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7일 옛충남도청에서 모여 대전시민대학에서 지원해준 45인승 차량을 타고 오늘의 답사를 출발했습니다.
오늘 답사코스는 산디마을에서 출발해 계족산성을 올라가서 점심식사를 하고, 비래사, 옥류각으로 내려와 비래동고인돌을 보고 고인돌호떡과 어묵을 먹으며 오늘 답사를 마무리할 예정입니다.
먼저, 이번 계족산성답사는 백남우(대전향토문화연구회 대표) 선생님께서 해설을 해주셨습니다.
우리 일행은 산디마을입구에서 등산을 시작했습니다.
장동(長洞) 산디마을은 계족산 북쪽 골짜기가 좁고 길어서 진골(긴 골짜기)이라는 이름의 장동 중에서 계족산 골짜기 가장 위쪽에 있는 마을입니다. 산디마을의 의미는 계족산 뒤에 있는 마을이라고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쪽 길로 산을 오르는 것은 처음이라 여쭤보니 일행 중 한 분이 이 길은 삼국시대부터 있던 옛길이고 계족산을 넘어가는 유일한 길이었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역사공부를 하거나 문화유산을 접할 때 종종 과거의 그 시점에서 그 순간을 경험해보는 듯한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오늘 답사도 그런 기분으로 출발을 했습니다.
날씨가 쌀쌀해서 걱정을 안고 등산을 시작했는데 걷다보니 땀이 나서 오히려 덥기까지 했습니다. 이 쪽 길이 지름길이니만큼 가파르다보니 등산이 오랜만이라 초반부터 숨이 가빠왔습니다. 운동좀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50분 정도 걷다보니 벌써 계족산성이 멀리서 보였습니다. 이 길이 지름길이 맞구나 싶어 너무 신기했습니다.
산성이 가까워지는걸 보면서 걷다보니 이런 이정표가 나왔는데 우리 일행은 곡성 방향의 북벽쪽으로 향했습니다.
북벽쪽 일부 구간은 현재 보수공사 중이었습니다.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북벽 바로 밑에 도달했는데 높이가 상당히 높았습니다
드디어, 북벽 옆쪽 돌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왔습니다.
산성을 올라와 가장 처음 눈에 들어온 건 넓은 평지위에 있는 건물터였습니다. 계족산성에는 총 9개의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조사결과 고려시대 건물터로 확인되었습니다.
계족산성은 표고 431m의 계족산 지붕에 산 정상을 둘러 쌓은 테뫼형 산성입니다.
계족산성의 형태는 북벽 약120m, 남벽 80m, 동서벽 300m 가량의 장방형입니다. 북벽부는 완만한 지형에 거의 수직선으로 축조됐으며, 북쪽 방면으로 난 능선부에서 동쪽으로 꺾이는 부분은 곡성(⑤)을 쌓아 취약점을 보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남문(②) 안쪽에 봉수대터(③)가 있었고, 동벽쪽에는 우물과 집수지(⑥)가 있습니다. 집수지와 우물터 부근에서 백제 및 통일신라 토기와 기와 조각들이 발견되었고, 고려와 조선시대 기와나 자기편들이 다수 발굴되어 이 성이 백제시대에 축성되어 통일신라,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계속 사용됐음을 말해줍니다.
계족산성의 축조시기에 대해서는 백제성으로 보는 것이 대체적인 추세이며 일부 신라성이라고 주 장하는 쪽도 있습니다.
백제성으로 보는 쪽은 백제부흥군의 옹산성 함락시기인 661년과 비슷하고, 과거 저수시설에서 불에 탄 채 발견된 나무 조각의 연대측정 결과 5세기 경으로 밝혀진 점, 신라에서는 나오지 않는 기와나 연화문와당, ‘우술(雨述)’ 및 ‘우술천국(雨述天國)‘이라는 명문기와가 발견된 것 등에 근거를 둡니다.
한편, 신라성으로 보는 쪽은 축성 방식이 편암을 판석 모양으로 납작납작하게 떼어내 쌓은 삼년산성 등의 신라성과 유사점이 있다는 점, 성의 대적방향 등에서 근거를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발굴결과나 기록과, 이 성의 전략상 위치 등 전체적으로 백제시대에 축성된 후 신라의 점령 후에도 이 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견고히 석성으로 개축하여 계속 사용됐을 것으로 보입니다. (*참조 : 조영연의 『시간따라 길따라 다시 밟는 산성과 백제뒷이야기』)
계족산성은 대전 내에 있는 50여개의 산성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많은 산성들 중 중심역할을 했을것으로 보이는 등 그 의미가 커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5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북벽에 올라 바라본 대전조망도 멋있었습니다. 우리 동네도 보여 매일 창밖으로 바라보이던 계족산성이 이위치 쯤 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 신기했습니다.
서문터 방향으로 걷다보니 산성 윗부분 길옆에 멋있는 소나무들이 띄엄 띄엄 서있었는데 바로 이점이 멀리서 보았을 때 계족산성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특징입니다.
넓은 평지와 소나무들이 보기에 좋고, 이곳에서 보이는 전망도 좋아서 인생사진 찍기 좋은 곳 같았습니다.
우리 일행은 넓은 건물지에서 돌계단을 따라 내려와 서문터로 향했습니다.
서문터에 도착해서 보니 대전을 조망하기에 너무 좋았습니다. 백남우 선생님의 해설을 들으며 경관을 감상했습니다.
그런데, 울림의 안여종 대표님께서 이곳에 설치되어 있는 조망사진을 보시며 지명표시가 모두 잘못된 부분을 가르키고 있다며 수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울림에서 이 작업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일행은 서문터에서 다시 봉수대 쪽으로 향했습니다.
우리 일행은 봉수대에 도착했는데, 이곳은 경상도 방면에서 전달받은 긴급한 소식을 청주와 충주를 거쳐 서울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 곳입니다.
일행은 전망좋은 봉수터의 잔디밭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각자 준비해온 도시락을 나눠 먹으며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진 후, 남문터로 이동을 했습니다.
▲남문벽 중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부분
▲남문벽 중 좌측은 복원한 부분, 우측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부분
오늘 해설을 맡으신 백남우선생님께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성벽의 돌 모양을 보고 신라성으로 판단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지역이 이런 점판암이 많이 나오는 지역이라서 단지 돌 모양만을 가지고 신라성이라고 하는 것은 좀 어려운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점심을 먹던 장소인 봉수터에서도 이곳에서의 작은 일화를 소개해주시면서 역사를 추정하고 밝히는 과정에서 작은 흔적이나 기록에 집착하는 것 보다 상식의 입장에서 먼저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셨었는데 그것과도 연결되는 생각인 것 같았습니다.
일행은 남문 쪽으로 내려와 성재산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전망도 좋았습니다.
오랜 만의 산행이라 다리라 풀려 가끔씩 주저앉기도 하며 가파른 산길을 내려오다 보니 어느덧 비래사가 보였습니다.
비래사는 조선 중기에 회덕송씨의 종친들이 창건한 암자로, 비래암(飛來庵) 현판을 송시열 선생이 썼다고 합니다.
비래사 바로 앞에는 절의 산문에 해당하는 옥류각이 있습니다.
▲ 뒤에서 본 옥류각 모습
옥류각은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으며, 동춘 송준길 선생이 강학하던 곳을 기념하여 제월당 송규렴 등 송준길 선생의 제자와 문인들이 1693년에 세운 누각입니다. 옥류각의 명칭은 골짜기에 흘러내리는 옥같은 물방울이라는 뜻을 따서 지은 이름입니다.
옥류각 앞에는 ‘초연물외(超然物外)’ 라고 새긴 바위가 있습니다. 송준길 선생이 쓴 글씨라고 알려져 있고, 옥류각 현판은 곡운 김수증 선생의 글씨입니다.
일행은 동춘당 생애길을 따라 내려오다 비래동 고인돌에 잠깐 들려 백남우 선생님의 해설을 듣고, 터널을 빠져나오면 기대리고 있는 고인돌 호떡집에서 어묵과 호떡으로 추운 몸을 녹이면서 오늘의 답사를 마쳤습니다.
계족산 옛길을 따라 산을 올라 이 주변의 다른 산성들의 이야기와 함께 깊은 해설을 들으면서 계족산을 천천히 감상하고 옥류각을 거쳐 비래동고인돌까지 내려오는 이번 일정은 꽤 색다른 느낌의 산성답사였습니다. 과거 그때의 시기로 돌아가보는 느낌도 여러번 들어서 추억에 많이 남을 것 같습니다.
추운 날씨에도 기꺼이 산행을 즐기면서 사고없이 답사를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참석자 분들과 많은 이야기를 하나라도 더 해주시려고 애쓰신 백남우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글쓴이 : (사)대전문화유산울림 사무국장 허혜경
첫댓글 사진과 글 고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