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인성교육진흥법’이 발효되었다고
한다. 그 내용을 보니 구구절절 옳은 말뿐이다. 그 2조에는 ‘인성교육’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인성교육"이란 자신의
내면을 바르고 건전하게 가꾸고 타인·공동체·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인간다운 성품과 역량을 기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을 말한다.’ 그걸 부정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요즘 어지간한 공터에 ‘바르게 살자’라는
글귀가 새겨진 큰 돌 비석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걸 세운 단체의 추구하는 목표를 찾아보니 "정직한 개인, 더불어 사는 사회, 건강한 국가건설"이라고 한다. 그 역시 부정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그것의 구체적 실현이 어떤 사람들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느냐에 있을 것이다.
예전 내가 현직에 있을 때 학교 현장에서 ‘토론 교육’을 강조한 적이 있었다. 사실 토론교육은 현대 시민사회에서 구성원이
될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고 아이들은 그를 통해 ‘시민’(공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들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수업만 강조되었지 실제 학교현장에서 토론은 거의 행해지지 않았다. 교무회의는
교장의 일방적인 의사 결정이 전달되는 공간이었고 그것에 이의를 달고 토론을 요구하면 돌아오는 답변과 평가는 ‘토론하면 학교가 분열하고 안정성이 깨진다’, ‘말이
많다’, ‘나댄다’, ‘매사에 부정적이다’ 결국에는 ‘인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교장의 경고성 마지막 한 마디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이소’였다.
학교에는 건물에 내걸리는 슬로건 구호들이 있다.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이 ‘창의적이고 도덕적인 시민’이다. 그러나
학교 현장에서 ‘도덕적인 시민’은 지시에 잘 따르는 사람으로서
결국 아이들의 ‘창의성’은 도덕이라는 틀 속에 갇혀 질식해
버리는 그런 이율배반적 슬로건이 되어 버린다.
대구시 교육청에서 인문교육을 강화한다고 한다. 그를 위한 도서도 선정하고 보급하고
있다. 그러나 인문학적 소양은 그렇게 멍석 깔고 시킨다고 키워지는 게 아니다. 학교 현장에서 봉사활동을 점수화 한 후 어떤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지하철 역에서 점수를 채우기 위해 스마트 폰 보면서 무료하게 시간만 때우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참 못할 일 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요즘 우리 사회 곳곳에 인문학이 넘쳐나고 있다. 인문 도서가 베스트 셀러가
되고 인문학 강좌가 넘쳐나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 사회가 인문학적으로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유의미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문학은 그저 하나의 트렌드 혹은 파편적 지식의 습득이 되고 마는 것은 아닐까?
예전 아주 공부 잘 하고, 인성도 나쁘다고 할 수 없는 학생이 있었다. 논술학원 다니면서 중학생 수준에 걸맞지 않은 높은 수준의 서적도 많이 읽고 있는 아이였다.
어느 날 수행평가 결과지를 아이들에게 돌려주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나를 찾아왔다. 채점이 잘못되었다는 것이었다. 보니 과연
답이 적혀있는데 내가 틀렸다고 표시해 두었다.
그러나 그 아이는 공부를 워낙 잘 해 보통 틀리는 문항 수가 아예 없거나 많아야 1~2개여서
내가 그 아이의 답안지를 늘 기억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해당 문제의 답란을 비워놓고 있었다. 그런데 답안지를 돌려 받은 후 답을 써넣은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결과에 목을 매고 있다. 결과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그것이 무엇을
가져다 주는 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과를 중시하고 과정에서의 반칙에는 관대한 환경이라면 아이들은
부정행위에 대한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
(백록동 서원의 백록동 교조)
주희 백록동 서원 학규에 ‘도덕 원리를 추구할 뿐 이익을 구하려 하지 마라. 참된 길을 밝히고 결과에 연연하지 말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힘이 곧 정의가 되고(내가 중학교 때 학교 도서관에서 일본어 회화책을 보았는데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유일한 구절이 '勝(か)てば 官軍 카테바 캉군' 즉 '이기는 것이 정의다' 하는 것이다) 오로지 결과만이 서열을 결정하고 권력 수준을 결정해 그에 연연하게 환경을 만들어 놓고 결과에 연연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속임수일 뿐이다.
인성을 법으로 강제하겠다는 발상이 놀랍다. 인성은 그렇게 법으로 규제한다고 키워지는 것이 아니다. 부모의 가정교육과 사회적 압력에 의해 자연스럽게 배워가는 것이다.
아이 기를 살린다고 식당에서 제멋대로 행동하거나 침대, 좌석 위를 신발을 신고
다녀도 방치하고 누군가 뭐라 하면 싸우려고 덤비는 부모 밑에서 큰 아이들에게 ‘신호등을 건널 때 빨간
불이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하는 도덕 시험 문제에 답 하듯이 교육을 시킨다고 인성이 키워질 리 없다.
내 개인적인 여행 경험에서 보면 중국이나 영국의 교통 질서 문화에 공통점이 있다. 교통 신호를 잘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에는 차이가 있다. 중국은 사람과
함께 차도 신호를 지키지 않지만-그래서 익숙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굉장히 위험하다- 영국은 사람은 지키지 않지만 차는 잘 지킨다는 것이다. 사람이 교통신호를
지키지 않으면 차들이 알아서 잘 피해주거나 기다려 준다. 이런 행동의 차이는 결국 문화의 깊이의 차이라고
본다. 그런 문화는 결국 사람 중심의 배려의 가치가 생활화 된 것이 아닐까?
유학은 분명 봉건시대를 지탱한 지배 이데올로기이지만 오늘날 시민사회에서도 훌륭한 가치 규범이 될 수 있는 자산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백록동 학규에도 나오는 논어의 구절, ‘나에게
다른 사람이 하지 말았으면 하는 일을 내가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것이야 말로 타인에 대한 배려의 기본 바탕이 되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지지하는 정치세력에 대해서는 잘못에 대해 관대하고 반대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똑 같은 일에 윤리, 도덕 운운하며 열을 올려 비난한다면 그 어떤 가치 기준도 기준으로서의 자격과 힘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기준이 없는데 인성 교육은 무엇을 기준하여 시킬까? 다시 늘 그렇듯이
‘교과서와 현실은 다르다’ 이렇게 교육시킬까?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 경험이지만 조직에서 ‘인성 강조’와 ‘민주 의식’은 반비례한다. 즉 인성을 강조하는 사람은 민주의식이 부족한 경우가 많고, 민주의식이
강한 사람은 굳이 인성을 강조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솔직히 민주 의식이 강하면 인성은 그
속에서 저절로 갖추어져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왜냐면 민주의식의 요체는 바로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그렇습니다.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 국민의식 수준을 올리는 것, 나 한사람이라도 제대로 하자라고 누구나 생각하고 실천해서 확산되어야하는데 物神과 경쟁의 현 사회에서 참으로 쉽지 않은것 같아 답답합니다. 구호나 운동이 아닌 '나부터 실천'하는게 어떨까요? 결국은 사회의 가장 기본구조인 가정교육에서 시작되어야 하고, 부모의 생활태도에서.... , 정답은 없는, 원론적인 것 아닌가 여깁니다. 날씨가 더워 저도 횡설수설하는가봅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늘 공감하면서 힘을 얻습니다.
횡단보도에서 정차해주는 차에게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하는 나라...
아마 세상에서 보기 드문 나라 일것 같습니다.
어찌할 수 없어 "좋은 지도자 되기"를 비는 마음,
윗물이 맑기를 기다리는 참을성은
순진한 것 일까요?
꾀가 많은 것일가요?
최근 오연호지음<우리도 행복할수 있을까>를 읽었습니다. 그룬트비 리더십이 감명깊었습니다. 덴마크가 행복지수 1위의 나라가 된 역사적배경입니다. 민주헌법 보다 중요한 것이 시민의 자유, 시민의 각성이라 생각하고 시민교욱에 열정을 가졌습니다. 오늘날 그는 덴마크의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