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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1-11 (탄식하며 우는 자가 되라)
성경본문 : 에스겔 9: 1~11 (4절)
1 그가 또 큰 소리로 내 귀에 외쳐 가라사대 이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로 각기 살륙하는 기계를 손에 들고 나아오게 하라 하시더라
2 내가 본즉 여섯 사람이 북향한 윗문 길로 좇아 오는데 각 사람의 손에 살륙하는 기계를 잡았고 그 중에 한 사람은 가는 베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찼더라 그들이 들어 와서 놋 제단 곁에 서더라
3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올라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4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5 나의 듣는데 또 그 남은 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그 뒤를 좇아 성읍 중에 순행하며 아껴 보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쳐서
6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 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찌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7 그가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성전을 더럽혀 시체로 모든 뜰에 채우라 너희는 나가라 하시매 그들이 나가서 성읍 중에서 치더라
8 그들이 칠 때에 내가 홀로 있는지라 엎드리어 부르짖어 가로되 오호라 주 여호와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분노를 쏟으시오니 이스라엘 남은 자를 모두 멸하려 하시나이까
9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의 죄악이 심히 중하여 그 땅에 피가 가득하며 그 성읍에 불법이 찼나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으며 보지 아니하신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아껴 보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 하시더라
11 가는 베옷을 입고 허리에 먹 그릇을 찬 사람이 복명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게 명하신대로 내가 준행하였나이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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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며 묵상하며 :
하나님은 죄악을 결코 간과하지 않으십니다. 심판 중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심판의 날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자가 되어야합니까?
탄식하고 우는 자가 되라.
끔찍한 성전의 타락상을 보여주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살육자들을 불러 이스라엘을 심판하십니다. 서기관의 먹그릇을 찬 사람에게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4절)고 하십니다.
그 후에 여섯 명의 살육자들은 이마에 표가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껴보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아이와 부녀를 다 죽여야 합니다. 특별히 그 무서운 심판은 성전 앞에서 동방의 태양신을 경배하던 늙은 자들을 심판함으로 시작됩니다(6절).
하나님은 거룩한 성소를 더럽힌 자들을 간과하실 수 없는 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방식입니다. 악을 심판함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정의가 온 천하에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자비한 심판 중에서도 긍휼을 베푸십니다. 가증한 타락에 동참하지 않고, 탄식하며 울던 사람에게 입니다(4절). 한 사람만이 서기관의 먹그릇을 찬 데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극히 적은 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심판에서 구원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입니다. 악한 시대 속에서 우리가 보여야 할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연락에 빠지지 말고, 상한 목자의 심정으로 탄식하고 우는 자가 되어야하겠습니다.
악한 시대를 중보하는 자가 되라.
무서운 심판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면, 선지자의 중보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 에스겔은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그는 심판을 외쳤지만, 심판의 잔혹한 현장 속에서 상한 마음으로 부르짖습니다. “오호라 주 여호와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분노를 쏟으시오니 이스라엘 남은 자를 모두 멸하려 하시나이까”(8절)
에스겔의 중보기도는 아브라함과 모세의 중보기도를 생각나게 합니다. 하지만 에스겔의 중보기도는 심판당하는 자들이 안타깝고 불쌍해서 드리는 단순한 중보의 차원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그의 중보는 여호와의 궁극적인 목적과 영광에 근거한 것입니다.
바로 ‘남은 자’에 대한 관심입니다. 포로가 되기 전부터 끊임없이 심판을 예언했던 많은 선지자들, 특히 이사야 선지자는 ‘남은 자’의 소망을 선포했는데, 지금 에스겔은 ‘남은 자’까지 멸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라고 부르짖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보하는 자를 통해 당신의 계획을 드러내시며,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출처: 일용할 양식/ 2006.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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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아신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아무리 사소하고 비밀스러운 일이라도 절대로 그분의 지각(知覺)을 피해갈 수는 없다. 우리는 간혹 우리의 내밀(內密)한 일을 하나님께서 몰라주셨으면 하고 바라기도 하지만 그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우리의 생각을 살피신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시 139:2).
우리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드러난 결과를 통해 그 사람의 생각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대체로 일의 결과가 좋으면 사람의 동기를 문제 삼지 않는 경우가 많다. 동기는 여전히 감취어진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드러나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생각을 모두 아시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하는 그 마음의 동기를 시기 때문에, 일의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동기가 옳지 못하면 그 일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적어도 하나님께 있어서는 동기가 결과보다 우선한다.
우리는 많은 일들을 하면서 살아간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일을 함에 있어서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의 결과가 아닌 그 일의 동기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보다 그 일을 왜 하느냐가 중요하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마다 왜 그 일을 하는지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물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일을 하는 데는 대체로 두 가지의 동기가 있다. 하나는 자신을 위하여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다시 말해 같은 일을 하면서도 어떤 사람은 자신의 영광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추구한다. 그 외의 다른 동기들은 대체로 이 두 가지 동기에 종속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많은 거룩한 일을 하고 있다. 하나님을 예배하며,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며, 전도하며, 봉사하며, 성도의 교제를 나눈다. 그러나 이러한 거룩한 일을 하면서도 역시 동기는 각기 다를 수 있다. 거룩한 일을 거룩하신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거룩한 일을 자신을 위해 하는 사람도 있다. 즉 마땅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해야 하는 사람이, 그렇게 일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것은 가장 옳지 못한 일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선을 가장한 악, 즉 위선(僞善)이다.
성경에는 이 위선을 ‘외식’(外飾)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을 주로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에게 적용하셨다. ‘외식하는 자’라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낱말은 ‘hypocrites’인데, 이 말에서 영어의 ‘hypocrite’가 유래하였다. ‘hypocrites’는 본래 ‘가면을 쓴 사람’이라는 의미로, 배우를 말한다. 당시에는 연극을 할 때 배우가 배역에 따라 얼굴에 가면을 썼기 때문에 배우를 그렇게 불렀다. 연극을 하는 배우가 정말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가 바라는 것이야 말로 연극을 마치고 무대 위에서 내려오기 전에 관중석에서 터져 나오는 박수가 아닌가? 바로 사람들로부터 오는 갈채이다. 배우라는 직업은 솔직하게 사람의 영광을 구한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나 오늘날이나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사람의 영광을 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한다. 마땅히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할 사람들이 사람의 영광을 구하니 문제이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함을 가장해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이러한 외식을 무섭게 책망하셨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척 하면서 사람의 영광을 갈망하는 것은 정말 혐오스럽다.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로 합당치 않다.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요 12:43).
우리들의 이야기를 해보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거룩한 일들을 행하는가?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을 통해 우리가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사람의 영광을 바라지는 않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말씀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사역자들이 말씀을 선포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밝히 드러내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냄이 아닌가? 그렇지만 말씀의 선포자가 하나님의 평가가 아닌 인간의 반응에 따라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는 않는가? ‘목사님, 은혜 많이 받았어요.’라는 말 한마디에 흥분했던 감정이, 바로 이어지는 ‘뭔 설교가 그따위야.’라고 들려오는 말 한마디에 싸늘하게 식어진 적은 없는가? 왜 이러한 감정의 기복이 생기는가? 그것은 인간이기에 당연한 반응이 아니라, 그 내면 깊숙한 곳에 사람으로부터의 갈채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역시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다. 말씀을 강론하는 일은 연예인들이 모여서 하는 잡담이 아니다. 연설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선포하는 영광스럽고도 심각한 일이다. 어찌 사람들의 입에 의해 그 가치가 결정될 수 있다는 말인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 일을 할 뿐이다.
특히 ‘외식’이라는 말 자체가 예술로부터 유래했으니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특히 이 외식으로 자유롭기가 더 어렵다. 오늘날 스스로를 ‘찬양사역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그들의 일에서, 그들의 기질에서 이러한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다. 정말 그들은 그 입에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말을 달고 살지만, 실제로 갈망하는 것은 사람의 영광이 아닌지, 사람들의 갈채가 아닌지 솔직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무대라는 속성이 인간의 갈채를 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때로 사람들로부터 갈채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들이 정말 ‘찬양사역자’라면 찬양을 통하여 정말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이다.
봉사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보자. ‘봉사’라는 ‘섬김’이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집사,’ ‘봉사,’ ‘일꾼,’ ‘종’과 같은 단어는 다 같은 헬라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봉사는 사실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고 ‘비천한 일’이다. 남을 섬기는 일은 비천한 사람이 하는 일이다. 이것은 세련된 일도 아니며, 힘들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오직 주인의 뜻을 이루는 데 그 삶의 목적이 있다. 그런데 이 비천한 일이 어찌하여 요즘 교회에서는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영광의 길로 변화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내가 아무리 비천해져도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다면 기꺼이 그 비천함을 감당하는 것이 바로 봉사이다. 하나님의 영광과는 관계없이 봉사를 통해 내가 영광을 취하려는 태도가 바로 외식이다.
사도 바울의 말을 기억해야겠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Soli Deo Gloria!
펴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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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며 적용하며
1.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들은 누구입니까(1~2절)? 그들에게 무엇을 지시하셨으며, 심판에서 제외될 사람들은 누구입니까(3~6절)?
2. 심판의 잔혹함이 어떠하며, 모든 것을 목격하던 에스겔이 드린 기도가 무엇입니까(7~8절)? 에스겔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무엇입니까(9~11절)?
3. 당신은 하나님을 떠난 죄악을 보면서 상한 마음으로 탄식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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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하며 간구하며 :
사랑의 하나님 !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몸 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하시고
실천하는 믿음을 주옵소서,
성도된 우리들이
내 이웃을 기쁘게 하며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범사에 감사하며 인내와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뜻이 같게 하시고
한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신실한 성도의 모습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아멘.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