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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산골로 유학 갔을까?
박경화 『민들레』 44호 ‘시골로 유학 가기’에 이어 일본의 산촌유학 실태를 소개합니다. 한국에서 닮은꼴의 실천을 꿈꾸는 귀농자 두 사람, 처음 산촌유학을 소개한 민들레출판사 사람 셋, 그리고 시민단체 활동가 한 사람이 다녀와 남기는 보고서인 셈입니다. 일본 산촌유학의 여러 모습 가운데 일부를 소개했고, 더 자세한 내용은 현지에서 촬영한 영상물과 각종 자료가 정리되는 대로 소개하는 자리를 8월 끝 무렵에 가질 계획입니다. 자세한 일정과 장소는 다음호 『민들레』에 싣겠습니다. 산촌유학이 궁금하신 분이나 우리 사회에 씨앗을 뿌리고 싶은 분, 단체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만나 뵈면 좋겠습니다. 그 전에 궁금한 점이나 자료가 필요하신 분은 민들레출판사 박경화에게 연락주세요. juliet5464@hanmail.net
자립하는 아이
“식사하러 오세요.”
아침 일찍부터 차를 타고 달려 늦은 오후에서야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는 오오카센터에 짐을 풀었다. 식당에서 사먹는 밥에 허기가 진 상태여서 저녁 먹으러 내려오라는 말에 두 번 생각할 틈도 없이 식당으로 향했다. 어떤 요리가 나올까? 큰 시설이니 급식소처럼 나올까, 일본 특유의 소박하고 정갈한 음식이 나올까, 배불리 먹을 수는 있을까? 식당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멈칫, ‘여기가 식당 맞나?’ 돌아 나와 간판을 살폈다. 다다미가 깔린 너른 공간에는 아이들만 가득했다. 다시 들어와 보니 저녁식사를 차리기 위해 아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떤 규율이 있는 것처럼 아이들은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형으로 보이는 아이가 무거운 냄비를 들고 있으면 키 작은 아이가 국을 떠서 개인 그릇에 담았다. 한 아이가 밥상 위에 그릇을 가지런히 놓으면 다른 아이가 뒤따르면서 양상추를 담았다. 아이들은 대개 초등학생이고 중학생 아이들이 몇몇 섞여 있는 정도였다. 손발이 아주 척척 맞아 고도의 훈련을 받은 게 아닐까, 잠깐 가자미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고소한 저녁시간,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기엔 배가 너무 고프다. 밥과 된장국, 사람 수만큼 가지런히 놓인 접시에 잘라놓은 자몽과 등꽃 튀김, 시금치 어묵조림에, 생선까지, 침이 꼴깍 넘어간다.
이곳은 일본 나가노시(長野市) 오오카(大岡) 마을 산촌유학센터. 도시 아이들이 부모 곁을 떠나 시골마을로 유학 와 지역학교를 다니면서 머물도록 만들어진 산촌유학생들의 숙소다. 도쿄를 비롯한 대도시에서 온 초등학생, 중학생 아이들이 1~2년 동안 머문다.
우리는 지금 산촌유학을 알아보러 일본으로 왔다. 우리나라에서 산촌유학을 시작해보려는 이명학 씨와 우성숙 씨, 대안교육연대 정수진 씨, 통역을 도와주는 정현경 씨, 그리고 민들레 식구 셋이 교보교육문화재단 지원으로일주일 동안 일본의 산촌유학 단체와 센터, 농가와 학교를 방문할 계획으로 왔다. 나가노현은 우리나라 강원도 같은 곳으로, 오오카센터가 있는 오오카 마을은 ‘기타(北) 알프스’라 부르는 해발 3천 미터가 넘는 산맥이 6월에도 흰 눈을 이고 있는 깊은 산골마을이다. 이 높은 산이 건너다보이는 푸른 언덕에 자리 잡은 오오카센터에는 지도원이라 불리는 교사 네 사람과 아이들 15명이 머물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밥상마다 큰 플라스틱 대접과 고무주걱이 나왔다. 아이들은 자기가 먹은 그릇에 남아있는 음식과 양념까지 이 주걱으로 싹싹 긁어 플라스틱 그릇에 담았다. 그리고 개수대로 가서 큰 아이, 작은 아이 할 것 없이 직접 설거지를 했다. 먹을 만큼만 음식을 담은 데다 주걱으로 양념찌꺼기까지 모았으니 물로 한 번 헹구면 될 정도로 설거지가 간편했다. 저녁을 먹고 혼자 슬슬 돌아다니다 공동 공부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의 가방과 책, 학용품 같은 수업교재가 들어있는 사물함을 사진으로 찍기 위해서였다. 두리번두리번 살피는데 여자 아이가 빗자루와 걸레를 들고 들어왔다.
“저녁 맛있었어요?”
나를 보고 활짝 웃더니 책상을 한쪽으로 밀어놓고는 빗자루로 쓸고 부지런히 걸레질을 했다. 미안해서 얼른 나왔다. 복도로 나오니 사내아이가 소파를 한쪽 옆으로 치워놓고서 비질을 하고 있고 여자 아이는 손걸레로 바닥을 닦고 있다. 2층으로 올라가니 빨래를 잔뜩 모아 세탁기를 돌리는 아이도 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방과 주방, 화장실까지 아이들이 모두 부지런히 청소를 하고 있다. 손님이 와서 그러나, 아니면 일주일에 한 번씩 하는 대청소날인가. 알고 보니 날마다 이렇게 청소를 한단다. 집에 있는 아이들 같으면 저녁밥을 먹고 쉬거나 가족들에게 어리광을 부릴 시간이 아니던가?
일본 산촌유학의 기본정신은 자립하는 아이다. 도시 아이들이 부모의 품을 떠나 시골마을에 머물면서 학교를 다니고, 숙제와 공부는 스스로 한다. 여러 아이들과 어울려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빨래와 청소 같은 일상생활도 제 손으로 해결한다. 센터의 선생님들은 숙제를 몰라서 물으러 오는 아이나 학년에 맞는 학습능력이 떨어지는 아이에게만 공부를 도와주고 있다. 그리고 아이들이 스스로 생활할 수 있는 방법을 지도하는 데 중심을 두고 있다. 우리가 저녁식사로 먹었던 된장국은 아이들이 마을 할머니에게 직접 배워서 만든 된장으로 끓인 것이고, 버섯 역시 직접 키운 것이었다.
센터 건너편에는 아이들이 가꾸는 논밭이 있다. 작은 밭 하나를 빌려서 농사를 짓는다. 농사법 역시 마을 농부가 와서 가르쳐준다. 한 골씩 맡아 콩과 가지, 오이와 토마토 같이 자기가 좋아하는 작물을 심는데, 역시 아이들의 솜씨라는 걸 한눈에 눈치 챌 수 있었다. 다른 밭에 비해 작물들의 키가 작고 기운이 없고, 한쪽에서는 시들시들 말라가고 있었다. 저래서야 어디 수확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아이들이 모내기를 한 논 역시 다른 논에 비해 벼가 어리고 연약해 보였다. 하지만 농사일은 기계 힘을 빌지 않고 전부 손으로 하는데, 농사의 어려움과 먹을거리의 소중함을 배우면서 수확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란다. 그 밖에도 어른들의 지혜를 배울 수 있는 시간을 자주 가지면서 마을 공동체와 어울리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센터가 도시 아이들을 위한 공간만은 아니다. 센터 공부방에는 마을 아이들의 사물함도 마련되어 있는데, 도시 아이들이 머무는 동안 단기체험 프로그램이 자주 열린다. 이때 마을 아이들도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어울리면서 숙식을 함께 한다.
저녁에는 아이들이 강당에 모여 나라 밖 손님인 우리들에게 큰북 공연을 보여주었다. 옛날 바닷가 마을에서 고기잡이를 떠나는 어부들이 노래하고 춤추던 것을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큰북소리와 노래하는 모습이 어부의 출어가라기보다는 전쟁터로 나가는 병사들 사기를 높이는 몸짓으로 보여 적잖이 거부감이 일었지만 북을 두드리는 아이들 눈망울과 몸짓은 사뭇 진지하고 힘찼다. 이어진 부채춤과 타악기 합주 역시 취미 수준을 넘어 꽤 오랜 시간 연습을 했을 법한 훌륭한 공연이었다.
오오카센터의 책임자인 아오키 선생님은 처음부터 아이들에게 이 전통공연을 가르치려고 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센터에서 머무는 아이들 마음을 집중시킬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하다가 지역의 전통문화를 배워보자는 결론을 얻었다고. 그래서 선생님들이 먼저 북채 잡는 법부터 익혀나갔다. 때로는 전문강사를 초대하기도 하고, 멀리 연수도 다니며 기량을 닦은 뒤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연습시간은 따로 없지만 아이들은 틈만 나면 북치고 노래하는 데 여념이 없단다. 게다가 지들끼리 경쟁심도 생기면서 어떤 아이는 밭에서 일하는 동안 나뭇가지로 돌멩이를 두드려가며 연습에 빠져들기도 했다. 이런 바람은 다른 산촌유학센터로도 번져 센터마다 나름의 기량을 다듬어간다. 이렇게 익힌 솜씨들은 전국의 산촌유학센터 사람들이 다 모이는 11월 축제(일종의 추수감사절) 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연하는 것으로 그해 배움을 매듭짓는다고 한다. 11월 축제 때는 아이들의 부모는 물론 산촌유학에 관심을 가진 어른들도 꽤 많이 모이는데 다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라고 한다. 어떤 아이들은 이 폼 나는 공연을 보고서 산촌유학을 와야겠다 결심하기도 했단다. 지역 전통문화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데 센터 아이들이 이렇게나마 전통을 이어가고 있으니 마을 사람들도 무척 반기고 있다.
초등학교 여학생인 쿠미코와 사키코에게 이곳 생활이 어떠냐고 물었다.
“엄마 생각도 안 나요. 아주 재밌어요.”
배시시 웃었다.
바람 잘 날 없는 대가족, 산촌유학 농가
다음날 우리가 찾은 곳은 산촌유학을 온 아이들이 머물고 있는 야사카(八坂) 마을의 농가 스바 씨 댁이었다. 산촌유학 단체가 일본에는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소다테루카이 산촌유학의 특징은 이처럼 유학 기간 동안 반드시 농가에서 머물도록 한다는 점이다. 지역에 따라 좀 다르기는 하지만 한 달에 열흘이나 보름은 농가에서 머물면서 농민들의 생활 그대로를 느끼고 배울 수 있도록 한다. 특별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일상에서 산촌 문화와 생태감수성이 몸에 배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꾸민 장치라 하겠다.
나무와 흙으로 지은 지 50년이나 되었다는 스바 씨 집은 여전히 깔끔하고 튼튼해 보였다. 2층까지 방이 여러 개 있고, 농기구를 넣어두는 창고까지 딸린 꽤 큰 집이었다. 거실 노릇 하는 큰방과 좁은 복도 따라 작은 방이 있고, 출구도 따로 있어 대가족이 살아도 서로 독립공간을 가질 수 있는 구조였다.
우리는 큰방에 모여앉아 스바 씨 부부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미 호호 할머니인 스바 씨 부인은 요즘 한창인 죽순과 고사리로 나물을 무쳐 녹차와 함께 먹을 수 있도록 한 그릇 소담스레 내놓았다. 우리네 시골 인심처럼 할머니는 찻잔을 흘깃거리며 연이어 차를 따르고 먹기를 권했다. 올해 여든인 스바 씨와 일흔여덟인 부인은 산촌유학으로 아이들과 생활한 지 35년이나 되었다. 그동안 이 정갈한 집을 거쳐 간 아이들은 무려 180명이나 된다고 한다.
“우리 아이가 중학교 1학년일 때 처음 유학생이 왔는데, 지금은 다 어른이 되었어요. 요즘에는 한참 손주뻘 되는 아이들이 오는데도 우리를 ‘엄마, 아빠’라고 불러요.”
쑥스러운 웃음을 짓는 부부는 35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이들을 대하는 비결은 언제나 내 아들딸 대하는 마음으로 만나는 거라고 했다. 지금은 초등학생과 중학생 아이 다섯 명이 머물고 있다. 아이들은 4월에 와서 다음해 3월까지 한 달에 열흘씩 이곳에 머무는데, 각자 개인 방을 따로 주지 않고 큰방에서 서너 명이 어울려 살게 한다. 농사일만 해도 만만찮은데 아이들을 어떻게 돌볼까 궁금했다.
“아이들 스스로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빨래와 청소도 제 손으로 하게 해요. 바쁜 농사철에는 아이들이 우리를 돕죠. 그냥 한 식구처럼 지내는 거예요. 해 떨어지고도 일이 마무리가 안 되면 오늘은 밥을 좀 늦게 먹자고 하면 되구요. 기숙사 마냥 정해진 시간에 이것하고 저것하고 같은 건 없어요. 그냥 평소와 다름없이 살아요. 아이들이 있다고 해서 특별히 배려하는 일은 없어요.”
스바 씨네는 지금은 많이 줄였지만 이전에는 무 재배를 많이 했다고 한다. 제때 시장에 내보내려면 일손이 부족하니 유학 온 아이들도 훌륭한 일꾼 몫을 했다고 한다. 대부분은 열심히 하고 재밌어 하지만 농사를 싫어하는 아이도 있었다. 도시에서 내려와 갑자기 환경이 바뀌면 적응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럴 때 부부는 억지로 시키지 않고 아이들이 조금씩 적응해서 스스로 결정할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을 택한다.
스바 씨 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일본에서 가장 먼저 산촌유학을 시작했던 야사카센터가 있다. 스바 씨 집에서 머무는 아이들도 바로 야사카센터 아이들이다. 센터와 홈스테이 농가는 자주 소통하며 아이들을 돌본다. 농가에 아이들이 머무는 동안 결혼식이나 장례식처럼 부부가 같이 외출해야 할 일이 생기면 아이들은 잠시 센터에 맡기면 된다. 또, 농가 차원에서 해결하기 곤란한 일이 아이들에게 생기면 센터 선생님들의 도움도 받는다. 센터와 농가는 이렇게 긴밀하게 서로 돕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2년 줄곧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지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간격을 두고 센터와 농가를 오가는 까닭에 센터 활동가나 농가 어른들 모두 오랫동안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아이들이 산촌유학을 와 있는 동안 도시에 있는 부모들도 가끔 이곳을 찾는다. 봄 연휴 때, 야사카센터 행사나 아이가 다니는 학교 참관일에도 온다. 이럴 때 농가 부모와 도시 부모가 만나 서로 아이에 대한 정보교환을 하기도 한다.
아주 드물게 학교 앞 구멍가게에서 과자를 슬쩍 하기도 하고 다른 농가에 가서 말썽 피우는 녀석들도 있었다. 그럴 때면 스바 씨는 자식에게 하듯 호되게 야단을 친단다. 한번은 너무 속상해서 사내아이의 머리를 쥐어박았는데, 그 아이가 자라 다시 찾아왔을 때 꿀밤을 먹었던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함께 웃기도 했다.
그렇다면 아이들을 받는 게 농가엔 어떤 도움이 될까? 농사를 짓는 스바 씨네는 가을까지는 이렇다 할 수입이 없는데 홈스테이비를 받으니 살림살이에 꽤 도움이 된다고 했다. 큰돈은 아니지만 달마다 현금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돈보다 더 큰 도움을 주는 게 있다. 바로 아이들이 주는 생기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나는 아이들을 맡아 기르면서 스바 씨 부부가 얻는 기쁨은 돈보다 훨씬 큰 선물이었다. 실제 스바 씨 부부는 여든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건강하고 정정해 보였다.
따뜻하던 차가 어느덧 식어가고 질문과 답이 무르익는 가운데 아이들의 용돈에 대해 여쭈었다. 도시의 소비생활에 익숙한 아이들이 시골에서는 어떻게 지낼까? 그런데 놀랍게도 용돈을 주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소다테루카이의 원칙이라고 했다. 학용품 사는 돈이나 병원비 같은 비용은 부모들이 보내준 참가비에서 쓰고, 돈이 많이 든 경우에만 나중에 결산하는 방식을 택한다. 농가에서는 때때로 간식을 챙겨주고 산골마을에는 가게도 드물어 아이들이 돈 쓸 일이 거의 없단다. 애초에 이곳으로 오면서 아이들은 돈을 안 쓰는 곳이라고 마음먹고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도시의 집에 다녀왔다가 용돈을 받아서 오는 아이라도 가게에서 물건을 사면 좁은 동네에 금방 소문이 나기 때문에 함부로 돈을 쓸 수도 없다고.
아이들이 제 할 일을 스스로 한다 해도 엄마의 일거리가 늘어나지 않을까? 스바 씨 부인에게 여쭤보았다. 보통 엄마들이 그렇듯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는 엄마 손길이 많이 필요하다. 빨래와 청소를 아이들이 스스로 하지만 이불 속에서 벗어놓은 옷이 나오기도 하고, 더러운 양말을 신고 다니거나 우산을 잊고 학교 가면 책임이 느껴져 자꾸 챙겨주게 된다. 그러나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4월에 아이들이 오면 우리도, 아이들도 서로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해요. 그래서 여름방학까지는 서로 호흡을 맞추고 배우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천천히 적응할 때까지 기다려 주지요. 아빠들은 다 좋은 거라고 그저 웃고 넘어가지만 역시 산촌유학에서는 엄마 역할이 중요하고, 엄마 노릇을 할 여성이 어떻게 마음먹는지가 아주 중요해요.”
도시로 돌아간 아이들이 자라서 애인이나 배우자를 데리고 인사 오면 스바 씨 부부는 친부모 못지않게 뿌듯함을 느낀다. 일본 풍습에는 고마운 분들에게 여름 안부를 묻는 카드와 겨울 연하장을 주고받는데, 이때 받은 사람은 꼭 답장을 써야 한다. 그런데 산촌유학 왔던 그 많은 아이들이 해마다 연하장을 보내오니 부부가 함께 답장 쓰기도 만만치 않단다. 많은 아이들을 따뜻하게 품어준 노부부의 활짝 웃는 얼굴에서 자상함과 푸근함, 그리고 삶의 지혜가 우러났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부모를 닮아가고, 부모는 자라나는 아이를 보면서 어른이 되어간다고 했던가? 숨 막히는 도시에서 살던 아이들이 스바 씨 부부 곁에 머물면서 자신의 미래를 따스하고 포근하게 그리는 시간을 갖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아이들의 눈망울을 보면서 스바 씨 부부 역시 35년 동안 바람 잘 날 없는 대가족을 길러낸 것이 아닐까 .
산촌유학, 어떻게 떠나는 것일까?
산촌유학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지금부터 34년 전, 나가노현이 고향인 아오키 씨는 학교 선생님이었다. 그가 서른다섯 살 되던 해, 입시전쟁터 학교에는 더 이상 교육이 없다는 생각으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진짜 교육은 뭘까 고민하다 아이들과 자연이 만나면 여러 가지가 해결되겠다는 생각을 품고 자연체험활동 중심으로 배우고 익히는 ‘소다테루카이(育る會)’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초기엔 돈이 없어 실무자들 모두 자원활동으로 일했고, 심지어 도쿄에서 중고차를 사서 수리한 뒤 시골에 되팔아 자료집과 홍보물을 만들기도 했고, 가끔 여는 행사 수익금으로 겨우겨우 운영할 정도였다. 인건비는 생각조차 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집안 살림살이는 교사였던 부인의 월급으로 생활해야 했다. 그렇게 고생스런 몇 해가 지나 소다테루카이의 여름캠프가 신문에 실리면서 갑자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때는 따로 캠프시설을 두지 않고 지역 농가를 빌려 아이들을 머물게 했다.
산촌유학을 희망하는 아이들이 늘어나면서 농가에서만 머물기보다 공동체 생활을 경험할 기회와 공간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야사카 마을에 최초의 산촌유학센터인 야사카센터를 만들었다. 아직은 지역 공무원도, 학교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의심 반 호기심 반으로 산촌유학하는 이들을 대할 때였다. 하지만 아이들의 소리가 사라졌던 산골에 한꺼번에 스무 명이 넘는 아이들이 들어오고, 그들의 부모형제가 마을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사람이 빠져나간 산골에 사람을 불러들이는 산촌유학은 지역 살리기 아이템으로 주목을 끌었다.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 정원이 늘면서 예산 지원도 늘고 교사도 더 충원되었다. 이런 소문이 전국으로 퍼져 여러 지자체들이 산촌유학을 유치하려 들었다. 센터도 지어주고 운영에 필요한 재정 지원을 하겠다는 곳도 생겨났다. 그런 바람을 타고 만들어진 곳이 야사카센터 옆 마을의 오오카센터였다.
우리가 첫날 머물렀던 오오카센터는 오오카 마을 재정으로 건물도 세우고 운영비도 보조해주고 있다. 부모들에게 한 달 참가비로 초등학생은 6만9천 엔(약 62만 원)을 받고, 중학생은 7만2천 엔(약 65만 원)을 받아 센터 재정의 절반쯤을 충당하고 있다. 부모들에게는 적지 않은 돈이지만 큰 건물을 유지하고 교사들 월급 주고, 각종 프로그램을 열다보면 언제나 적자인데, 그 부족한 부분을 지자체가 채워주고 있는 것이다. 산촌유학을 기획하고 실천하는 소다테루카이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공적지원을 받는 것이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시키는 것만큼 공적인 투자가 어디 있냐는 게 그들의 논리다.
오오카센터에 이어 전국에서 다양한 산촌유학센터가 세워졌는데, 그 바람도 요즘에는 한결 수그러들었다. 90년대 이후 일본 사회에 긴 불경기가 계속되면서 중앙정부의 돈 씀씀이가 엄격해지자 산촌유학센터가 있는 지역에서도 볼멘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도시에서 온 아이들을 위해 왜 우리가 돈을 써야 하나?’ ‘도시 아이들에게만 혜택을 주는 것 아니냐’
소다테루카이에서는 이 점을 새겨듣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 끝에 도시에서 온 이른바 ‘유학생들을 위한 센터’가 아니라 ‘지역의 생태교육, 생활교육장’으로서 성격을 새롭게 잡아가고 있다. 시골에 살지만 오히려 놀 친구도 없고 이야기 나눌 상대가 없어 하루 종일 집안에서 컴퓨터 게임에 빠져 있는 시골 아이들에게 자연을 느끼도록 도와주는 역할도 한다. 또, 어른 아이가 모두 모여 문화공연도 펼치고 놀기도 하는 사랑방 노릇도 하고 있다.
산촌유학을 오는 아이들의 80퍼센트는 산촌유학센터에서 여는 설명회나 단기캠프를 경험하고 나서 결정했다고 한다. 산촌유학의 취지나 방향, 내용에 부모가 공감하고, 무엇보다 산촌유학에 관심이 있고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큰 아이들이 왔다는 걸 드러낸다. 대학 진학을 위한 공부보다는 더불어 사는 삶을 선택하는 부모들이 대부분이다. 시골에서 돌아와 공부를 따라가지 못하는 게 아닐까 걱정하는 이가 신청하면 산촌유학은 적절하지 않다고 일러주기도 한다. 아이도 행복하고, 부모도 만족스러우려면 산촌유학이 무엇인지, 그 센터는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 정확하게 이해하는 일이 무척 중요하다. 간혹 집에서 데리고 있기 곤란하거나 뭔가 문제가 있는 아이들이 오기도 하지만, 이런 아이들 수는 20퍼센트를 넘기지 않도록 한다. 중심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안전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혹시나 사고가 생길 수도 있으니 이를 대비해서 보험회사와 이야기해 산촌유학협회보험도 만들었다. 보험료는 한 아이 당 1년에 1만5천~2만 엔(약 13만~18만 원) 정도를 낸다.
산촌유학 주관단체는 소다테루카이 말고도 여럿 있다. 따라서 그 유형도 다양하다. 센터 중심으로 운영되는 곳도 있고, 농가 중심으로 유학생을 받기도 한다. 방과후 프로그램을 활발히 운영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시골학교에 다니는 도시 아이들을 위한 하숙집으로 그치는 곳도 있다. 센터 없이 농가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지속성이 떨어진다고 한다. 단독 농가의 경우 아이들을 보살피는 어른들이 여행은 물론 외출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5~6년 뒤에는 다들 지쳐 산촌유학을 그만두는 일이 흔하다. 그래서 소다테루카이는 센터가 중심이 되고 농가와 소통하며 산촌유학을 운영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아이가 도시로 돌아가게 될 때는 유학 전과 후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아이가 성장한 부분을 부모에게 알려주고, 유학생활에서 배운 것을 일상에서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방법도 알려준다. 일 년을 채우지 않고 도중에 그만 두는 아이도 간혹 있지만, 6퍼센트를 넘지 않는다. 정말 오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오기 때문이고, 시골에서 그냥 노는 게 아니라 농사일도 해야 하고 고생도 많다는 이야기를 사전에 충분히 하기 때문이다.
산촌유학이 남긴 것
산촌유학은 도시에서 온 아이들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버스도 자주 다니질 않아 산촌은 그저 불편한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도시 사람들이 와서는 숲도 좋고 공기도 맑고 밥도 맛있다고 감탄하니 지역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 곳을 다시 돌아보고 그 가치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시골마을에 아이들이 늘어나니 생기가 넘치고, 시골학교에도 전학 온 아이들이 늘면서 활기가 넘치게 되었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만나러 올 때 차에 기름도 넣고 지역 식당에서 음식을 사먹기도 하면서 작은 마을의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데도 한몫했다. 또, 유학 왔던 아이가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며 때때로 다시 마을을 찾고, 더 자라서는 가족을 데리고 오기도 한다. 또 자기가 지냈던 마을과 사람들을 잊지 않고, 직접 쌀이나 채소들을 주문해서 사가기도 한다.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을 주고 있는 셈이다. 유학 기간은 1~2년이지만 10~20년을 넘어 인연이 계속되니 이것이야말로 ‘도농교류운동’이자‘도농교류학습’이라 하겠다.
일본 역시 풍경이 아름다운 곳에서 펼쳐지는 자연체험학습이나 단기캠프, 수련시설이 많다. 이런 가운데 소다테루카이가 다른 곳들과 어떤 차별성을 갖는지, 30년 동안 소다테루카이에서 산촌유학을 이끌고 있는 야마모토 씨는 이렇게 말했다.
“산촌유학은 그저 도시 아이들이 시골에서 생활하고, 작은 학교 살리는 차원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외톨이로 지내는 시골 아이들에게 도시친구를 만나게 해주고 형제를 만들어 주고, 자기가 사는 마을을 돌아보며 애정과 자부심을 가지도록 합니다. 도시 아이들에게는 고향을 만들어 주고,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합니다. 이렇게 시골이든 도시든 아이들이 서로 어우러져 살고, 생태감수성을 키울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산촌유학이고, 소다테루카이가 하고자 하는 일입니다. 또, 아이들에게만 머물지 않고 아이들과 이어진 이 나라 사람들 모두에게 생태감수성을 키워주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치열한 입시경쟁은 뒤로한 채 시골로 유학 오는 것이 한참 돌아가는 듯 보이지만 길게 보면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것입니다. 산촌유학을 다녀온 아이들은 농가와 자연에게 자립심을 배워 무엇이든 스스로 해결하고, 직업을 선택할 때도 자부심을 갖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습니다. 모두가 이런 어른으로 자란다면 이 나라가 분명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산촌유학’을 만나러 함께 일본으로 떠났던 우리의 고민은 더 깊어만 갔다. 우리 눈으로 직접 보고 생생하게 들으면 우리 실정에 맞는 길이 보일 것으로 생각했지만 밤늦도록 숙소에서 이야기하고, 다시 이동하는 기차에서 끝날 줄 모르는 토론이 이어지면서 여러 가지 고민거리들이 생겨났다.
농가 구조의 차이도 무시 못할 문제인 듯했다. 일본의 농가는 도시 주택과 별 다르지 않을 만치 정갈하고 규모도 더 큰 편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지내기에 서로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우리 농가 현실을 생각하면 장기 유학은 쉽지 않은 일일 듯 싶었다. 센터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지자체의 지원을 끌어내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들이 시골에서 머물 수 있는 시설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교육에 대한 고민과 철학이 있는 어른이 절실히 필요하고, 아이들과 어울려 공동체로 살 수 있는 가족들도 필요하다. 귀농자들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지역 학교를 설득하는 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일본은 벽지 근무를 자원하는 교사에게 별다른 혜택이 없다 보니 오히려 뜻있는 교사들이 지원하는 반면 우리 실정은 승진 점수를 바라고 오는 교사들이 대부분이니 학교를 바꾸어가지 않으면 교육의 질을 보장하기도 어렵다.
생태교육의 대안으로, 귀농자들의 의미있는 일감으로, 도시와 시골을 연결하는 징검다리로 우리에게 맞는 모습이 뭘지 찾아나선 길에 이런저런 고민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