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淨空老法師🙏Who is Jesus?耶穌是誰?你要批評他 毀謗他 那是毀謗了阿彌陀佛?🙏
정공 스님(Venerable Master Chin Kung) 🙏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분을 비판하거나 비방한다면, 그것은 곧 아미타불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
가오펑 염불당(Gaofeng Buddha-Name Recitation Hall)
2023년 10월 12일
법신(法身)은 시작도 끝도 없으니,
망념은 흩날려도 그 본질은 본래 공(空)하도다.
극락정토는 적연부동 중에 자성(自性)의 공덕을 드러내고,
아미타불은 고요한 비춤(寂照) 속에 원만하고 걸림 없는 지혜를 나타내시네.
인연 따라 묘한 작용이 일어나 분별을 초월하니,
순경(順境)과 역경(逆境) 모두 반야 지혜의 공덕이 되도다.
한 생각 돌이켜 안으로 향하면 정토로 돌아가니,
시방삼세(十方三世)의 모든 중생이 하나로 만나는 곳이라.
法身無始亦無終
妄念紛飛體本空
極樂凝然彰性德
彌陀寂照顯圓通
隨緣妙用離分別
順逆皆成般若功
一念迴光歸淨土
十方三世總相逢
선도 대사(Great Master Shandao)께서는 저서 《찬례문(讚禮文)》에서 "극락정토는 무위(無爲)의 열반 경지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쇠퇴하거나 변함이 없이 영원히 고요하고 항상(恒常)하다"고 덧붙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경전에 나오는 '항상하다'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자성의 항상성, 즉 불변하고 확고한 항상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항상하여 쇠퇴하거나 변함이 없다"는 뜻은 참으로 아름답게 표현된 것입니다. 변화와 불변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임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변하지 않는 측면은 본질(체, 體)이고, 변화는 작용(용, 用)을 나타냅니다. 무엇이 이 변화를 주도하거나 다스릴까요? 바로 아뢰야식(Alaya-vijnana, 장식/藏識)입니다. 아뢰야식은 망심(妄心)입니다. 진심(眞心)은 변하지 않지만 망심은 변합니다. 망심이 아무리 변해도 그것은 여전히 거짓입니다. 망심 자체가 허상이기 때문입니다. 허상인 것이 어떻게 실재하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겠습니까? 망심의 본질은 진심입니다. 그렇다면 왜 망심으로 변하는 것일까요? 바로 미혹(delusion) 때문입니다. 대승 경전에서는 "찰나의 깨닫지 못함(불각/不覺)으로부터 무명(無明)이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무명(無明)은 어디서 오는가? 바로 그 한순간의 '알아차리지 못함'에서 비롯됩니다. 그렇다면 그 한순간의 알아차리지 못함에 원인이 있는가? 원인은 없습니다. 만약 원인이 있다면 결과가 따를 것이고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 되겠지만, 원인이 없기에 그것은 허망한 것, 즉 실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실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그저 개의치 않는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어떤 장애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마음을 두는 순간, 그것은 개입하여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반야경(般若經)》은 우리에게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무주생심, 無住生心)"고 가르칩니다. '머무는 바 없이'란 그곳에 집착하거나 마음을 묶어두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마음을 내라'는 것은 사물이 흘러가는 대로, 즉 인연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연이 닿는 대로 그것을 능숙하게 활용하여 자신을 닦고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좋은 환경을 만나면 모든 일이 뜻대로 풀리고, 좋은 인연을 만나면 마주하는 사람과 사건이 모두 긍정적이고 만족스럽게 다가옵니다. 자신을 닦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집착이나 갈망을 일으키지 않는 것, 구체적으로는 자신에 대한 집착을 품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타인에 대해서는 온 마음을 다해 봉사하되, 일이 끝난 뒤에는 그 어떤 집착의 흔적에도 물들지 않은 채 순수하고 평등하며 깨어 있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이롭게 하든 타인을 이롭게 하든,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상태에 머무는 것입니다. 만약 역경이나 불리한 조건—환경이 열악하고 장애와 좌절이 많으며 만나는 사람들이 불친절한 상황—에 처한다면 어떠해야 하는가? 그러한 환경에서 분노를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의 시험대입니다. '나는 이 상황에서 분노를 품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용납될 수 없으며, 시험에 실패한 것이다. 반면 분노를 품지 않고 번뇌를 일으키지 않으며, 그러한 일들이 마음에 짐이 되지 않게 한다면 성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 우리는 스스로를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거울과 같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결점이 있다면 고치고, 없다면 앞으로 그런 일을 피하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만약 부정적인 성향이 있다면 변화하고 참회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경각심을 갖고 그러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스스로를 독려해야 합니다. 오늘날 도를 닦는 이들은 흔히 자신을 내세우며 남을 깎아내립니다.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 오만함을 버리지 못한 채 남을 비판하고 허물을 들추며 자신의 지위를 높이려 합니다. 이는 잘못된 일입니다. 우리가 불법(佛法)을 만난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주된 목표는 서방극락정토에 왕생하는 것이며, 이는 누구에게나 열린 기회입니다. 정토로 갈 때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이곳의 모든 것은 현상, 즉 아뢰야식(alaya-vijnana)의 발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정토에 이르면 의식은 지혜로 전환되며, 이러한 세속의 사물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됩니다. 그곳의 모든 것—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은 완벽하게 구족되어 있으며, 그곳에서 큰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러니 세속의 물건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것들을 완전히 놓아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국가와 민족, 그리고 전 인류를 위해, 나아가 불교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종교를 위해서도 헌신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가 하나의 본질임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그분은 어쩌면 그 특정 전통 안에서 아미타불이 화현(化現)하신 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분을 비판하거나 비방한다면, 그것은 곧 아미타불을 비방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그분들은 모두 부처와 보살의 화현입니다. 중생을 해탈로 이끌기 위해 적절한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것이니,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 형태를 통해 구원받을 이들을 가르치고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불변한 이치입니다. 온 우주는 진정 하나의 실체입니다. 모든 현상을 하나로—가족보다 더 가깝게, 진정 하나로—보는 것은 절대적으로 옳은 일입니다. 수많은 경전과 논서가 이 궁극적인 진리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 진리를 만날 인연을 얻었으니, 우리는 이를 받아들이고 긍정하며 진정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왕시望西(Wangxi)가 질문했습니다. "이것은 원인(因)을 닦아 결과(果)를 얻는 수행을 통해 실현되는 영역—즉 시작이 있는 것—인데, 어찌하여 '원인도 결과도 아니며(非因非果)', '변함없이 영원하다(常住)'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인과를 닦아 결과를 얻는 것은 시각(始覺)의 지혜에 속하고, 무위(無爲)하며 변하지 않는 것은 본각(本覺)의 이치에 속합니다. 시각이 원만해지면 그것은 곧 본각이 됩니다." 이는 상당한 깊이를 지닌 훌륭한 설명입니다. 원만해진 시각은 곧 본각입니다.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입니다. 오직 이래야만 그 개념이 성립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장애는 전적으로 분별과 집착에서 비롯됩니다. 이를 초월하면 온 우주가 하나의 실체가 됩니다. 누구와 하나가 되는 것일까요? 바로 나와 하나가 되고, 아미타불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오묘하고 참으로 경이로운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궁극의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그 누구라도, 아무리 무거운 업을 지었더라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마치 우리가 스스로를 용서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무거운 업을 지었어도 결국 자신을 용서하듯이, 그 이치는 똑같습니다. 궁극의 깨달음에 이르면 선과 악의 개념이 사라집니다. 선과 악이 존재하는 한, 분별과 집착 또한 남아 있게 마련입니다. 최고의 경지에서는 분별과 집착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단 한 가지 생각조차 일어나지 않습니다. 법신(法身)의 보살은 생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법신을 볼 수 없지만, 생각이 없으면 법신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실재의 근본 이치를 꿰뚫어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진심(眞心)과 망심(妄心)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망심에는 시작과 끝이 있지만 진심에는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진심과 망심은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