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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미래와 남겨진 감정
---한현희의 시세계
임지훈
우리는 왜 시를 쓰고 읽는 걸까. 명징하지도 않고, 선명하지도 않은 말들로 길게 써내려간 이 말들의 뭉치를 왜 이토록 신뢰하며 쓰다듬는 걸까. 아무도 읽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왜 ‘시’라는 형식을 빌어 무언가 말하고 그리는 걸까. 시를 쓰거나 읽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한 번쯤은 해봤을 고민이다. 나는 그 고민을 자주 꺼내어 본다. 무슨 의미인지 잘은 모르겠더라도 무언가 선연하게 마음을 뒤흔드는 문장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그 질문을 꺼내어 매만진다.
젊은 시인의 시를 읽는다는 건 나에게 이런 의미다. 미처 풀리지 않은 상징과 기호의 세계 속으로 발을 들여놓는 일. 처음으로 내던져진 세계에서 알 수 없는 사물들의 관계를 추적하는 일. 그리하여 전부는 아닐지라도, 조금이나마 이 세계를 축조한 사람의 마음을 쓰다듬어 보는 일. 그래서, 종국에는 나조차 내 안에 남겨져 있던 나도 모르는 나의 마음을 읽어내 보는 일. 타인의 시를 읽으면서 나를 읽게 되는 일이 조금은 생경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우리가 세계를 읽는 방식이란 내 마음이라는 안경을 통해서 벌어지는 일이다. 알 수 없는 뭉치 속에서 알 수 있는 것을 발견한다는 건, 그 속에서 나와 같은 마음을 발견하는 일이라 말해도 그리 무리는 아니리라고 생각한다.
한연희의 시집 희귀종 눈물귀신버섯(문학동네, 2023)은 이채로운 제목만큼이나 이채로운 시어들로 가득차 있다. 한편으로는 녹음이 우거진 것 같고, 한편으론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생명력들이 자꾸만 꿈틀거리는 것 같다. 그래서 한연희의 시 한 편 한 편은 한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라기보다 세밀하게 자꾸만 뜯어보고 싶은 풍경에 가깝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편들은 대개 2~3장 정도의 분량을 가진 장시들로 주로 이루어져 있다. 개개의 시편들은 독특한 알레고리와 상징을 통해 자체적인 세계를 구성하는데, 이를 위해 상황을 제시하고 시어에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의미를 불어넣는다. 그렇다보니 한연희의 시는 짧고 구체적인 감정을 직설적으로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상황에 따른 독특한 서사를 제공하며, 그 세계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예컨대 아래의 시를 한 번 살펴보자.
인간 연습을 한다
기침하고 코를 풀고 다리를 찢는다
재채기가 나올 때마다 어쩐지 인간에 가까워지는 것 같아
그러나 멀지 않은 시대엔 신체를 버려야 하는 게 맞겠지
그래서 우리는 작두콩의 생명 유지 방법에 관해 연구한다
진딧물이 달라붙지 않도록 새파랗게 독해지는 것
햇빛을 더 받도록 몸집을 부풀려 변태하는 것
꼬투리를 단단히 붙들고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
콩과(科) 식물은 아주 차가운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에 가까울수록 뜨거운 피로 분노에 자주 빠져든다
이런 사소하고 별일 아닌 점들이 미래의 차이를 만든다
세계 최대 두상 대회에서 대상을 받았을 때
잘못을 깨닫기도 전에 고열로 부은 머리가 기침병을 퍼뜨렸고
이후로 결코 건강한 날은 오지 못했어
뜨거운 차는 쉽게 목구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나는 무릎을 꿇고 흐물거리는 점액질을 퉤 뱉는다
작두콩의 초록색은 너무 선명해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고
그 속의 동그랗고 납작한 낱알들은
마치 아프지 않기 위해 오히려 아프고 마는 신체이형장애 환자를 닮았고
때마침 농사를 짓는 마을 주민이 나를 불러 세워
인간은 변모할 거라고
품종개량이 일어날 거라고
앞으로는 통증을 느낄 수 없는 인간 생활만이 존재하게 될 거라고
확고한 말씀은 때론 몸에 좋지 않다는 걸 마을 주민은 모르는 걸까
인간이 인간의 외형을 잊고서 남의 살을 물어뜯거나
집을 버리고 외진 수풀에 모여 종말에 열중하거나
아무렇지 않게 재가 되어버린다
여전히 나는
코는 축축하고 다리는 흐느적거린다
두 개 네 개 다섯 개로 늘어나는 것만 같다
작두콩 차를 많이 마신 덕분인가봐
두 발로 직립보행하는 자가 인간이든 개든
이런 개념은 기침 한 번에 사라진다
반듯하게 누워서 입을 벌린다
미래가 호로록호로록 입안으로 들어온다
- 「미래에 없는」, 전문.
위의 시는 작두콩의 생육과 인간의 삶을 씨실과 날실처럼 교차시키며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 두 시어가 교차하며 진행되는 까닭에, 작두콩과 인간의 의미는 서로 교환되기도 하고 물들기도 하면서 한 점을 향해 이어져 나간다. 그리하여 닿게 되는 한 점은 아마도 ‘인간’이리라 생각되는데, 왜냐하면 이 시에서는 처음부터 “인간 연습”이라는 상황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습”이라는 시어로 미루어 보건데, 이 시에서 전제하고 있는 ‘인간됨’이란 인간이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생물학적인 특수한 요소가 아니라, 어떤 특수한 연습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후천적인 교육의 산물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실 이러한 상황 설정이 누군가에게는 낯설 수 있겠으나, 생각해보면 ‘인간됨’이란 그리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모든 사회의 고유한 문화와 기술발전 상황에 따라 ‘인간’의 정의를 달리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발전이 더딘 가부장제 사회의 국가에서라면 성별에 따른 노동의 분업과 가족 내 역할에 따라 ‘인간됨’이 결정될 것이고, 기술발전이 고도의 수준에 이르렀으며 대안적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촉발된 사회의 국가에서라면 ‘인간됨’이란 또 다른 의미를 통해 결정될 것이다. 예컨대 ‘인간됨’이란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으로서의 규격, 즉 특수한 사회적 요구에 대한 충실성을 통해 규정된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라는 사회적 형상에 가닿기 위한 끝없는 연습을 하는 중이라 생각하더라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게 된다. ‘인간’임에도 ‘인간’에 가닿기 위해 연습을 해야 하는 상황, 그것은 위의 시에서 제시하는 특수한 상황이면서 동시에 이 시를 읽는 존재 일반이 처해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작두콩의 생명 유지 방법”에 대해 연구한다는 화자의 말은 단지 특수한 분과학문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는 들리지 않게 된다. 어떻게 작두콩을 목적에 맞게 기를 것이냐는 ‘방법’에 대한 논의는 곧 어떻게 인간을 사회적 목적에 맞게 구성해낼 것이냐는 사회적 함의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에 호응하듯, 시의 중간 즈음에서 화자와 마주하는 “농사를 짓는 마을 주민”과의 대화는 작두콩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것으로 이어진다. 마치 “작두콩”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듯, “인간은 변모할 거라고/품종개량이 일어날 거라고/앞으로는 통증을 느낄 수 없는 인간 생활만이 존재하게 될 거라고” 말하는 주민의 말은 “인간 연습”이라는 최초의 상황 설정과 맞물리면서, 그러한 연습의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한연희의 시는 이처럼 상황을 제시하고 이로부터 특수한 시어를 길어내어 구체적이면서도 서사적인 하나의 세계를 축조한다. 그렇기에 개별적인 시편 하나하나는 시어나 시의 정조, 혹은 전제된 상황을 통해 교집합을 구성하기 보다는, 시의 화자가 지닌 성격과 말하기의 태도와 방식, 그 속에서 추출되는 지향성을 통해 교집합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여기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교집합의 가장 커다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바로 지향성이다. 그렇다면 한연희의 시집 희귀종 눈물귀신버섯의 개별적인 시편들이 공통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위의 시가 그러하듯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때의 질문은 인간 그 자체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남겨지는 여분들, 혹은 앙금들 쪽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제자리를 찾기 위해
굴러다니는 핀볼 게임의 구슬처럼
데구루루 데구루루
혼이 나가고 들어가고
왜그랬어왜그랬어왜그랬어왜그랬어
어떤 응어리가 데구루루 굴러간다
우정을 돌돌 뭉친 쪽지와 선물을 포개어놓은 자리에
개의 늘어진 혓바닥이 있다
신뢰합니다를 외치던 자에게 뒤통수를 맞았던
아무런 이유 없이 친구에게 절교당했던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포옹과 친절과 다정으론 역시 부족한 거구나
좋아하는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어
쫓아다니고 싶었을 뿐인데
느닷없이 출몰하는 지옥
세면대에 물을 받아놓았더니
수면 위에 초파리가 앉아 뱅뱅 돈다
초파리를 죄다 죽이고 얼굴을 씻는다
미워하고 싶은 자의 얼굴을 본다
미워하는 자의 얼굴이 된다
마음이라는 단어를 개의 주둥아리에서 끄집어냈는데
마침내 미쳐버리고 말았다
침대에 놓인 신발과
책장에 꽂은 머리카락과
집 없이 떠도는 혼백만으로
나는 당신의 귀신이 됩니다
당신이 내다버린 마음을 먹고 자라난 것입니다
모든 게 엉망이구나
그리하여 오늘 죽은 자와 내일 죽을 자와
아니 죽지 않을 자 모두
참 다정한 귀신이 되려 노력하는 걸 보면서
머리카락을 늘어뜨린다
개는 죽으면 영영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고
인간은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빨간 실타래와 부적을 베개 밑에서 꺼내
가스불에 태우고 나서야
선명하게 보인다
드디더 찾았다
내가 발뻗고 죽을 자리!
- 「광기 아니면 도루묵」, 전문.
직유를 통해 제시되는 최초의 상황에 주목해보자. “제자리를 찾기 위해/굴러다니는 핀볼 게임의 구슬”이라는 직유는 인간의 “혼”을 향해있다. 이는 앞서의 시에서 그러했듯 한연희의 시에서 자주 나타나는 특수한 양상 가운데 하나인데, 그의 시에서는 ‘인간’에게 당연히 내재되어 있으리라 여기는 요소들이 자주 분리되거나 분열되어 있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위의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의 정신-혼은 인간의 몸 그 자체에 스며들어 있거나 밀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흡사 정신이 나가버린 광인의 모습처럼 외따로 떨어진 모습으로 제시된다. “모든게 엉망이구나”라는 화자의 말처럼, 시는 산발적인 감정의 소묘와 축축하고 뭉그러진 물성을 지닌 시어들의 교차를 통해 내밀하고도 혼란스러운 광인과도 같은 ‘나’의 내면을 그려낸다.
하나 짚어볼 것이 있다면, 위의 시에서 제시되는 감정들은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제시된다기보다 부산스럽고 부산물스러운 모습으로 제시된다는 점이다. 마치 그것은 시에서 나타나는 “응어리”와도 같은 모습인데, 왜냐하면 위의 시에서 화자인 ‘나’가 시에서 드러나는 자신의 감정들을 마치 덧붙여진 것, 혹은 떨쳐내지 못해 거듭 생의 발목을 붙잡는 부수적인 것들처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우리가 흔히 상식적으로, 앞으로의 생을 위해 떨쳐낼 감정들은 떨쳐내고, 잊어야 할 것은 잊어야한다는 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렇게 떨쳐내고 잊어버리고 싶어 하는 응어리들, 혹은 부수적인 그 감정들이 이 시편에서는 시적 화자의 인격을 구성하는 가장 깊은 요소들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조금 더 정교하게 말하자면, 위의 시에서 시적 화자의 인격을 구성하는 것은 그와 같은 응어리를 떨쳐냄으로써 구성되는 순수한 인간 정신으로서의 ‘혼’이 아니다. 그렇게 떨쳐내고자 하는 응어리와 같은 감정들이 시를 읽으며 마주하는 화자의 인격을 구성하고 있다.
인간이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떨쳐내야 할 부산물 적인 감정 혹은 응어리와 같은 것들이 인간의 인격을 구성하고 있다는 건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어쩌면 이것은 앞서의 시편에서 점멸하듯 나타나고 사라졌던 ‘인간됨’에 대한 이야기와 엮어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예컨대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의 규격을 위해 떨쳐내고 잊어야만 하는 감정과 감각들이 있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쉽사리 놓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 혹은 그렇게 떨쳐내라고 요구받는 감정과 감각들이 사실은 인간의 인격을 구성하는 요소라는 것. 그렇게 ‘인간됨’을 강요하는 사회적 요구는 역설적으로 ‘인간’이라는 사물의 가장 중심에 놓인 감정과 감각들을 비워낼 때에야 다다르게 되는 ‘비인간’의 형상이라는 것으로 우리는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응어리와 같은 감각들에 대한 감정은 어쩌면 우리가 차마 버리지 못하는 ‘인간’에 대한 미련이라는 역설에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가닿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산에 자주 오르는 사람은
계곡이 나타난다고 한들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거기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 한들 만나러 가지 않는다
언젠가 한때 정을 나누고 서로에게 의지했던 사이였지만
그이는 계곡에 빠져 죽은 혼이 되어 있을 뿐이라
더는 마주할 수가 없고
산에 오르게 하는 이유가 원한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북한산에도 가고 관악산에도 가고
또 어느 날엔 도봉산 둘레길을 걷고
그저 습관처럼 산을 찾는 사람
그가 우연히 무수골 입구의 비석에서
근심과 걱정이 없어진다는 마을 이름의 의미를 읽는다
딱히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아담한 길을 따라 걷고 걸으며 근심을 잊어보려 애쓴다
마침내 계곡에 이르러
그 무수골 계곡에 산다는 흰 버섯을 본다
바위틈에 달라붙은 이끼를 훑는다
그리고 불쑥
저편 짙은 수면 위로 머리를 내민 원혼을 알아챈다
스르르 스르르 스르르
광목천이 미끄러지듯 서서히 움직여오는 것
여전히 꾹 다문 입매와 물기 어린 눈망울을 본다
여전히 기다랗고 단단한 몸의 윤곽을 본다
아줌마 아주머니 하고 부르면
소녀처럼 늘 울고 웃던 그이가
우물쭈물하며 손을 내민다
그동안 잘 지내지 못했는가?
믿음은 이끼에 가깝지 않았던가?
계곡에선 이제 죽지 않는가?
질문이 거듭될수록
그이의 눈은 텅 비어가고
몸체에 닿는 물의 철썩거림은 커다래지고 커다래져서
정확히는 알 수 없는 울음으로 번져간다
영영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 옛날 무수골에 들른 왕은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모든 근심과 걱정을 다 내려놓고 가겠다고 말했지만
아마 전부를 내려놓진 못했을 것이다
산에 오른 자 역시 원혼을 향한 죄책감을 내려놓을 순 없다
무수골에서 버섯을 따고 가지를 심고 멱도 감으며
수면 위 가끔 떠오르는 물거품과 녹조를 걷어내거나
미끄러지고 흘러내리는 감정을 위해
매일 돌탑을 쌓고 기도를 올려주다
점점 산에 오르지 않는 자가 되어
거기 있던 사람이
산에 오르는 다른 자와 약속을 했지
이제 거기 말고 여기
멀리멀리 나아가
마하 싯다야 사바하*
사바하 무수수하루쿠기고나다헤루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자
그러니 산에 오르는 또다른 당신은 알아챘으리라
그동안 잘 지내지 못했는가?
그동안 외로지 잘 지내고 있었는가?
이런 물음이 얼마나 원망에 깃든 기도에 가까운지
계곡에 이르면 왜 울컥 목이 메고 마는지
발을 담그고 수면 아래로 기어이 들어가고 싶은지 말이다
매년 무수골 입구에는 작고 흰 버섯이 피어나는데
그 이름은 희귀종 눈물귀신버섯
그걸 보기 위해 사람이 몰리는 여름마다
꼭 익사자들이 생겨나 계곡은 충만해진다
- 「계곡 속 원혼」, 전문.
* 대성취존이시여, 성취케 하소서.
인간의 생애를 산에 오르는 일로 비유하고 있는 이 시에서, 중심에 놓이는 서사는 산을 오르는 것이면서 동시에 산을 오르는 일이 아니다. 화자는 산을 오르고 그 능선을 계속해서 따라가지만, 실제로 화자의 눈을 잡아당기는 것은 산과 산 사이에 놓인 계곡이기 때문이다. 위의 시에서 계곡은 죽은 이들과 미처 인간의 역사에 담기지 못한 감정들, 언어화될 수 없었던 사건들이 계속해서 흘러드는 장소이다.
사회적 존재로서 인생을 살아간다는 건 그 자체로 이 시의 상황과도 같지 않을까. 우리는 거듭해서 산을 타고 오르내리며 사회적으로 불필요한 감정들은 계곡에 던져버리고 나아가야 할 테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역설적으로 우리가 내던진 감정과 기억, 차마 언어화되지 못한 응어리들로 자꾸만 시선을 빼앗긴다. 우리는 삶을 살며 평온함을 바라며 그것을 위해 스스로의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쓰지만, 그건 역설적으로 우리의 마음이 본질적으로 평온할 수 없으며 산발적으로 튀어나오는 감정과 응어리들에 사로잡힌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인간이 되기 위해 내던진 인간적인 요소를 향해, 우리의 발걸음의 방향과는 관계없이 우리는 거듭 시선을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한연희의 시집 희귀종 눈물귀신버섯이 내어놓고자 하는 인간학의 진실이 아닐까.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됨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내려놓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러한 것들을 내려놓았을 때 가닿게 되는 최종적인 귀결은 과연 인간적인 인간인 것일까.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개념도 사실은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특수한 정치경제적 체제 하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관념 혹은 이미지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 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연희가 한 편 한 편의 시를 통해 담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내려놓고자 했던 그 모든 부산물과도 같은 감정들이 바로 인간의 진실이며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중심의 사물이라는 사실이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한연희의 시는 다음과 같이 또 다른 진실의 한 타래를 풀어놓는다. “그녀는 비로소 문고리에서 미안함을 빼내어 목에 걸어둔다//그녀와 한몸인 듯 이제야 딱 들어맞는다/정말 미안해//이제야 자신에게 좀 너그러워진다”(「미안해를 구성하는 요소」). 어쩌면 우리가 정말 우리로서, ‘인간’으로서 있을 수 있는 것은 사회가 내버리라 요구하는 그 부차적인 요소를 대면하고 그것을 나의 것으로 껴안을 때가 아닐까.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끝내 놓지 않으며, 우리가 버리고자 했던 것들은 과연 무엇인지 물어본다.
임지훈
2020년 서울신문,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 당선
한양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동대학 국어국문학과 박사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