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종의 맥을 잇고 조선 태종과 세종의 귀의를 받은 행호스님 이야기
제주도 국립박물관에는 불상 유물이 한점도 없다.
국립박물관으로 불상이 없는 유일한 박물관이다.제주도는 옛부터 절오백 당오백이란 말이 전해지는 곳이다.절이 오백이요.신당이 오백이란 뜻이다.
제주는 민중불교와 무속신앙이 어우러져 신불합일의 신앙체계를 지켜왔다.
조선 숙종때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은 제주의 불교와 무속을 혹세무민하는 사교와 미신으로 단정했다.도내 각 마을마다 산재해 있던 신당 129개소와 모든 무구들을 불태워 버렸다.
1000여명에 이르던 심방들은 귀농시켜 버리고 제주도의 사찰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청동불상은 모두 바다로 던져 버렸다.그때 제주의 신화와 역사기록.그리고 고대문헌들이 함께 불길에 사라졌을 것이다.
봉려관스님에 의해 관음사가 세워지기 전까지 제주도는 200년간 무불상시대였다.제주 박물관에 불상이 한점도 없는 이유이다.
한라산 상봉에도 석불이 있었다.석불 뒷면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세 분의 성인이 입적할 곳이다.
한분은 와서 살다가 입적하고
한분은 들어 와서 입적하고
한분은 유배되어 열반을 보이리라
삼성입적처 三聖入寂處
래거입적 來居入寂
입거입적 入居示寂
류거시적 流居示寂
제주에 유배왔던 첫번째 성자는 행호스님이다.
그는 해동의 공자라고 자부했던 최충의 후손이다.조선초기 태종과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태종의 원찰 원주 각림사와 고양 대자암 주지로 머물렀다.대자암은 태종의 네째아들 성녕대군의 능침사찰이다.
효령대군의 후원을 받아 대자암에서 능엄경.법화경.육경합부등을 판각하였다.그당시 대자암은 120명 승려가 거주하고 행사때는 2000명 승려가 함께 하던 왕립사찰이었다.세조때는 한글창제의 주역 신미대사가 주석하였다.
행호스님은 강진 백련사를 중창하는등 천태종의 부흥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선종의 총본산인 흥천사의 주지가 되어 설법하면 수만명의 대중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사교로 여긴 불가의 승려에게 구름처럼 대중들이 모여들자 성균관 유생 이영산등 648명이 집단으로 상소하였다.
신들이 듣건데 전조의 말기에 승려 나옹이 허무적멸의 가르침으로 어리석은 무리들을 유혹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승려 행호가 흥천사에 머물면서 나옹의 도반이라고 하면서 백성을 속여서 풍속을 바꾸려고 합니다.백성들이 사모하기를 나옹과 다름없이 합니다.행호로부터 받은 도첩이 한해동안 수만명에 이르렀으니 이는 인류가 멸망할 조짐입니다.
고려왕조의 쇠퇴한 말기에도 나옹을 목베어 죽여서 요사한 무리를 없앴거늘 하물며 성세에서 보고만 있겠습니까.영을 내려 승려 행호의 머리를 끊어 요사하고 망령된 근본을 영구히 없애면 국가에 다행한 일이 될것입니다..
세종28년 (1446년) 행호스님은 제주 유배길에 오른다.꺼져가는 불법을 중흥시킨죄이다.
수행이 깊고 학덕이 높아 출가제자들이 줄을 잇고 수만명의 백성들이 성인으로 받든 것이 숭유억불의 조선사회에서는 용납할수 없는 대역 죄인이었다.
제주도에 귀양온 행호스님은 제주관리들의 조롱과 핍박을 받다가 참수형을 받아 입적했다.
행호 큰스님은 무너져 가는 불법을 다시 일으키고 수만명의 문도와 백성들의 존경을 받던 어진 스승이었다.
그러나 대역죄인의 몸이 되어 제주도에까지 끌려와서 순교하였다.
제주도는 조선불교 삼대성인의 순교성지이며 열반처이다.
첫째 성인은 세종때 천태행호 큰스님이다.
두번째 성인은 명종때 라암보우 큰스님이다.
세번째 성인은 영조때 환성지안 큰 스님이다.
조계종단에서는 제주불교계와 공동으로 세 분 순교성자 봉찬다례제를 해마다 올리고 높은 뜻을 기렸으면 한다.
사진 1번 온갖 모욕과 구박을 당하면서 가람을 수호하고 불법을 지켜온 조선의 고승들을 생각한다.
보우스님과 환성지안스님의 순교석상이 모셔진 제주 불사리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