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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팤실에서
(손자 영관에게)
2022. 7. 12. 이현래 목사
하나님은 사람을 찾고 있어. 그런데 원래 그 영역에 사람이 있는 게 아니고 다른 영역으로 빗나가 있어. 빗나가 있는 사람을 찾고 있는 거야. 빗나갔다면 보통 모르잖아. 원래 사람이 이러니깐.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을 지을 때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이 만들자.”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은 영이요 생명이니까 형체가 없잖아. 그래서 형체를 가진 인간을 지은 거야. 그러면 이 둘이 합하면 온전해지잖아.
그러면 왜 이렇게 지었을까? 우주 만물을 보면, 살아있는 모든 것을 보면 전부 이런 원리로 지어졌어. 둘이 연합해서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보면 알겠지? 식물도 다 그렇고 동물도 다 그러니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아니하는 것, 생명과 형상, 이렇게 서로 만나도록 되어 있다고. 특이하지.
왜 이런가 하면 처음부터 생명과 형상이 합해져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그게 아니고 이것이 영원성이 없어져 버려. 한쪽은 죽는 것이고 한쪽은 안 죽는 거잖아 이 둘이 합해야 온전함이 되고 또 죽음이 있으니 갈라지게 되고. 또 만나지고... 식물도 다 똑같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면서 죽고 사는 것이 없으면 얼마나 좋았겠냐? 그런데 죽고 사는 것이 없으면 천사처럼 되는 거라. 그러면 좋을 것 같은데 생육하고 번성하는 게 안 돼. 천사들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없어. 그러니까 생육하고 번성하려면 둘이 합해야 되는 거야. 연합했다 헤어지고 또 연합했다 헤어지고...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살 때까지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야. 그런데 아브라함이 죽고 나면 또 사람이 있어야 되잖아. 이삭이 필요한 거야. 그리고 이삭의 하나님은 또 이삭이 죽고 나면 야곱이 필요한 거야. 이렇게 언제든지. 이것을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해. 항상, 항상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봐.
하나님은 변치도 않고 영원하고 스스로는 생육 번성이 안 돼. 그러니까 아브라함만큼 사용하고, 이삭만큼 사용하고, 야곱만큼 사용하는 거지. 알겠냐, 이 원리를? 둘이 합하는 이 원리를 연합이라고 해. 연합이라는 말은 둘이 섞어져서 한 몸처럼 되어버린다는 말이 아니라, 각기 다르면서 수를 보존하는 거지. 이 영이요 생명은 하나님의 형상이 필요하고,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영이고 생명인 하나님이 필요한 거야.
남자에게는 여자가 필요하고 여자에게는 남자가 필요하고 이걸로 결론을 내렸어. 그러면 흙과 씨를 비교하면 씨는 씨대로 있으면 아무것도 안 돼. 흙에 들어가서 흙과 연합을 하면 열매가 되는 거야. 그러니까 이 둘은 서로 없으면 안 될 것들이야. 씨에게는 흙이 없으면 안 되고, 흙에게는 씨가 없으면 안 되고.
그러니까 옥수수 1개를 뿌려놓으면 말이야, 그게 10개 20개 100개 이렇게 늘어난단 말이야. 밭이 되어서 수확을 해도 흙은 도로 흙이야. 씨는 씨고. 이것이 영원한 거야, 알고 보면. 이런 원리로 지어졌어, 모든 게. 그런데 사람은 누구한테 속아가지고 ‘너 혼자 다 할 수 있다.’ 여기에 속은 거야. 네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이렇게 하면 제한이 되잖아. 이것을 ‘제한 없이 할 수 있다.’ 이 말을 성경으로는 ‘하나님과 같이 된다.’ 이렇게 속인 거야. 그 말을 듣고 아담은 먹지 말라는 걸 먹었다는 거지. 어떤 기록을 보면 자기 혼자 살 수 있는 길을 찾아간 거야.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어떻게 하면 내 혼자라도 살 수 있나?’ 이것을 찾고 있는 거야. 내 혼자라도 독립할 수 있나? 이걸 찾고 있어. 그 제한이 싫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하나님이 찾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면 형상으로서의 사람을 찾고 있어. 그런데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사람만 있는거야. 그러면 하나님이 쓸 수가 없잖아. 그래서 하나님이 이 사람을 찾고 있는데 이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이 아브라함부터야.
이것을 부름 받았다고 해. 불러내었다. 그래서 어디까지 왔냐면 예수까지 온 거라. 그러면 그동안에 여러 세대를 거쳐서 사람들의 판을 따라가지고 하나님께서 일을 했어. 아브라함 때는 아브라함대로, 이삭 때는 이삭대로, 야곱 때는 야곱대로, 다윗 때는 다윗대로, 모세 때는 모세대로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찾았단 말이야. 마지막에 예수께로 왔어. 그래서 그것을 성경에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고 써있단 말이야. 계보가 전부 그렇다는 거지. 그 길로 온 거라는 뜻이야.
그러면 이제 예수님에게 와서 결말이 나야 될 거 아니야. 여기서 문제는 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이것이 정말 중요해. 원래 하나님이 찾고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이것이 가장 중요해. 그런데 예수를 만나보니까 사람이 할 수 없는 놀라운 이적을 행한단 말이야. 따라다니면서. 이적을 보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아 하나님 아들이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가 보다. 그것이 하나님 아들이 되는 건지 알았단 말이야. 그래서 따라 다녔어. 따라 다녔는데 아무리 가도 가도 이 사람은 모르겠네. 어떻게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는지, 어떻게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였는지 그건 모른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포도주를 먹을 때는 좋은데 포도주를 만드는 사람은 모른단 말이지. 떡을 먹을 때는 좋았는데 떡을 주시는 이는 몰라. 그것은 전자제품이 있는데 항상 그걸 사다만 쓰는 것과 똑같아. 내가 만들 수가 없잖아. 원래 우리 때는 tv를 일본 소니 제품을 샀거든. 왜냐하면 그때는 소니 외에는 없으니까 우리는 사다 쓸 수밖에 없었어. 못 만드니까. 그런데 오랜 연구 끝에 계속 과정을 거쳐서 오면서 하나씩 둘씩 배워서 지금은 우리가 자체 생산하게 되었잖아. 하나님 나라도 이와 같은 거라. 우리가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겪어오는 동안에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이렇게 짐작을 하게 되었거니와 하나님도 그런 사람을 목표로 해서 역사를 운행했단 말이야.
그러니까 하나님은 아시는데 우리들은 몰랐단 말이야. 우리 교회는 할아버지가 이런 길을 따라 오다가 예수를 만나가지고 예수님의 좋은 걸 보고 그걸 내가 먹고 또 형제에게 나눠주고 이랬단 말야. 우리끼리 잔치는 잘 됐어. 그런데 이 예수는 나도 모르고 형제들은 더욱 모르고, 이제 마지막에 오니까 문제가 생긴 게 ‘이것이 전부인가?’ 라는 문제가 생겼어. 전부. 형제들이야 이것이 전부 다 좋다 이렇게 하는데 나는 그것이 아니더란 거지. 왜냐하면 내가 갖다만 줬지 내가 떡을 만들 줄 모르거든. 그러면 내가 없으면 어떡하나. 떡을 만들 사람도 없잖아.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아니, 이대로 살면 좋지 않냐? 자유롭고, 어떤 다른 교회에서 볼 수 없는 교회, 목사님만 있으면 되지 않냐. 굳이 예수가 왜 필요하냐.’ 이런 사람까지 생긴 거야. 우선 먹으니까. 그런데 이것은 얻어먹는 거니까 한도가 있는 거지. 그래서 나는 이 사람을 알아야 되겠다,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되겠다. 이렇게 예수를 찾게 된 거지.
여태까지 예수 얘기해놓고 지금 새삼스럽게 예수를 찾는 것도 그 이유를 알겠지? 내가 왜 그랬는지. 그런데 지금까지 기독교 2천년의 역사에서 예수님은 이런 분이다. 부활의 예수, 이런 역사적인 증거가 많단 말이야. 나는 거기 가보니까 아무 데라도 내가 찾을 수 있는 예수가 없는 거야. 왜냐하면 십자가에 못 박혀 부활한 것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야. 사람들이 예수를 죽였지만 하나님은 그 예수를 다시 살렸다. 그게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거지. 핵심인데, 십자가에 가보니까 예수님이 죽지 않을 수 없는 일로 죽었어.
왜냐하면 유태교 안에 있으면서 유태교가 제일로 싫어하는 것을 했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아버지가 일하시면 나도 일한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으니까. 우리가 들을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유대인들이 들을 때는 도저히 들을 수가 없는 말인 거야.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으로 인해서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 하다가 해방된 민족이지. 광야 40년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광야를 통과한 사람들이야. 가나안 땅으로 들어와 나라를 얻은 사람들이야. 전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된 것인데 어떤 인간이 와가지고 그 하나님과 하나라고 하니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 아니겠냐? 그래서 죽인 거야. 내가 거기 가 보니까 나하고는 별 상관이 없는 사람이야. 난 유태인이 아니니까. 모르겠는 거지, 어떤 사람인지. 왜 사람이 저렇게 죽어야 되나? 저런 말 안 했으면 안 죽을 텐데.
부활했다는 데 가보니까, 내가 부활했다는 사람 못 만나겠는 거야.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 너도 모르겠지? 부활하는 사람을. 나도 모르는데 사람들은 그걸 믿고 있는 거지. 그래서 난 다시 십자가로 가서 또 십자가를 보기 시작했는데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을 보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내려와 봐라. 이렇게 막 소리 지르는 거야. 여기는 특별한 곳이야. 왜냐하면 사람을 십자가에 매달면 다 죽는 거 아니냐.
어떤 경우에도 사람이 십자가에 달렸는데 내려와 보란 말을 안 해. 죄인 같은 누구라고 한다든지, 아는 사람 같으면 불쌍하다고 한다든지 이러면 이렇지, 내려와 보라는 소리는 안 하지. 그런데 왜 내려와 보라고 하는가? 하나님 아들이거든 내려와 보라는 거야. 하나님 아들 아닌 사람한테 내려와 보라고 할 필요가 없는 거지.
하나님의 아들이야? 내려와 봐.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 그 말인 거지. 이 말에 예수님이 아무 말도 못하고 죽었잖아. 그러니까 모두들 실망하고 가버렸어. 조롱하던 사람들도 ‘그러면 그렇지.’ 하고 가버리고, 제자들도 가고, 기다리는 사람도 ‘안 되네.’ 그러고 가버린 거야. 기다리는 사람은 거기서 내려올 수 있는 사람을 기다린 거지. 그러니까 이제 갈 데가 없잖아. 그런데 그것이 부활로 넘어간 거야.
내가 부활한 예수를 만났으면 문제는 간단해. 부활한 예수를 내가 못 만났으니 문제가 되잖아. 그러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십자가밖에 없는데 거기 가서 찾아봐야지. 찾아보니까 내려오라, 내려오라, 그런데도 못 내려오는 사람이 있어. 보통 사람이 못 내려오는 것은 당연하지.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또 그런 행사도 봤는데 내려오라 했는데도 못 내려오고 그리고 죽은 사람이 있어. 여기서 나는 내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여기 있구나. 이 사람 밖에 내가 모르거든. 그래서 나는 했단 말이야. 지금까지 내가 찾던 사람이 이 사람이구나. 십자가에 가서도 못 만나고, 부활했다는 곳에 가서도 못 만났는데.
어떤 사람은 심지어 뭐 어떤 은사를 받은 사람도 있어. 속에 뜨거운 불이 끓듯이 열심이 있는 사람, 그것도 안 되더라는 거지. 그런데 여기 오니까 어쩌면 내가 찾던 사람이 아니야. 그런데 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까 내가 딱 만나지게 된 거야.
못 내려오는 자리는 나하고 다를 수가 없어. 나도 못 내려올 것이고 이분도 못 내려오고. 나도 죽을 것이고 이분도 죽을 테니까. 그거면 끝난 거잖아.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이 찾는 사람이 발견된다 말이야. 참사람, 지금까지 참 사람이 아닌 거야 이게. 모든 사람 다 봐도. 그런데 진짜 사람이 있네, 사람다운 사람이 있네. 왜냐하면 예수의 실체가 발견되니까. 이 사람이 참 사람 아닌가? 하나님은 누구를 인정하는가? 이런 사람을 인정해. 원래 이런 사람을 사람이라고 이름 했어.
나는 이 사람 안에서 ‘나도 이 사람이네.’ 이렇게 알아지는 거야. 너도 그 사람이지. 우리 모두가 이 사람이야. 이 사람일 때 하나님이 우리를 안단 말이야. 나를 찾아온 하나님. 나는 하나님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찾아오지, 그걸 알게 됐어. 그래서 나는 이것을 복음이라고 그래. 복음이라는 말은 내가 하나님을 찾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찾아왔다는 거지.
죽은 예수를 통해서 나를 찾아온 것이잖아. 내가 쉬워졌는 거야. 사람이 다 똑같아졌으니까. 우리가 보통 목욕탕 가면 다 똑같다고 하지만 목욕탕 가도 틀려. 키가 큰 사람도 있고 나같이 작은 사람도 있고. 난 너무 말라서 목욕탕 가도 창피해. 그러니 동등해지지 않아. 세상 어디에도 똑같아지는 사람은 없어. 아무 데도. 배운 것이 다르든지, 가진 것이 다르든지, 다 다르지 똑같은 사람은 없는 거야. 또 내 성격과 네 성격은 다르잖아?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결국에는 다 아는 것 같아도 남남이야. 다 틀리니까. 그런데 예수 안에서 보니까 사람이 다 똑같은 사람이야.
배우고 안 배우고도 관계가 없고, 가지고 있느냐 안 가지고 있느냐도 관계가 없고, 아느냐 모르냐도 관계가 없고, 그냥 사람 그대로. 원래 사람 그대로 밖에는 없단 말이야. 여기서 우리가 만나지면 하나구나, 하나. 여기서 만나지면 다 똑같구나. 나는 그때 보고 예수님과 내가 하나구나.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봐도 너와 나는 하나구나.
지금 너는 내 손자고 내가 할아버지잖아. 그런데 여기서는 그것도 아닌 거야. 너도 사람, 나도 사람. 다 사람이지. 여기 있는 네 명이 다 사람이야. 할머니도 아니고 이모도 아니고 그냥 사람. 아는 것도 다 다르잖아. 다른 거는 상관없고 다 사람. 사람이라는 거야. 하나님은 이 사람을 찾고 있어. 그래야 자기가 잃어버린 사람 찾은 거잖니. 이 사람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이 좋았다고 그랬다.
심히 좋다. 뭐가 있는 사람보고 좋아하는 건 아니고, 가지고 있는 사람보고 좋아하던 게 아니라 바로 지금 거기 있는 그 사람. 예수처럼 그렇게 실체가 드러난 그 사람을 좋아한거지. 왜? 그 사람이 필요하니까! 영이요 생명이신 하나님에게는 바로 그 사람이 필요해.
서로가 가난하니까. 영이요 생명이신 하나님에게는 형상이 없고 사람은 형상이 있는데 죽어 있어 생명이 없으니까. 그렇게 딱 생명을 만나면 되잖아. 그러면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거야. 그러면 하나님이 창조했던 창조가 회복된 거잖아. 그분한테 가니까 모든 사람이 그 안에 다 있어. 어떤 사람도 예외가 없이 전부. 그것을 보고 포함이라고 해. 포함.
지금까지 많은 성인 군자들이 왔는데 만민을 포함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공자님한테 가면 ‘어떻게 공자님처럼 됩니까?’ 물어보면 배워라 배워. 학이시습(學而時習)이잖아. 불역열호(不亦說乎)아. 내가 배우고 또 익히면 이게 어찌 아니 기쁘리오. 그래서 사람을 평가하기를 배우지 않으면 도를 모른다는 거야. 도를 모르면 짐승과 같다. 이것이 유교사상이라. 거기는 사람이 다 다르지, 배우니까. 배우는 데를 가면 다 다르잖아. 석가모니한테 가면 뭐라 하겠냐. 이 세상 모든 건 다 허사다. 이걸 네가 알려면 수양을 해라. 그럼 나같이 된다. 네가 이런 경지에 오를 수 있다.
영관: 그러니까 거기는 수양을 해야 되는 거죠.
할아버지: 그래, 수양을 해야하는 거지. 그런데 수양을 하면 사람마다 다 똑같은가? 아니란 말이야. 또 공부하듯이 말이야, 등급이 생길 거 아니야? 큰 스님, 작은 스님 이래, 거기도 하나가 안 되지. 예수님한테 가면 특이한 게 있어. 어디를 가도 배우라 그러든지 아니면 수양해라 이런 거든. 어느 종교도 다 똑같아. 예수님한테 가면 배우라, 수양해라. 이런 말이 별로 없어. 없고 뭘 물으면 대답이 시원찮아.
내가 아버지께로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너희를 내 있는 곳에 오게 하겠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묻기를, 가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기업이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됩니까? 물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리 이리 가면 된다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고, 내가 곧 그 길이다. I am the way. 내가 곧 그 길이다. 그러니까 대답이 이상하잖아. 부산 가려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이래저래 차를 타고 이렇게 간다. 이러면 되는데 내가 곧 길이다, 그러면 길이 없잖아.
진리가 무엇입니까? 물어보는데 내가 곧 진리다. 이래버리면 진리가 뭔지 모르잖아. 생명이 무엇입니까? 내가 곧 생명이다. 이래버리면 할 말이 없어지는 것 아니냐. 그래서 긴밀히 묻기를, 그러면 우리 아버지를 좀 보여주십시오. 그랬단 말이야. 그러니까 봐라. 내가 이렇게 함께 오래 있었는데 아버지를 또 보여달라 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거다. 이렇게 대답했단 말이야. 그러니까 기껏 해온 이야기가 말짱 다 헛일이 되어버리고 이 사람밖에 안 남았잖아. 그러니까 답이 없는 거야. 답이 없어.
왜 이렇게 답이 없냐면 내가 하나님과 하나 되는 데는 방법이 있는 게 아닌 거야. 나라는 사람이야. 형상으로서 나라는 사람. 이 사람만 필요하지, 내가 뭐 아는 것도 소용없고 지식도 소용없고 아무것도 소용없어. 하나님은 사람을 찾고 있으니까.
희랍 사상, 철학이나 희랍사상은 무엇이든지 객관화해서 내놓고 내가 그것을 다시 소유할 수 있는, 그런 걸 되게 하려는 것이 희랍사상이고 여기서 과학이 발달했어. 가령 장미꽃을 키우면 장미 향기가 저절로 나는 거잖아. 그런데 장미는 안 키우고 장미향만 필요하단 말이야. 그러면 장미향을 어떻게 뽑아가지고 그것을 과학적으로 연구해서 분석해가지고 그걸로 다시 향을 만들어내는 이것이 과학이야. 사람은 생각할 때 이거 이 장미향이네 이렇게 생각하는데 벌은 이것이 장미향이 아니기 때문에 안 오는 거야. 사람은 지금 이것이 뭐 잘못 되어서 그 냄새가 나는 그것인 줄 아는데 벌이나 나비는 알기 때문에 안 오는 거야, 안와.
사람은 뭐가 감각이 잘못 된 거지. 그러니까 장미향이 뭐냐? 그러면 예수님 같으면 내가 장미다. 이럴 것 아니냐? 장미도 장미향이 뭐냐? 그러면 내가 장미다, 내가 향이다. 이럴 것 아니겠어? 그런 대답하고 똑같아. 그러니까 사람 자체가 답이라는 거야.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는 사람이 곧 답인 거야.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은 어떻게 연합하는가? 아까 말한 대로 흙과 씨, 여자와 남자, 이렇게 연합하는 거야. 아기를 낳았는데 여자가 그렇다고 아기가 되는 것도 아니고 남자가 되는 것도 아니잖아. 흙이 밭이 되어서 열매를 생산했는데 그렇다고 흙이 열매가 되는 건 아니야. 이것이 연합이라는 거야. 우주 만물이 그렇게 만들어졌어. 그러니까 우리 인생을 살 때도 마찬가지로 꼭 필요한 것끼리 만나는 것이다. 이게 연합인 거야.
이렇게 되면 인생이라는 게 이제 아주 단순해지지. 상대적이야. 서로 만나야 되고 하나가 되야 해.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게 뭐냐면 아, 인생은 내 혼자 될 수 있는 게 아닌 거구나. 뭘 해도 이것이 연합이 돼야 되는구나. 내가 혼자는 안 되는 거구나. 이것만 발견해도 인생사는 게 아주 쉬워진다.
선생이 있어서 배운다고 하면 쉽지만 혼자 공부하려면 어렵잖아. 그래도 그런 건 혼자 해도 할 수가 있는데, 그런데 이 인생은 혼자 안 되는 거야. 혼자 못 사는 거야. 예를 들어 좋은 친구도 필요하고 좋은 선생님도 필요하고. 그렇지? 내 잘난 맛에 살면 안 된단 말이야. 상대적인 거야. 좋은 친구를 만나면 나도 좋은 사람이 되고 나쁜 친구 만나고 나쁜 사람이 되고. 그런 세상의 이치를 알면 지혜로워져. 여기 내가 필요한 게 생기는구나.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원리처럼 비행기 안에서 그냥 사람이 있으면 가는 건지 안 가는 건지 모르잖아. 창밖을 봐야 내가 가는 게 보이는 거 아니냐, 그치? 그러니까 내 혼자 간다 할 수도 없고 안 간다 할 수도 없지. 외부와의 관계 안에서는 가고 있는 거지. 바깥 세계와 나하고의 관계에서 나는 가고 있단 말이야. 이 관계가 없으면 나는 간다 안 간다가 없는 거지.
그래서 사람은 아주 단순한 거야. 이렇게 살면 사람이 너무 지혜로운 사람이 되지. 그렇잖냐. 이 복음은 사람이 사람 되는 복음이야. 다른 사람이 아닌 참 사람. 원래 있는 사람, 영원히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되는거야. 다른 게 아니라 사람이 사람 되는 것이 성공이다. 소나무가 소나무 되는 것이 성공이잖아. 벼를 심을 때 벼가 되면 성공이잖아. 거기에 다른 성공이 없잖아. 벼를 심었으면 벼 되는 게 성공이고 인생도 하나님이 지었으면 그 인생이 되는 게 성공이야. 내가 처음 와서 보니까 내가 아무것도 없어진다 해도 내가 너무 부유한 거야. 왜냐하면 항상 가능성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면 나는 풍요로워질 수도 있고 지혜로워질 수도 있어. 사용하시면. 사용 안 하면 나는 그냥 기계나 마찬가지야. 아무리 좋은 차라도 좋은 주인이 와서 잘 사용하면 좋은 차로 쓰여질 수 있고 아무리 좋은 차라도 뭐 주인이 안 좋은 일에 쓰면 안 좋은 차가 돼버린 거잖아. 사람도 마찬가지로 누가 나를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어. 누가 쓰느냐에 따라, 내가 누구하고 사느냐에 따라서 내가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어. 나 혼자 된 건 아무것도 없어. 홀로 되는 것은.
세상은 너 똑똑해라 이거잖아? 너 혼자 잘나봐라 이거잖아. 우리 이름을 빛내자. 높이 오르자. 하늘에 오르자. 그래서 우리 이름을 빛내자. 이게 바벨론이야. 그런데 그것이 무엇으로 만들어 졌나? 흙을 이겨서 벽돌로 만든 거야. 흙은 벽돌 되면 죽는 거지. 끝나는 거야.
흙의 최대의 가치는 벽돌에 있는 것이 아니고 농사를 짓는 데 있어. 인생은 인생으로 쓰여지는 데 가치가 있어. 인생으로. 벽돌로 쓰여지면 가치가 없고 죽은 것이지. 흙은 아무 것도 아닌데도 살리는 능력이 있어. 그런데 벽돌은 살리는 능력이 없어. 한 번 벽돌이 되어버리면 끝이야. 그런데 사람들이 다 벽돌이 되려고 해.
흙이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어. 내가 씨를 받아가지고 나한테도 열매가 많이 열렸네. 옥수수가 끝없이 열렸는데 어느 날 주인이 와서 다 걷어가 버렸어. 그럼 나는 빈 밭이 되었네. 야 허망하네. 내 인생은 아무것도 없네. 이러면 허망한 거잖아. 또 아니면 엉겅퀴가 막 나가지고 쓸 데가 없어졌다. 그래도 인생이 허망하잖아. 그런데 좋은 열매를 맺어가지고 주인이 가져갔다는 것에 대해서 나 같이 흙인 사람이 이렇게 좋은 열매를 맺어서 주인에게 드려지네. 이러면 영광스럽게 되는 거잖아.
무슨 밭인가에 따라서 내 인생은 영광스러워질 수도 있고 비참해질 수도 있고 그래. 세상에서는 한다고 열심히 했어. 열심히 했는데 나온 게 엉겅퀴야. 그러면 인생이 허무해지는 거야. 안 그렇겠나? 농사짓는다고 지었는데 나온 게 엉겅퀴뿐이다, 그러면 허무할 거 아니냐. 농사를 짓는다고 지었는데 주인이 즐거워하며 가져갔다. 그러면 내년에 또 주인이 와서 씨를 또 뿌릴 것이고 해마다 나는 좋은 밭이 되는 것이지. 그런데 엉겅퀴 뿌려진 곳은 해마다 농사짓는 사람 주인이 없으니 허망해지지.
인생의 행복과 불행도 여기에 달려있어. 누가 쓰느냐에 따라서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어.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영광스러워지고 하나님이 사용하지 않고 누군지 모르는 어떤 사람이 사용하면 나는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마는 거지. 나를 하나님이 지금 안 쓰신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 안 그렇겠냐? 그런데 쓰시니까, 하나님이 쓰시니까 내가 내 정체성이 생긴단 말이야. 나는 이렇게 쓰여 지는 거구나. 누구를 만나도 할 말이 있어. 나를 자랑할 말이 있다는 말이야.
누구를 만나도 나를 자랑한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그 사람을 자랑할 수 있는 거야. 내가 성공하겠다고 자랑하거나 돈 있다고 자랑하면 사람들이 듣기는 좋아해도 뒤로 돌아가면 욕해. 지 잘난 척 한다고. 이것은 내가 잘난 척 한 게 아니잖아. 당신도 나와 같은 사람이야. 그 말을 하는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그 사람도 결국 알아들으면 좋아하지. 참 사람은 그런 사람이네.
지금 우리 교회에 전파된 복음이 바로 이거다. 다른 게 아니고.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모든 사람이 하나로 포함돼. 거기에 진정한 평화도 있고 진정한 평등도 있고 참 자유도 거기 있어. 모든 데서 다 해방돼. 세상에 자유가 왜 없나? 물론 정치적으로 독재가 있는 사람에게 자유가 따라다니지. 그런데 그건 잠시뿐이야. 오히려 자기 스스로가 매어 있어. 누가 뭐라고 그런 것도 아닌데 말이 나는 왜 아무 것도 못 하나? 하잖아. 자기한테 매여서. 그런데 자기한테 매이지 않으니까 자유로워지지. 그리고 너나 나 똑같은 사람이니까 경계심이 없어져버려. 사람한테 대한. 그냥 자유롭잖아. 그냥 그 사람도 나한테 자유롭게 돼. 무장할 필요가 없잖아.
저 사람이 나한테 무슨 피해를 끼칠 것인가 이럴 필요도 없고, 내가 그 사람을 또 그렇게 볼 필요도 없거든. 충분히 자유가 생겨. 평화가 생기는 거야. 인간들이 지금 그런 걸 추구하고 있어. 평등 평화 자유 이런 걸 추구하고 있잖아.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소유의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평등하지도 못하고 자유롭지도 못하니 사람들은 뭘 내놓고 살잖아. 너는 뭐 하는 사람이냐? 명함, 간판, 그것을 내놓는단 말이지. 그건 알고보면 내가 아니지. 내 기능이고 소유일 뿐이지 내가 아니잖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니 내가 두려워 숨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야. 떳떳하지 못해. 항상 당당하지 못하고. 자기 위치로 이탈했기 때문에, 그런데 이 위치로 돌아오면 내가 떳떳해져, 누구한테도. 있는 사람한테 가도 떳떳하고 없는 사람한테 가도 떳떳해. 높아질 이유도 없고 낮아질 이유도 없어. 내 실체가 드러났으니까, 그러니 얼마나 편하냐? 높아지려고 하니까 불안하고 남보다 나아지려고 하니까 힘든 거지. 그렇잖아?
세상에서 사는 것은 그냥 내가 한 만큼 사는 거야. 내가 열심히 하면 그만큼 내가 많이 소유할 수 있는 거고 열심히 안 하면 못 가지는 거지 뭐, 당연하게. 열심히 안 해서 못 가져놓고 뭐, 재수가 좋아서 그랬다느니 특혜를 받아서 그랬다느니, 왜 자기는 못하고 남 보고 그러고 있냐. 뷔페식당에 가면 마음대로 먹으라고 해놨잖아. 자기가 좋은 거 골라 먹으면 될 텐데. 일부러 잘못 골라 먹고 배탈이 나면 누구 책임이고. 자기 책임이지.
영관: 그런데 할아버지가 예수가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고 죽은 사람이라는 말씀을 처음부터 하신 게 아니잖아요. 그 말씀을 하신 게 언제쯤 부터에요?
할아버지: 처음부터 했는데 그렇게만 말을 하지 않았던 거야. 내가 아브라함 얘기할 때도 그 얘기, 이삭 얘기 할 때도 그 얘기, 야곱 이야기할 때도 그 얘기했어. 내가 왜 그걸 좋아했냐면 아브라함이 한 때는 믿음이 좋았어.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대. 하나님이 이를 그의 의로 여겼다고 했어. 그런데 뭐가 되어버렸냐면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아버렸지. 하나님이 원치 않는 아들을 낳아버렸어. 그 후 13년 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그렇게 살다가 100살이 됐을 때 하나님의 사자들이 와서 하는 말이 내년 이맘 때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이랬거든.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믿음이 없어졌다는 말이잖아. 그런데 아니다. 반드시 내년 이맘 때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믿음이 없다고 책망한 게 아니고, 아니다. 너 생각하고 다르게 내년에 꼭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도 장막 뒤에서 웃었다고 되어 있어.
웃기십니다. 이런 뜻이지. 그런데 이삭을 받은 거라. 그것을 내가 볼 때 아주 좋았어. 왜냐하면 내가 힘이 다할 때 또 하나님이 주신 게 있구나. 내 힘만이 전부가 아니구나. 그걸 알았단 말이야. 나는 원래 그렇게 산 사람이야. 내 힘으로만 산 게 아니고 주신 것으로 살았단 말야. 그러니까 나는 그걸 만날 때 나를 만난 기분이었단 말야. 그러니까 그 아브라함 얘기를 좋아했던 거야.
이삭은 가는 데마다 아버지 아브라함 시대에 팠던 우물을 열어가지고 사용했던 사람이야.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우물을 빼앗는 거라. 빼앗으면 또 가서 파고 또 파고. 마지막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아무리 봐도 이거 보통 사람이 아니네. 우리가 이렇게 했는데 망할 줄 알았는데 안 망하고 점점 더 잘 돼 간단 말이야. 그래서 와가지고 거꾸로 무슨 얘기를 하냐면 우리를 침략하지 않겠다고, 해하지 않겠다고 명세해 달라는 거야. 그래서 이삭이 그렇게 했던 것 아니냐. 우리가 서로 침략하지 말자 이렇게 약속했지.
그런데 이삭은 자기 큰 아들 에서를 축복하려고 했어. 에서가 그 말을 듣고 밖으로 별미를 만들러 나가있는 동안에 야곱은 집에서 어머니가 만들어 준 별미를 가지고 와서 아버지 내가 에서입니다. 그랬다는 거야. 아버지 이삭은 눈이 어두웠어. 구별을 못했단 말이야. 음성을 들어보니까 야곱의 소리인데, 어디 팔 좀 만져보자 해서 만지니 털이 있더라는 거야. 에서는 털이 많았던가봐. 음성을 들으니 야곱인데 팔을 만져보니 에서네. 그래서 축복을 해버렸잖아.
그 축복을 했다는 말은 그냥 말이 아니고 상속권을 갖는다는 거야. 아버지 재산과 권세와 그 모든 걸 다 준다는 뜻이야, 이게. 그래서 야곱은 아버지를 속여가지고 그 장자권을 획득했고, 에서는 늦게 와서 못 받았다는 거야. 이상한 일이잖아. 분명히 야곱이 잘못했고 또 이삭이 잘못한 건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잘못한 걸 탓하지 않고 야곱을 인정했던 거야. 그게 이스라엘의 조상이 됐어.
왜냐하면 하나님은 야곱이 필요했던 거야. 그래서 그 필요한 것을 이삭이 했는데 이삭은 자기가 모르고 한 거거든. 자기 생각으로 했으면 분명히 에서를 축복했을 건데 그러면 하나님의 일은 안 되고, 눈이 어두운 다음에 하니까 자기는 속았는데 하나님의 일은 됐단 말이야. 그걸 들을 때도 내가 재미있는 것이 아 사람이 실수도 할 수 있구나. 실수할 수 있는데 실수한다고 다 망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실수가 있구나. 이걸 보게 됐어. 내 인생에 희망이 생기더라. 나도 잘못할 수 있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좋게 쓸 수도 있구나. 이러니까 내가 숨이 쉬어지잖아. 한 번 실수하면 그만이다 이랬으면 완전 망하는데 말이지.
야곱은 거짓말하고 도망을 가서 20년간 고생을 해. 어찌하든 자기 집을 세워보려고 노력을 했던 사람이거든.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 잃어버리고 빈손이 되어 애굽으로 내려가는데 그때 할아버지처럼 고관절이 부러져서 절름발이가 되어 버렸어. 눈은 어둡고 나이는 130살이 되었어. 그런데 요셉이 잘 돼 있었기 때문에 요셉 앞에 끌려가 인도되어서 바로 앞에 섰단 말이지.
바로는 임금이잖아. 그런데 그때 거기서 특이한 일이 있어. 그 바로를 보고 두 번이나 축복했단 말이 나와. 축복은 위의 사람이 아랫사람한테,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한테 하는 게 축복이거든. 그러면 말이야, 130세의 노인, 절름발이, 그리고 양식이 없어서 온 사람, 눈이 먼 사람. 이 사람에게 뭐가 있다고 바로를 축복하겠냐? 속에 뭔가 자기에게 넘치는 뭐가 있었기 때문에 축복한 게 아니겠냐? 사람이 아무것도 없어도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있구나. 남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있는 사람, 그래서 내가 좋아했거든. 지금 내가 그 모양이거든. 아무것도 없어. 건강도 없고. 그런데 남에게 줄 것이 가득 있는 거야. 누구에게 줄 것이 많아.
내가 이걸 주면 복이 되겠다, 이런 게 많아. 그러니까 그때 봤던 것이 나에게 딱 맞는 거야.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이 내 눈에 보이니까 그 뒤로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온 거지. 그런데 마지막에 오니 그대로 되잖아. 하나님 말씀한 대로, 야곱에게 일어났던 일과 같이, 이삭에게 일어났던 일과 같이, 아브라함에게 일어났던 같은 일이 내 일생에서 반복되었단 말이야. 그러면 너희한테도 마찬가지로 그런 일생이 또 이루어지는 거야. 그런데 그게 축복이지.
이 길로 왔으니까, 이게 이 길의 마지막 결론이거든.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사람. 하나님의 아들 같은 사람인데 십자가에서 못 내려왔으니까 아브라함이 100살 된 거나 마찬가지 아니냐? 이삭이 눈이 멀어서 잘못 축복한 거나 마찬가지 아니냐? 야곱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가서 바로를 축복하는 것도 마찬가지 아니냐? 열매인거야. 이런 것을 위해서, 이 사람을 위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이 한 사람 안에 다 들어있는 거야.
내 안에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들어있어. 그 사람이 이스라엘의 근본이 되었고 인생의 근본이 되었어. 그러니까 언제 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아. 구체적으로 이 말을 한 것은 한 7년 전인가 5년 전인가 되었는데, 그전에도 이 이야기를 해왔어. 여기에 오니까 내 인생의 결론이 생기고 열매가 딱 생겨나. 내가 여기 오느라고 모든 일이 있었구나.
나는 앞으로 얼마동안 살 것인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지만 나는 열매를 거두었다. 하나님이 내 인생에서 열매를 거두었어. 알쏭달쏭하지? 알 것 같으면서도 또 모르겠지? 그러니 늘 들어야 돼.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어. 이것은 내가 땅에서 기어서 만들어가는 세계가 아니야.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니 듣지 않으면 안 돼.
나는 시골에 살 때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는데 병들어서 몇 년 교회를 쉬고 스무 살 때 아버지가 하시던 생업을 맡아서 했단 말야. 그러니 생업 걱정을 안 했어, 장사하던 집이니까. 그것을 물려받아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잘 안되어서 다 망해버렸어. 아무것도 없이 되어버렸어.
그러고 나니 앞날이 암담했거든. 그런데 한편으로는 내가 교회를 다니면서도 하나님이 있는가? 없는가? 이것이 고민이었어. 그런 의심이 생겼어. 교회를 가면서도 속으로 내가 왜 가지? 하면서 갔어. 그래서 세례 받으라는 것도 안 받고 미루었거든.
그런데 어느 날 나는 내일 일도 모르네, 이런 것을 알았어. 실제로 돈이 다 떨어져서 내일 밥을 어찌 먹을지 몰랐어. 그런데 어떻게 한 끼도 안 굶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내일 일도 모르는데. 이렇게 아니까 그동안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생각이 싹 날아가 버렸어. 내가 내일 일도 모르는데, 하나님이 있거나 없거나가 무슨 상관이 있겠냐.
그동안 내게 있던 버블, 거품이 싹 가라앉았어. 맨땅에 딱 엎드려있는 내 자신이 보이대. 이래서 인생은 피조물이구나 그렇게 알았지. 하나님을 안 것이 아니라, 나를 안 거야. 나는 피조물이구나. 내가 만일 주인이라면 내 마음대로 할텐데, 내 마음대로 못하는 자리에 있다 보니까 나는 내 마음대로 있는 게 아니네. 아버지 어머니가 있어서 내가 있고, 또 아버지 어머니 위에 아버지 어머니가 있고, 나는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네, 이런 생각이 들어왔어.
그때 이상하게 복잡한 생각이 없어지고 내 마음이 편해지더라. 나는 피조물이구나. 그러면 내가 왜 지어졌을까? 이런 생각이 났어. 그때 일기장에 ‘하나님 나를 뭐하러 만들어놓았습니까?’ 이렇게 하고 있었는데, 꼭 귀신이 들은 것처럼 멀리 있던 친구가 나한테 편지를 했어. 요즘 어떻게 지내냐? 그래서 솔직히 내 있는 대로 말을 했지.
그랬더니 대번에 편지가 왔어. 하나님이 너를 살려주셨으니 하나님을 위해 일할 생각이 있느냐? 있으면 말하라. 그러면 내가 길을 알아보겠다고 편지가 온거야. 나는 그때까지 내가 죽을 자리에서 하나님이 나를 살려주셨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해 봤거든. 병원에서 마지막 선고를 받고 나왔는데 하나님이 나를 고쳐주셨다는 생각을 못해봤어.
그런데 뒤로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더라고. 내가 입원한 곳이 광주 제일병원이라고 선교단체에서 만든 병원인데 검사하니 결핵균이 나왔단 말야. 그래서 입원하고 두 달 동안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만 있었어. 약을 너무 많이 써버려서 내성이 생겨 쓸 약이 없으니 누워만 있으라고 하더라고. 그렇게 누워있는데 이상하게 그 심하던 기침이 서서히 없어져 버렸어. 두 달 만에 정기검진을 하는데 결핵균이 안 나온다. 두 번 세 번 검사해 봐도 안 나오니 균이 없으니 입원해있을 필요가 없으니 나가라는 것이야.
담당의사가 날더러 조심조심해서 살라고 하더라. 그때 이미 폐 한쪽이 다 없어졌거든. 그렇게 나왔으니 객관적으로 보면 참 특이하게 살아났다, 그런 생각을 할 만 하잖아? 그런데 난 그렇게 전혀 생각을 안해 봤어. 그런데 나를 알고 있는 동네 사람들은 다 그렇게 알아. 저 사람은 어려서부터 교회에 착실히 다니더니 하나님이 살려주었다고. 그 당시에는 결핵환자가 많이 죽었어.
친구에게 편지를 받고 난 후, 첫째 날 생각하기를 내가 어머니를 혼자 두고 무슨 수로 집을 나가서 나갈 수 있다는 말인가? 하였지만, 둘째 날 잠을 자고 일어나니 내가 하나님께 왜 나를 지었습니까? 했던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날 아침에 일찍 편지를 또 써서 목포 가는 배편에 부쳤어. 그때부터 20일 만에 아무 준비도 없이 집을 떠나왔어. 그 고향 같은 곳을 떠나게 되었지. 만일 안 그랬으면 나는 그곳에서 돈 한 푼 없이, 돈 대줄 사람 하나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 도저히 상상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