 하는 최초의 단계인 입류(入流) 즉 수다원(須陀洹)이다.
그 다음의 단계인 일왕래(一往來) 즉 사다함(斯陀含)은 남자가 20세 전후가 되면 출가한 무리에서 세속의 집으로 다시 돌아와서 20여 년 동안 생업에 종사하면서 재산을 불리고 결혼을 하여 자식을 낳아 대를 잇게 한 다음 40세가 넘어서 또다시 출가하는데 이것이 불래(不來) 즉 아나함(阿那含)의 단계로서 그때부터 세속과는 완전히 담을 쌓고 수행정진 하여 마침내 아라한(阿羅漢)의 과(果)를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금강경은 비록 이러한 네 가지 수행단계를 거쳤거나 '과(果)'를 얻었더라도 스스로 그것을 느끼거나 집착하게 되면 즉각 '상(相)'에 떨어져서 '도(道)'를 이루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설하고 있다. 그러나 화엄경은 수행의 단계를십신(十信)·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십지(十地) 등 50단계에 등각과 묘각을 합해서 52단계로 나누거나 부처님의 계위인 정등각(正等覺)을 합해서 53단계로 나누고 있다.
금강경의 마지막 제32분은 금강경을 널리 알리라는 뜻에서 유통분(流通分)이라고 하는데, 직접 널리 유통시키라는 표현은 없으나 경전의 내용에서 어떤 사람이 금강경(金剛經) 또는 사구게(四句偈) 만이라도 수지 독송하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연설을 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배재물로 보시를 하는 것보다 그 공덕이 훨씬 크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금강경은 전체가 5천 2백여 자(字)에 불과한 아주 짧은 경전이지만 삼라만상의 실상(實相)과 우리 인간이 살아가면서 알아야 할 참된 슬기와 지혜를 빠짐 없이 가르쳐 주고 있는 경전으로 구절 구절은 비록 짧으나 그 내용이 선명하고 간편하여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불교를 소개시켜 주는 데는 아주 적합한 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나. 반야심경
반야심경(般若心經)은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密多心經) 또는 앞에 마하를 붙여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密多心經)이라고도 하는데, 경전의 본문은 비록 260자에 불과한 아주 짧은 경전이지만 내용은 불교경전 중에서 가장 긴 대반야경(大般若經)의 정수를 뽑아 만든 경전으로 석가모니부처님이 상징적인 실체인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을 등장시켜서 부처님 자신의 마음을 설법하고 있는 경전이다.
경전이 설하고 있는 핵심적인 사상은 공사상(空思想)으로 구도자이며, 성자이신 관자재보살이 심오한 지혜의 완성을 위해서 이를 실천할 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오온(五蘊)이라는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다섯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성을 보아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서 생(生)·노(老)·병(病)·사(死)를 비롯한 일체의 고통과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반야(般若)는 팔리어 프라즈나(Prajna)를 음역한 말로서 지혜(智慧)로 번역하는데, 이와 유사한 지식(知識)이라는 말은 타인의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정보를 전달받는 것인데 반하여 지혜(智慧)는 원래부터 자기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을 찾아내는 것으로 이 반야심경은 마음속의 반야(智慧)를 찾아내고 마음속의 반야를 배우는 마음의 경(經)으로 예불 또는 각종 법회 때에 가장 많이 독송되는 경전이다.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는 똑 같은 내용의 문구를 네 번씩이나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실체가 없는 물질(색)에 현혹되거나 사로잡히지 않고 집착에서 벗어날 때에 그 물질의 참 모습을 볼 수 있고 온갖 번뇌로부터 벗어나 무상(無上)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공(空)'의 의미를 제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반야심경은 현장(玄장)이 19년 동안 인도를 유학하던 중에 어떤 병든 스님으로부터 범어로 구전 받은 것을 중국어로 번역한 것으로 경의 원래 이름은 '당범번대자음반야바라밀다심경(唐梵번對字音般若波羅密多心經)이며, 현장이 뒷날 날란다 승원에서 병든 스님을 다시 만났는데, 그때 스님이 '나는 관세음보살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그 자리에서 하늘로 사라졌다는 전설과 같은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첫댓글 01. 불교 안에서 공(空)이 시선을 끌은 것은.. 기원 전 1세기(BCE 1세기)부터 활동이 나타나기 시작한 반야부에서 그 의미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면서 부터였다는 것은 본문을 보아도 잘 드러납니다.
그것은 종종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데.. 공이란 낱말부터 시작해 [공 불교]는 대승불교인 반야부에서 창조한 불교로 아는 게 그것입니다.
그건 아니! 지요. 공이란 말은 3법이라 일컫는 무상, 고, 무아와 함께 쓰인 것인데.. 3법만으로 충분히 제자들을 이해시킬 수 있다 보니.. 굳이 공을 더 설명할 이유가 없어져 상좌부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던 [근본 교설]이라고 저는 봅니다..^^()..
02. 그런 공의 의미를 전하고 있는 경이 <잡. 12-297. 대공법경(大空法經)> 입니다. 타이틀은 [대공법]이라 하여 무언가 새로운 게 있나?.. 할 수 있지만..
내용은 바로 12연기법의 유전문과 환멸문 그리고 중도를 [대공법]이라 하고 있으니.. 12연기법과 중도가 바로 공이라고 하는 거지요.
그게 참이라면.. 굳이 공을 따로 설명할 이유가 별로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그저 12연기법과 중도를 설명하면 그게 곧 [공(空)] 설명이 되니까.
03. 그런데 왜 공이란 말이 반야부에 의해 강조되기 시작했을까요?.. 그 이유를 저는 본적이 없지만.. 저의 견해로는..
당시 반야부 입장에서 보면.. 당시 주류를 이루고 있던 상좌부에서 12연기법과 중도를 잘못 이해하고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봅니다.
04. <잡아함경>과 함께 [설일체유부] 경으로 알려진 <중아함 쌍품 소공경>을 보면 [공]에 대한 뉘앙스가 <335. 제일의공경>과 다릅니다..^^
<잡. 335경>을 듣는 제자들의 수준이 훨 높아진듯 한 감이 온다는 겁니다..^^
아니면 그런 느낌이 저만이 갖는 착각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