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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인의 소유를 낭비하는 청지기
예슈아께서 청지기에 대해 비유로 말씀하셨다. 청지기는 고용인, 대리인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상징하는 주인을 부자로 비유하셨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부자이시다. 부자에 대해 나쁜 이미지를 가질 필요는 없다. 다시 말해 거룩한 부자가 하나님이시고 우리 아버지가 어마어마한 부자이신 것이다.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낭비하여 직책을 박탈할 거라는 통지를 받았다. 낭비하다는 '시간이나 재물 따위를 헛되이 헤프게 쓴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을 헛되게 보내고 재물을 헛되게 쓴다면 이처럼 파산하여 땅을 파거나 빌어 먹어야 할 위기에 처할 수 있다. 여기 나오는 청지기도 그런 상황이다.(눅16:1-3)
2 잘못을 만회할 해결책을 발견하다
당장 자신이 시간과 재정을 헛되게 씀으로 직장에서 짤리고 구걸해야 할 정도로 암담한 상황에서 한가지 묘안을 생각해냈다.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하나하나 불러 빚을 많이 탕감해주는 것이다. (눅16:4-7)
3 세상 청지기가 더 지혜로운 이유
주인은 이 불의한 청지기가 일을 지혜롭게 해결하는 것을 보고 칭찬을 했다. 이 행동이 칭찬할 일인가? 왜 칭찬을 했을까? 어쩌면 우린 어리석어서 지금도 주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부끄럽지만 빛의 아들들보다 세상의 아들들이 더 지혜롭다고 한탄하고 계시다. 어리석은 빛의 아들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더 지혜롭다고 칭찬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지금도 놓치고 있는 지혜는 무엇일까?(눅16:8)
4 불의한 재물로 영주할 처소를 얻다
이 청지기가 지혜롭다고 칭찬을 들은 이유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위기에 닥쳤을 때 은혜를 얻을 수 있는 친구가 생겼다. 그것은 영원한 처소가 될거라 말하고 있다. 여기서 불의의 재물의 원어는 '불의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돈'을 의미한다. 불의하게 번 돈으로 친구를 사귀라는 의미가 아니라 불의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돈이지만, 그것으로 친구를 사귀라는 뜻이다. 그러면 돈이 없어질 때 그 친구가 자신을 영접하여 환란에서 건져주는 구원이 될 거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롭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아직도 이해는 가지 않는다. 과연 이게 무슨 뜻일까? 어떻게 이게 지혜로운 행동이 될까? 심지어 자신의 돈도 아닌 주인의 것으로 은혜를 베풀고 유익을 취했다. 이에 대해 예슈아께서는 이렇게 풀어주신다. "지극지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다." 예슈아께서는 청지기의 삶의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기서 지극히 작은 것은 '크기나 양이나 품위에 있어서 가장 적고 가장 별볼일 없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작은 것에 충성하면 큰 것에도 충성한다는 것이다.
그럼 이 비유에서 지극히 작은 것은 무엇이겠는가? 불의의 재물이 지극히 작은 것이라면 큰 것은 친구(영혼)이다. 불의한 속성을 가진 재물에도 충성스럽지 않다면 (믿을만 하지 않다면) 어찌 영혼에 충성스러울수 있겠느냐는 뜻이다. 또한 이 땅에서 시간을 불의하게 보낸다면 어찌 영원이라는 시간에 불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 땅에서의 삶은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한 훈련의 장소이다.(눅16:9,10)
5 남의 재물에도 충성해야 한다.
불의한 재물이라는 가장 작은 것, 가장 수준이 낮은 것에 충성하지 않는다면 누가 우리에게 참된 것, 영원한 것을 맡기겠는가?
영원한 것은 친구 즉, 영혼이다. 자신이 얻은 영혼들을 통해 영원한 안식처를 얻는다. 그러니 불의한 청지기가 가장 보잘 것 없는 재물로 영원의 속성을 가진 영혼을 얻는 모습을 보고 지혜롭다고 칭찬한 것이다. 세상의 아들들은 재물로 친구를 만들고 영혼을 얻는데 빛의 아들들은 그 비밀과 가치를 모르고 뭐가 더 중요한지도 모른다고 한탄하시는 것이다.
또한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않으면 누가 우리 자신의 것을 주겠는가? 이 불의한 청지기도 주인의 소유에 충성하지 않았기에 쫓겨나는 신세를 맞이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재정을 걱정해주고 진정으로 위해주는 사람을 하나님은 축복하기 원하신다. 이것은 당연한 축복의 원리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조건 일하라고만 하시지 않으셨다. 분명 장사 밑천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 은사들은 사실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과 은사에 충성하지 않는데 어찌 우리에게 속한 유업을 기대할 수 있겠는냐는 것이다.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눅16:11,12)
6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충성하여 남겨드리는 문제는 두 주인에 대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재물에 충성스러운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럼 두 주인을 섬기는 사람은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알아보자. 두 주인을 섬기는 자는 이것은 미워하고 저것은 사랑할 것이다. 또는 이것은 중요하게 여기고 저것은 가볍게 여길 것이다. 다시말해 재물은 사랑하고 하나님을 미워하거나 재물은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님은 중요치 않게 여길 수 있다.
반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재물은 미워하거나 하나님은 중요하게 여기고 재물은 중요치 않게 생각할 수 있다.
둘 중에 무엇이 옳은 마음이겠는가? 당연히 후자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모두 잘못된 마음이다. 안타깝게도 이 모습은 두 주인을 섬기는 자들의 모습이다. 재물과 하나님은 처음부터 비교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빛의 아들들도 속아서 사실상 두 주인을 섬기고 있다. (눅16:13)
7 불의한 재물에 충성해야 하는가?
여호와께서는 6일동안 힘써 모든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단 하루만 여호와의 날이니 일하지 말고 거룩히 지키라고 말씀 하셨다. 영어 번역을 보면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샤밧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6대1이다. 6일동안 경제 활동을 하고 1일을 예배한다. 즉 6일은 불의한 맘몬에게 충성하고 1일은 하나님께 충성한다면 과연 우린 두 주인을 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재정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면 결국 빚이 생기고 파산하게 되어 맘몬의 종이 되고 말 것이다. 이처럼 재정에 충성스럽지 않다면 두 주인을 섬길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6일동안 열심히 돈을 버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면 믿겠는가? 우린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하는 것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 열심히 경제활동을 하는 것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같이 충성하는 모습이다. 그건 계명에서도 밝히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유한 종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돈에서 자유해야 한다. 자유한 것은 없기 때문에 자유한 것이 아니라 돈을 벌 줄 알아야 자유한 것이다. 마치 물에서 자유하기 원한다면 수영할 줄 알아야 하는 것과 같다. (충20:8-10)
8 일하지 않는 악하고 게으른 종
달란트는 돈의 단위이기도 하고 재능, 은사라는 뜻도 있다. 10달란트를 받은 자는 10달란트를 남겼고 5달란트를 받은 자는 5달란트를 남겼다. 이렇게 장사를 잘하여 이윤을 남긴 자는 착하고(선하고) 충성된 종으로 인정받았고 그 날에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 그와 반해 한 달란트를 받은 자는 하나님은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쉽게 말하자면 자신이 일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일은 되지 않느냐는 말이다. 원하시면 다 하실 수 있고 자신에게 주신 재능이 있든 없든 사용하든 안하든 하나님의 일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진 그의 믿음은 악하고 게으른 자라는 비난을 받았고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쫒겨났다.
이때 하나님을 의미하는 주인의 말은 더욱 놀랍다. 차라리 돈을 취하여 이자를 주는 자들에게 맡겨 이자라도 버는 게 좋았을 뻔 했다는 말씀하신다. 원래 이자라는 시스템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다. 이자를 통해 자산을 늘리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다니 놀랍지 아니한가? 과거 많은 은행가들이 유대인들이었다. 당시 너무 많은 빚이 있던 이방인들은 윤택하게 사는 성실한 유대인들을 세상을 삼키고자 하는 악마로 표현하곤 했었다. 게으른 자들에겐 하나님도 돈밖에 모르는 흑암으로 보이지 않을까? 오랜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은 어쩌면 하나님에 대한 오해일지 모른다.(마25:21-30)
9 받은 은사로 장사하라
예슈아께서 그 날에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는 자신에 대해 비유로 말씀하셨다. 한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올 것이다. 예슈아께서 재림하셔서 우리가 얼마나 남겼는지 분명히 물으실 것이다. 우리의 사역을 장사라고 표현하셨다. 우린 장사하는 것, 무역하는 것 이러한 돈버는 것을 수준낮은 행동, 또는 영적이지 않고 죄악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달란트는 처음부터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재능과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늘에서 부터 온 것이다. 받은 은사를 통해 장사를 한다는 것에 죄책감을 갖거나 정죄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장사라고 표현하셨다. 장사는 결코 악한 행동이 아닌 것이다. 악하게 장사하는 사람이 문제인 것이지 장자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만약 자신이 받은 재능을 하찮케 여기고 땅에 뭍는 자가 아니라, 소중함을 알고 남기는 자가 되었을 때, 이것이 남의 것(하나님의 건)에 충성된 자이며 열고을의 권세를 차지하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다스리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우린 자신의 재능을 잘 다듬고 발휘하여 두배로 남기는 자가 되야 할 것이다.(눅19:15-17)
10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구하지도 걱정하지도 말라
물론 하나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구하지도 말고 근심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 근심하다는 원어로 '의심하다, 근심하다' 등의 뜻이다. 즉,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실까라는 의심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심지어 이런 것을 위해 구하는(기도하는) 것은 이방인의 기도 즉, 우상에게 기도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원하지도 받지도 않으신다. 그저 우상 숭배의 모습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이와 같은 것들이 필요한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계신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저절로 다 받게 될 거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예배만 드리고 기도만 하면 다 주시는 것 아닌가? 분명 열심히 일하라고 하시곤 이제 와서 그의 나라만 구하면 된다고 하시는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나라를 얻지 못할까봐, 들어가지 못할까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누구보다 그분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얼마나 원하시겠는가?!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예슈아께서는 우리의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보물을 하늘에 두라고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얻는 방법은 구제이다. 가난한 자를 돌아보고 구제하는 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방법이고 집을 짓는 것이고 그곳에 있을 곳을 마련하는 방법인 것이다. 우리가 재정을 충성되게 버는 이유도 영혼들을 구제하고 돕기 위함이다. 불의할 수 있는 재정을 가지고 영혼을 얻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원히 거할 집을 얻는 방법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재정이 어디에 쓰느냐를 보면 우리 마음이 땅에 있는지, 하늘에 있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정을 벌게하시는 것, 유한한 시간을 주신 것, 썩어질 몸을 주신 것도 그것을 통해 영원한 것을 얻는 방법을 배우게 하기 위함이다. (눅12:29-34)
11 부정하게 번 돈은 받지 않으신다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고 하나님께 드리고 구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버느냐도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창기가 번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을 받지 않으신다. 심지어 여호와께 서원하여 드리는 돈일지라도 가증하게 번 돈은 받지 않으신다. 원어로 보면 창기를 고용하여 버는 돈, 창기가 버는 돈과 개는 '남자 매춘부'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음행으로 버는 돈는 여호와께 역겹고 가증하다. 또한 너무 과한 이자를 받는 것은 악한 일이나 적당한 이자를 받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그러나 형제에게 꾸어줄 때는 이자없이 꾸어주어야 한다. 형제에게는 이자를 통해 이윤을 남기려고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 선하며 복을 받는 방법이다. 이처럼 토라는 어떻게 사랑하고 선하게 사는 방법을 가르친다(신23:18-20)
12 돈을 탐하는 바리새인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었다. 좋아할 수 있으나 '좋아하는'의 뜻은 욕심이 많고 몹시 탐내는 마음을 말한다. 탐심이 많았지만 그러한 탐심을 정당화하여 사람들 앞에서 존경을 받았다. 자신의 탐심을 합리화하여 사람들이 존경하게 만든 자들을 하나님은 미워하신다(우상 숭배와 같이 혐오하신다). 돈에 탐심이 있는 자들은 맘몬을 섬기는 자들로 두 마음을 가진 자들이고 두 주인을 섬기는 자들이다. 왜 성도들은 이런 자들에게 돈을 갖다 바치는 것일까? 어떻게 이들은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일까? 흔히 이들은 돈을 죄악시 하고 하나님께 모두 드려야 맘몬으로 부터 자유하게 된다고 말하지만 결국 두 주인을 섬기는 자들이 보이는 모습중에 하나임을 알 수 있다.(눅16:14,15)
13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하는 방법
예슈아께서 바리새인들에게 겉은 깨끗해 보이지만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게 차 있다고 책망하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인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그러나 우리의 몸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창조하신 것을 모르는 것 같다. 우리의 겉모습이 지극히 작은 것이라면 영원한 속사람은 얼마나 큰 것일까?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어리석어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예슈아께서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고 조언하고 계시다. 원어로는 '네가 가진 것들로 구제하라'이다. 탐심으로 돈을 모으는 자가 아니라 구제하는 자가 될 때 돈을 섬기게 되는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지혜로운 청지기가 가장 작은 재정으로 큰 영혼을 얻은 것처럼 그래서 영원한 처소와 연결된 것처럼, 가장 작은 재정으로 구제할 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탐심으로부터 자유로와 질 수 있을 것이다. 구제해야만 구원받는다고 말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구원받고자 하는 자들이 구제하는 삶을 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우리의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이다.(눅11:39-41)
14 모든 날과 모든 일이 거룩하게 되는 방법
여호와께서는 엿새 동안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 그러므로 샤밧을 거룩하게 하시고 복되게 하셨다. 우리가 6일동안 일하고 하루는 거룩한 성회로 안식을 누리는 것은, 세상에서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며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준비하는 것을 배우기 위함이다. 일을 중단할 수 있는 하루, 돈이 다가 아니고 이 땅의 삶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는 하루 이렇게 충성된 6일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샤밧은 자체로도 거룩하지만 또한, 나머지 6일을 거룩하게 하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샤밧의 축복이 결국 6일 동안 일한 것에 대한 보상이기 때문이다.(출20:8-11)
샤밧 예배: 토요일 10시 30분
헌금 계좌: 농협 301 0293 8190 01 레올람토라
대전시 동구 가양동 39-11 2층 레올람 토라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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