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황량한 벌판의 고창고성(高昌故城)
투루판 동쪽 40km 지점 황량한 불모의 땅에 있는 고창고성(高昌故城)은 기원후 5세기 회족(回族)이 세운 고창국(高昌國)의 수도로, 외성(外城)과 내성(內城)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내성만 있다.
성안은 엄청나게 넓어서 당나귀가 끄는 마차를 타고 중간쯤 갔다가 돌아오는데도 시간이 제법 걸린다. 붉은 흙벽돌로 지은 성벽과 건물들은 건조한 날씨 탓에 많이 훼손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옛 윤곽을 알아볼 수 있게 남아있다.
천축(天竺-印度)으로 가던 현장(玄奘三藏)법사 일행이 이 고창국(高昌國)에 들렀는데 고창왕은 불교에 심취하여 현장법사(玄奘法師) 일행을 놓아주지 않고 계속 설법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유적 중에는 설법을 듣기 위해 특별히 지었다는 건물도 있는데 신하들이 설법을 듣기 위해 모이면 왕이 엎드려 현장법사가 왕의 등을 밟고 연단에 오르게 하였다는 방과 설법대(說法臺)도 보인다.
고창고성(高昌故城) 유적 / 교하고성(交河故城) 유적
현장법사는 이곳에 1년여 머무르며 설법을 하였고, 돌아오는 길에 꼭 다시 들러 불경도 나누어주고 설법도 들려주겠다는 약속을 하자 고창왕은 천축국까지 가는 동안 지나치는 모든 나라의 왕들에게 통행증을 써주어 현장(玄奘) 일행은 무사히 천축(天竺-印度)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 한혈준마(汗血駿馬)와 고창국의 멸망
이 지역에서 기르는 말은 달려도 지치지 않는 명마로 달릴 때 핏빛 땀을 흘려서 한혈준마(汗血駿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 말(馬)을 탐낸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은 사신을 보내 많은 돈을 줄 터이니 말을 보내달라고 하자 고창왕은 당나라가 그 말을 타고 쳐들어올까 걱정되어 사신을 죽여 버렸다고 한다.
격노한 당태종은 군사를 보내 고창국(高昌國)을 멸망시켰고, 천축(天竺/인도)에서 불경을 싣고 돌아오던 현장 일행은 고창국이 멸망하였다는 말을 듣고 다른 길로 돌아서 중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 현장(玄奘 혹은 三藏) 법사의 16년간 5만여 리의 구도(求道) 여행을 손오공(孫悟空), 저팔계(豬八戒), 사오정(沙悟淨)을 등장시켜 소설화한 것이 서유기(西遊記)인데 실제 현장법사의 여행은 7세기 당나라 때 이야기이고, 소설로 쓴 사람은 16세기 명나라 시대(明代)의 작가 오승은(吳承恩)으로 소설(小說)이다.
삼장법사가 자신의 여행을 직접 기록한 것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인데 이것은 실제 여행기인 셈이다.
고창국 유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스타나(阿斯塔那) 지하묘도 있는데 3~7세기(世紀)에 축조된 고분군(古墳群) 유적이다.
이 유적은 그리 넓지는 않지만 수많은 미라와 유물이 나온 것으로 유명하며 지하 묘실(墓室)에는 채색벽화도 잘 보존되어 있어 당시 이 지역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15. 강안(江岸)의 요새 도시 교하고성(交河故城)
투루판 남쪽 5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교하고성(交河故城)은 두 강줄기가 만나는 곳의 중간 지점에 있는 천혜의 요새(要塞)로 축조된 성(城)이자 도시인데 고대 교하국(交河國/2세기)의 수도(首都)였다고 한다.
강의 양안(兩岸)은 절벽을 이루고 있으며, 그 가운데 버들잎 모양의 3km 정도 기다랗게 형성된, 요새 형상인 교하고성(交河故城)은 지하 3층까지 굴을 뚫어 도시를 형성하고 있다.
고창고성과 비슷한 형태로 붉은 흙벽돌로 지은 건축물들은 훼손이 심한 편이지만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고 건물들의 안내문도 잘 설치되어 있다. 더운 사막 지역이다 보니 지하도시가 훨씬 시원했을 것이고, 절벽 아래 강에서 물을 끌어 올려 저장하였던 시설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