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학성(예비역 대장)
1966년 준장 진급-월남파견(100군수 사령관)
1970년대 초반에 소장 진급하여 26사단장 교육참모부장
1977년 중장 진급하여 3군단장 국방부 군수차관보
1979년 12.12 군사쿠데타 이후에 대장으로 진급하여 3군사령관으로 예편
이후 안전기획부장역임
[유학성 제5공화국 시절 이런일도 했다]
공화국때 한미관계는 박정희시대와는 판이한 밀월을 구가했다. 이는 전두환 대통령이 박대통령의 독자적 군사외교 노선을 일찌감치 포기, 정통성의 결함을 대미 밀착외교로 보완하려 했기 때문이다. 자주국방을 내걸고, 미국에 자존심을 굽히지 않은 박대통령의 자세가 유신정권의 위기를 초래했다는 것을 신군부는 잘 알고 있었다. 미국쪽도 카터의 인권외교가 가져온 문제점을 주목한 레이건 대통령이 대한(對韓)정책을 적절히 선회해 화답했다. 그 결과 신군부는 쉽게 정권의 뿌리를 내렸고, 미국은 그들의 군사외교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5공 정권을 흡족히 생각했다. 물론 그런 가운데 삼민투 등 운동권 학생들의 85년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등을 계기로 젊은 층의 반미 감정은 확산됐다. 12.12와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미국 책임론’은 한국민에게‘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에서 한미간의 협력은 정보기관 관계에서 두드러졌다. 안기부와 미 중앙정보국(CIA)의 밀착은 양국 정보기관책임자의 상호 비밀방문에서 단적으로 나타났다. 81년 5월 유학성 안기부장이 미CIA를 방문한데 이어 노신영.장세동 안기부장 때는 윌리엄 케이시 미CIA국장(87년 병으로 사망)이 두차례 서울을 방문했다. ‘비노출’과‘비공개’라는 정보기관의 특성상 이제껏 비사로 남아있지만, 5공 7년간의 한미관계는 정보기관쪽을 들여다 보지 않으면 온전한 실체 파악이 어렵다. 유학성 부장은 81년 5월 미 버지니아주 랭글리에 있는 CIA 본부를 방문했다. 한국 정보 책임자가 CIA 책임자 초청으로 미국을 공식 방문한 것은 5.16후 중앙정보부(안기부 전신)가 생긴 이래 처음이었다. 유부장 일행은 대미관계가 불편했던 70년대 후반의 일들을 떠올리며 만감이 교차했다 한다. 박동선의 코리아게이트가 미 의회와 검찰의 추궁을 받고 있던 시절 미CIA는 청와대도청설로 한국 정부를 압박한 적이 있었다. 또 중앙정보부장 출신의 김형욱과 워싱턴 현지에서 망명한 정보부 요원 김상근이 미 의회 청문회에서 자신이 몸 담았던 한국 정보기관의 추악상을 폭로했다. 그로 인해 미 CIA와 중정의 관계는 형편없이 구겨졌고, 한미관계는 악화됐다. 때문에 5공 정부는 안기부장의 공식 방미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했다. 유학성씨의 회고. “한미관계가 악화되면 우리 전체의 안보.외교가 어려워집니다. 미국과의 우호 증진이 한반도 안정은 물론 서구.일본과의 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정보 현장에 있으면 바로 느낄 수 있습니다. 70년대 양국 정보기관간의 갈등은 안보는 물론 외교. 경제 관계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지요” 당시 미 CIA를 찾은 한국방문객들은 CIA 본부의 로비 벽에 쓰여 있는 글귀부터 주목했다. ‘진실을 안다면 그 진실이 당신을 자유롭게 하리라’ 남산 안기부에 쓰여 있는‘우리는 음지에서 일하면서 양지를 지향한다’는 표어와는 무언가 지향점이 달라 보였다. 유부장 일행을 맞은 케이시국장은 자신이 미 수출입은행장 시절(75년) 서울을 방문했던 기억부터 떠 올렸다. 그는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위한 한국정부의 차관지원 요청을 해결한데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 코리아게이트 여파로 당시 미 정계와 언론은‘한국을 도와주지 말라’고 대체로 외면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었다. 80년 레이건 대통령의 선거운동본부장및 정권인수반장이었던 케이시는‘힘 우위에 의한 대소 봉쇄정책’이란 레이건 독트린을 성안한 주역이기도 했다. 81년 CIA 총수로 임명되면서 카터 대통령 시절 숨죽였던 비밀공작을 재개, 국방부와 국무부가 망설이는 국내외 분쟁에 대담하게 뛰어들어 소위‘CIA 비밀전쟁’을 벌였다. 케이시의 이런 전력과 성향을 충분히 파악하고 미국에 간 유부장은 이번 기회를 적절히 활용하리라 마음 먹었다. 미국측은 기대 이상으로 나왔다. 먼저 유부장은 손장래(주미 한국대사관 안기부 공사)와 그레그(부시 부통령 보좌관)간의 막후 공작 협력 채널을 만드는 실질 소득을 올렸다. 그는 CIA 국장 출신인 부시 부통령을 만나서 대북한 고위급 회담과 서울과 모스크바.북경과의 막후 대화 채널을 뚫는 중개자로 미국이 나서 달라고 요청했다. 부시는 즉각 배석한 그레그 보좌관에게 협조토록 지시했다. 당시 그레그(89년 주한 미대사)는 부통령 안보담당 보좌관이었다. 그는 73년 중앙정보부의 김대중씨 납치사건때 미 CIA 서울 거점장(한국지부장)으로서 김씨를 살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후 손장래-그레그 채널은 전두환-김일성 남북정상회담 추진을 위해 공작을 벌였다. 80년대 이래 남북관계에 등장하는 유엔주재 북한대표부의 한시해대사(나중 숙청)와 우리쪽의 비밀통로가 그때 마련됐다한다
1212사태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이 이끄는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없이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법적으로 강제연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군 내부의 무력충돌.
십이십이사태는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을 계기로 정승화 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에 취임하면서 수도권 지역의 주요 군 지휘관을 교체하는 등 내부개혁이 진행되면서 정치군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군 내부에서 부각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가 하극상에 의한 군사쿠데타를 감행하여 불법적으로 군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12월 12일 저녁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합수부 소속의 허삼수·우경윤 대령에게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의 강제연행을 지시했다. 한국정치사에서 5·16이후 또 한 번의 군사쿠데타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국군보안사령부 인사처장 겸 계엄사령부 소속 합동수사본부 조정통제국장이던 허삼수 대령은 합동수사본부 수사 제2국장 우경윤 등과 함께 대통령의 재가도 없이 저녁 6시 50분 경 무장한 제33헌병대 병력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공관 주변에 배치하였다. 이로부터 약 20분이 지난 7시 10분경 참모총장 공관으로 들어가서 총으로 위협하는 가운데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여 강제로 끌고 나와 저녁 7시 30분경 국군보안사령부 서빙고분실로 연행하였다. 연행과정에서 참모총장 부관이 전화로 외부와의 연락을 시도하자 합수부측 보안사 수사관들이 권총을 발사해 양측간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신군부는 큰 저항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함으로써 군사쿠데타에 성공했다. 같은 시간에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총리공관에 머물고 있던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총장 체포에 대한 재가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저녁 9시 30분경 유학성·황영시·차규헌·백운택·박희도 등과 함께 집단적으로 대통령을 찾아가 재차 정승화 총장의 체포 및 연행에 대한 재가를 강압적으로 요구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부분에 대해 대법원은 12월 13일 새벽 5시 10분경 신군부세력의 주장대로 재가를 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정승화 총장이 이미 체포되었고 또 신군부 세력이 군권을 장악한 이후 이루어진 것으로서 '사후승낙'에 불과하기 때문에 반란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다고 판결하고 있다. 십이십이사태 다음날 아침 정승화 총장 연행에 대해 노재현 국방부장관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에 관여했던 것이 판명되었기 때문"이라는 짤막한 배경설명을 발표했지만 그 역시 신군부에 의해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십이십이사태를 통해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12월 13일 0시부터 새벽 6시 20분 사이에 육군본부·국방부·중앙청·경복궁 등 핵심 거점을 차례로 점령하고, 방송국과 신문사를 통제하에 두었다. 한편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을 체포하고 수도경비사령부에 모여있던 윤성민 참모차장과 하소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문홍구 합동참모본부장 등 육군본부측 장성들의 무장을 해제하였다. 신군부 세력은 이듬해인 1980년 1월 20일자로 정승화 추종세력인 이건영 3군사령관과 정병주·장태완 등을 모두 예편시키고 정승화 참모총장에게는 징역 10년형을 선고했다. 이들과는 달리 십이십이사태를 주도했던 신군부세력은 대부분 승승장구하여 권력의 요직을 차지하였다.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이희성 중장이 임명되었고 수도경비사령관에 노태우 소장, 특전사령관에 정호용 소장이 임명되었다. 그 외에도 황영시·김복동·유학성·유병현·박준병 등 신군부 세력은 군 요직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이들 신군부 세력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계기로 국가권력을 탈취함으로 긴 쿠데타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1980년 '서울의 봄'을 짓밟고 등장한 제5공화국의 뿌리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십이십이사태의 진상은 그후 십여년간 밝혀지지 못한 채 권력에 의해 은폐되어 있다가 김영삼 정부 아래서 쿠데타의 주역인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이 구속되어 사법적 심판을 받는 과정에서 '하극상에 의한 군사쿠데타'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