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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0-51
나누는 일이 마쳤더라
[시작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완성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우리 가운데 오사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말씀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제가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가족에 대한 이야기, 이혼에 대한 설교를 거의 들어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지나고 나서 보니까 하나님께서 저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셨는데 어머니의 많은 기도가 있었기에 제가 고난을 겪고 이런 사역을 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의 언니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언니는 너무 착하고 일류로 점철된 삶을 살았습니다. 이화여고와 서울대학과 서울대학원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다닐 때는 기독학생회 부회장까지 했고 졸업 후에는 대학에 출강도 했습니다. 그렇게 화려한 학창시절을 보낸 언니가 결혼을 하고 지금은 빈민가에서 20년이 넘도록 아무 말 없이 헌신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나누어지는 인생을 잘 살고, 나누는 일을 마치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완성했다고 보여집니다. 모든 분야에 있어서 나누는 일을 마치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완성했다는 것은 어떤 인생을 말하는가 본문을 통해 보기 원합니다.
무엇이든 완성했다고 하는 사람은 첫째,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10, 17, 24, 32절을 보면 일곱 지파 중에서 스불론, 잇사갈, 앗셈, 납달리 가족대로 땅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열두 지파에게 땅을 분배하면서 항상 "가족대로, 가족대로"했지만 땅 나누는 일을 마치는 본문에서 다시 한 번 언급을 합니다.
모든 지파의 기업은 가족을 따라 주셨습니다.
아무리 성공했다고 해도 가족의 단위를 무시하면 성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식은 부모없이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문제아는 없습니다. 문제 부모만 있을 뿐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열두 지파의 분배를 보면 모든 지파는 공평하게 기업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지휘 하에 전쟁이 계속 되어 오다가 땅 나누는 일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했던 일곱 지파, 게을렀던 일곱 지파가 받은 땅을 보면 변방 땅에 불과한 곳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이든 할려면 부지런하게 해야합니다. 유다는 가장 많은 성읍을 얻었는데 누군들 변방 땅을 받고 싶어서 받았겠습니까. 누군들 부지런하지 않고 싶어서 부지런하지 않겠습니까. 열두 지파에 들기도 어려운데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까닭을 살펴볼 때 성경을 많이 알면 적용이 풍성해진다고 했습니다.
열두 지파의 특징을 살펴보기 위해 창세기 30장을 보면 야곱의 열두 아들이 나옵니다.
야곱에게 네 명의 부인이 있습니다. 언니인 레아와 동생 라헬, 그리고 첩 두 명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낳은 열두 아들의 이름을 누가 짓는가 하면 레아와 라헬이 짓습니다. 야곱이 짓는 게 아니라 레아가 자기 아들 이름을 짓고, 라헬이 자기 아들 이름을 짓습니다.
야곱이 얼마나 둘째 라헬을 총애했는지 모릅니다. 라헬을 너무 총애해서 조강지처인 레아를 얻고도 라헬 얻기를 칠년을 수일같이 여기다가 둘째 부인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라헬을 총애했습니다. 야곱도 인간적인 연약함이 있어서 주님이 인정하시는 부인은 레아였지만 죽을 때까지 라헬을 총애했습니다
라헬만 총애를 하니까 레아가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공평하셔서 레아는 아들을 쑥쑥 낳게 하셨습니다.
그 첫째 아들이 르우벤인데 그 뜻은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시고 이제는 살아나리로다'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두 번째 아들은 '나의 총애 없음을 들으시고 이도 주셨도다' 그래서 시므온입니다.
세 번째는 '나와 연합하리로다',
네 번째는 '이제는 찬송하리로다'.... 야곱의 사랑을 못 받으면서도 점점 하나님과 연합하여서 연합과 감사와 찬송으로 말이 바뀌어집니다.
이런 레아를 보변서 아들을 못 낳은 라헬을 투기를 하며 빌하를 야곱에게 첩으로 주었습니다. 그래서 빌하가 아들을 낳았는데 라헬이 뭐라고 이름을 지었는가 하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소리를 들으셨도다'하면서 단으로 지었습니다. 빌하가 두 번째 아들을 낳았을 때는 '내가 형과 경쟁하여 이겼도다'하고 납달리라고 지었습니다.
레아가 네 번째 아들을 낳고 생산이 멈추었는데 레아도 인간적으로 연약한 고로 실바를 첩으로 주었습니다. 실바가 아들 갓을 낳았는데 '복되도다'라는 뜻입니다. 또 앗셀을 낳았는데 '기쁘도다'라는 뜻입니다. 레아는 이렇게 항상 말이 덕스럽습니다.
레아의 맏아들 르우벤이 어머니와 야곱을 합쳐주려고 합환채를 가지고 가다가 라헬을 만났습니다. 라헬이 그것을 보고 '그 합환채 덕분에 형님이 아들을 잘 낳는가'보다 하고 그것을 팔라고 하니까 르우벤이 그것을 팔고 어머니 레아와 야곱이 동침하는 기회를 얻어왔습니다. 그 때 레아의 생산이 멈추었다가 다시 아들을 낳았는데 '하나님이 값을 주셨도다'라고 해서 잇사갈입니다. 또 스불론을 낳았는데 '하나님께서 후한 선물을 내게 주셨도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도록 라헬은 아들을 못 낳았습니다. 그러면서 사랑받지 못하는 레아가 아들을 낳을 때마다 감사하는 모든 과정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라헬에게 열 한 번째로 아들 요셉을 주셨더니 '다른 아들 하나 더 낳기를 원한다'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것이 요셉의 뜻입니다. 두 번째 아들을 주셨는데 죽으면서 '슬픔의 아들', 베노니라고 이름을 짓고 떠났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는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라헬은 주로 억울하고, 경쟁에서 이겼고, 그리도 기다리던 아들을 주셨는데 아들을 더 달라고 하고, 슬프다고 하면서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것이 그대로 자녀들에게 간다는 것입니다. 땅 분배에서 그대로 결과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울 때 레아처럼 사랑하신다, 주셨다, 연합하다, 찬송, 복되도다, 기쁘다, 후한 선물을 주셨다.. 한다면 그것이 그 사람의 인격 아니겠습니까. 레아에게는 힘든 과정을 겪으면서 보혜사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남편의 사랑보다 더한 주님의 사랑과 깊이 연합돼 있었기 때문에 항상 감사하고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라헬이 낳은 자녀의 지파가 변방 땅, 형편 없는 땅을 받게 되는 것은 다 부모의 결과입니다.
또한 요구하지 않았어야 될 요단 동편을 요구한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는 어떤 사람입니까. 르우벤은 서모 빌하와 동침을 했고, 므낫세는 요셉이 애굽 제사장의 딸과 결혼해서 낳은 아들입니다. 갓은 첩인 실바의 아들입니다. 동편 땅을 요구할만 해서 요구했습니다. 부모는 잘 살아야 합니다. 여자로서 기업을 얻었던 슬로브핫의 딸들은 므낫세 지파에 속해있어도 요단 서편에 들어와서 기업을 얻었습니다. 므낫세 지파에 속해 있어도 서편에서 기업을 얻은 자녀도 있습니다.
레아의 믿음으로 자손들이 후대끼자 번성하는 것을 볼 때에 살인자고 간음자여도 레아가 잘 살다가 가면 자손들이 복을 받습니다. 결국 부모의 고난에 대한 태도가 자녀의 축복과 저주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로서 얼마나 막중한 책임을 느껴야 하는지 모릅니다.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이지만 그렇게 남유다를 괴롭히는 북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고, '길에 밴 첩경의 독사'인 단도 라헬의 소생입니다. 부모 책임의 가장 우선순위는 주의 길을 잘 가르치고 레아처럼 어떤 경우에도 감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창세기 49장에 야곱이 열두 아들에 대해서 예언을 했는데 신명기 33장, 사사기 5장의 열두 지파 명단에서 어떤 지파는 들어갔다, 어떤 지파는 빠졌다 하는 우여곡절을 거칩니다. 그러다 성경 마지막 요한계시록 7장 명단에는 유다, 르우벤, 갓, 잇사갈, 납달리, 므낫세, 시므온, 레위, 잇사갈, 스불론, 요셉, 베냐민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사장 지파인 레위가 세 번째 아들이지만 여덟 번째로 들어갑니다. 요셉과 베냐민은 마지막에 턱걸이로 입성을 했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둘째 아들이었던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을 우상의 본거지로 삼았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속한 지파였던 에브라임이지만 열두 지파 중에서 빠졌습니다. 단 지파도 빠졌습니다. 빠진 지파 둘 다 라헬의 소생입니다.
유다는 창세기 38장에 며느리와 동침한 후에 너무 오랫동안 겸손하게 인내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유다만 언제나 1위로 입성되는 영광을 누립니다. 다른 지파는 다 순서가 바뀌는데 유다는 언제나 1위입니다. 그래서 드디어 예수님이 오시는 축복을 누리는 지파가 유다입니다. 유다 지파가 압도적으로 많은 122 성읍을 가지는 것은 수많은 전쟁을 통해서 승리했다는 뜻입니다. 유다가 122 성읍을 얻은 것에 비해서 오늘 나온 일곱 지파는 스불론은 12 성읍, 잇사갈은 16 성읍, 앗셀은 22 성읍, 납달리는 19성읍을 받습니다. 10 내지 20, 거기에서 다 거기인 지파의 기업들입니다. 이렇게 변방 땅을 받고 조금 기업을 얻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성읍을 갑자기 많이 얻은 것 같아서 유다 지파를 보고 부러워합니다. 그럼에도 여러분은 지금도 유다를 무시하고 있고, 옛날에도 무시했고, 앞으로도 무시할 것입니다. 유다를 무시하는 여러분의 속성 때문에 여러분이 유다가 되기 어려운 것입니다. 유다는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각자 이 땅에서 맡겨진 역할이 있습니다.
유다가 제일이고 요셉이 나쁘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열두 지파를 통해 인간의 군상을 보여주시고 성도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열두 지파가 그 역할 모델을 한 것입니다. 역할 모델을 함으로 지금은 122 성읍, 12 성읍 이랬다가 성경 마지막 요한계시록 7장에는 다 똑같이 만 이천 명씩 열두 지파 144,000명이 입성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질고와 수치와 어떤 것도 주님께 내어놓고 주님만 믿으면 똑같이 구원의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인자 시므온의 지파도 똑같이 입성했습니다. 오늘 어떤 상황에 있어도 다같이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화려하게 학창시절을 보낸 언니가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문교부 유학시험을 봤습니다. 당연히 합격이 되어서 언니가 원하는 모든 대학에 입학 허가를 받아놓았습니다. 그런데 가기 직전에 후두염에 걸렸습니다. 노래를 할 수 없다는 청천벽력의 선고를 받고 한달 만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 결혼은 하지 않아야 될 결혼이었습니다. 우리 집의 개혼인데 아버지는 딸이 귀한 줄을 도통 모르셔서 결혼하자고 한다고 하니까 그냥 하라고 했습니다. 알아보고, 의심하고, 따져보는 것을 악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할 수록 저희 집은 하나님이 은혜로 살았지 밥을 안 굶은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엄마는 엄마 대로 도통하시고,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도통하셔서 우리 집안에는 인간의 말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친구들하고 싸웠다고 해도 초등학교 아이에게 '용서하라' 그런 이야기만 하셨기 때문에우리는 싸울 줄도 모릅니다. 어려서부터 싸우면 전부 울고 들어오고, 누구와 경쟁해서 이기고 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서로가 다 착하지만 저는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언니의 결혼을 보면서 '내가 보기에도 저 사람은 아닌데'하고 생각했습니다. 한 달 만에 그 집에 가보고 약혼 전 날 울고 불고 안한다고 했을 때 막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유교 가문에서 자라셨고, 장로님이 되셨어도 성경적 가치관이 없으셨습니다. 평생 안 믿으시다가 어머니 돌아가신 다음에 교회에 나가셨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결혼을 해야된다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의심하면 안 되고, 내일이 약혼식인데 체면이 문제였습니다. 제가 지금도 기억합니다. '사랑으로 승화하고 살아라' 이러셨습니다.
자신이 경험해보지 않고 정답만 이야기하는 것이 사람을 질리게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존경했지만 그 말씀에 설득력이 있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살아갈 수록 믿을 수록 생각해 볼 때 그 결정은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한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하려면 무엇보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열심히 봐야 합니다. 성경적인 가치관이 성립되지 않으면 누구도 올바로 사랑하고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결혼 하루 전이라도 확신이 없으면 하지 말라고 말씀 드리는 것이 괜히 하는 게 아니라 경험해보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이혼은 안 돼지만 결혼 전이라면 하루 전이라도 파할 수 있으면 파해야 합니다.
결혼을 한 언니는 그렇게 신앙 경력이 찬란하고 교회를 열심히 다녔어도 성경을 읽은 적이 없고 성경적인 가치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지혜가 없고 자신의 결혼 생활이 해석이 될 수 없었습니다. 정말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못 들어보았습니다.
아이를 금새 낳았는데 남편은 직장이 없었습니다. 저희 친정이 망한 후라 코딱지만한 집에 살고 있었는데 망한 우리 집에서 다같이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다음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저도, 언니도 교회 다니는 사람들끼리 결혼을 했는데 우리 집안을 양육의 사명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교회를 다닌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신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런 결혼을 할 수 있는가. 평생 교회를 다니고 새벽기도를 다닌 엄마인데 그럴 수가 있는가.
여러가지로 안 살아야 될 이유는 백 가지도 넘었습니다.
누구보다 효녀이고, 열심이고, 속 한 번 썩인 일이 없는 언니인데.. 그렇게 착하고 밝은데 왜 후두염에 걸리고, 왜 그런 결혼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 우리 식구는 모두 바보였습니다. 착한 것이 아니고 다 바보였습니다. 다 일류학교를 나왔어도 똑똑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얼마나 지혜의 근본인 지를 몰랐습니다. 그 때 단 한 사람이라도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이런 말들을 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두 번째, 억울한 마음을 가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고 나누는 일을 마치기 위해서는 억울한 마음을 가지면 안 됩니다.
40절부터는 단 지파의 땅 분배가 나오는데, 단은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소리를 들으셨다'는 뜻으로 라헬이 지어준 이름입니다.
기업으로 땅을 분배할 때 유다 지파는 '올라가고, 올라가고'가 많다고 했습니다. 베냐민은 '내려가고'가 많습니다. 스불론은 한 번씩 '올라가고, 이르고, 미치고'에서 끝났습니다. 잇사갈은 올라가고, 내려가고가 한 번도 없고 앗셀은 '이르고, 이르고, 이르고'입니다. 그런데 단은 올라가고, 내려가고, 이르고, 미치고 이런 말도 없이 자신들에게 할당된 것을 두려워하고, 무시했습니다. 주안에서 올라가고, 내려가고, 이르고, 미치고.. 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전쟁 중이다 하는 것이 좋은 겁니다. 정해진 땅에서 잘 살아보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단은 안 올라가야 할 데를 올라가서 쳐처 취한 유일한 지파입니다.
단 지파의 땅은 가나안 중앙에 주셨는데 단의 인구가 64,400 명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인구를 많이 주셨습니다. 저희 언니처럼 전력이 화려, 찬란합니다. 그런데 자기네들끼리 살기엔 분배 받은 땅이 너무 좁습니다. 좁은 데다가 사사기 1장, 13장을 보면 아모리 족속의 원주민과 블레셋 원주민이 괴롭혔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아모리 원주민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무서운 원주민이 괴롭히고 살 곳은 좁습니다. 그래서 자기들 마음대로 북쪽 레바논 골짜기 레센까지 가서 칼날로 취하고 마음대로 단이라고 칭했습니다.
유일하게 명하지 않은 땅을 치고 명한 땅은 취하지 않은 지파가 단 지파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서에서는 어떻게 평가를 하고 있습니까.
47절 - 그런데 단 자손의 지경이 더욱 확장되었으니 이는 단 자손이 올라가서 레센을 쳐서 취하여 칼날로 치고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하였음이라 그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서 레센을 단이라 하였더라
"단 자손의 지경이 확장되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레센 땅이 라헤스와 같은 곳인데 사사기 18장에 보면 평안하고, 염려없이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조선민족처럼 권세 잡은 자도 없고 백의민족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아무 이유없이 칼날로 쳤습니다. 우리나라가 가만히 있는데 일본이 쳐들온 것과 같습니다. 지금 일본이 잘 살고 있는 것 같아도 결단코 역사는 그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이유없이 쳐들어왔기 때문에 뒤바뀔 것입니다. 조선민족은 역사상 어딘가를 먼저 쳐 본 적이 없습니다. 전세계에서 먼저 침략을 한 적이 없는 백성이 우리 민족이기 때문에 선교로 쓰임받는다고 합니다. 누구에게도 억하심정을 가질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집은 좁고 살기 싫고, 무서운 아모리 같은 남편과 싫은 불레셋 같은 부인이 있을 때 우리는 안에서의 일을 밖에서 하려고 합니다. 시키지도 않은 전도한다고 곳곳에 전리품을 쌓아놓으려고 하지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밖이 아니고 안 입니다.
내가 아무리 가서 일을 해도 하나님은 안 속으십니다.
내 영역이 있습니다. 관계 전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부부관계부터, 그 다음에 부모, 형제, 직장의 상하관계, 교회에서도 공동체에서의 관계전도가 가장 건강한 교회의 갈길입니다. 서로의 관계가 건강하지 않으면 건강한 교회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관계 때문에 끝없이 우리는 갈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모리 같은 남편하고 사는 것이 얼마나 갈등이 많겠습니까. 그러나 갈등 충만한 것이 성령충만인데 자꾸 갈등을 피하려고만 하니까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을 받아놓고 핀트 안 맞는 순종을 한다고 했는데 지경이 확장됐습니다.
실상을 알아야 합니다.
많이 모인다고 좋은 게 아닙니다. 어떻게 확장되었는가, 그것을 봐야 합니다.
유다처럼 122 성읍을 얻었는가, 단처럼 불순종함으로 성읍을 얻어놓고 주의 일이라고 떠들고 있는가 이것을 봐야 합니다.
창세기 49장에 단에 대해서 첩경의 독사, 뱀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자기 아들인데도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하고 메시아를 기다리는 기도를 야곱이 저절로 하게 됐습니다. 안에서 해결해야 될 문제를 밖에서 해결하려 하는 사람의 특징이 기복신앙이기 때문에 지금 단 지파가 쳐서 취한 레센 땅은 우상숭배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숭배 중심지였습니다.
우리에게 오는 고난은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환경을 피해가면 말씀을 떠나게 되고 자기 성취의 종교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들이 얻은 레센은 앗수르에 의해서 다른 민족보다 빨리 멸망했습니다. 결국 원래 주셨던 가나안 중앙도 잃어버리고 나중 땅도 잃어버린 것입니다.
언니는 식구들을 벌어 먹여 살리면서 망한 친정 거두고 2, 3년을 버텼지만 이혼을 했습니다.
쉽게 이혼을 했습니다. 이혼할 이유가 백 가지도 넘었으니 당연하게 생각하고 이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불같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을 만났는데 신랑감을 알아봐야 된다고 알아본 것이 졸업증명서하고 학점이었습니다. 알아보니 올A 학점을 받고 명문대학을 졸업한 천주교 총각 신랑을 만났습니다. 수많은 갈등이 있었지만 천주교는 같은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한 것이 그 때 믿음의 분량이었습니다. 이혼하고 불같이 은혜를 받고 금식기도까지 하면서도 천주교 남편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 남편이 지금까지 주님을 못 만나고 있습니다.
총알을 피하려다 대포를 만났습니다.
저희 언니가 빈민가 선교를 하는 것이 믿음으로 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하나님께서 인도를 해 가셨습니다. 온 몸을 불사르게 구제하고 선교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남편의 구원을 위해 아침 금식이 아닌 온전한 금식을 40일 하고, 그러다 기억력 손상까지 왔는데도 그 남편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너무도 죄인의 모습으로 숨어서 섬기려니까 기가 막힙니다. 이것이 4대째 신앙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수준이 높은 집안이기 때문에 하나님꼐서 지금까지 혹독하게 책임을 묻고 계십니다.
우리는 다 숨어지냅니다. 드러내지를 못합니다.
언니도 평신도로 선교를 하다 목사 안수를 받았는데 더 큰 고난이 왔습니다. 목사의 남편이 교회를 안 나오고, 아들은 속을 썩입니다. 그런 생활이 몇 십 년 계속 되다보니까 언니까지 치유가 필요하게 됐습니다.
말하고 싶은 요점은 억울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언니는 열심히 사역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평신도 집사가 미국 시골교회에서 잠시 설교를 맡아서 했는데 323명이 교회를 나오게 됐습니다. 20년 간이나 더운 필리핀에서 빈민가 선교를 하였습니다. 그냥, 자기는 죄인입니다. 그렇게 화려하게 연주 생활을 했던 사람이 화장도 안하고 필리피노처럼 변했습니다.
그렇게 필리핀 선교를 하고 교회를 개척했어도 지금의 결론은, 그것보다 가장 중요한 선교는 이혼을 안 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경이 확장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혼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선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혼을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를 우리 식구는 처절하게 보았습니다. 모든 식구의 아킬레스건이었고, 열등감이었습니다. 당사자 뿐아니라 식구들에게까지 상처가 전염되었습니다. 이후에 결혼한 저나, 또 다른 언니들이나 남편이 조금만 잘못해도 계속 언니의 이혼을 물고 늘어졌습니다. 저는 시마다 때마다 억울했고. 저 또한 이혼하고 싶은 생각이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알콜중독이라도, 돈을 한 푼도 못 벌어도, 초등학교만 나왔다고 해도 결혼을 깨서는 안 된다고 처절하게 외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안 보았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유교 집안인 저희 집안으로서는 몇 십 년이 지나도 그 일을 가장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 집의 고정관념 때문에 이렇게 몇 십 년 동안 큰 상처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사역을 하는 저나, 언니나 그 일만 생각하면 떨었습니다.
만약 이혼을 한 후에 평범한 남편을 만나고 무난하게 교회만 나갔어도 소경이 눈을 떴다고, 필리핀 선교한다고 흐뭇했을 것입니다. 단 자손들처럼 지경이 확장됐다고 자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은 믿지 않고, 이제 정신병이 나타나고, 도무지 이혼했다는 것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혼하고 나서 잘나갔으면 가책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혼해서 열매가 많지 않으냐, 이혼해서 주의 일 하지 않느냐' 이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하기 원하신 것입니다.
저희 집이 수준이 높아서, 날마다 가정 회복과 이혼 막기에 온 힘을 기울이게 하시기 위해서 온 몸으로 선교해도 그것이 아니라는 모델을 제비 뽑아서 우리 집에 주셨습니다.
언니는 유다 같아서 아무 소리 못 내고, 필리핀 빈민가에서 사역을 하면서도 생색을 전혀 못내고 살았습니다.
우리 집의 풍토상 미국 명문대출신에 올 A 학점을 받고, 총각이었고, 그런 사람을 만났으니 그냥 안 보이는 미국에 가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미국에 살지 않고 한국과 필리핀에서만 살았습니다. 그 흔한 미국 한 번 제가 못 가봤습니다. 전혀 도피처가 되지 못했습니다. 또 평생 먹여 살려야 되는 입장입니다. 아직도 앞이 안 보이는 고난 가운데 있습니다. 남편과 아들 때문에 아무 일을 못합니다.
언니에게 치유가 필요합니다.
저도, 언니도 안식년 한 번 가져보지 못하고 지내면서 언니는 환갑을 지났고, 제 나이도 오십 중반에 들어섰습니다. 편안하게 사역을 잘하라고, 자랑하는 모델로 저희 집을 쓰셔도 되겠는데 이렇게 아픔을 가지고 가족을 회복시키는데 앞장서도록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제가 당하지 않고 어떻게 이런 말을 확신있게 할 수 있겠습니까.
언니는 저보다 더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힘든 사람을 만나도 잘난 척 할 것이 하나도 없고, 언니는 언니대로 한국보다 더한 필리핀에서 빈민가 사람들을 대하는데 전혀 거부감이 없는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도 손 붙잡고 사는 것입니다. 그만큼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 땅에 잘 있으라고, 어떤 이유가 있어도 있으라고 외치라고 언니의 모델을 보여주십니다.
제가 그래서 청년들에게 불신결혼하지 말라고 날마다 외치는 것입니다. 이 사역 때문에 언니가 수고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억울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완성하기 위해서 부부가 잘살아도 감사하지만 힘들게 살아도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끝이 안 보이는 고난 가운데서 기도하고 회개한 모든 것이 사명으로 연결된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언니가 평생 돈 한 푼 못 벌고, 말 한 마디가 안 통하는 첫 남편과 지금까지 살았다면 사역하는데 열등감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인지 몰랐습니다.
이미 이혼하신 분도 많이 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가시면 됩니다.
이미 이혼하신 분들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교회에서 안 한다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은 다 똑같습니다. 당한 사람, 안 당한 사람 자기 입장에서 듣는 것이 아니라 가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고 나누는 일을 하는가,
세 번째는 먼저 섬기고 본이 되는 것밖에 없습니다.
49~50절 - 이스라엘 자손이 그 경계를 따라서 기업의 땅 나누기를 마치고 자기들 중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기업을 주었으되 곧 여호와의 명령대로 여호수아의 구한 성읍 에브라임 산지 딤낫 세라를 주매 여호수아가 그 성읍을 중건하고 거기 거하였었더라
여호수아는 그 많은 땅을 나누어주고 가장 마지막에 기업을 얻었습니다.
그 산지는 여호수아 자신이 구한 것이었으면 동시에 여호와의 명령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민족의 지도자로서, 자신이 그동안 한 수고로 좋은 땅, 좋은 대가를 바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건할 성, 좋지도 않은 성, 압구정동도 아닌 딥낫세라를 원했습니다. 지도자로서 누릴 특권을 포기 했습니다. 평생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 뜻을 따라서, 사심없이 주어진 분복을 누리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주안에서 행한 수고에 대해 특권을 요구할 때가 많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종의 자리를 떠나지 않으셧던 주님의 모습을 기억하며 주님과 교회를 섬기는 특권만으로 자족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열심히 해놓고 속이 끓어서 죽으면 되겠습니까.
자기 고향 식구인 요셉 지파가 땅을 조금 줬다고 불평했을 때 여호수아는 '너희 스스로 개척하라'고 처방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자기 식구들을 객관적으로 보았지만 마지막 기업은 고향 땅 에브라임 산지의 딥낫세라를 구했습니다. 가족을 객관적으로 보되 끝까지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봅니다. 이런 사람이 일을 마칠 수 있고 기업을 나누어줄 수 있는 인생인 것입니다.
저 또한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이혼한 것에 대해 가슴 아파하고, 가슴 아파하는 언니를 보면서 날마다 객관적으로 이야기 해주지만 언제나 언니를 위해 눈물로 기도합니다. 그것이 제 사역에 연결되어 약재료가 되지 않습니까. 그만큼 언니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만큼 구원의 확신이 있기 때문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식구 중에 이혼했을 때 누가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겠습니까.
제가 사역을 하면서 언제나 가족에게 모든 신경이 다 가있습니다. 가족은 사랑이기 이전에 책임입니다. 책임을 다해야 하고, 또 자기 고향 땅에 가서 묻혀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마지막에 에브라임 산지에 기업을 구한 것을 보았습니다.
본이 되는 인생을 사는 것밖에는 완성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결혼을 믿음의 가정의 배우자와 했음에도 우리 모두 잘못된 선택을 했습니다.
누구나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본으로, 어머니의 기도로 인해서 딴 길로 가지 않고 사명을 찾았습니다.
다시 반복하는 말은 삶으로 살아낸 사람은 혹시 자녀들이 잘못된 선택을 했어도 자녀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머니'하면 초라한 모습, 교회 화장실 청소.. 이것밖에 기억이 안 나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거듭나고 돌아와서 눈물 흘리며 주의 길을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빈민가 선교를 그냥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으로 보여주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녀에게 무엇으로 기억될 부모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지금 이 세상을 떠났을 때 무엇을 기억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눈물 흘린 기도가 하나도 헛되지 않아서 전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쓰임받고 있습니다. 어떤 것도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는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그렇게 하지 말라고 날마다 제가 처절하게 외치는 것입니다.
왜 날마다 가정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이것이 모든 것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시작과 완성, 모든 것의 기본이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모든 지파를 향한 기업 분배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이같은 영광과 안식은 그들의 능력과 수고의 열매가 아닙니다.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입니다. 그러니까 맡겨진 사역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지금 생각해도 저희가 다 교회를 다녔지만 어쩜 그렇게 성경을 가르쳐준 사람이 없었는가,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해 준 사람이 없는가, 워낙 남의 말을 잘 듣는 식구들이니까 한 번만 말 해주었어도 들었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합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어리석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리석은 가정의 모델을 보여드렸습니다.
그래서 결혼하기 전에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골라야 합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골라야 합니다. 하지만 일단 결혼하고 나면 불구자라고 해도, 무슨 이유로도 이혼은 없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면 이혼은 영원히 올무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몇 십년이 지나도록 끝없는 가족의 상처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안 하셔야 됩니다.
그런 뼈 아픈 교훈이 있기에 눈물로 여러분의 가정의 회복을 위해 기도합니다.
진짜 도시락 싸들고 말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께서 제비 뽑아주신 식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조건 옳으시기 때문에 지나고 나서 보면 하나님의 절묘한 옳으심을 깨닫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날의 저는 없었을 것입니다. 각종 치사한 것을 다 당하고 지금의 제가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언젠가는 인생이 마쳐질 것이고 자녀에게 무엇인가 나누어야 할 텐데 어떻게 완성된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나누는 일을 마칠 수 있겠습니까.
가족이 축복의 통로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안 돌아온다고 할지라도 그 일을 위해 기도하고 가야 합니다.
이 산지를 내게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문제아는 없고 문제부모만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안에서 풀어야 될 문제를 밖에서 풀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호수아처럼 섬김의 본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이런 부모가 되기를 바라고,
자녀, 내 옆의 식구들, 그리고 남의 일이라고 여기지 말고 지금도 불화 가운데 있고 이혼을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다 찾아가서 말려야 합니다. 도시락 싸들고 가서 말려야 합니다.
그것을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자녀를 낳고, 결혼을 하고, 직장을 가고, 성공이 무엇인가 생각할 때 그 적용의 근본은 가족대로 인 것을 알았습니다. 가족이 축복의 통로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유가 없이 우리가 가족을 섬겨야 하며 그것을 위해서 어려서부터 자녀를 말씀으로 키워야 하고, 본을 보야야 하고, 어떤 고난을 통해서도 레아처럼 모든 가족들에게 주님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의 통로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언제나 감사하고, 연합하고, 찬송하며 후한 선물을 주셨다고 고백하는 그 고백이야 말로 우리 집안의 제자훈련이며 축복의 통로가 되는 말씀이고 적용인 것을 믿습니다.
좋아서가 아니라 힘든 환경에서도 날마다 주님과의 연합이 깊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부모가 되기를 원합니다. 문제아는 없습니다. 문제부모가 있을 뿐인 것을 깨닫게 하여주시고, 내 인생에 억울한 것 생각하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서 '어찜이니이까'하지 않게 하시고, '왜'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옳으신가를 깨닫기 원합니다. 종교를 우리의 성취로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피를 흐릴 수밖에 없는 내 죄에 대한 애통이 있을 때 우리가 힘든 사람의 손을 잡아주게 될 줄 믿습니다.
주님, 우리는 너무 아파서 본이 될 수가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도 억울하고, 분하고, 슬를 수밖에 없지만 내 자식을 가장 사랑하는 길은 본을 보이는 것밖에 없다고 하셨사오니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모든 공동체와 자녀들에게 무엇으로 기억되는 인생일까를 생각하기 원합니다. 레아처럼 지금은 내 자식이 살인자이고 간음자라고 해도 그가 주님과 깊이 연합하여서 약속의 말씀을 믿고 떠났기 때문에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것처럼 저희 어머니가 살고 떠나셨기 때문에 어머니가 떠나신 후에도 저희가 이렇게 주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내가 주님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내게 주신 고난의 환경 가운데서도 감사함으로 모든 사람을 약속의 자녀로 키울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런 믿음의 부모과 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