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막 16장 1-8절
설교제목 : 어디에 계시는가?
한계와 그림자 알기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이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사순절의 시간을 지나 부활의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깊은 어둠과 고통을 통과한 자만이 부활의 참된 빛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곡 : 지옥편》에서 지옥의 마지막 순례에서 루시퍼를 통과하면서 베르길리우스는 헐떡거리며 기진맥진하여 단테에게 말합니다.
“꽉 붙잡아라, 다른 길이 없다.”
“오직 이 계단으로만 우리가 본 악마를 뒤로하고 떠날 수 있다”
[아드리아나 마짜렐라 지음, 김덕규 옮김, 《단테와 융 1 : 신곡의 분석심리학적 이해》, 융심리학 연구소, 서울, p322]
끝까지 악마의 털을 붙잡고 그 악마를 계단 삼아 내려올 때만이 지옥을 통과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어려운 과제입니다. 악과 한계에 동일시하지 않으면서 방향감각을 잃지 않고 길을 간다는 것은 대단히 힘겨운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 그림자를 인식하는 것이 변환을 위한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가야바의 뜰에서 세 번이나 예수를 저주하며 부인합니다. 그 전날만 해도 그는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절대로’ 부인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지나친 자기 확신의 외침은 자기 인식이 부재에서 기인합니다. 인간이 죽음의 사지로 몰리면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려 합니다. 생존본능 때문입니다. 그 순간 인간의 의지력은 사실 무력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한계와 그림자를 인식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한계와 그림자를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는 하늘 꼭대기에 보좌를 마련하고 자리잡고서 교만해지거나, 저 아래 땅속의 열등감의 지옥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이런 한계와 그림자는 머리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30대 중반에 단테는 자신의 명예와 권력, 재산, 심지어 가족과 생이별하는 고통스런 어둔 숲의 경험을 통하여 자신의 한계와 그림자를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도 세 번 스승을 부인하고 닭이 우는 소리에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몸소 깨달았습니다. 부활의 아침은 그런 어둠을 몸소 경험하며 자신의 한계를 인식한 자에게 주어지는 값진 보상입니다. 무언가 한계 속에서 몸부림치고, 때로 좌절하는 아픔 속에서 베드로가 부활한 주님을 만나고 다시 변환하였듯이, 우리 또한 그런 인생 여정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인들은 무엇인가?
안식일이 지난 첫날 새벽, 해가 막 돋은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야, 살로메는 무덤에 갔습니다. 예수께 향료를 발라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토록 충성을 맹세하던 제자들은 모두 사라지고, 몇몇 여인들만은 남아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서 장사지내려 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나라와 세계를 구해보겠다고 결연한 의지로 나섰던 남성들은 뒷걸음칠 때, 예수님을 겸손히 섬기며 따라다니던 여성들은 끝까지 예수님과 감정적 유대를 놓지 않았습니다. 부활의 현장을 맞이하며 목격할 수 있는 이들은 바로 이런 여성상들입니다. 이런 여성상들은 감정적 유대, 공감능력, 관계성, 물질, 생명, 자연과 몸에 대한 존중을 대변하는 여성원리의 측면일 것입니다. 이런 여성상들은 부활한 그리스도를 통찰하게 하는 에로스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에로스 원리는 모든 것이 끝인 듯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와 접속을 시도한 것입니다.
2,000여 년 전에 이런 여인들의 부활 이야기가 역사적 사건이나 회고라면, 우리에게 이 사건은 어떤 의미나 생명력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부활한 그리스도와 접속하기 위해 여전히 오늘 우리 안에 이 에로스 원리가 필요합니다. 오늘날 우리 세계에 그토록 필요한 것이 에로스 원리일 것입니다. 불만족과 불안과 강박으로 시달리는 우리 세계와 우리의 내면의 현주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에로스 원리가 살아난다면 우리는 부활한 그리스도와 다시 접속이 일어나고 새로운 변환의 길로 나아갈 것입니다.
여인들은 무덤가로 가면서 서로 말합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그 돌을 무덤 어귀에서 굴려내 주겠는가?(3)”
여인들이 바보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로마 병사들이 철저히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무덤가로 가는 길이 위험할 수 있고, 엄청난 큰 돌의 장애물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인들은 계획하거나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에로스는 그런 것입니다. 그런 움직임 속에 이미 큰 돌이 굴려져 있었습니다. 이런 기적적인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느냐에 대하여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다고 증언합니다. 저는 이미 큰 돌이 옮겨진 뜻밖의 사건에 대하여 이렇게 해명하고 싶습니다.
계획하고 계산하고 목표를 세우지 않아도 자신의 감정과 에로스 원리로 예수 그리스도와 접속하려 한다면, 삶의 장애물은 어느새 걷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 길에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사랑으로 어떤 일이든, 하나님께 연결하려는 자는 지진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개입이 인생 속에 침투해오는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동시성적으로 무의식의 배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는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진정한 연결을 꾀하려는 자에게 나타나는 신비이고 기적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 속에서 나타나는 신비입니다. 에로스의 원리로 현실과 연결하고, 하나님과 연결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이런 신비를 인생길에서 경험하며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살아나신 예수
여인들이 무덤으로 들어갔을 흰옷을 입은 남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천사라고 지칭합니다. 여인들은 몹시 놀랐습니다. 천사는 말합니다.
“놀라지 마시오,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그는 살아나셨소,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소. ... (6)”
이런 천사의 출현은 인생의 방향상실과 두려움, 어둠을 경험하고, 막다른 낭떠러지 같은 길에서 배회할 때 나타나는 초월적 기능입니다. 그는 여인들에게 놀라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너희들은 죽은 예수를 찾고 있지만, 그분은 살아나셨다고 고지합니다. 이제 여인들은 더 이상 죽은 예수가 아닌 부활하신 예수와 만나야 함을 시사합니다.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여인들처럼 죽은 형식과 껍데기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려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곱씹게 합니다. C.G. 융은 이런 부활 사건에 대하여 의미있는 말을 합니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우리가 지금 하나님이 죽고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부활 신화는 그가 그의 몸이 있던 곳에서 발견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몸이란 물질이며 눈에 보이는 형태이며, 가장 높은 가치가 잠시 동안 머무는 장소를 의미한다. 나아가 그 신화는, 그 가치가 기적적인 방식으로 다시 일어났고 변환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기적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가치는 한 번 사라지면 영원히 되찾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되찾는다는 것은 전혀 예상 밖의 일이다. 죽어서 지옥에 가 있는 사흘은 사라진 가치가 무의식으로 내려가는 것을 의미한다. 거기에서 그것은 어둠의 세력을 정복함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고, 하늘로 다시 올라간다. 즉 의식의 최상의 명료함을 획득한다. 오직 몇 사람만이 부활한 분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은 변형된 가치를 발견하고 인식하기 위해서는 결코 적지 않는 어려움이 놓여 있음을 말해준다.”
[C.G. Jung, Psychology and Religion, CW 11, para.149]
오늘도 하나님이 죽고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신의 자리에 유사신이 대체되어 그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부활하신 그리스도, 가장 최상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모든 현대인에게 부과된 과제입니다. 변형된 최상의 가치를 발견하고 인식하는 일은 인간 정신의 발전에 필수적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영혼의 구원의 드라마를 완성해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낡고 진부한 형식과 부패한 종교적 제도를 대변하는 무덤가에서는 결코 그것을 발견하고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변환된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할까요?
어디에 계시는가?
고대 권위있는 사본의 사도신경의 고백은 그리스도께서 지옥에서 사흘동안 머물러계셨다고 고백합니다. 지옥으로의 하강은 무의식으로 내려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위에서가 아니라 아래에서, 우리의 심층에서 사라진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에서, 우리의 꿈과 환상에서 사라진 최상의 가치를 발견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무의식의 심층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심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또한 천사는 말합니다.
“그는 여기에 계시 않소, 보시오, 그를 안장했던 곳이오. 그러니 그대들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그는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거기에서 그를 볼 것이라고 하시오(6b-7).”
천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갈릴리로 가시고 거기에서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갈릴리는 어디인가요? 우리의 일상의 자리이자, 우리가 소명으로 부여받은 삶의 자리입니다. 가난하고 버림받고 소외되고 병든 이들에게 위로하고 치유하고 친구가 되어주고 진리를 그들에게 일러주시던 삶의 자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십니다. 아름답고 화려한 예루살렘, 아방궁처럼 치장된 화려한 교회건물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과하신 그 소명의 자리에서 나를 만나자고 하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내 안에 있는 열등하고 가난하고 병든 측면과 더불어 함께 하려는 곳에 계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연약한 이웃들과 연대하기 위해 기꺼이 손을 내미는 곳에 계십니다. 이 아름다운 부활절에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