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막의 고장' 벌교 가서 주먹 자랑하지 마라
이돈삼입력 2022.09.04. 17:36
담살이 의병장 안규홍의 이야기 살아 숨쉬는 '항일의 고장' 전남 보성
[이돈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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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교 주먹’의 상징 조형물과 안규홍 의병장 동상. 보성군 벌교읍 선근공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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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에서 돈 자랑하지 말고, 장성에선 인물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 벌교에 가면 주먹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 오래 전부터 전해지는 말이다. 나름 고개가 끄덕여진다. 바다가 넓은 여수는 고기잡이로 돈을 많이 벌었다는 이야기다. 장성은 학덕 높은 하서 김인후와 고봉 기대승, 노사 기정진의 영향이 크다.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이라는 말도 있다.
그런데, 벌교는 주먹과 무슨 상관이 있지? '벌교 주먹'에는 왠지 좋지 않은 이미지가 앞선다. 벌교에 폭력을 쓰며 행패를 부리는 깡패가 많았다는 이야기일까? 아니면, 말이나 행동이 거친 왈패가 많았을까? 궁금증이 <벌교 100년사>에서 풀린다. 일제강점기 의병들의 투쟁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벌교주민(한만호, 손공현)의 구술이었다.
'장터에서 나뭇짐을 지고 내려오다가 보니께. 일본 헌병들이 조선사람 장사꾼들을 발로 걷어차고, 짐짝들을 막 집어던져 불면서 횡포를 부리고 있었던 모양이여. 이걸 보고 못 참은 안 대장이 지겟짐을 떡 받쳐놓고 쫓아와서, 그대로 주먹으로 대그빡 헐 것 없이 몇 대 쳐분께 그냥 쫙 뻗어불드라여.'
<벌교 100년사>에 따르면 1908년 젊은 장사(안규홍)가 벌교장터에서 일본 헌병을 맨주먹으로 때려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일본사람들의 두려움이 '벌교 주먹'으로 표현됐다는 것이다. 일본에 맞선 안규홍과 보성사람들의 저항정신이 해방 이후에도 '벌교 주먹'의 전통으로 이어지고, 약자를 괴롭히는 이들에 대한 '정의의 주먹'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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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교 주먹’의 상징이 된 안규홍 의병장 동상. 보성군 벌교읍 선근공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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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경로당에서 내려다 본 법화마을 풍경. 민가와 경로당 사이에 논이 자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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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교 주먹'의 상징이 된 안규홍(1879~1911)은 의병장이었다. 1908년 보성에서 의병을 모으고, 전라도 일대에서 일본군과의 싸움에 나서 파청대첩, 진산대첩, 원봉대첩에서 대승을 거뒀다. 파청은 보성군 득량면 버들고개, 진산은 보성군 문덕면 진산마을, 원봉은 보성군 복내면 원봉마을을 가리킨다.
하지만 일제의 '남한폭도(의병) 대토벌작전'으로 일본군에 붙잡혔다. 1911년 대구감옥에서 31살의 나이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전해산, 심남일 등 유생 출신과 달리 안규홍은 머슴 출신의 의병장이었다. 정유재란 때 의병장이었던 문강공 안방준(1579~1654)의 10대손이기도 하다.
안규홍은 1879년 4월 10일 보성읍 우산리 택촌에서 태어났다. 4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친척뻘 되는 박제현에 의지해 살았다. 10살 때부터 머슴살이를 시작, 20여 년 동안 머슴으로 살았다. 안규홍을 '담살이', 그의 의병부대를 '안담살이 의병'이라 부르는 이유다. 담살이는 꼬마 머슴을 일컫는 지역말이다.
안규홍이 죽은 뒤에 쓰여진 <담산실기(澹山實記)>에 의하면, 그는 매우 강직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다. 횡포를 부리던 세금 징수담당을 혼내줬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 일제의 토지 침탈과 일본인들의 횡포를 보고,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투쟁에서 큰 자극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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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화마을 풍경. 여름 한낮이어서 그런지 오가는 사람도 없어 더 한적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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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박제현의 옛집. 사랑채 보수공사가 이뤄지기 전의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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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규홍은 의병을 모았지만, 머슴과 가난한 농민들만 모였다. 무기도 낫과 곡괭이뿐이었다. 양반들한테 도움을 청했지만, 돌아온 건 손사래였다. 머슴과 함께 활동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 것이다.
안규홍은 머슴과 농민들을 데리고 관동 출신의 강용언 의병부대에 들어갔다. 강용언은 일본군을 피해 순천으로 내려와 있었다. 안규홍은 그 부대의 의병장으로 추대되고, 의병의 수를 늘려갔다. 조직도 정비했다. 염재보를 부장, 이관회를 선봉장으로 삼았다. 자신이 머슴살이하면서 주인으로 모셨던 박제현을 운량관으로 삼았다. 운량관은 군량을 조달하는 역할을 했다.
1908년 4월 법화마을 뒤 동소산에서 의병의 기치를 든 안규홍 부대는 욕심 많고 못된 관리와 친일세력 제거에 나섰다. 활동 자금은 박제현과 지주들의 도움을 몰래 받았다. 세금 징수원을 공격하고, 난폭한 지주의 소작료나 재산도 빼앗았다. 빼앗은 소작료의 일부를 농민에게 되돌려주기도 했다. 농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안규홍 부대는 보성․순천 등지에서 일본군과 26차례 맞섰다. 일본군과 일본인 순사 그리고 일진회원 등 200여 명을 죽였다. 1909년엔 전해산․심남일 부대와 전남의병 연합부대를 구성, 나주 일대에서 합동작전도 펼쳤다.
그해 여름부터 일본군의 탄압이 거세졌다. 9월엔 '남한폭도 대토벌작전'이 펼쳐졌다. 일본인 보병과 해군이 한꺼번에 투입됐다. 의병들은 동요했다. 가공할 화력을 동원한 일본군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후일을 기약하며 의병의 해산을 명령하고 돌아가던 안규홍은 9월 25일 일본군에 붙잡혔다. 안규홍이 교수형에 처해지고 2개월 뒤, 대한제국은 일본에 강제 편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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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화마을 표지석.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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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 지어지고 있는 박제현 옛집의 사랑채. 안규홍이 머슴살이를 하며 살았던 집이 보수공사를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지어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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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규홍이 머슴살이를 했던 곳이 법화마을이다. 오래 전 법화사 주변에 형성된 마을이다. 법화사는 천봉산 자락에 대원사를 창건한 아도화상이 동소산 아래에 지은 절집이다. 마을 이름도 절집에서 따 왔다. 1400년께 순창조씨가 처음 들어오고 뒤를 이어 파주염씨, 진원박씨가 들어왔다. 풍수지리로 볼 때 마을 자리도 좋아 전란의 피해가 없었다고 전한다. 행정구역은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동산리에 속한다.
안규홍이 살았던 집은 마을 안쪽에 있다. 2017년 12월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안규홍이 머슴살이를 하며 살았던 사랑채는 물론 집주인 박제현이 살았던 안채도 함께 지정됐다. 그의 어머니와 부인이 살았던 집터는 현재 텃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집안이 온통 공사판이다. 허름하고 낡은 사랑채를 해체하고 다시 짓고 있다. 보성군 관계자는 "지난 7월에 공사를 시작했고, 올 추석 전까지는 끝낼 예정"이라고 했다. "내년엔 예산을 확보해 안채 보수 작업도 추진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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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규홍이 머슴살이를 하며 살았던 박제현 옛집의 사랑채. 보수공사가 이뤄지기 전의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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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제현의 옛집 앞으로 흐르는 시냇물. 빨래판이 만들어져 있고, 그 물에 어르신이 쌈채를 씻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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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앞으로 시냇물이 흐르고 있다. 동소산에서 내려오는 물이다. 한 어르신이 방금 밭에서 뜯어온 쌈채를 흐르는 물에 씻고 있다. 마을 담장에 그려진 벽화도 예쁘다. 시내에서 등물을 끼얹고, 빨래를 하는 모습이 옛 추억을 떠올려준다. 초가지붕에서 박을 따는 그림도 정겹다.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 고목도 멋스럽다.
법화마을에는 예부터 효자․효부가 많았다고 전한다. 효자와 효부를 기리는 비석이 여기저기 세워져 있다. 한국전쟁 등에 참여해 공을 세운 국가유공자의 집도 여러 군데 보인다.
마을사람들은 벼농사를 주로 짓는다. 산자락의 밭에 블루베리를 재배하는 집도 있다. 소를 키우는 축사도 보인다. 농사일이 바쁠 땐 품앗이를 하고, 마을경로당에서 식사도 함께 한다. 참 한가로운 산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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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화마을 풍경. 여름 한낮이어서 그런지 오가는 사람도 없어 더 한적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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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일보
첫댓글 진오님의 이력이 궁금합니다, 명재식 드림
요참에 지만원이 시키하고 전두환 시키 가루 똥통에다 부셔갔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