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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충만의 뜻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Views 2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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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lly Graham이 말하는 성령충만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충만의 뜻은 무엇인가? 성령충만이란 성령과 성령의 능력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엡 5:18에서 바울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바울은 두 가지 사실을 대조시켜 설명하고 있다. 술에 충만한 사람은 술의 지배를 받게 되고 술에 의하여 그의 정상적인 능력이나 행동이 유린당하게 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술의 영향 하에 놓여 있다고 가끔 말하게 되는 데 이는 흥미있는 일이다. 성령충만이란 이와 유사하다. 우리는 성령의 영향하에 있다. (Billy Graham, ‘The Holy Spirit’ p.114-115)
이상에서 빌리 그래함이 말하는 “성령충만이란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라는 주장이 동서양의 신학계와 교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성령충만의 개념정의이다. 그러나 이 정의는 현대번역 성경에 의하면 바른 정의인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행 2:4의 헬라어원문의 그릇된 번역에 근거한 것이므로 전혀 그릇된 것이다.
조용기 목사가 말하는 성령충만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는 사람을 성전삼고 내주하십니다. 그런데 이는 성령세례이고, 이와는 달리 성령충만이 있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으면 자신의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 받습니다. 그러나 성령충만을 받으면 단순히 자신의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성령의 생수의 강이 넘쳐흘러서 활력이 넘치고 능력 있는 신앙샐활을 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 ‘요한복음 강해’ [상] p.208)
성령충만이란 우리가 중생한 뒤 성령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점령하여 우리 안에 가득한 것을 말합니다. (조용기 목사, ‘성령님’ p.144)
성령충만이란 성령이 우리 마음과 생활을 온전히 지배하시고 우리가 성령 안에 완전히 잠겨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조용기 목사, ‘목사님, 전도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996, p.89)
진실한 기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여 내게 성령으로 채워주시고 기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조용기 목사, 순복음가족신문 1999년 3월 11일자 설교 중에서 발췌)
성령충만은 반드시 중생한 사람에게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생명과 믿음으로 충만케 하는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 ‘새신자교육 교재’ p.56)
성령충만을 받을 때 권능을 받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 입니다. (조용기 목사, ‘오중복음 이야기’ p.63)
성령충만한 삶은 곧 그리스도로 충만한 삶입니다(롬 6:11).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철저히 사시는 삶입니다(갈 2:20). 성령충만이란 내가 성령을 소유하고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나 자신을 사로잡아 내 안에서 좀 더 자유롭게 역사하사 그리스도를 더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 ‘오중복음과 삼박자 축복’ 1991, p.131,135)
눅 4:1-2, 4:14의 구절을 통해 우리가 추론해 볼 수 있는 것은 성령충만케 되면 더불어, 성령의 권능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 ‘나는 이렇게 설교한다’ 1997, p.149). 성령충만은 예수충만인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 1997년 5월 25일 순복음가족신문 ‘성령강림의 의미’ 설교 중에서 발췌)
조용기 목사는 이상에서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는 사람을 성전삼고 내주하십니다. 그런데 이는 성령세례이고, 이와는 달리 성령충만이 있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으면 자신의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 받습니다. 그러나 성령충만을 받으면 단순히 자신의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성령의 생수의 강이 넘쳐흘러서 활력이 넘치고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는 사람을 성전삼고 내주하십니다. 그런데 이는 성령세례이다”라는 주장은 요 14:17의 성령(님)의 내주에 대한 그릇된 번역과 행 1:5, 행 1:8에 나오는 성령세례의 뜻을 전혀 잘못 연구한 데서 온 것으로 그릇된 주장이다. 또한 조용기 목사는 “이는 성령세례이고, 이와는 달리 성령충만이 있습니다”라고 하여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서로 다른 뜻이 있는 것으로 주장하는데 이것도 역시 그릇된 주장이다. 행 1:5, 행 1:8, 행 2:3-4의 기록에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를 전혀 잘못 연구한 데서 온 전혀 그릇된 주장이다.
조용기 목사는 이상에서 “성령충만을 받으면 단순히 자신의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성령의 생수의 강이 넘쳐흘러서 활력이 넘치고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라는 것은 바른 주장이다. 그러나 “성령충만”이란 용어는 눅 4:1과 행 2:4의 그릇된 번역과 그릇된 해석에서 온 것으로 성령(님)을 물질취급하는 것으로 삼위일체 교리에 어긋나는 용어이며 바른 용어는 반드시 “성령(님)의 권능충만”이어야 한다.
또한 조용기 목사는 위에서 “성령충만이란 우리가 중생한 뒤 성령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점령하여 우리 안에 가득한 것을 말합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의 “성령충만이란 성령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점령하여 우리 안에 가득한 것을 말합니다”라는 주장은 천부당만부당한 그릇된 주장이다.
“성령충만이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가득한 것을 말합니다”라는 주장은 성령 하나님을 완전히 물질취급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혀 그릇된 것이다. 또한 “성령충만이란 성령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점령하여”라는 주장은 성령충만은 그릇된 번역에서 온 것인데 이를 바른 번역으로 믿는 데서 온 것이다. 성령충만의 번역은 ‘full of the Holy Spirit’이나 또는 ‘to be filled with the Holy Spirit’이어서는 절대로 안 되고, 눅 4:1, 눅 4:14, 행 1:8, 행 2:4에 근거하여 반드시 “성령(님)의 권능충만” ‘full of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또는 ‘to be filled with 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이어야 한다.
또한 조용기 목사는 이상에서 “성령충만이란 성령이 우리 마음과 생활을 온전히 지배하시고 우리가 성령 안에 완전히 잠겨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라고 주장하는데 이것도 역시 그릇된 것이다. “성령충만이란 성령이 우리 마음과 생활을 온전히 지배하시고 우리가 성령 안에 완전히 잠겨 있는 상태를 말한다”가 절대로 아니다. 성령충만이란 말은 그릇된 번역에서 온 것으로 바른 번역은 성령(님)의 권능충만이어야 한다. 따라서 성령충만이란 말은 사용해서 안 되고, 행 1:8, 행 2:3-4에 근거하여 “성령(님)의 권능충만이란 예수님의 증인의 사역 곧 복음전도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하여 성령님께서 중생 후에 주시는 성령(님)의 권능(power)을 받는 것이다”라고 정의해야 한다.
또한 조용기 목사는 이상에서 “진실한 기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주장하는데 “성령으로 충만”이란 말은 성령(님)을 물질이나 물건취급하는 것으로 삼위일체의 교리를 부인하는 처사이다. 따라서 “진실한 기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는 말은 “진실한 기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권능으로 충만할 때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로 반드시 바꾸어야 한다.
또한 조용기 목사는 이상에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여 내게 성령으로 채워주시고 기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는데 “성령으로 채워주시고”라는 말은 성령 하나님을 완전히 물질취급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여 내게 성령으로 채워주시고 기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말은 ‘하나님이여 내게 성령(님)의 권능으로 채워주시고 기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로 반드시 바꾸어야 한다.
또한 조용기 목사는 이상에서 “성령충만은 반드시 중생한 사람에게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생명과 믿음으로 충만케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는데 이는 반드시 “성령(님)의 권능충만은 반드시 이미 중생한 사람에게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생명과 권능과 믿음으로 충만케 하는 것입니다”로 바꾸어야 한다.
또한 조용기 목사는 이상에서 “성령충만을 받을 때 권능을 받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는데, 이는 반드시 “성령(님)의 권능충만을 받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로 바꾸어야 한다.
또한 조용기 목사는 이상에서 “성령충만한 삶은 곧 그리스도로 충만한 삶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철저히 사시는 삶입니다”라고 주장하는데 여기의 “성령충만한 삶, 그리스도로 충만한 삶”이란 말은 성령(님)을 물질취급하며 그리스도 예수님을 물질취급하는 것으로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릇된 용어이다. 바른 표현은 반드시 “성령(님)의 권능으로 충만한 삶,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권능으로 충만한 삶”이어야 한다.
또한 조용기 목사는 이상에서 “성령충만이란 내가 성령을 소유하고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나 자신을 사로잡아 내 안에서 좀 더 자유롭게 역사하사 그리스도를 더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반드시 “성령(님)의 권능충만이란 내가 성령님을 소유하고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권능이 나 자신을 사로잡아 내 안에서 권능으로 표적과 기사와 이적으로 역사하사 그리스도의 증인의 사역을 감당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더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로 바꾸어야 한다.
또한 조용기 목사는 이상에서 “눅 4:1-2, 4:14의 구절을 통해 우리가 추론해 볼 수 있는 것은 성령충만케 되면 더불어, 성령의 권능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주장은 눅 4:1-2, 4:14의 그릇된 번역과 해석에서 온 것이다. 눅 4:1의 번역은 눅 4:14을 반드시 같이 놓고 해야 한다. 눅 4:1의 ‘Jesus, full of the Holy Spirit, returned from the Jordan’은 눅 4:14의 ‘Jesus returned to Galilee in the power of the Spirit’에 근거하여 반드시 ‘Jesus, full of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returned from the Jordan’으로 번역하고 해석해야 한다. 또한 눅 4:14는 ‘Jesus returned to Galilee in the fullness of the power of the Spirit from the Jordan’으로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조용기 목사의 “눅 4:1-2, 4:14의 구절을 통해 우리가 추론해 볼 수 있는 것은 성령충만케 되면 더불어, 성령의 권능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는 맞는 것 같지만 그릇된 것이다. 여기의 “성령충만케 되면 더불어, 성령의 권능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는 반드시 “성령(님)의 권능으로 충만케 되면 곧 성령의 권능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이어야 한다.
조용기 목사는 “성령충만은 예수충만인 것입니다”라고 주장하는데 이를 영어로 표현하면 ‘the fullness of the Holy Spirit is the fullness of Jesus’가 되는데 이러한 말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 하나님, 성자 예수님을 완전히 물건이나 물질취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르게 표현하려고 하면 반드시 ‘the fullness of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is the fullness of the power of Jesus’이어야 한다. 조용기 목사가 말하는 성령론은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무수히 많은 모순과 오류투성이 속에 있는데 이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한글성경과 영어성경의 그릇된 번역을 맞는 것으로 믿고 착각 속에서 성령론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명성훈 목사가 말하는 성령충만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히 주장하시고 다스리는 것이 곧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충만은 내가 성령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나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효과적으로 일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하는데 이를 가리켜 성령의 세례 혹은 충만이라고 부릅니다. 성령이 충만할수록 서로 섬기게 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다는 소원이 있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능력으로 채워 주십니다. 성령충만은 곧 예수충만입니다. (명성훈 목사, ‘성령과 함께’ p.65,100,106)
명성훈 목사의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히 주장하시고 다스리는 것이 곧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충만은 내가 성령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나를 사용하는 것입니다”라는 주장은 전혀 그릇된 주장이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효과적으로 일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하는데 이를 가리켜 성령의 세례 혹은 충만이라고 부릅니다”의 주장은 올바른 주장이다. 그러나 여기의 “성령의 세례 혹은 충만”은 “성령의 세례 즉 충만”이라고 표현해야 한다. “성령이 충만할수록 서로 섬기게 됩니다”의 말도 성령을 물질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성령의 권능이 충만할수록 서로 섬기게 됩니다”로 고쳐야 한다. 또한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다는 소원이 있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능력으로 채워 주십니다”도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다는 소원이 있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능력으로 채워 주십니다”로 고쳐야 한다.
레마 성경주석이 말하는 성령충만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행 2:4), 청각적이며 시각적인 외적 임재 현상을 보이신 성령께서는 모인 무리들의 영혼 속에 충만케 임하심으로써 그의 임재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성령의 충만’을 ‘성령의 세례’(행 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는 단회적인 것으로 최초의 성령충만을 성령세례로 보신 것이며, 그 이후의 성령충만은 성령의 완전 지배하에 있음을 뜻합니다. 성령충만은 성령세례와는 다른 것으로 단회적인 사건이 아니며 반복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겠다. 성령의 은사는 일시적이나 성령세례는 단회적이며 영속적인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레마 성경주석 ‘사도행전’ p.75,285)
여기의 “성령께서는 모인 무리들의 영혼 속에 충만케 임하심으로써”라는 주장은 그릇된 것이다. 삼위일체의 교리에 근거하여 성령님은 예수님이시므로 이를 “예수님께서는 모인 무리들의 영혼 속에 충만케 임하심으로써”라고 고칠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충만히 임하신다는 말은 언어적으로 말이 안 된다. 왜 이렇게 말이 안 되는 주장을 하게 되었느냐 하면 행 2:3-4에 나오는 “그들이 성령충만을 받았다”는 그릇된 번역을 맞는 번역으로 믿고 글을 썼기 때문이다. 행 2:3-4의 바른 해석은 “성령님께서 불의 혀의 형태로 임하시어 그들은 성령님의 권능을 받았다. 또는 성령님의 권능을 충만히 받았다”이어야 한다.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이 성령의 충만을 성령의 세례(행 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의 주장은 ‘성령의 충만’의 용어 이외는 바른 것이다. 따라서 행 1:5의 성령의 세례와 행 2:4의 성령의 충만(성령의 권능충만)은 동의어의 관계에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의 “예수께서는 이 성령의 충만을 성령의 세례(행 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라는 주장과 “성령충만은 성령세례와는 다른 것”이라는 주장은 서로 상반되는 주장이다. “예수께서는 이 성령의 충만을 성령의 세례(행 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는 것은 “성령충만은 성령세례와 같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렇게 두가지는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서로 다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앞뒤가 일치하지 않는 모순된 주장이다. 왜 이렇게 모순된 주장을 하게 되었느냐 하면 행 1:5, 행 1:8, 행 2:3-4의 관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의 “세례는 단회적인 것으로 최초의 성령충만을 성령세례로 보신 것이며”라는 것은 한국의 순복음교단에서도 이렇게 주장하는데 이는 전혀 그릇된 것이다. 이는 성령의 세례와 성령의 충만의 뜻은 행 1:8에 기록된 “성령님의 임재하심으로 성령님의 권능을 받는 것이다”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여 생긴 그릇된 주장이다. “세례는 단회적인 것 곧 성령세례는 단회적”이라고 하면서 또한 “성령세례는 단회적이며 영속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 모순된 주장이다. “성령충만은 성령의 완전 지배하에 있음을 뜻합니다”의 주장은 그릇된 번역에서 온 것이다. 바른 번역은 “성령의 권능충만”이어야 한다. 따라서 많은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이 주장하는 “성령충만은 성령의 완전 지배하에 있음을 뜻한다”는 주장은 완전히 그릇된 주장이므로 “성령의 권능충만은 성령의 권능을 받는 것을 뜻한다”로 반드시 고쳐야 한다.
하용조 목사가 말하는 성령충만
성령이 충만하고 성령이 임했다는 말은 그분이 나를 통치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성령충만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성령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성령충만의 결과입니다. 성령님이 내게 임하시고 충만하시면, 나를 지배하시면 무엇을 지배합니까. 언어를 지배 합니다. 성령님이 시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통치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것이 임했다는 증거입니다. 그것이 충만하다는 증거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방언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언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기적을 행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놀라운 성령의 은사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 잘 모릅니다.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느냐를 들어보면 압니다. 정말 성령님이 시키는 일을 하고 있느냐. 나무는 열매를 보면 압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성령의 온 가지 은사를 다 받으면서 딴 소리하고 딴 짓하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가짜입니다. 귀신도 능력을 행할 수 있고 귀신도 방언을 할 수가 있고 귀신도 모든 이상한 환상들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증거가 아닙니다. 누구의 통제를 받느냐는 무슨 말을 하느냐로 결정합니다. 행 2:4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는데 이는 전 인격적인 체험, 전 인격적인 접촉입니다. 전 인격적인 지배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성령충만함이 나타나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내가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찬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말을 내가 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행동을 내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충만입니다. (하용조 목사, ‘사도행전 강해’ 서울온누리교회 2007년 5월 12일 Internet TV 방송에서 발췌)
이상의 하용조 목사의 주장은 전혀 그릇된 주장이다. 왜냐하면 성령충만의 뜻을 전혀 그릇되게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 목사는 “성령충만이란 그분이 나를 통치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라고 하는데 이는 그릇된 것이다. 하 목사는 “어떤 사람들은 방언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언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기적을 행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놀라운 성령의 은사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 잘 모릅니다. 그것 자체가 증거가 아닙니다.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느냐를 들어보면 압니다”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천부당만부당한 그릇된 주장이다. 성령충만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그의 말만을 들어서는 판단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만약에 예수님을 영접하여 믿고 있는 사람이 방언을 말하고, 예언을 하며, 기적을 행하고, 놀라운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나면 그는 100% 성령충만을 받은 사람이며, 그것 자체가 성령충만을 받은 완전한 증거이다. 하 목사가 말하는 “나무는 열매를 보면 압니다”라는 말은 맞는 말이지만 성령충만을 받은 사람의 경우에 성령충만의 열매는 결코 말에 있지 않고, 아홉 가지 은사 가운데 하나라도 나타나야만이 그것이 열매이다. 하 목사는 행 2:4를 “하나님의 성령충만함이 나타나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내가 말하는 것 입니다”라고 주장하는데 이것도 역시 천부당만부당한 그릇된 자의적인 주장이다. 행 2:4는 분명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하나님의 성령충만함이 나타나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내가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해석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잠언 30:5-6에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 말씀에 더 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 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용조 목사는 행 2:4에 분명히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에 기록된 “방언”이란 말을 빼버리고 “내가 말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더하여 거짓말하는 자가 되어 버렸다. 이외에 하 목사의 사도행전 강해는 전혀 그릇된 내용이 무수히 많이 섞여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신자들과 신학교 교수들과 목사들은 그를 한국교회를 이끄는 4명중의 하나로, 훌륭한 목회자로 추앙하고 있으니 이는 분명히 불행한 일이다.
서철원 목사가 말하는 성령충만
성령의 지배를 따라 사는 삶을 성령충만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에 의해 인도 되고 다스림 받고 지배받는 사람입니다 (서철원 목사, ‘성령의 사역’ 1990, p.29). 성령충만이란 성령의 지배를 뜻한다. 성령충만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의 통치를 받는 것이다. 성령은 신자들에게 내주하실 때부터 그들을 지배하고 인도하신다. 성령이 한 개인에게 오시면 믿음을 일으키고 회개케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믿음과 동시에 내주하신다. 성령의 인도가 성령의 지배이고 그것이 바로 성령충만이다. (서철원 목사, ‘성령신학’ 1995, p.149,149,151, 157)
이상에서 말하는 서철원 목사의 주장을 다시 정리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동시에 내주하신다. 성령은 신자들에게 내주하실 때부터 그들을 지배하고 인도하신다. 성령의 인도가 성령의 지배이고, 그것이 바로 성령충만이다”라는 주장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이 내주 하시고, 성령의 내주가 성령의 지배이고, 성령의 지배가 성령충만이다”라는 주장이다.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예수 믿을 때 성령충만을 받는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구약과 신약의 성경의 근거는 한 구절도 없다. 서철원 목사의 “성령의 지배를 따라 사는 삶을 성령충만이다”는 주장은 그릇된 성령충만의 번역에서 온 것으로 그릇된 정의이다. 이러한 그릇된 정의는 눅 4:1, 행 4:14, 행 1:8, 행 2:3-4, 롬 8:9,14에 기록된 성령충만의 뜻과 성령의 내주와 성령의 인도함에 대한 그릇된 번역과 해석에 기인한 것이다.
안영복 목사가 말하는 성령충만
성령의 충만이란 맡겨진 임무를 능력있게 수행하도록 위하여 성령이 충만이 임하여 지배하는 것을 말한다. (안영복 목사, ‘성령론 어떻게 연구할까’ p.114)
이상에서 안영복 목사는 “성령의 충만이란 성령이 충만이 임하여 지배하는 것을 말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 역시 “성령의 충만”의 그릇된 번역을 맞는 번역으로 믿고 착각 속에 있기 때문에 생긴 그릇된 주장이다.
소강석 목사가 말하는 성령충만
중직자들은 구약의 70인 장로처럼, 신약의 일곱집사처럼 성령충만을 받아야 한다. 성령 받음과 성령충만은 다르다. 성령충만은 은사이기 보다는 삶 자체에서 먼저 나타난다. 성령의 두 가지 충만이 있는데 외적 충만은 방언이나 예언이나 능력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적 충만이다. 기쁨이 넘치고 감사가 넘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풍성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소강석 목사, ‘신정주의 교회를 회복하라’ 2006, p.316)
이상에서 말하는 소강석 목사의 “성령 받음과 성령충만은 다르다”는 주장은 요 7:37-39, 요 20:22, 행 1:8, 행 2:4의 기록을 잘못 연구한 데서 온 것이다. 또한 “성령충만은 은사이기 보다는 삶 자체에서 먼저 나타난다”는 주장은 성령충만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생긴 그릇된 주장이다. “성령충만”은 그릇된 번역에서 온 그릇된 용어이며 바른 번역은 “성령(님)의 권능충만”이어야 한다. 또한 소강석 목사는 “성령의 두 가지 충만이 있는데 외적 충만과 내적 충만이 있다”라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은 성경에 그 근거가 전혀 없는 것으로 자의적인 그릇된 주장이다. 또한 “성령의 두 가지 충만이 있는데 외적 충만은 방언이나 예언이나 능력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적 충만이다. 기쁨이 넘치고 감사가 넘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풍성해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 역시 성령충만의 뜻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릇 주장하게 된 것이다. 바른 주장은 “성령충만은 방언이나 예언이나 능력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방언, 예언, 귀신추방, 능력 등 성령님의 아홉 가지 은사가 나타나면 기쁨이 넘치고 감사가 넘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풍성하여 지게 되는 것이다”이어야 한다.
이영훈 목사가 말하는 성령충만
성령충만이란 무엇이냐고 논하자면 더 깊은 신학적인 내용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성령충만이라고 하는 원리 한 가지만 말하고자 한다. 성령충만은 곧 말씀충만이다. 말씀충만과 성령충만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충만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한 사람들이 성령충만을 체험 위주로만 해석하다가 그 체험 위주의 신앙 때문에 여러 가지 부작용과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성령충만의 체험을 무시하고 말씀만 강조한다면 신앙이 메말라 지성주의, 형식주의에 빠지게 되고 만다. 말씀충만이 성령충만이고 성령충만이 말씀충만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충만을 받으려면 말씀충만해야 하고 말씀충만하려면 성령충만해야 한다. (1997년도 목회자 월요성령학교 강의안: '21세기를 향한 성령의 사역,’ 이영훈 목사의 강의 제목: ‘21세기를 향한 성령운동의 원리’ p.173-4)
성령을 받게 되면 권능이 나타나고 증인이 된다. 성령충만을 받게 되면 권능이 나타나고 증인이 된다.(이영훈 목사, 1998년 5월 11일 여의도순복음교회내 국제신학연구원 주최 ‘목회자 평신도 월요성령학교’에서 ‘한국 순복음성령운동(오순절운동)과 펜사콜라 브라운스빌 교회의 부흥’이란 제목의 강의 중에서 발췌). 성령침례는 성령으로 사로 잡히는 성령충만의 체험으로 일회적인 것이다. (이영훈 목사, 순복음가족신문 1998년 10월 11일 기고문에서 발췌)
결론적으로 성령충만이 곧 예수님 충만임을 잊지 말자. (이영훈 목사, 2007년 10월 24일, LA 크리스찬 투데이 신앙칼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투고 중에서 발췌)
이영훈 목사는 이상에서 “성령충만이란 무엇이냐고 논하자면 더 깊은 신학적인 내용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성령충만이라고 하는 원리 한 가지만 말하고자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의 “성령충만이란 무엇이냐고 논하자면 더 깊은 신학적인 내용으로 들어 가야 한다”라는 주장은 얼핏 보면 바른 주장인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전혀 그릇된 주장이다. 왜냐하면 성령충만이란 무엇이냐고 논하는데 더 깊은 신학적인 연구가 필요한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이영훈 목사가 주장하는 데로 성령충만이란 무엇이냐를 알기 위해서는 깊은 신학적인 연구로서는 절대로 알 수 없다. 성령충만이란 무엇이냐를 알기 위해서는 깊은 신학적인 연구가 필요한 것이 절대로 아니라 오직 눅 3:22, 눅 4:1, 눅 4:14, 행 1:5, 행 1:8, 행 2:3-4의 여섯 구절을 자세히 눈여겨 읽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동서고금의 수많은 신학자들이 성령충만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연구해 오고 있으나 오늘날까지 신학적인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영훈 목사가 주장하는 “성령충만이란 무엇이냐고 논하자면 더 깊은 신학적인 내용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영훈 목사의 “성령충만이란 무엇이냐고 논하자면 더 깊은 신학적인 내용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은 그가 아직까지 신학적으로 성령충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스스로의 고백이다. 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그릇 번역된 한글성경과 영어성경으로서는 “성령충만이란 무엇이냐”의 해답을 찾기 위하여 신학적으로 아무리 깊이 연구한다고 할지라도 그 해답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깊은 신학적인 연구가 없더라도 헬라어의 문법과 영어문법을 조금만 이해하면 그 해답을 금방 찾을 수 있다. 동서고금의 모든 신학자들이 위에서 말하는 여섯 구절의 번역이 맞다고 믿고 착각 속에 있듯이 이영훈 목사도 그들과 똑같이 착각 속에 있기 때문에 이 착각 속에서 빠져 나오는 것만이 “성령충만이란 무엇이냐”를 밝혀내는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이영훈 목사는 이상에서 “말씀충만이 성령충만이고 성령충만이 말씀충만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충만을 받으려면 말씀충만해야 하고 말씀충만하려면 성령충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은 올바른 주장인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제대로 한번도 읽어 보지 않고 주장한 것이라는 비난을 받기에 충분한 황당한 그릇된 주장이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성경 구절은 구약과 신약성경에 한 구절도 없는 것으로 이영훈 목사가 성경 특히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자세히 읽어보지도 않고 오직 그의 머리 속에서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그릇된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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