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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재구촌과 평화지대 선언
대민 심리전과 대적 선무공작의 효시
강원도 홍천 맹호사단사령부에서 채명신 사단장이 대대장 부임 신고 시 "베트남전에서는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탈취할 목표는 없다"라고 강조하면서 "다만 군인 정신과 조국을 위한 충성심으로 베트남전에 임해야 한다"라고 말을 맺은 점에 대해 늘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베트남에 도착 후 몇 개월 지나지 않아 그 의문이 풀렸다. 첫째, 베트남의 정치 사정이 불안해 쿠데타가 자주 일어난 점에 관심을 두었다. 다음으로 부정부패가 극심해 월남군은 싸움을 포기한 군대처럼 늘 패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더욱 놀란 것은 지금 싸우고 있는 적국의 수괴 호찌민을 존경하고 있다는 월남군 장교들의 이념이었다.
당시 월남의 도지사(성장-省長) 는 영관급이 맡고 있었고 군수는 중위 또는 대위가 책임지고 있는 완전 군정 체제였다. 그들과 대화 해도 호찌민에 대한 부정적 언사는 일체 금기시 돼 있었다. 전쟁을 하면서 적국의 수괴에게 긍정하는 것은 곧 패배를 자인하는 것이 아닌가?. 비로소 채명신 사단장의 명언? ' 베트남전에서는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탈취할 목표는 없다' 가 이해되었다. 따라서 나는 전투에 중점을 두는 것보다 민사심리전에 주안을 두고 월남전에 임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다행히 대대 정보관 권준택 대위가 미군 심리전학교를 졸업한 심리전 전문가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대적 선무공작의 임무를 부여했다. 그는 그 타당성에 적극 호응했다
권준택 대위는 행동을 개시, 베트콩이 비밀리에 내왕이 있다고 에상되는 요소에 구호소를 설치하고 대대 군의관과 위생병을 배치한 후 찾아오는 월남인들 환자 치료에 나섰다. 당시 대대는 미군 군수지원사령부에 요청하면 소요 보급품 필요량을 지원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의료 약품은 충분히 보급됐다. 한편 베트콩의 기습을 대비하기 위해 몇 곳의 잠복조를 배치 철저한 경계 대책도 세웠다.
기적은 약 한 달 뒤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구호소에 베트콩 귀순병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의 베트콩 귀순병은 베트님전 한국군에게 심리전 최초의 경사였다.
그러나 대대의 상급 부대인 연대와 사단의 일부 참모들 간에는 재구대대를 헐뜯기 시작했다. "재구대대는 베트남전에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 대민사업을 하기 위해 왔다"는 빈정거림이었다. 이런 소문을 듣고 채명신 사단장이 직접 대대를 방문했다.
나는 브리핑을 통해 "사단장 각하의 지휘 방침에 따라 전투보다 대민 심리전과 대적 선무공작을 통해 적을 제압하겠으며 앞으로도 심리전에 중점을 두고 대대를 지휘하겠습니다" 고 보고를 마친 후 벌써 귀순병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말을 이어가자 채명신 사단장은 벌떡 일어나 나에게 다가와 가볍게 포옹하고 만면에 웃음 지으며 "과연 맹호 제일의 재구대대야" 하며 칭찬하는 것이었다.
이후 사단은 대민 심리전과 대적 선무공작에 관해 깊은 관심을 두기 시작했으며 몇몇 참모의 빈정거림도 사라졌다. 바로 이때 시작한 베트남전 한국군의 대민 심리전과 대적 선무공작이 베트남전 첫 심리전의 효시가 되었다.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한다
재구대대의 대민심리전과 대적 선무공작은 대대 정보관 권준택 대위 주관하에 계속 되었다. 권 대위는 대대 군의관 박재구 중위와 함께 대민 구호소에서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정성을 쏟고 있었다. 더구나 구호소에 귀순 베트콩이 이어지자 더 신명이 났다. 당시 베트콩 거점지역에는 말라리아가 유행되면서 많은 베트콩이 고통을 받고 있었다. 바로 말라리아 치료제를 대대 구호소에서 나누어준다는 소문을 듣고 베트콩 귀순이 이어진 것이었다.
대민진료에 쓰일 의약품은 무제한 공급되었다. 그 가운데 말라리아 치료제는 가장 많이 공급 받았다. 당시 미군 당국에 요청하면 군말없이 헬기로 실어다 주었다.
베트콩 귀순이 계속되자 그들로부터 정보를 얻는 것은 물론이고 이어지는 베트콩 귀순병으로 인해 싸우지 않고 전과를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부자(父子) 베트콩이 함께 귀순한 사연이 널리 퍼졌다. 이 이야기가 고국의 일간지 여러 곳에 크게 보도되자 정보관 권준택 대위는 대민심리 전 성공사례로 한때 유명해졌다.
재구대대에 계속 베트콩 귀순병이 이어지자 보고에 접한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 겸 맹호사단장이 헬기로 대대를 방문하였다. 그무렵 채명신 사단장은 주월한국군사령관을 겸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주처를 사이공(현 호찌민)에 두고 있었다. 나는 브리핑을 통해 심리전과 대민지원사업의 중요성을 설명하면서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한다’는 대대장 지휘지침을 보고하자 자리를 함께하고 있던 연대장은 못마땅한 표정이었으나 채명신 장군은 벌떡 일어서더니 나에게 다가서며
“지금 대대장 박 중령이 말한 그 지휘지침 가운데 백 명의 베트콩을 놓쳐도 좋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인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고 말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의 주적은 정규군이 아니고 게릴라 들입니다. 상당수 민간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투를 하다 보면 양민 학살이라는 누명을 쓸 수 있습니다. 이 지침은 양민을 보호한다는 의미가 있어 월남전의 특수성에 입각, 심리전을 효과적으로 실시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연대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채명신 장군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이공 사령부로 돌아갔다. 그날 밤 사이공 사령부 채명신 사령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박경석 중령,‘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한다’는 귀관의 지휘지침을 주월한국군사령부 훈령으로 격상시켜 전 주월한국군 부대에 하달할 생각인데 박경석 중령이 양해해 주겠느냐”는 내용이었다. 나는 즉각 “무한한 영광입니다” 라는 명료한 답변으로 이 일을 매듭지었다.
바로 이 주월한국군사령부의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한다’ 는 훈령이 계속 주월한국군 대민지침으로 유지됨으로써 월남전에서 양민 피해를 극소화할 수 있었다.
어느 전쟁을 막론하고 군인보다 민간인 희생이 훨씬 많다. 이를 두고 양민학살로 몰아대는 것은 전쟁의 본질을 이해 못한데서 생긴다.
재구촌 준공과 되찾은 펑화
베트남에서 미군은 여단급 단위로 전술책임지역(TAOR) 을 할당 받고 지역 평정 작전을 수행하지만 채명신 장군은 더 광범위하게 평정지역을 확장하기 위해 대대 단위로 지역 평정을 맡겨 작전케 했다. 재구대대의 첫 전술책임지역은 1번도로와 19번도로가 교차하는 남탕 지역이었지만 이외로 쉽게 평정이 되자 채명신 장군은 적정이 가장 드센 푸캇군 일대에 전술책임지역을 할당했다. 미군이 평정하다 뜻을 이루지 못해 철수한 지역임으로 적정이 첫 전술책임지역과 달랐다. 가끔 박격포탄이 날아오고 중대전술기지에 침투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대전술기지에 접근하기 전에 매복병에게 발견돼 시체를 남기고 도주하는 일이 잦았다.
재구대대의 병력은 배속 되는 병력이 증가해 항상 1000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배속된 병력은 105미리 곡사포 1 개 포대를 비롯하여 4.2인치 박격포 소대, 1개 공병소대등이었다.
대대의 전술책임지역은 다시 네 개 지역으로 구분해 대대본부 지역, 3개 소총중대 지역으로 할당, 임무를 분담하고 있었다. 새로운 지역에서도 대대의 주 임무는 대민 심리전과 대적 선무공작에 지향되었다.
이무렵 깊은 산 속에 피난갔던 월남인이 떼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재구대대가 의약품을 나누어주는 착한 군인들이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돌아온 피난민이 거처가 절대 부족하였다. 특히 용영일 대위의 제9중대 지역이 주거난이 심각했다. 따라서 중대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들 피난민을 수용할 마을 건설에 나섰다. 시멘트 등 자제는 미군의 지원으로 해결했고 일부 골격은 근처에 흔한 대나무를 베어 충당했다. 이곳은 우리나라와 달리 난방이 필요 없음으로 집짓기에 훨씬 수월했다.
제9중대는 중대장 용영일 대위의 지휘하에 집짓기에 전력을 쏟아부어 작은 마을 학교와 50여 채의 민가를 완성 돌아온 월남인을 모두 수용했다. 이에 감동한 빈딩성의 성장은 행정 명령으로 재구촌(在求村)으로 명명하고 큰 행사로써 월남의 명물 마을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때 건설한 재구촌이 고국에까지 알려져 일간신문 기자들이 기사 취재차 대대를 찾기 시작했으며 고국에서 방문하는 VIP들의 방문 코스로 각광을 받았다. 이어서 베트남어 통역관을 시켜 재구대대장 박경석 중령의 이름으로 '대대 주둔지역을 평화지대로 선언하고 적대 행위가 없으면 일체 군사력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베트남어 전단을 만들어 미군 헬기 편을 이용 푸캇군 일대에 뿌렸다. 그 후 약 10개월간 작전 임무 수행차 출진하는 전투지역을 제외한 대대 관할 지역에는 단 한건의 베트콩의 침투 적대 행위가 없었다.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은 고국에서 오는 귀빈들을 재구촌에 안내하느라 아마 재구촌을 수 십 차례 방문 했을 것이다. 채명신 사령관은 재구촌에 올 때마다 재구촌을 가리켜 '재구의 유산' 이라며 흡족해 했다.
내가 착상한 재구대대 관할 평화지대 선언을 아군과 적이 묵계(默契)로서 합의해 베트남에서 상당 기간 그 약속이 이행된 경우는 베트남전의 불가사의라고 입을 모았다. 훗날 퇴역 후 채명신 장군은 그 평화지대에서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었다고 술회했다.
보복과 응징
재구촌 건설 초기 양민과 함께 대나무 숲에서 대나무 벌채 과정에서 있었던 일이다. 베트남은 겨울이 없는 상하의 나라이므로 주거시설이 간단하다. 대나무를 엮어 시멘트를 입히면 벽이 완성된다. 시멘트는 요청하면 얼마든지 미군 헬기가 운반해 준다. 제9중대 2개소대가 중대장 용영일 대위 지휘로 대나무 벌채를 하고 있을 때, 근처 작은 마을에서 양민으로 가장한 베트콩이 기습사격을 가해와 순식간에 3명의 병사가 쓰러졌다. 세 병사는 현장에서 숨졌다. 보고를 받은 나는 절차를 무시하고 즉각 대대에 배속된 105밀리 곡사포대와 4.2인치 박격포소대, 그리고 대대 편제 화기인 제12중대 81밀리 박격포에 사격명령을 내려 그 부락을 표적으로 포탄을 퍼부어 박살 냈다.
첫 포탄으로 제12중대장 방서남 대위가 직접 지휘하는 81밀리 박격포탄이 작렬하였다. 방서남 대위는 육사 15기 선두주자로 동기생 가운데 인기가 높았다. 제12중대는 중화기중대인 탓으로 늘 대대장과 대대본부 경계를 전담하고 있었으므로 작전 참가 기회가 거의 없다시피 되자 활달하고 진취적인 성격의 중대장 방서남 대위는 좀이 쑤셨는데 무제한 사격명령이 내리자 신바람이 나서 박격포소대를 지휘, 포탄을 발사했다.
마을은 그다지 크지 않은 십여 호에 불과했다. 당시 월남 관할 월남인 마을에 대한 포탄사격은 연대와 사단을 거쳐 월남 군청과 성장의 승인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절차를 밟으면 베트콩이 모두 도망가기 때문에 나는 격분한 가운데 사격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내가 사격 중지명령을 내릴 때까지 계속 포탄을 퍼부어 가옥을 박살 내고 예상 도주로까지 한동안 포격을 계속했다.
연대와 사단에서는 난리가 났다. 사이공의 주월한국군사령부에서도 유선, 무선 가릴 것 없이 빗발쳤다. 나는 처벌을 각오하고 일체 전화도 받지 않고 포격을 계속했다. 맹호사단 포병사령관이 직접 달려와 포병사격 중지를 호소했다. 나는 “내가 모든 책임을 진다”고 소리치면서 사격을 중단시키지 않았다. 결국 마을은 잿더미로 변했고 시체 5구를 확인했다. 다행이 마을 사람들은 사전에 피신해 있었으므로 희생이 적었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우리나라 도지사 격인 성장과 군수 등이 큰 문제를 일으켰다. 월남군사령부는 물론 월남 정부도 항의 대열에 나섰다. 이틀 후 대대본부로 진상조사와 항의차 성장과 군수 일행이 대대지휘소에 찾아왔다. 이어서 연대장 김정운 대령과 유병현 사단장, 사이공의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도 헬기로 도착했다.
나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일행 모두를 야전의자에 앉게 하였다. 나는 일행에게 당당한 어조로 상황을 설명했다. 이어서 빈딩 성장이 장황하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나는 월남 당국의 항의에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격한 말로 쏘아댔다.
“촌락 건설을 위한 대민사업을 수행하는 병사들을 양민으로 가장해서 저격, 내 부하가 3명이 죽었다. 이 과정에서 절차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절차를 밟는 동안 적은 도주할 것이 아닌가. 전쟁은 응징과 보복으로 이어지는 무절차의 연속이다. 나는 내 부하를 사살한 적 거점을 응징한 것이다. 앞으로도 전투행위가 아닌 평화로운 대민사업 중에 불법 저격을 가하면 계속 더 가혹하게 응징할 것이다.”
내 말이 끝나자 성장과 군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갔다. 채명신 장군과 사단장 연대장도 말없이 헬기로 돌아갔다. 이 일은 더 이상 확대되지 않고 마무리되었다.
내가 지휘하는 재구대대 제1진 13개월간의 전투에서 전체 사망자는 소대장 김무석 중위 1명과 사병 17명이었다. 그 가운데 사고사는 이때 숨진 3명뿐이고 나머지 15명은 전투 중 전사자였다. 전 제대별 대대 단위 사고사 통계에서 재구대대 사고사 3명은 가장 적다. 전사 15명 또한 가장 적다.
채명신 장군은 훗날 전역 후, 재구대대 제1진 전사 15명과 사고사 3명 합계 18명의 희생은 기적에 가까운 적은 수임을 강조하면서 바로 재구 정신(在求 精神)의 구현이라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이 사건 며칠 뒤 전단을 만들어 헬기로 재구대대 전술책임지역(TAOR) 내의 행정관서 및 부락에 골고루 뿌렸다.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재구대대는 양민 보호와 구호에 계속 힘쓸 것이다. 작전명령에 따른 전투 시 외에는 어떤 경우도 사격을 하지 않고 양민을 보호한다. 다만 평시 대대 전술책임지역에서 평화로운 활동을 방해하거나 위해를 끼칠 때는 몇 배로 응징할 것이다. -맹호 재구대대장 육군중령 박경석』
대대에는 월남인 통역관이 1명씩 배치되어 있어 그로 하여금 번역해서 전단을 만들었다. 이후 재구대대 전술책임지역에는 평화가 유지되었고 나의 잔여 임기 10개월간 평화가 이어지면서 1건의 전투 외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 후에 귀순 베트콩 심문을 통해 알려진 사실이지만 빈딘성 베트콩 지휘부에서는 ‘푸캇군 한국군을 한국군 지역에서 건드리지 말라. 보복을 받는다’는 비밀 지령이 내려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리더십’에는 바로 ‘보복과 응징’이라는 뒷받침이 필수적이다. 허술한 대처는 급소를 피격당하기 마련이다. 나는 이때의 독단 전횡을 후회는커녕 정당방위로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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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치열한 작전에
맹호의 정밀한 굴레는 이뤄낸
효과는 대단한 효과이지요
우리 박 장군님의 지혜로우신 면도
매우 대단하셨습니다!
과찬의 말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